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 - 을사조약 전야 대한제국 여행기
아손 그렙스트 지음, 김상열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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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왔소이다.


과거의 기억을 향수하는 것은 태곳적 회귀본능의 일환이다. 시간, 공간, 사물에 대한 감각의 그리움과 개인의 역사 속에 숨쉬는 인간적 공감대와 연정을 앨범 속에 고이 간직한다. 그리고 추억을 새기고 현재를 되새김질 하는 일련의 과정을 되풀이 함으로써 성찰과 낭만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되돌아 갈 수 없기에 뒤 돌아 볼 수 밖에 없는 이러한 마음의 행동양식은 때때로 짐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미와 가치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책은 100년 전 조선에서 바로 뛰쳐나온 듯한 현장감이 긴 호흡을 내 뱉는다. 스웨덴의 기자 아손 그렙스트가 조선을 여행하고 기록하여 서구에 알린(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책이라서 그런지 풍부하고 세세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 당시 조선과 주변국과의 국제 정세, 문화, 여성의 지위, 경제, 종교, 교육, 전통, 설화, 민담 등 100년 전 조선을 쫙 펼쳐 놓기 때문에 ‘한국인’이 읽기에도 재미가 있다.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질 운명의 것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으니 이 책의 가치는 높다고 평가한다. 악취가 나는 뒷골목 풍경, 전근대적인 감옥과 사형 장면, 거지와 양반, 평민들의 생활상, 황태자비의 장례 행렬, 사진에 찍힌 호기심 어린 조선 백성들의 표정 등등은 신기하리만큼 생생하다. 물론 이 책에는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성향의 내용들이 많다. 저자의 지극히 주관적, 지엽적, 왜곡된 지식들이 꽤 나타나기 때문이다(옮긴이에 의해 곳곳에서 수정됨).

그 이유는 유럽인의 시선으로 동양의 작은 나라의 모습을 담기에는 너무나 무식하고 모자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 당시 조선은 열강에 의해 서서히 잠식당하고, 국운이 기울어 망국의 길로 접어선 시점이 아니던가. 합리주의와 산업주의로 무장한 ‘문명인’들이라 하는 서구인의 시선에 비친 조선은 전근대적이다 못해 미개인으로까지 보여질 정도로 ‘서구 문명 기준’에는 아주 못 미치는 국력과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그것조차 이해를 해야 하는 미덕을 보여야 진정한 재미를 얻을 수 있다. 그러한 시선의 끝에는 조선이 가진 ‘한과 ‘슬픔’ 뿐만 아니라 부조리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조선인들은 게으르다. 노동을 경시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즐긴다.’ 라고 평을 하니 발끈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풍류와 멋, 여유를 삶에 관철시키는 백성들이라고 우기고 싶겠지만, ‘조선의 선비는 노동으로 보일 수 있는 일은 멀리 한다. 제 손으로 하는 것은 없다.’ 노동은 양반 이외 계층의 계급적 전유물이라는 지적에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노동 경시는 현대에도 이르고 있지 않던가.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를 멸시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풍조는 조선의 천박하게 겉 멋만 든 숭문주의의 유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서울에만 태양은 뜨고, 지방은 늘 그늘에 가려져 있다. ~중략~ 서울의 광채가 지방을 압도하고, 모든 코레아 사람이 서울에 살고 싶어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서울 내에서만 궁과 임금의 눈길을 끄는 것이 용이하고 또 눈길을 끌게 됨으로써 공직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국토의 기형적인 발전에는 다 원인이 있는 것이다. 왜 서울에 주요 기관이 밀집해 있는가? 행정 특별시에 대한 ‘그들’의 우려와 참뜻은 너무나 뻔한 속마음이 드러나 있다. 손에 쥔 것을 펴지 않으려는 그들의 욕심은 조선의 망국과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 책에 담긴 정서는 망국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설움을 잘 드러낸다. 일본 군대에 체포되는 조선 군인들, 매질에 익숙해질 만큼 맞으면서도 징징거리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무능력함, 왕비가 낭인들에게 살해되어도 왕은 도망쳐 다녀야 하는 국가의 운명을 보는 외국인의 시선에서는 연민이 담겨 있다. 허나 그들의 동정에 반가워 할 필요도 없고, 왜곡된 시선에 화 낼 필요도 없다. 다만 사라질 수도 있었던 기억의 자취를 남겨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책 한 권의 무게가 아닌 역사의 무게로 다가왔음을 인정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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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아이 2005-01-25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님의 리뷰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