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라루스 서양미술사 7
제라르 르그랑 지음, 정숙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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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을 갖고 미술사를 들여다 볼수록 점점 더 시선이 머물게 되는 쪽은 전성기 작품이 아니라 전성기 바로 전이나 후의 작품인 것 같다. 처음에는 대표적인 시기의 '잘 된 그림'이 먼저 눈에 띄지만, 나중에는 '잘 되려다 만 그림'을 더 살펴보게 된다. 잘 되려다 만 그림이란, 한 시대의 절대적 양식에 도달해 가는 그림이기도 하고, 아니면 그러한 양식으로부터 탈출해 나가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런 그림들은 뭔가 야릇하고 조마조마하다. 묘한 긴장감이 있고, 그래서 보는 즐거움이 있다.

르네상스 역시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의 그림보다도 매너리즘 사조의 작품들이 더 매력적으로 와닿는다. 마치 문고리를 쥐고 문턱에 엉거주춤 서 있는 듯한 그런 그림들에게서는 애매한 위치에서 비롯하는 망설임과 혼란, 회의와 고민이 묻어난다. 어쩌면 과감하고도 이상한 시도에 대해 화가 스스로 느꼈을 법한 해방과 자유의 쾌감도 가늠해 보게 된다. (물론 이 사조가 정치 및 종교적으로 심각한 혼돈에 빠져있던 당시 이탈리아의 불안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측면도 결코 간과할 순 없겠지만)

매너리즘에 관해 이 책에서는 ‘형태의 높이기와 고갈의 역학으로 보면, 바로크 예술은 어떤 면에서는 매너리즘을 이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책에 따르면, 고전주의 시기의 카라치도 여전히 매너리즘에 속해 있는 화가라고. 또 한편으로는 카라바조의 그림 <청년기의 바쿠스>에서 바쿠스의 불그뎅뎅한 얼굴에 드리워진 '도발적인 저속함'에서 매너리즘의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다고.

매너리즘 특유의 지나친 각색이나 어색한 시도가 훗날 바로크 회화의 역동적인 표현을 예비하는 의미 있는 사전 작업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시기를 단지 이행기로만 보는 것은 어쩐지 아쉽다. 독자적인 고유성 때문이다. 매너리즘 시기는 그야말로 디오니소스적인 충동으로 충만해 있다. 마치 이 즈음의 미술가들은 균형과 조화, 화합과 완벽함 따위의 아폴론적인 미에 질릴 대로 질린 나머지 일부러 위악을 부리고 반항을 하면서 지난한 모색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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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아트 - 예술의 최전선
진중권 엮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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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론>에서 플라톤은 미술을 가리켜 이데아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활동으로 낙인찍는다. 미술은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한 현실 세계를 또 다시 모방하기 때문에 이데아로부터 떨어져도 한참이나 떨어진, 다분히 저급한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플라톤이 20세기 추상미술회화를 만났더라도 여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19세기까지도 가시적 외부 세계를 묘사하는데 충실했던 미술은 추상표현주의 화파의 등장 이후 비로소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미술은 더 이상 대상의 재현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고유한 대상이 된다. “미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추상회화의 포문을 연 클레가 남긴 말이다. 예술가는 이제 창조된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 자체를 모방한다. 

모사에서 창조로 나아갔던 근대 이후 회화미술의 흐름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갖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20세기의 사진과 영화가 실재를 모사한 가상으로서 기술복제시대를 열었다면, 21세기의 디지털 이미지는 실재와는 상관없이 자체 합성된 가상으로서 기술복제시대의 다음 단계인 '기술합성시대'를 열었다고 선언한다. 근대 회화미술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매체예술 분야에서도 동일한 방향의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기술복제시대의 사진과 영화가 모더니즘의 두 축인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을 낳았다면, 이 시대의 혁신적 매체인 디지털 이미지는 어떤 미학적 현상과 사조를 낳게 될 것인가. 이 책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러 미디어아티스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러한 의문을 풀어나가고 있다.  

첫 번째 인터뷰이로 등장한 로이 애스콧은 가상과 실재를 넘나드는 가변현실 속에서 21세기의 자아는 '생성적 이고 창발적'인 성격으로 변모한다고 말한다. 가상현실 속에서 새롭게 구축되는 자아는 '분열'이나 '상실'이 아 니라, '생성'과 '해방'을 의미한다. 이제 자아는 양자물리학에서 전자나 아원자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가상과 현실에 다중적으로 혼재한다. 또한 그는 가상현실이 종내에는 인간의 영적 세계까지도 담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이 단계를 '식물현실'이라고 정의하는 그는, 물리적 현실과 가상현실, 그리고 식물현실의 경계가 최종적 으로 무화되어 인간 의식이 이 세 가지 장(場) 사이를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상태야말로 기술합성시대의 인류가 도달해야 할 궁극의 지점이라고 말한다.  

반면, 사이버 페니는 가상현실을 다중자아 생성의 장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세계로 본다. 그에 따르면 가상현실을 비롯한 컴퓨터 기술은 그 사상적 토대를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두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과 심신의 통합을 추구하는 예술과는 도저히 맥락이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논리-수학적 기호체계, 보편성, 효율성, 최적성 등을 근본적인 가치로 하는 과학기술은 예술의 내재적 특질이나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와는 상극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미디어 아트 작업을 논하기 전에 미디어라는 기술이 그 도구적 적합성을 가지고 있는가, 과연 그것이 예술의 도구로 쓰이기에 적합한가 하는 점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한다. 

근대 문명도 겨우 적응해 가고 있는 처지에 첨단 기술문명에 대한 논의를 파악하려니 다소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인터뷰 대담이라는 형식이 주는 박진감 덕분에 주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재미있게 읽힌다. 특히 저자가 인터뷰어로 나선 챕터를 읽다 보면 문득 백분토론의 한 장면이 연상되기도. 일례로 컴퓨터 게임 기술의 가능성에 무한한 기대를 품고 있는 어느 미디어아티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로 나선 저자는, 비디오게임이 제공하는 모험의 기회들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당면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물질의 저항이 없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가짜 체험이 아닌가, 전쟁게임에 몰입한 학생들이 분절되지 않은 원시적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점은 오히려 시대를 퇴보한 듯이 느껴지지 않는가 등등 공격적인 질문을 연신 쏟아내는데, 이에 대한 인터뷰이의 답변도 질문 못지않게 체계적이고 적확해서 관전의 묘미가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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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존 버거 지음, 박홍규 옮김 / 아트북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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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따르면, 피카소가 평생에 걸쳐 보여준 다양한 화풍은 순차적인 단계를 밟은 진화의 과정이라기보다 전후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급작스런 변모에 가깝다. 그는 애초에 지적인 탐구 활동을 통해 작업을 진척시키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작업을 이론적으로 일관되게 정립하려는 의지도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천재였고, '즉각적이고 반지성적'으로 '영매'처럼 작품들을 쏟아내었다. 저자는 피카소가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정확히 의식하고 있었고 그 결과, 설명-제안-논의-배움 따위의 상호적 덕목에 대해 회의적이었다고 말한다. 때문에 피카소는 입체주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변모는 했으되) 거의 발전하지 않았으며 점점 더 자신의 천부적 창조성이라고 하는 신비에만 배타적으로 의존해야 했다고.(p.71) 

위에서 예외로 언급한 입체주의 시기는 피카소의 전 생애에 걸쳐 유일하게 대외적 교류가 활발했던 시절이다. 입체주의 시기에서 보여지는 자기발전적 면모는 바로 그런 활발한 교류 덕분이었다. (저자는 이 무렵을 피카소 미술의 정점으로 봄) "1907년까지 피카소는 분명 그림에서 고독한 길을 걸었다. 그는 파리에 있는 동년배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그 역시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아비뇽의 처녀들> 이후 그는 한 집단에 속하게 되었다."(p.122) 그래서 피카소의 입체주의 시기는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과 어느 정도 작품 성향이 유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후에 피카소는 다시 내성적이고 고독한 혼자만의 세계 속으로 되돌아간다.     

입체주의 시기를 제외하고 피카소가 보여주는 작품 세계의 이상향은 언제나 단순하고 원시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원시적인 요소에는 어김없이 고향 스페인의 향취가 짙게 베어 있는데, 바로 이점은 스페인을 떠나서 침입자이자 이방인의 처지로 유럽에 정착해야 했던 피카소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 나간 하나의 전략이었다. 저자는 피카소가 스스로를 (스페인이라는 이국에서 온) '고상한 야만인'으로 이상화함으로써, 루소처럼 자신을 둘러싼 유럽 사회를 비난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눈에 비친 피카소는 "자신이 사는 부패한 사회를 비난하기 위해 그 자신의 천재성이 지닌 원시적 성격을 이상화하는, 그래서 자기만족에 빠진,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고상한 야만인'이라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끝없이 작품을 생산해야 했던 미술가"(p.199)였다.        

이 책에서 말하는 피카소의 실패란, 1945년 이후 작품에서 보여지는 매너리즘적 경향을 말한다. 입체주의와 고전주의, 초현실주의를 섭렵하고 이후에는 독자적 양식을 창안하는 등 끊임없이 양식 실험에 도전하던 피카소였으나, 어느덧 '자신의 연기 모습에 매료되는 배우'와 같이 스스로 구축한 양식에 자아도취 되기 시작한다. '양식에의 자아도취'는 '주제의 결핍'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주제의 결핍'이야말로 매너리즘의 근본 원인이 된다. 즉, 작품에서 양식 실험 외에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부재하다는 것. 스타일은 있는데 내용은 없는, 내용이란 그저 '피카소가 그린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 상태야말로 매너리즘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피카소가 그린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써는 이미 굉장한 '내용'이었고, 이러한 역설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매너리즘은 쉽게 극복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말년의 피카소 작품들은, 성숙한 자기완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여느 거장들의 말년 작품과는 달리, 지극히 자조적이고 자기체념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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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9-09-18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전 이 책 보고 피카소에 대해 급관심이 생겨 한동안 열심히 챙겨 봤었답니다.

수양 2010-10-26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에휴 저는 오랜만에 이 리뷰를 다시 읽어보니 책 내용이 기억이... 새록새록이 아니라 가물가물이네요-_-;;; 정녕 내가 읽었던 책이란 말인지ㅜ_ㅜ
 
이주헌의 아트 카페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27
이주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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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초반부에는 사조를 넘나들며 서양 고전 미술 작품들을 두루 살피다가 뒷부분으로 가면 한국 전통미술 및 현대미술작품(사실 이렇게 분류하기도 좀 애매하지만)도 꽤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그 중에 박대성 화백의 <현율玄律>이라는 작품(아래)은 도판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눈이 다 시원해지는 그림이다. 크기가 178X383cm라고 하는데, 실물로 보면 얼마나 압도적인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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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미학강의
이중텐 지음, 곽수경 옮김 / 김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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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절하고 자상한 미학입문서. 미학의 기본 개념과 전반적인 범주를 폭넓게 조명하고 있다. 서론부인 1~2장까지는 지나치게 친절해서 장황하기까지 한 설명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는데, 3장 칸트미학 이후부터는 오히려 그 친절함에 한없이 감사하게 된다.     

2. 내가 지난번에 시끄럽게 정리해놨던 크로체의 인간의 정신활동을 이 책 4장에서는 아래처럼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다.    

직관-인식활동-특수사물에 대한 인식-예술과 심미-미추
논리-인식활동-일반사물에 대한 인식-과학과 철학-참과 거짓
공리-실천활동-특수목적에 대한 추구-경제학-이해
도덕-실천적활동-일반목적에 대한 추구-윤리학-선악

3. 크로체에게 있어 '직관은 곧 표현'이다. 표현되지 못한 직관은 있을 수도 없다. 생각은 하는데 구현하지 못했다는 것은 졸렬한 변명일 뿐이다. (물론, 이에 대해 크로체는 '마음 속에 떠오른 생각'조차도 이미 하나의 내재적 표현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크로체에게는 표현 형식에 있어서의 연마나 훈련은 인식활동을 정상적으로 수행해 나가기 위해 당연히 이미 기본적으로 마스터 되어있어야 할 전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직관이 100% 표현으로 승화되어, 직관이 표현이고 표현이 직관인 그런 경지는 선천적으로 표현력을 타고난 천재가 아니고서야... 예술가는 그야말로 천재라는 얘기인가.   

4. 4장에 나오는 몇가지 심미 이론들: 립스의 감정이입론(의인화나 연상과는 다른 의미임. 주체가 정감을 대상에게 이입함으로써 물아가 체험하는 동일한 심리과정. 천인합일과 정경합일의 경지), 벌로프의 심리적 거리설(주체와 대상 사이에 적당한 심리적 거리가 유지되고 있을 때만 대상이 주체에 대해 비로소 미적일 수 있음), 동일구조론(외물의 구조와 외물로부터 느끼는 정감은 동일구조다. 일종의 미메시스 같은 게 아닐까?)

5. 7장 예술의 원론적인 의미에 대한 언급 일부 요약: (종교나 과학이 '형식 있는 의미'인데 반해) 예술은 '의미 있는 형식'이다. 예술에서의 의미란 '정감'을 말한다. 즉, 예술은 정감을 대상화한 형식이다. 예술은 형식을 통해 정감을 전달한다. 그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동정과 공명을 체험하게 한다. 이것이 예술의 기능이다. 정감의 공명, 즉 동정감, 이것은 곧 칸트가 말한 공통감(=공리를 초월하고 개념이 아니면서 목적을 갖지 않는 주관적 보편성)과 마찬가지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인류에게는 왜 이런 보편적 느낌이 존재하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확증이기 때문이다. 정감은 인간의 확증이다. 정감을 체험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다. "정감이란 인간과 인간 간의 상호 확증의 심리 체험이다. 정감이 상호 확증인 이상 그것은 본질적으로 반드시 동정감이어야 하며 반드시 이론적, 논리적으로 각 개인의 정감이 모두 같기를 요구한다." 예술은 결국, 정감을 통해 인간이 인간임을 확인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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