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을 위한 전체주의


△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 발행인

아인슈타인이 생애 말년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만약 다시 일생을 살게 된다면 결코 과학자가 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꽤 알려진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연구결과로 이 세계가 가공할 핵전쟁의 위험 속에 빠진 현실에 절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현재의 상황에서 내가 선택하고 싶은 유일한 직업은 지식추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 즉, 배관공과 같은 일이라고 토로하였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경우는 드물기는 하지만, 예외적인 게 아니다. 특히 2차세계대전 이후 과학자들 중에는 자신의 연구결과로 지구가 갈수록 거주불가능한 곳으로 되어간다는 데 대하여 크게 우려하고 괴로워하면서, 종래의 연구방식을 변경하거나 포기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과학자들은 아마도 남달리 예민한 감수성과 양심의 소유자들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적인 자질이나 성향을 떠나서, 정말 문제는 이러한 과학자들을 견딜 수 없게 하는 현대적 과학연구의 근본경향일 것이다.

비엔나(빈) 출신의 미국 콜럼비아 대학 교수였던 생화학자 에르빈 샤르가프는 DNA의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 결정적인 공로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90살을 훨씬 넘긴 긴 생애 동안 서양 고전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와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다양한 주제에 걸쳐 저술활동을 계속했는데, 그 중 핵심적인 것은 현대 과학문명과 과학연구의 현실에 대한 그의 집요하고 날카로운 비판적 에세이들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의 자연과학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그리고 외경의 염을 불러일으키는 자연의 장엄함이라고 하는 관점에 대한 쉴새없는 공격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연과학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상호 연관되어 있어서 한 쪽이 사라지면, 다른 쪽도 사라질 운명에 있다. 정신의학, 심리학, 정신분석에 의한 인간영혼의 고체화와 물질화에 이어서 이제 인간의 신체도 단순한 연구재료가 되어버렸다…인간의 태아가 다른 인간을 위한 재료로서 생산되는 미래의 공장은 결코 더 이상 공상이 아니다.” 샤르가프는 상황이 이렇게 뒤틀려버리게 된 것은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악마의 교의(敎義)’가 현대과학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전형적인 예가 핵분열과 생명조작 기술이라고 지적한다.

배아 줄기세포 연구는 인간 초기생명을 재료 이용 이번 ‘쾌거’에 대해
윤리의식 부재 비판도 가능 무병장수 현실 된다면 가공할 디스토피아일 것

국내의 한 연구팀이 배아줄기세포 연구라는 이른바 첨단 생명공학 분야에서 또다시 선구적인 업적을 세웠다고 해서 지금 한국사회는 온통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연구가 구체적으로 자기들에게 어떤 이익을 어떻게 가져다줄 것인지 아무런 이해도 없이 덮어놓고 환호하고 있다. 아마도 이번 연구의 성과로 한국인들의 국제적 위신이 크게 높아졌다는 의식이 이런 분위기의 바탕에 깔려 있는지 모른다. 게다가, 이 연구의 결과로 앞으로 막대한 부가가치가 생겨나서 한국의 경제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될 거라고 하지 않는가. 연구 책임자가 어느새 민족의 영웅이 되고, 따라서 그에게 국가 최고급의 경호를 포함한 온갖 특혜조치가 강구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이 연구가 조만간 난치병 극복에 획기적인 의료기술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난치병 환자나 그 가족들에게는 아마도 이보다 더 큰 복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에는 허다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이 연구가 쉽사리 인간복제로 이어질 위험성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동안 제기되어온 연구방식 자체의 비윤리성도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연구는 사람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맹아상태의 인간의 초기생명을 ‘재료로’ 이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따져 보면 인간 공동체의 가장 기초적인 도덕적 기반을 훼손하는 행위일 수 있다. 이른바 문명국가들에서 생명윤리의 이름으로 이런 종류의 연구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번의 과학기술적 ‘쾌거’는 그러한 윤리의식 혹은 윤리적 규제의 부재의 소산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정말 민족적 긍지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찬양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연구에 대한 열광적인 찬양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냉철한 성찰과 비판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한겨레>의 조홍섭 기자는 이 상황에 대하여 “어딘가 전체주의 냄새가 난다”고 썼다. 나는 작고한 일본의 정치사상가 후지타 쇼조의 말을 빌려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생명조작에 의한 의료기술의 궁극적 지향은 무병장수의 세상이라고 한다. 무병장수의 꿈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욕망이겠지만, 그러나 정말 질병없는 세상이 현실이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가공할 디스토피아일 것인가. 모든 전통문화는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 근본은 우리가 인간존재의 궁극적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 있음을 가르쳐왔다. 삶의 기술은 본질적으로 고통을 견디고, 죽음에 순응하는 기술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질병도, 고통도, 시련도, 죽음도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의 삶은 심히 공허하고 천박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제성장이라는 신(神)을 오랫동안 섬겨오는 동안에 어느새 이러한 삶의 근본이치도 망각해버릴 만큼 우리의 정신은 마비되고 빈곤해졌는지 모른다.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는 실로 무서운 억압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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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5-06-03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종철씨에게 고마워 하셔야죠 ^^; 이런 글들은 요즘에 소금과 같다고 생각되어 여기 저기서 퍼오고 있습니다.

알고싶다 2005-06-03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쓴 취지에 대단히 공감은 하지만, 질병없는 세상은 디스토피아이며, 질병이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삶을 공허하고 천박하게 만드는 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글쓴이의 생각에는 동조할 수가 없군요.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환자의 갱생을 위하여 새우잠을 자면서 현대 의학을 발전시키는 많은 의학자들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굳이 정신의학을 예로 들자면, 물론 어느 정도의 슬픔은 꼭 필요할 것입니다. 완전한 사회란 없으니까요. 불완전한 사회를 보고 어느 정도 분노하고 슬퍼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우울증은 없어져야 합니다. 슬픔이 정상적인 것이라면 우울증은 병리적인 것입니다.

라주미힌 2005-06-03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하철도 999가 생각나네요. 기계가 되어 불사의 몸이 되는 세계. 생명이 소중한 이유는 그 한계가 존재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거시적인 관점으로 보아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순환이 정상적인 것이라면, 그 흐름을 방해하는 것은 병리적인 것입니다. 의학자들의 노고가 격하되어서는 아니되겠지만, 그러한 노고가 인류에게만(생태계의 수 많은 생명체들을 제외한) 그 중에서도 특정 소수의 계층(자본, 권력을 소유한 자들)에게만 그러한 혜택이 돌아간다면, 그것을 디스토피아로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인간의 고통이 줄어들면, 행복 또한 줄어듭니다. 빛이 있기에 그림자도 있듯이 생명의 가치는 수명의 연장만큼이나 줄어들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늘어난 수명은 누군가의 또는 어떤 생명체의 생존을 먹고 자라난 독이니까요.

알고싶다 2005-06-03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이 교회나 성당에 다니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체세포 유전자를 핵이 제거된 난자와 융합하는 것을 의학적 관점에서는 생명의 탄생이라 부르지 않음에도 이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기독교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데, 죽음을 방해하는 의료 기술의 발달이 병리적인 것이라고 하시는 것을 보니 그렇지 않은 듯 하군요. 내세에서라도 영생을 추구하는 면이 니체가 비판한 기독교의 본질이었으니까요. 하기야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황교수의 연구가 인간 복제의 가능성을 연 것은 사실이니 윤리적인 고려가 행해져야 함은 마땅하고 라주미힌님이 김종철씨에게 공감하는 점도 바로 이 점일 겁니다. 물론, 이런 의학적인 성취가 여타 생명체들을 배제한 인류에게만 행복을 준다면 문제겠지요. 그러나 수의학 및 축산업 등에서 동물의 생명 활동을 증진시키는 데에도 생명공학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말씀하신 것처럼 소수 계층에게만 그러한 혜택(역설적이게도 라주미힌님은 혜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네요)이 돌아가는 것도 문제일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치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이 과학자들이나 의학자들의 연구의 프로세스를 중단하게 하는 근거는 될 수 없습니다. 컴퓨터의 발명은 부자와 빈자의 정보 격차를 초래했지만, 컴퓨터가 발명되지 않아야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컴퓨터는 민주주의의 기폭제 역할을 할 가능성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인터넷 언론을 주도하는 언론이 개혁 언론이라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보수적인 종이 신문들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갈수록 인터넷 신문의 영향력이 강화되리라 봅니다.) 같이 언급해야 할 것은, 과학자들도 정치가와 마찬가지로 권력 집단이지만, 푸코의 지적대로 권력의 구조는 거시적이라기 보다는 미시적이라는 겁니다. 정치적 권력을 지닌 자들과 과학 전문가 집단의 관계가 반드시 이해타산적 타협의 속성을 띄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겠지요. 은하철도999를 언급하셨는데, 감정이 없는 기계인간으로 영원히 사는 것보다는 슬픔과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남기를 원한 철이의 심정이 님에게 투영되었겠군요. 맞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어둡고 괴로운 현실과 극을 이루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기쁨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기쁨은 더욱 황홀한 희열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질병을 더욱 많이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인간이 슬픔과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을 연장하면 그 생명체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자명하다고 하셨는데, 저는 님의 그 생각에 공감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제가 중병을 앓아 몇 개월간 병원에 입원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요.

라주미힌 2005-06-04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아가 생명이냐 아니냐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기에 확정지어서 말할 수 없는 부분이구요. 여기서 순수한 생명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배아는 당연히 생명체입니다. 물론 우리가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는 '인간성의 유무'일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윤리 문제가 부각되고 있는 것일테고요.(전 의학적 관점만이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상당히 철학적인 문제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현실적인 문제라고 보고 있거든요.
대체로 알리님의 생각과 크게 틀리지 않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알리님은 인간의 시선으로 인간의 편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고, 전 그 틀 안에서만 있어왔기에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류의 만행이 점점 가속화되고 무자비해지고 있다는 것이 우려한다는 점입니다. 수의학, 축산업에서 축적된 생명공학이 짐승을 위한 것인가요? 이것은 마치 야생동물을 잡아다가 야생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인간의 호혜적인 행위로 착각하는 것과 괕습니다. 이러한 착각이 가져온 재앙은 지구상의 생명체에 대한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리님께서 인지하고 계실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과학자와 의학자들이 윤리적인 책임의식을 가지고 연구에 임해야 할 당위성을 내포하게 됩니다. 미시적인 집단(?)이라면 거시적인 집단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만큼의 영향력을 보여줘야하고,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따지면 연구 못하기 때문에 인류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부분이 있다면 연구에만 몰두하라는 식(?)의 지지(현 우리나라의 상태)는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당연히 윤리적이어야 하고, 그들의 연구성과가 아무리 상업적으로 뛰어나고, 동기가 훌륭하더라도 문제의식의 부제는 허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사회적 합의와 제도적 장치의 철저한 보완과 감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 현실이 그런가요? 인간이 겪는 고통과 슬픔, 참으로 참기가 힘듭니다. 그것을 줄이겠다는데 어찌 반대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인간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잖아요. 인간들 틈에서도 '가치있는 생명'이 있고, '좀 죽어도 상관없는 생명'들이 있는 세상속에서 너무 큰 것을 바라는 건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알리님의 리플은 다시 한번 깊은 생각들을 해 볼 수 있는 의미있는 동기가 된 것 같습니다. ^^

알고싶다 2005-06-05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저도 라주미힌님 글을 보고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도 인간의 편의만 대변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조건없는 사랑이 모든 생명체에게 돌아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저의 두서없는 댓글을 통해서 라주미힌님에게 잘 전달되지 못한것 같네요. 인간들 틈에서 자신만의 개성을 발휘하는 많은 귀중한 생명들! 사랑해야겠지요! 심지어 저는 여름철에 휴가가서도 제 몸에 달라붙은 모기 한마리 안죽인답니다~ (못죽이는게 아니라) 이런, 어젯밤꿈에서도 바퀴벌레들이 방에서 알을 까고 계속 번식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인상만 찌푸리던 기억이 나네요. (솔직히 귀엽지는 않잖아요. ^^*) 이런 괴상(?)한 꿈을 꾸는 걸 보니 아무래도 라주미힌님과의 토론에 대해 너무 심취했나봐요, 흐흐. 라주미힌님은 좋은 꿈 꾸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