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지금부터 할 얘기와 관련은 있지만 일종의 낚시다. 나는 진보신당 당원이다. 선거 결과를 두고 진보신당과 노회찬을 질타하는 최근의 조류에 불만이 많지만, 지금부터 하려는 말은 그런 얘기가 아니다. 민주당 대변인이 노회찬의 결단을 촉구하고 민주당 관계자가 노회찬의 완주에 대놓고 섭섭함을 표하는 이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것일까에 대한 비평적 관심이 이 글의 초점이다. 여기에 요즈음의 한국 정치를 작동시키는 비밀이 있다.

‘비판적 지지’론이란 것은 본래 운동권의 내부 담론이다. 일단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진보정당의 독자노선을 걸어가야 하는지를 좌파들끼리 논의하는 것이 ‘비판적 지지’론이었다. 따라서 진보신당 부산시당의 야권연대 합류와 심상정의 사퇴 등을 ‘비판적 지지’로 접근하는 것은 올바르지만, 민주당의 군소정당에 대한 압력은 또 다른 차원이다. 이 문제는 또 다른 관점에서 규명되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십 년간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이 가장 얄미워한 민주당 성향의 정치인은 유시민이었다. 유시민은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 사표론을 부채질하여 민주노동당의 표를 절반 이상 잠식했다. 뺏을 건 다 뺏어가고도 “얻을 건 다 얻었는데 마지막에 던지지 못했다.”라고 2002년 권영길의 완주에 대해서 논평하는 등 얄미운 짓을 그치지 않았다. 가져가고도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었고, 진보성향 표를 가져갔으니 그 지지자들의 바람도 일부는 반영해 주겠다는 진정성도 없었다. 오히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 우경화를 주도하고 옹호하며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경호실장’ 노릇을 했다. 하지만 유시민이 특히 미움받았다는 건 다른 민주당 정치인의 경우 좌파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도 된다.

그랬던 이유는 간단하다. 역풍을 맞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지주계급이란 물적 토대를 지녔던 보수야당을 ‘중산층과 서민을 위하는’ 당으로 혁신시킨 위대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그는 재야세력 및 운동권들과 연합을 했다가 오히려 독재정권의 ‘빨갱이’ 공세에 시달려 표가 깎이는 경험을 했다. 민주당은 경험에 의해 스스로를 ‘좌파’와 끊임없이 구별짓기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동족상잔의 전쟁과 정치적 좌익의 학살이라는 토대 위에서 건국된 대한민국의 주류 정치세력이 되기 위해 민주당에게 강요된 생존의 문법이었다. 민주당은 좌파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행세했다. 어휘로도 그랬고 정책지향으로도 그랬다.

1997년부터 2007년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IMF 사태라는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극적으로 집권한 민주화 세력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삼게 되었다.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세력의 경제정책이 역설적으로 독재정권의 그것보다 덜 민중적이게 된 역전현상이 벌어졌다.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좌파들은 1991년 소련 붕괴 후 우왕좌왕하다 합법적 좌파정당 운동을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의 창당과 성장은 ‘좌파=친북’이라는 연결고리를 완화시키고 ‘좌파’란 단어의 시민권을 되찾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했을 것이다. 한편 한나라당은 지극히 보수적인 집권당의 경제정책에 대해서까지도 ‘사회주의적’이란 수사를 남발하면서 이념에 대한 혼동을 조성하는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좌파’란 말은 예전보다 덜 위험한 말이 되었지만, 점점 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되어갔다. 

민주당의 보수적 경제정책에 과격하게 가속 페달을 밟은 듯한 이명박 정부의 미칠듯한 반서민 정책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한나라당은 김대중과 노무현을 ‘좌파’로 몰아붙인 대가로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감은 또 한 번의 역설로 돌아와 민주당이 스스로를 ‘좌파’로 규정하게 했다. 사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시대에 그들은 ‘좌파’를 철지난 유행으로 규정했더랬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좌파 꼴통들이나 쓰는 어휘로 치부했더랬다. 그런데 그들이 요즘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말을 한다. 경기도지사 후보 토론회에서 진보신당 심상정 후보는 민주당 김진표 후보에게 물었다. “스스로를 좌파라고 생각하십니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보수 경제관료였던 그가 대답했다. “예.” 세상이 뒤집혔다.

선거 직후 어떤 대학생들의 대화를 들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이겨서 다행이야.” / “왜?” / “한나라당은 우파고 민주당은 좌파잖아. 좌파가 승리하면 사회가 어지럽거든.” 이들의 대화는 어찌해서 한나라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들이 모두 “민주당이 좌파다.”란 명제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마디로 말하면, 민주당이 좌파라야 한나라당도 존립근거가 생기고 민주당도 존립근거가 생긴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민주당으로의 폭력적 쏠림을 방치하는 ‘야권단일화’를 논할 수 있고 노회찬이 완주하면 진보신당 홈페이지를 폭격하고 노회찬 정계은퇴 서명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 공당의 대변인이라는 사람이 떳떳하게 다른 정당 후보의 사퇴를 촉구한다.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조중동은 언제나 좌파의 준동을 두려워한다. 그들이 말하는 좌파는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체제에 위협이 되며, 대한민국을 언제든지 조선노동당에게 팔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나쁜 놈들”이다. 조선노동당 문제를 제외하고 생각하면, 꽤 멋있어 보인다. 그런데 진보신당 당원이란 나란 사람은 그렇게 위협적이고 무시무시한 존재일까? 내 꼬라지를 돌이켜보니 한숨이 나온다. 민주당이 좌파가 된 세상에서, 좌파정당의 지지자들은 한줌도 안 되는 일종의 오타쿠 집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진보신당이 국민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규탄한다. 국민이란 건 민주당 지지자들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란 정치적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보편적인 수사인데 말이다. 정상인의 말로 번역하자면, 그들은 노회찬에게 진보신당 당원 말을 듣지 말고 민주당 지지자 말을 들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는 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가 가능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미 답을 말했다. 민주당이 좌파니까. 

아무래도 사람은 자신이 죽여버린 것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는 모양이다. 가령 영화 <아바타>를 보라. 인디언과 숲을 죽여 버린 인간이 첨단 테크놀러지로 그것을 가상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던가. 좌파가 아닌 사람들이 ‘좌파’라는 말을 멋으로 알고 유행처럼 그것을 걸치게 된 현실은 좌파정치의 진정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 지지자들에게 ‘진정한 보수’이기도 했고 ‘진정한 진보’이기도 했던 한 매력적인 정치인의 죽음은 그를 따르는 정치세력을 부활시켰고 그들이 좌파를 ‘대체’하게 했다. ‘좌파’란 것이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위험한 것’으로 치부되었을 때는 차라리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민주당이 경제정책의 뚜렷한 변경없이 손쉽게 ‘좌파’라는 구호를 접수한 이 사회에서 심상정은 ‘국민’의 뜻을 떠받들어 왕년의 두 전직 대통령처럼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치’를 이야기한다. 도대체 좌파는 어디에 남아있단 말인가. 

3.3%의 지지율이 비난의 근거가 되는 황당한 현실은 ‘진보정치의 성장’에 대한 고민이 아닌 ‘진보정치의 생존’에 대한 고민을 요구한다. 아무도 우리와 연합하려는 이들은 없으니 진보신당 사람들은 허망한 정치공학적 계산에 매달리지 말고 이 지지율로도 살아남는 법을 고민할 일이다. 선거전략 평가하고, 다시 원칙 세우고,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은 보내고, 당선된 3명의 광역의원과 22명의 기초의원들의 의정활동을 총력지원해야 한다. 중앙정치에서 성공할 수 없다면 지역정치의 길이라도 노려봐야하지 않겠나. 사회에서 우리의 쓸모가 무엇인지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고 노력한다면, 다시 세상이 바뀔 때 한번쯤은 기회가 올 거다. 민주당이 서민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http://hook.hani.co.kr/blog/archives/5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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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11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정당이 자신들의 당론을 맘껏 펼치는 세상이 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