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 때 일이다. 자정을 넘어서면서 명박산성 앞의 시위는 점점 더 과격해지고 있었다. 시위대 중 앞쪽에 포진해 있던 일부 무리가 산성을 넘어서 청와대로 돌격하자고 선동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선동과 동시에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어디선가 정체모를 대형 스티로폼 벽돌들이 속속 등장했다. 대체 누구의 아이디어로 동원된 것인지 명박산성 못지 않게 궁금해지는 스티로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위대 앞의 무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스티로폼 벽돌을 하나 둘 쌓아올려 명박산성을 뛰어넘을 계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위 행렬의 꽁무니에 있던 사람들은 반쯤은 시위를 즐기러 나온 방관적인 무리들이었기 때문에 시위가 과격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군다나 청와대로 진입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험악한 표정으로 스티로폼 벽돌을 치우라고 난리였다. 갑자기 나타난 스티로폼 벽돌로 인해 '산성을 뛰어넘을 것이냐, 말 것이냐', '스티로폼을 치워라, 말아라', '청와대로 돌진하자, 말자' 하는 의견 대립이 첨예해지면서 시위대는 돌연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명박산성 앞의 시위 무리가 내분으로 아수라가 되어가는 동안, 시위대 뒤켠에서는 퍽 대조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긴 머리를 풀어헤친 청년들이 북치고 장구치며 노래를 불러댔고, 한쪽에선 통닭을 시켜먹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차량 운행이 통제된 거리 곳곳에는 빈 소주병들이 심심찮게 굴러 다녔다. 열에 받쳐 악다구니를 질러대는 시위대 전방의 무리들에 비하면, 후방에 포진해 있던 사람들은 상당히 얼빠지고 심드렁한 상태였는데, 그러면서도 그들은 내심 뭔가 즐거운 기색이었다. 나는 문득 명박산성 바로 앞의 과격한 시위대 무리가 후방의 아나키 사회를 수호하기 위해 정부와 격전을 벌이는 최전방의 투사들처럼 생각되었다. 

명박산성을 뛰어넘어 청와대로 진격하는 게 대체 미국산 쇠고기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스티로폼까지 준비했던 그 과격한 정치 조직은 대체 청와대까지 쳐들어가서 뭘하려고 했던 걸까. 이명박 볼기라도 때리려는 계획이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당시에 어쨌든 산성을 넘자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순전히 그건 아나키적 해방 공간이 좀더 확대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후로도 나는 무질서하고 방만한, 그러면서도 이유없이 달뜨게 되는 집회 특유의 이상야릇한 분위기를 만끽하러 촛불에 몇번 더 참여했었다. 촛불시위 때를 돌이켜보면, 나는 정치적으로 진보도 보수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불순분자였다. 내가 좀 더 평화를 지향했다는 점만 빼면, 촛불을 핑계로 억눌린 생의 에너지를 분출하고자 닭장차를 때려부쉈던 사람들(분명 이런 자들도 있지 않았을까?)과 나는 심정적으로 완전히 한패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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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2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2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양 2010-09-02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기자들 월급은 나와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