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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존 버거 지음, 박홍규 옮김 / 아트북스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에 따르면, 피카소가 평생에 걸쳐 보여준 다양한 화풍은 순차적인 단계를 밟은 진화의 과정이라기보다 전후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급작스런 변모에 가깝다. 그는 애초에 지적인 탐구 활동을 통해 작업을 진척시키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작업을 이론적으로 일관되게 정립하려는 의지도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천재였고, '즉각적이고 반지성적'으로 '영매'처럼 작품들을 쏟아내었다. 저자는 피카소가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정확히 의식하고 있었고 그 결과, 설명-제안-논의-배움 따위의 상호적 덕목에 대해 회의적이었다고 말한다. 때문에 피카소는 입체주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변모는 했으되) 거의 발전하지 않았으며 점점 더 자신의 천부적 창조성이라고 하는 신비에만 배타적으로 의존해야 했다고.(p.71)
위에서 예외로 언급한 입체주의 시기는 피카소의 전 생애에 걸쳐 유일하게 대외적 교류가 활발했던 시절이다. 입체주의 시기에서 보여지는 자기발전적 면모는 바로 그런 활발한 교류 덕분이었다. (저자는 이 무렵을 피카소 미술의 정점으로 봄) "1907년까지 피카소는 분명 그림에서 고독한 길을 걸었다. 그는 파리에 있는 동년배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그 역시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아비뇽의 처녀들> 이후 그는 한 집단에 속하게 되었다."(p.122) 그래서 피카소의 입체주의 시기는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과 어느 정도 작품 성향이 유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후에 피카소는 다시 내성적이고 고독한 혼자만의 세계 속으로 되돌아간다.
입체주의 시기를 제외하고 피카소가 보여주는 작품 세계의 이상향은 언제나 단순하고 원시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원시적인 요소에는 어김없이 고향 스페인의 향취가 짙게 베어 있는데, 바로 이점은 스페인을 떠나서 침입자이자 이방인의 처지로 유럽에 정착해야 했던 피카소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 나간 하나의 전략이었다. 저자는 피카소가 스스로를 (스페인이라는 이국에서 온) '고상한 야만인'으로 이상화함으로써, 루소처럼 자신을 둘러싼 유럽 사회를 비난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눈에 비친 피카소는 "자신이 사는 부패한 사회를 비난하기 위해 그 자신의 천재성이 지닌 원시적 성격을 이상화하는, 그래서 자기만족에 빠진,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고상한 야만인'이라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끝없이 작품을 생산해야 했던 미술가"(p.199)였다.
이 책에서 말하는 피카소의 실패란, 1945년 이후 작품에서 보여지는 매너리즘적 경향을 말한다. 입체주의와 고전주의, 초현실주의를 섭렵하고 이후에는 독자적 양식을 창안하는 등 끊임없이 양식 실험에 도전하던 피카소였으나, 어느덧 '자신의 연기 모습에 매료되는 배우'와 같이 스스로 구축한 양식에 자아도취 되기 시작한다. '양식에의 자아도취'는 '주제의 결핍'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주제의 결핍'이야말로 매너리즘의 근본 원인이 된다. 즉, 작품에서 양식 실험 외에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부재하다는 것. 스타일은 있는데 내용은 없는, 내용이란 그저 '피카소가 그린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 상태야말로 매너리즘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피카소가 그린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써는 이미 굉장한 '내용'이었고, 이러한 역설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매너리즘은 쉽게 극복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말년의 피카소 작품들은, 성숙한 자기완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여느 거장들의 말년 작품과는 달리, 지극히 자조적이고 자기체념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