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사유와 인간 - 푸코의 웃음, 푸코의 신념, 푸코의 역사! 산책자 에쎄 시리즈 4
폴 벤느 지음, 이상길 옮김 / 산책자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미학화는 어떤 욕구에 부응하지 않으며(그보다 그것은 욕구를 창출한다), 특정한 목적을 겨냥하지도 않는다. (...) 미학화의 에너지는 설득력 있는 그 어떤 교리에서 나오기보다는, 자유로부터, 자아의 충동으로부터, 신비하고 내밀한 ‘블랙박스’로부터 나온다.” -p.182 

우리가 신뢰하는 모든 절대적인 것들이(심지어는 우리 자신까지도) 계보학적 관점에서는 언제나 임의적이고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탄생 비화를 갖는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짓눌릴 필요가 없으며,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할 당위성도 필연성도 없다는 것. 우리는 우리가 자각하기도 전부터 이미 자유롭다는 것. '미학화'의 에너지는 바로 이 자유로부터 나오는 것이겠다. 아래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담론’과 ‘장치’ 개념을 요약한 것. 

담론 
-담론은 테마의 변이형이자 특이성이 갖는 형식이다. 담론은 매번 특이적으로, 자의적으로 변전한다. 변전은 우연적이고, 교차하는 인과성들의 복잡한 연쇄로부터 생겨난다.
-담론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며, 생각되지 않은 생각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투명성이다. 우리는 어떤 시기의 담론의 경계 안에서만 생각한다. 우리가 안다고 믿는 모든 것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제한된다. 우리는 그 한계를 보지 않으면,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저자는 담론을 투명한 어항에 비유하고 있다.) 
-각 역사적 구성물, 각 학문 분야, 각 실천의 궁극적인 차이인 이 담론은 한 시대 전체에 공통된 사유 스타일이나 시대정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하부구조도 아니고 물적 토대도 아니고 세기의 정신도 아니다.
-담론은 매 시대에 사람들이 모든 것을 지각하고 사유하고 그에 작용하는 안경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피지배자들이나 지배자들 모두에게 부과된다.
-담론이라는 말은 하나의 층위가 아니라 일종의 추상, 즉 사건이 특이하다는 사실을 지칭한다. 모터의 작동이 그것의 부속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듯이, 그것은 모터가 작동한다는 추상적 관념인 것.
-담론은 특이성, 시대의 기이성, 장치의 국지적 색깔을 만들어낸다. 
-담론들은 변증법의 논리에 따라 이어지지 않으며, 훌륭한 이유로 인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대체되지도 않고, 초월적인 법정에 의해 그들 간에 서로 평가받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담론들 사이에는 사실적인 관계만 있고 당위적인 관계는 없다. 그것들은 서로를 대체하며, 그들의 관계는 이방인, 경쟁자의 관계다. 이성이 아니라 바로 전투가 사유의 핵심적인 관계를 이룬다.

장치
-장치란 담론, 제도, 건축적 설비, 규제결정, 법률, 행정조치, 과학적 언표, 철학적, 도덕적 박애주의적 제안을 포함한다. 간단히 말해,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의 총체. 과학이든 병원이든 성애든 혹은 군대든 어떤 역사적 구성물을 이루는 법령, 기록, 말 또는 실천들. 관념, 사법, 의학, 치안, 병원제도, 가족적 또는 직업적 규범 등등.  
-장치는 담론을 사회 속에 구현한다. 담론은 장치의 작동 속에서 형성된다. 담론은 그 자체로 장치에 내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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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버는 ‘실물재산’(real property)이나 ‘부동산’(real estate)이라는 말에서의 ‘실’(real)이 라틴어 res, 즉 ‘사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어의 real, 즉 ‘왕실의(royal), 왕에 속하는’을 의미하는 말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다. real의 어원으로 보자면, 소유물이 real한 까닭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국가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소유물이 언제든지 국가의 강제력에 의해 빼앗기거나 파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그러나 국가가 개인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쉽사리 가시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신체적 상해를 야기할 수 있는 능력에서 어느 한 편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권력의 위치에 있으면 대개는 강제나 요구, 협박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조적 불평등 관계에서 비롯한 구조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치우친 상상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 

치우친 상상의 구조란 무엇인가. 여기서 그레이버는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한다. 첫째는 ‘현실과 이성 사이의 통로’로서의 상상력으로, 이것은 데카르트 이후 상상이 환상이나 공상으로 추락하기 이전, 고대와 중세에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상상의 개념이다. 이런 종류의 상상력은 “정적이거나 독립된 것이 절대 아니며, 물리적 세계에서 현실적 효과를 발휘하려는 목적을 지닌 행동의 프로젝트 속에 있고, 그런 까닭으로 인해 언제나 변화하며 적응해 간다.” 

두 번째는 ‘해석 노동’으로서의 상상력이다. 이것은 권력이 작용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상상적 동일시’의 작업이다. 가령, 직원은 자신과 상사와의 관계가 불화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상사의 눈치를 보고, 배려하고, 상사의 속마음은 어떤 상태인지 신경을 쓴다. 이런 종류의 상상을 ‘해석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치우친 상상의 구조'란, 불평등과 지배의 구조 속에서 소수의 엘리트만이 전자, 즉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노동에 종사하고, 노동자는 해석 노동에 해당하는 상상력만을 발휘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재밌는 것은, 그레이버가 ‘상상적 동일시에 의한 해석 노동’을 노동의 일차적 형태로 보면서, 맑스가 말한 노동 소외의 개념을 바로 이 해석노동에 의해 발생하는 소외로 본다는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본질의 존재 자체를 회의하면서, '소외' 역시 인간의 본질이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한 허구적 개념이라고 말한다. 소외라는 것은 인간이 비본질화된다는 것인데, 만약 인간에게 어떤 항구적인 본성, 본질이 부재하다면 소외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소외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적 개념일 뿐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이같은 반론에 대해 그레이버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실제로 있는 것은 무한하게 복합적인 존재들이지만 그런 존재들을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을 통합된 주체로 상상해야 하며, 실제로 있는 것은 사회관계들이 이루는 혼란스럽고 경계가 없는 네트워크지만 그런 사회관계를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통합적이고 경계가 있는 사회를 상상해야 한다. (...) 나는 이것이(소외의 경험이) 구조적 폭력의 필연적 결과로 상상력이 뒤틀리고 파괴되는 결과라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를 비롯한 아나키스트 운동가들은 시위나 퍼포먼스 같은 직접행동 전략을 통해 국가 권력에 반격을 가한다. 그들은 직접행동이 ‘창조적 전복 행위의 상황’들을 창조하고, 행위자들로 하여금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의 상상의 역량을 되찾을 수 있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아나키스트 선동가 집단 크라임씽크의 선언은 인상적이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직물에 구멍을 내고 우리를 형성할 새로운 현실을 일궈 나가며 우리의 자유를 만들어야 한다. 계속해서 새로운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습관, 관습, 법, 또는 편견의 관성에 방해받지 않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의 창출은 전적으로 스스로의 몫이다.”   

광우병 파동 때 광화문 촛불 집회에 몇 번 참여한 적이 있다. 사실 나를 집회로 이끈 것은 광우병 걸린 소보다도 광화문 현장의 무정부적 상황이 전해주는 난장의 매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건대 당시 광화문에는 별의 별 집단이 다 있었다. 뉴라이트 할아버지, 해병대 아저씨, 극좌파 선동조직, 북치고 춤추는 청년들, 예수천국 불신지옥 팻말 든 아줌마, 붉은 악마, 걸인 등등. 시민이라기엔 너무나 야생적이고, 폭도라기엔 너무나 평화로웠던 사람들.  

내가 진정 놀랐던 것은, 현실이라는 직물에 구멍이 뚫렸을 때 그 구멍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래서 도무지 수습이 안 되는, 인간들의 엄청난 에너지였다. 분출하는 힘! 탈주하는 힘, 힘들! 우리는 다 함께 정치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지만,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이성과 합리로 설명하기 위한 의식적인 명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레이버의 표현을 빌면) 국가권력에 의한 불평등 구조가 낳은 모든 규율과 조직과 체제로부터의 일탈과 해방- 무의식의 심층에서 우리가 열망했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을까. 바로 그러한 염원이 촛불이라는 하나의 즐거운 축제로 승화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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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에 존재하는 것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책임은 인간이 지지만, 책임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책임의 범주를 벗어난 것들, 파시즘이나 자본권력이나 그런 것들은 그저 도저하게 '작용'할 뿐이다.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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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량리. 그곳은 요란스런 동네였다. 날마다 정체모를 약장수가 목청을 높이며 성분이 의심스런 엑기스를 선전하고, 주위로는 언제나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노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요설을 경청했다. 전대를 찬 아낙들은 쌍소리를 주고받으며 육탄전을 벌였고, 그러다 어느 한쪽이 물벼락을 맞고 나가떨어지기도 했으며, 그 사이 색색의 조각보로 온몸을 둘둘 만 노숙자가 거리를 배회했고, 노상에 자리를 펼친 점쟁이들이 매서운 눈빛으로 행인들을 쏘아보는가 하면, 골목 한복판에선 알코올중독자가 대(大)자로 뻗어있고, 그 와중에도 대낮부터 소주를 걸친 아주머니들은 코끝이 새빨개진 채 대관령 코다리 미역을 팔았다.

 

보이는 것마다 정신없고 촌스럽고 지저분한 동네였다. 나는 청량리에 직장이 잡힌 이후로 그곳의 거리를 활보할 때마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멸시와 증오와 혐오의 감정을 밑바닥까지 긁어모아 거리 곳곳에 오물처럼 투척했다. 브라질 다방의 더러운 간판에 조소를 날리고, 길거리표 엑기스를 의혹에 가득 찬 시선으로 쳐다봤다. 거리에 만연한 각박한 정서와 경박한 분위기가 내게 조금이라도 옮겨 붙을까봐 결벽증 환자처럼 몸을 사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모른 척 하고 싶었던 곳은 소위 588이라 불리는 사창가 일대였다. 요란법석의 아수라를 헤치고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가면 마치 겹겹의 꽃잎 속에 은신해 있는 꽃술처럼 사창가가 펼쳐져 있었다. 속눈썹이 삼 센티씩 되는 아가씨들이 반짝이는 드레스를 차려입고 무표정하게 앉아있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에게 588은 긍정이나 부정을 떠나 애당초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단언컨대 싫었다. 그런 곳이 직장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조차 못마땅했다. 모순적이었던 것은, 그곳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감정적인 거부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사실 또한 내가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동안 읽은 몇 권의 책들 덕분에 장식적으로나마 몸에 걸치고 있던 인권의식이나 공동체의식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청량리라는 구체적인 환경 속에서 의지와 무관하게 불쑥불쑥 솟아나는 악의적 감정들은, 관념으로만 익힌 시민적 도덕률이 얼마나 알량하고 허구적인 종류인지를 명백히 증명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2 도저히 호감이 가지 않는,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환경과는 천양지차의 동네였지만 어쨌거나 그래도 청량리는 내 일터였다. 싫든 좋든 나는 그곳에서 하루하루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내게 청량리는 대면하고 싶지 않지만 끝내 외면할 수도 없는 그런 동네였다. 퇴근 후 카메라를 챙겨들고 청량리 일대를 찍으러 다니기 시작한 것은 이런 미묘하고도 복잡한 심사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었다.

 

588은 청량리에서도 가장 꺼려지는 곳이었지만, 나는 망설임 끝에 마지막으로 거기까지도 카메라에 담았다. 결코 호기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의무감에 가까웠다. 불편한 대상을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불편을 느낀 데 대한 일말의 죄책감을 떨쳐버리기 위한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모른 척 하고 싶은 대상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그것은 어쩌면 나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한 의지이자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겠다는 오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당시의 나 자신에게는 제법 정의롭게 여겨졌을지 몰라도 관계 맺기라는 측면에서는 철저히 이기적이었다는 사실, 그것이 결코 타자를 이해하기 위한 진정한 방도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사진 찍기라는 행위가 어디까지나 자기 본위로 타자를 이해하려는 대단히 자족적인 활동이며, 누군가에게는 심각한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은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3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동안 내가 청량리에 대해 갖게 된 최초의 우호적인 감정은 동정심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동정심의 배후에는 나이, 생활 환경, 경제력, 지능, 사회적 지위 전반에 걸쳐 나의 총체적 처지가 대상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이 전제되어 있었다. 타자를 나보다 열등한 위치로 상정해놓은 상태에서 발휘하는 동정심이란 얼마나 위선적인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자와 나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는 일에 불과했다. 명확한 선을 그어놓고 선 너머를 혀를 차며 바라보는 것, 이것이 당시 내가 느낀 동정심의 실체라면 실체였다.

 

자기 방어를 위해 대상과의 간극을 일정하게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동정은 혐오와 닮아있다. 어쩌면 동정과 혐오는 야누스의 두 얼굴이 아닐까. 그래서 동정을 베푼 대상은 언제든지 혐오의 대상으로 전복될 수 있는 게 아닐까.

 

4 어떤 대상을 향해 렌즈를 들이민다는 행위는 내가 그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피사체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행위인 것이다. 사진 찍기는 청량리라는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한 가지 방법론이었다. 일정하게 유지되는 거리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나의 사진 찍기는 동정이나 혐오라는 감정과도 그 내적 맥락이 닿아 있었다.

 

사진을 찍는 행위의 배후에는 어떤 심리가 내포되어 있을까. 사진을 찍는 행위에서 수전 손택은 사진에 찍힌 대상을 전유하려는 주체의 욕망을 읽어낸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곧 주체와 대상의 특정한 관계 맺음인데, 이 과정을 통해서 마치 주체는 어떤 지식을 얻은 듯, 그래서 어떤 힘을 얻은 듯 느낀다는 것이다. 이때 카메라는 불편함을 주는 이질적 대상을 포획하여 박제함으로써 불온한 타자를 제압하는 데 소용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피사체와의 정서적 교감이나 유대가 부재한 상태에서 일방적인 렌즈 들이밀기로 이루어지는 사진 찍기는 피사체에게 자행되는 명백한 폭력이다. 사진으로 포획되는 순간 대상은 실재성을 상실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한다. 대상, 즉 타자는 더 이상 ‘도래하는 낯선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타자는 규칙적이고 편안한 나의 삶을 불규칙적이고 불편한 삶으로 변화시키는 무엇으로서가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한 시나리오의 한 요소로 전락해 나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데 활용된다. 그리고 그런 때의 타자는 나의 현재에 아무런 작용을 가하지 않는, 그저 먼 곳에 고정된 채로 존재하는 하나의 ‘풍경’이 된다. 사진을 찍음으로써 나는 타자에게서 후퇴하여 자신 속에 숨어버린 채 인식주관의 입장만을 취하는 관찰자가 되는 것이다.

 

5 동정과 혐오라는 감정, 그리고 사진을 찍고 다녔던 나의 행동. 이 모두에는 전적으로 ‘공재성’이 부재해 있었다. 파비언에 따르면 공재성이란 ‘동시대를 사는 것’이다. 그것은 격리된 다른 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성질이다. 나는 청량리라는 경제공동체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량리 사람들과 전혀 다른 시간을 살고 있었던 게 아닐까. 관찰자의 시선으로 셔터를 눌러댈 때 뿐만이 아니라, 약국에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약을 조제해서 팔고 상담을 할 때조차도 철저히 그들과 나는 ‘시간의 계층화-공간화’를 이루고 있었던 게 아닐까.

 

파비언에 따르면, ‘시간의 계층화-공간화’는 마치 인터넷 익스플로러 창에 두 개의 동영상을 띄워두듯이 세계를 분할하여 각각을 별개의 공간으로 만들어 사유하는 공상적 분리기제다. 이는 곧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즉각적인 이동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이때 각각의 세계는 병존하면서 동시에 분리된 장소로서 존재한다. 파비언은 시간의 계층화 또는 시간의 이층적 배분이 공재성을 거부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얘기한다. 더불어 그는 공재성의 거부가 응답 가능성으로서의 책무에서 자기를 면책하고 부끄러움의 불안에서 도주하기 위한 수단임을 지적하고 있다.

 

6 나는 차라리 적극적으로 청량리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서 '부대끼는 게' 옳았으리라. 부대낀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간섭하고 시달리는 것이다. 괴롭히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성가시게 하고 성가심을 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대낌이란 이해하려는 대상과 싸움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삶의 규칙을 공유해 나가는 일이다. 파비언은 “열려있다는 것은 폭력이나 항쟁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며, 폭력이나 항쟁은 뛰어난 공재성의 양태”라고 말한다.

 

폭력과 항쟁은 곧 ‘소통의 찢김’이다. 온몸으로 소통의 찢김을 감내하며 대상의 삶 속으로 파고드는 것, 그리하여 대상의 일부가 되어 그 안에서 서로 함께 부대끼는 것. 그것은 내가 사진찍기라는 활동을 통해서는 결코 당도할 수 없는 지점이었다. 칼 포퍼는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문제 속으로 들어가 그 문제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포퍼가 말한 ‘새로운 이해’라는 것은 소통의 찢김을 감수하면서 얻게 되는 고통스럽고도 핍진한 체험, 그러한 체험을 통한 이해에 다름 아닐 것이다.

 

7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공재성의 확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내가 다시 청량리로 돌아갔을 때 나는 청량리 주민들과 공재성을 확보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부대낄 수 있을까. 알았다고 해서 나는 과연 안 만큼 실천할 수 있을까. 알아도 쉽게 실천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못한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앎과 실천 사이에 놓인 괴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또 하나의 문제. 공재성을 확보한 관계에서도 타자와의 간극은 엄연히 존재하질 않는가. 그 간극은 우리가 저마다 독립된 개체로서 온전하게 존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간극이다. 타자에 가닿는 것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 서늘한 심연을, 심연의 간극에서 비롯하는 존재론적 고독을 우리는 어떻게 품어 안아야 할까.

 

8 타자라고 하는 대상에 대한 가장 완벽한 이해는 자신을 포기하고 스스로 이해하고 싶은 타자가 될 때이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론적 닮기, 즉 미메시스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미메시스는 인식론적 모방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외적 형태의 재현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제 몸의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의 분장술과 같은 존재론적 닮기의 놀이를 가리킨다. 그러나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과연 현실적으로 탈아(脫我)를 통한 대상과의 합일이 가능할까. 근대적 주체가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이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라면 존재론적 닮기 역시 지나치게 시(詩)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게 아닐까.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홀로 있는 존재로 성립된 주체가 타자와 관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성주의적 길로서의 ‘지식’과 신비주의적 길로서의 ‘무아경’이라는 두 가지 방식을 언급하며 그 두 길이 모두 적합지 않다고 말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대상이 주체에 흡수되어버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반대로 주체가 대상 속으로 흡수되어버린다는 점에서 모순적이게도 이 두 가지 극단적 앎의 방식은 이해하려던 타자 자체의 소멸을 가져와 버린다는 것이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결코 좁혀지지 않는 타자와의 간극에 대해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노래한다. 어쩌면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의 간극이란, 그러니까 너와 나의 간극이란, 새로운 생성이 일어나는 비밀스런 장소인지도 모른다. 그곳에서는 시인의 말처럼 정말로 바람이 춤추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간극은 더 이상 타자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대상과 내가 매순간 새롭게 창조해 나가는 생성의 공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메워야 할 결핍이 아니라 무궁한 가능성을 지닌 미지의 공간으로서 간극을 인식할 때, 타자와 나는 비로소 “불편한 우정”(진은영)을 쌓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불편한 우정’이란 앞서 언급한 ‘부대낀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타자와의 간극을 가능성을 배태한 미래적 장소로 보는 이런 관점에서는 ‘어떻게 간극을 극복하여 타자에 도달하느냐’가 아니라, ‘타자와의 간극을 어떻게 가꿔 나갈 것인가’로 그 문제 설정의 방향이 달라진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어떻게’에 대한 한 가지 방법론으로 유머의 가치를 언급하고 싶다.

 

9 사진찍기가 대상과 나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지는 대상 인식 방법이라면, 유머는 그 심리적 거리감을 일시적으로 무화시켜 버림으로써 대상과 융화하는 방법이다. 전자가 이성적 관찰이라면 후자는 감성적 어울림이다. 전자가 인식론적 제스처라면 후자는 관계론적 제스처다.

 

실질적으로 유머는 적대가 발생할 수 있는 국면을 진정시키는 훌륭한 완충제로서 기능한다. 적대라는 것은 나와 외부의 대상과의 적대에만 국한된 양상이 아니다. 내 안의 무수한 타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대립과 갈등 또한 하나의 적대적 상황일 수 있다. 니체에게 있어서 웃음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졌는지 기억한다면, 유머야말로 강자의 어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머는 슬픔과 고통의 정신적 내면화를 막아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것들을 신체에서 털어버리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10 약국에는 날마다 별별 사람들이 다 찾아왔다. 노숙자는 잊을 만하면 나타나 약국에 살림을 차리려 했고 깡패들은 쓰레기 더미를 투척하며 시비를 걸어왔다. 진동하는 악취로 존재감을 알리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적선 좀 해달라고 생떼를 쓰는 부랑자도 부지기수였다. 이들과 부대끼면서 뛰어난 공재성의 한 가지 양태를 보여주었던 사람이 바로 과장님이다. 내가 혀를 내두르며 조제실로 도망가 버릴 때마다 그녀는 넉살과 타이름으로, 때로는 욕설과 삿대질로 그들과 어울렸다. 과장님은 사람들 앞에서 나보다 훨씬 많이 웃고 화내고 욕하고 수다스러웠는데, 그녀가 약국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하는 태도에는 기본적으로 끈끈하고 찰진 어떤 것이 있었다. 그 어떤 것이란, 자동인형처럼 뻣뻣한 나의 태도에는 도저히 부재한 무엇이었다.

 

웃고 화내고 욕하고 대들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눙치고 하는 일련의 모든 소통 양태가 한때는 한없이 통속적이라며 냉소했던 적도 있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누구나 저렇게 모서리가 닳고 닳은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싶어 우울한 적도 많았다. 오랜 시간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옹이처럼 생겨났을 장사치 특유의 성정이 과장님에게서 느껴질 때마다 그것이 곧 나의 미래의 모습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암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가 통속적이라 냉소했던 장사치 특유의 성정이야말로 공재성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였다. 그리고 그 성정의 기저에 깔려있던 것은 아마도 인간에 대한 애정이 아니었나 싶다. 관념적 사변으로는 결코 습득되지 않는, 오로지 부단한 부대낌 속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단단하게 쌓여가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로서의 어떤 애정 말이다.

 

11 이제까지 나는 공재성과 그것의 적극적 양태로서의 부대낌, 유머와 인간애 등을 열쇠말로 삼아 타자를 이해하는 문제를 고찰해 보았다. 이 글을 쓴 이후로도 나는 무수히 다양한 청량리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각각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또 다시 새로운 타자와 온몸으로 불화를 겪게 될 것이며, 매번 다른 종류의 딜레마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한, 타자를 이해하는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타자 이해의 문제는 결코 관념으로 정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구체 속에서 매번 새롭게 의미화 작업이 요구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지옥이란 다름아닌 타인들이라고 했고, 니체는 생의 고통을 대지에서 벌어지는 즐거운 축제로 받아들인 바 있다. 그렇다면 타자와 타자성을 사유한다는 것이야말로 생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그리하여 생을 긍정하는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울러 타자에 대한 성찰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생의 난제로 삼을 수밖에 없는 ‘더불어 혼자인 삶’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타자에 대한 사유가 계속 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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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쉬 2015-11-27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좋은 글이...
보물 같네요.
책 속 구절인 줄 알고 무슨 책인지 찾아봤다는

수양 2015-11-28 03: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달아주신 댓글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어봤는데 이런 맙소사 우르르 몰려오는 닭살크리를 어찌할까요ㅠ;;;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밤 11시 정도가 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퉁이를 돌았을 때 복도 끝에 시커먼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어서 화들짝 놀란 적이 몇 번 있었다. 동생이었다. 까무러치는 내 꼴이 우스운지 동생은 담배를 비벼 끄며 킬킬대고, 나는 멋쩍어서 짐짓 심장 떨어지겠다고 타박을 놓곤 했다. 그렇게 둘이 몇 마디 주고받으면서 투닥거리다가 나란히 집으로 들어온 게 두어번 쯤 될까. 

그런데 참 모를 일이다. 언젠가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귀가할 때마다, 동생이 어두운 복도 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면, 그래서 또 나를 깜짝 놀라게 해주었으면 하는 실없는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이다. 기대는, 원래 기대라는 게 그렇듯이, 들어맞을 때도 있고 어긋날 때도 있다. 물론 어긋났다고 해서 좌절할 건 없다. 복도가 텅 비어 있다면, 동생은 틀림없이 집안에서 퀭한 눈으로 컴퓨터를 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 

그럼에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퉁이를 돌았을 때 아무도 없으면 왠지 허전하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뀔 때 그것은 아무리 미소한 종류라도 어찌할 수 없는 허전함을 동반하는 것이다. 사소한 반복에도 규칙성을 부여하고 괜한 기대를 품는 버릇은 얼마나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드는 습관인지. 동생은, 아무 것도 모르는 동생은, 그저 담배를 태우거나 컴퓨터를 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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