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꽃나무 우리시대의 논리 5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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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제 내가 때국물이 빠져서 얼굴이 허여멀건 게 도시 티가 난다고 했지만, 나는 햇빛을 못 봐서 허옇게 뜬 얼굴을 볼 때마다 설움이 왈칵 솟고는 했다.
회사 옥상에 높다랗게 붙어 있던 ‘수출만이 살길이다’라는 큰 간판이 언젠가 ‘수출강국’으로 바뀌어도 전혀 강하지 못했던 아이들은 그 간판 아래 짓눌린 채 버려진 배추 잎사귀처럼 누렇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
욕먹는 일, 매 맞는 일, 개중에 예쁜 아이들 엉덩이 주물리는 일, 매일 목표량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일, 수당도 없는 연장 작업을 거의 매일 하게 되는 일, 그런 일이 부당한 일이라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점심 시간 줄 서 있다 어쩌다 한 번씩 하늘과 눈이 마주치면 갑자기 편도선이 부은 것처럼 목울대가 뻑뻑하게 아파서 밥이 잘 안 넘어간다든지, 집에 편지를 쓴다고 화창한 일요일 기숙사 창문 아래 배를 깔고 엎드려 ‘머니 아버지 보세요.’ 한 줄만 써 놓고는 편지지에 눈물 콧물 칠갑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든지, 그럴 때는 뭔지 모르게 자꾸 억울하다는 생각이 치밀고는 했다. -39쪽

참 사는 것 같았다.
싸워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동자들의 투쟁은 위험해 보인다. 싸워서 얻은 해방감을 단 하루도 누려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노동조합을 지키겠다고 목숨까지 거는 이들은 무모해 보인다. 그들은 아직도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북선은 우리가 만들었다. -57쪽

이제 아무도 기적을 말하지 않을 때
온몸으로 기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우리가 단지 역사를 추억할 때
스스로 역사가 되어 가는 사람들.
서러움이 뭔지를 알려거든 그들을 보라.
우리가 잃은 게 뭔지를 알려거든 그들의 눈빛을 보라.
연대를 말하려거든 100일째 펄럭이는 천막엘 가 보라.
우리들의 미래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몹시 궁금하거들랑
비정규직이라 불리는 그들을 보라. -149쪽

"나는 교향악단을 구경한 적도 없고 오케스트라 같은 건 지나가다라도 본 적이 없다. 내가 만약 단 한 번만이라도 여러분들의 연주를 듣고 노래를 듣고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나는 엄청난 죄책감에 사로잡혔을 거다. 한 달에 70만 운을 받고 그마저도 잘릴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그 음악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하면 누가 그 음악을 듣고 행복할 수 있겠는가. 모멸감을 느끼면서 만들어진 음악이 도대체 누구의 영혼을 살찌울 수 있겠는가." -169쪽

"매일매일이 유서 같았던 일기장을 몇 권이나 남겨 놓고 공장 옥상에서 고단하기만 했던 스물두 살의 몸뚱이를 끝내 날렸던 미경이의 유서는 그러나 막상 짧기만 했습니다.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라고 외쪽 팔뚝에 볼펜으로 비명처럼 새겨넣고 갔습니다.
~
작가가 되는 꿈을 꾸었으나 살아서는 도저히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던 미경이가 선생님 곁으로 갔습니다. 수만 벌의 옷을 만들었지만 단 한 벌의 주인도 될 수 없었던 미경이의 소원은 제비꽃 한복을 입어 보는 거였습니다. 여기저기 터지고 부러진 스물두 살 몸뚱이 여며서 그 옷을 수의로 입혀 보냈습니다. 비록 눈으로 보실 수는 없더라도 제비꽃 향기가 나는 아이가 있거들랑 시도 읊어 주시고 문학도 가르쳐 주시구료."-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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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19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구니 담아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