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신주의 배격한다고, 신자유주의 몰아내자고, 승자 독식이 싫다고 백날 중얼거려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힘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소한 욕심을 차단하는 것, 소박한 삶을 각오하고, 더 용감하고 더 행복해질 것.
나는 대구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서울에서 살기는 했지만 친척이 죄다 영남권에 거주하므로 가족과 합류하는 즉시 ‘제2외국어’권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런데도 “오빠야~”로 시작하는 살갑고 애교 넘치는 대구 계집애의 말투는 전혀 구사하지 못하며, 대구 남자의 사투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자고로 경상도 남자 말투란 부산과 구미야말로 제 맛이다, 하는 다소 편협한 취향이 있으며, 실은 전라도 오빠들의 걸쭉한 사투리에 꺅꺅 자지러지는 소녀의 마음 역시 남몰래 간직하지만, 서울에서 산 지 25년이 넘어도 영혼 어딘가에 화인처럼 짙게 새겨진 경상도 사투리 한마디는 해가 갈수록, 고단한 신자유주의가 깊어질수록 더 진해진다. 그것은 바로, “마, 괘앤~찮타”이다. 최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백수가 되고 나니, 더욱더 그 말을 주문처럼 되풀이하게 되었다. 마, 괘앤~찮타.
신자유주의가 깊어질수록 주문처럼 되뇌는 말
회사를 그만두기까지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상사가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데?” “만 2년6개월 다녔으면 제대할 때가 됐습니다.” “두 번 생각 안 해볼 거냐?” “소도 30개월 이상이면 광우병 걸립니다.” “그만두면 뭐 할 건데?” “대형 바이크 면허도 있고, 오토바이 있으니까, 퀵서비스나 할랍니다.” “웃기지 말고.” “정말입니다. 밥 먹을 수 있으면 뭐든 해야죠.” “….”
무심코 한 말이었지만, 그날 퇴근 뒤에도 그 말 한마디를 종일 생각했다. 밥, 밥, 밥. 밥이 다 뭐라고. 밥만 먹으면 될 거 아닌가. 괘앤~찮타, 밥만 먹으면 된다. 밥만 먹으면 된다는 거, 이것은 사실 그토록 오랫동안 내가 애써 무시해왔던 진실이었다. 밥만 먹으면 될걸, 자꾸 더 바라니까 그토록 인생에 잡다한 고뇌가 많았다 싶다. 월급 타기 위해 하는 노동이 그 노동으로 인한 고통을 풀기 위한 소비를 낳고, 그 소비가 다시 월급을 타기 위한 노동을 운명적으로 부르는 광경을 수없이 겪고 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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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나그림 |
밥만 먹으면 안 될 게 없을 텐데, 밥만 먹으면 되는 건데 밥벌이의 고통을 소비로 푸는 것은 간결하며 신속하고도 비겁한 방식이었다. 그렇게도, 돈을 쓰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쉽고 재미있다. 밥 먹고 나면 커피도 마시고 싶고, 유행하는 청바지도 하나 사고 싶고 아찔한 하이힐도 하나 사고 싶고, 예쁜 색깔의 립글로스도 하나 사고 싶고, 거기 어울리는 마스카라도 갖고 싶고, 여기 잘 어울리는 핸드백도 하나 갖고 싶고, 하는 식으로 인생은 사소하고도 귀엽기까지 한 욕심으로 인해 순식간에 번잡스러워진다. 사표를 쓰면서 생각했다. 이제 밥, 밥만 생각해야지. 밥만 먹으면 된다.
속으로 외웠다. 괘앤~찮타. 밥이면 됐지. 비싼 반찬 못 먹어도 된다. 밥만 먹어도 사람은 산다. 커피 못 마셔도 안 죽는다. 30년 된 다세대 셋방 살아도 안 죽는다. 아직 젊은데 경사 급한 산동네 좀 올라간다고 안 죽는다. 비싼 밥 먹는다고 천년만년 사는 거 아니다. 드럼 세탁기에 돌린다고 옷에 금칠 되는 거 아니다. 명품 화장품 바른다고 갑자기 절세미인 될 것도 아니고, 프리미엄 진 입는다고 순식간에 제시카 알바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어깨 펴고, 괘앤~찮타. 물신주의를 배격한다고, 신자유주의를 몰아내자고, 승자 독식이 싫다고 백날 중얼거려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으니 무력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은 사소한 과욕을 차단하는 것, 그리고 하얗고 예쁜 밥알만 생각하는 것. 그러면서 그 밥알처럼 소박한 삶을 각오하고, 더 용감하고 더 행복해질 것. 행복이라는 것도, 각오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까. 모든 88만원 세대 여러분에게도, 괘앤~찮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