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버는 ‘실물재산’(real property)이나 ‘부동산’(real estate)이라는 말에서의 ‘실’(real)이 라틴어 res, 즉 ‘사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어의 real, 즉 ‘왕실의(royal), 왕에 속하는’을 의미하는 말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다. real의 어원으로 보자면, 소유물이 real한 까닭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국가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소유물이 언제든지 국가의 강제력에 의해 빼앗기거나 파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그러나 국가가 개인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쉽사리 가시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신체적 상해를 야기할 수 있는 능력에서 어느 한 편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권력의 위치에 있으면 대개는 강제나 요구, 협박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조적 불평등 관계에서 비롯한 구조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치우친 상상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 

치우친 상상의 구조란 무엇인가. 여기서 그레이버는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한다. 첫째는 ‘현실과 이성 사이의 통로’로서의 상상력으로, 이것은 데카르트 이후 상상이 환상이나 공상으로 추락하기 이전, 고대와 중세에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상상의 개념이다. 이런 종류의 상상력은 “정적이거나 독립된 것이 절대 아니며, 물리적 세계에서 현실적 효과를 발휘하려는 목적을 지닌 행동의 프로젝트 속에 있고, 그런 까닭으로 인해 언제나 변화하며 적응해 간다.” 

두 번째는 ‘해석 노동’으로서의 상상력이다. 이것은 권력이 작용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상상적 동일시’의 작업이다. 가령, 직원은 자신과 상사와의 관계가 불화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상사의 눈치를 보고, 배려하고, 상사의 속마음은 어떤 상태인지 신경을 쓴다. 이런 종류의 상상을 ‘해석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치우친 상상의 구조'란, 불평등과 지배의 구조 속에서 소수의 엘리트만이 전자, 즉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노동에 종사하고, 노동자는 해석 노동에 해당하는 상상력만을 발휘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재밌는 것은, 그레이버가 ‘상상적 동일시에 의한 해석 노동’을 노동의 일차적 형태로 보면서, 맑스가 말한 노동 소외의 개념을 바로 이 해석노동에 의해 발생하는 소외로 본다는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본질의 존재 자체를 회의하면서, '소외' 역시 인간의 본질이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한 허구적 개념이라고 말한다. 소외라는 것은 인간이 비본질화된다는 것인데, 만약 인간에게 어떤 항구적인 본성, 본질이 부재하다면 소외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소외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적 개념일 뿐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이같은 반론에 대해 그레이버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실제로 있는 것은 무한하게 복합적인 존재들이지만 그런 존재들을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을 통합된 주체로 상상해야 하며, 실제로 있는 것은 사회관계들이 이루는 혼란스럽고 경계가 없는 네트워크지만 그런 사회관계를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통합적이고 경계가 있는 사회를 상상해야 한다. (...) 나는 이것이(소외의 경험이) 구조적 폭력의 필연적 결과로 상상력이 뒤틀리고 파괴되는 결과라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를 비롯한 아나키스트 운동가들은 시위나 퍼포먼스 같은 직접행동 전략을 통해 국가 권력에 반격을 가한다. 그들은 직접행동이 ‘창조적 전복 행위의 상황’들을 창조하고, 행위자들로 하여금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의 상상의 역량을 되찾을 수 있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아나키스트 선동가 집단 크라임씽크의 선언은 인상적이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직물에 구멍을 내고 우리를 형성할 새로운 현실을 일궈 나가며 우리의 자유를 만들어야 한다. 계속해서 새로운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습관, 관습, 법, 또는 편견의 관성에 방해받지 않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의 창출은 전적으로 스스로의 몫이다.”   

광우병 파동 때 광화문 촛불 집회에 몇 번 참여한 적이 있다. 사실 나를 집회로 이끈 것은 광우병 걸린 소보다도 광화문 현장의 무정부적 상황이 전해주는 난장의 매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건대 당시 광화문에는 별의 별 집단이 다 있었다. 뉴라이트 할아버지, 해병대 아저씨, 극좌파 선동조직, 북치고 춤추는 청년들, 예수천국 불신지옥 팻말 든 아줌마, 붉은 악마, 걸인 등등. 시민이라기엔 너무나 야생적이고, 폭도라기엔 너무나 평화로웠던 사람들.  

내가 진정 놀랐던 것은, 현실이라는 직물에 구멍이 뚫렸을 때 그 구멍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래서 도무지 수습이 안 되는, 인간들의 엄청난 에너지였다. 분출하는 힘! 탈주하는 힘, 힘들! 우리는 다 함께 정치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지만,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이성과 합리로 설명하기 위한 의식적인 명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레이버의 표현을 빌면) 국가권력에 의한 불평등 구조가 낳은 모든 규율과 조직과 체제로부터의 일탈과 해방- 무의식의 심층에서 우리가 열망했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을까. 바로 그러한 염원이 촛불이라는 하나의 즐거운 축제로 승화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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