단전가정 15살 소녀 죽음을 계기로 돌아본 ‘에너지 기본권’

우리에게 어둠을 밝히기 위한 촛불은 이제 낯설다. 촛불 시위가 익숙할 뿐. 그만큼, 전기가 끊어져 촛불을 쓰다가 불이 나 목숨을 잃은 소녀의 이야기는 낯설고 안타깝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기가 끊어진 것이어서 더욱 그렇다.

지난 10일 새벽 경기도 광주시 목동 남아무개(48)씨 집에서 불이나 남씨의 둘째 딸(15)이 목숨을 잃었다. 농업과 막노동을 하는 남씨가 일거리가 줄면서, 지난 2월부터 전기료 80여만원을 체납했다. 지난 겨울 전기장판으로 겨울을 나면서, 전기 요금이 80만원을 넘어섰다. 5월 말에 전기가 끊어졌고, 남씨의 딸이 화장실에 두고 온 촛불이 옮겨붙어 불이 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단전에 따른 ‘촛불화재’는 언론에 보도된 것만 해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2월에는 전남 목포시에서 단전당한 정신지체 2급 장애인 남편과 하반신 마비 장애인 부인이 촛불을 켜놓고 자다가 불이 나 부부가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석달치 전기 요금 10여만원을 내지 못했다. 또 지난해 12월에는 전북 남원시에서 촛불을 켜놓고 정신지체장애인 아들과 잠을 자던 80대 기초생활수급자 할머니가 화재로 숨졌다. “할머니가 전기 요금을 아끼려고 촛불을 켜고 살았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었다.

전기 끊겨 촛불 켜다 불타 죽은 사람들…

한달에 몇만원의 전기 요금을 못내 전기가 끊어지는 세대는 우리 곁에 있다.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서 75살 어머니와 함께 사는 지체장애 5급 장애인 ㅎ씨는 10만원의 전기요금을 내지 못해, 몇달째 전기가 끊어졌다. ㅎ씨는 폐지를 수집해 생계를 잇고 있다. 이들은 아름다운 재단의 ‘빛 한줄기 희망기금’에서 10만원을 지원받아 12일에야 다시 전기 구경을 할 수 있게 됐다.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전기조차 이용하지 못하는 세대는 지난 한 해에만 48만6362가구에 이르렀다. 임대아파트 임대료 미납자에 대해 관리사무소 등에서 임의적으로 전기를 끊는 경우는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의도적으로 안내는 사람은 거의 없고, 생활이 어려워서 못내는 것”이라는 게 한전 관계자의 설명이다.

지난 2003년부터 아름다운 재단이 저소득층에게 전기 요금을 지원해주는 ‘빛 한줄기 희망기금’ 사업에도 최근 도움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 재단은 올해 예산으로 8천만원을 잡고 여름철과 겨울철로 두차례 나눠서 지원할 계획이었지만, 벌써 재원이 바닥났다. 지난 5~6월, 529세대에 올해 예산보다도 많은 8400여만원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재단 전현경 간사는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세대가 지원을 요청한 탓”이라며 “단전세대가 그만큼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방에 전깃불을 밝히고, 텔레비전을 켜고, 선풍기를 돌리는 것. 그 가장 기본적인 행위조차 할 수 없는 이들에게 도움의 빛은 희미하기만 하다. 아름다운 재단의 전기요금 지원을 받는 세대는 전체 단전가구의 0.1% 수준이다. 한국전력공사 관계자는 “수도야 끊어지면 옆집에서 물을 퍼올 수 있지만, 전기 없이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수도 끊기면 옆집서 퍼올 수 있지만 전기 없인 아무 것도 못해”

그러나, 한전의 지원은 턱없이 모자란다. 한전은 월 1~70kWh 사용자는 전기요금의 35%, 월 71~100kWh 사용자는 15%를 깎아줄 뿐이어서, 저소득층은 세대 평균인 월 200kWh 정도를 쓰더라도 혜택을 받지 못한다. 1~3급 장애인 등에게는 요금을 20% 깎아주고 있지만, 많은 장애인 세대가 나머지 80%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한전은 혹한기와 혹서기의 단전 유예조처 기간을 늘리겠다고 밝힌 바 있지만, 아직도 7~8월과 12~1월 넉달간으로 제한돼 있다.

한전 쪽도 할 말은 있다. “방앗간에서 연말에 불쌍한 집에 쌀 서너포대를 줄 수는 있지만 매달 쌀을 공짜로 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개별 기업에게 전기를 공짜로 제공하라고 할 게 아니라, 국가가 저소득청에 대한 사회복지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게 한전 관계자의 주장이다.

이미 서구사회에서는 보편화된 ‘에너지 기본권’에 대한 인식도 우리에겐 낯설기만 하다. “공기와 물 그리고 에너지! 이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조건이다. 능력에 따라, 계층에 따라 차별적으로 영위될 수 없으며, 시장 논리가 아닌 공공성과 형평성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만 한다. 그러기에 에너지는 인권의 문제로 규정되어야 마땅하다. 에너지는 인권이다! 에너지 기본권을 보장하라!” 지난 6월15일 국회에서 여러 시민사회단체가 연 기자회견의 회견문 일부다.

조승수 의원 에너지기본권 법안 제출…통과 가능성은 낮아

조승수 민주노동당 의원은 지난 4월 에너지 기본권을 명시한 관련 법안을 국회에 냈지만, 에너지위원회 설치 등을 놓고 논란이 벌어져 아직 해당 상임위에서 계류 중에 있다. “빈곤에 처한 자와 그 가족에게 기본생활에 필수적인 전기, 가스, 난방열 등의 에너지를 무상으로 공급하자”는 게 입법 추진 취지이지만, 법안 통과 가능성은 높지 않은 상태다.

아름다운 재단 전현경 간사는 “도시락 배달 사업과 의료보호 등을 통해 먹거리와 의료에 대한 보장을 하는 것에 비하면, 에너지를 필수적 재화로 보고 직접 지원하는 제도가 없는 것은 균형에 맞지 않는다”며 “에너지가 현대생활의 생존필수 기본권임을 인정해 저소득층에게 최소량의 에너지 사용이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정순 한국빈곤문제연구소장은 전기요금 하나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지적한다. 전기가 끊어졌는데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하고 살펴주는 사회시스템이 없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류 소장은 “한 인간이 태어나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시스템을 만들어주는 게 정부의 존재 이유고, 제대로된 사회”라며 “전기 따로 가스 따로 접근할 게 아니라 기초생활수급자 대상과 급여를 현재의 두배 정도로 강화해, 최소한의 기초생활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처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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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7-13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승수 민주노동당 의원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군요.
우리나라, 아직 사회 시스템이라 할 만한 게 뭐 있나요?!


숨은아이 2005-07-13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 서재에서 보고 왔어요. 난방을 전기장판으로 한다는 건, 가스 보일러 설치가 안 되었거나 기름을 땔 여유가 없다는 뜻이겠죠. 슬픕니다.

라주미힌 2005-07-13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한 쪽은 너무 풍족해서 탈이고, 다른 한 쪽은 빈곤해서 탈이고... 웃기는 세상이죠.
생태계에는 항상성이란게 있는데, 왜 인간 세계에는 없는지.

검둥개 2005-07-13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 저도 추천하고 퍼갑니다. 좋은 뉴스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

라주미힌 2005-07-13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요즘에 찾는 분들이 부쩍 늘었네요. 반갑습니다. 알라딘 서재 중독성 있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