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현대 미술의 풍경
윤난지 지음 / 한길아트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총론부만 정리해본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 대략 1970년대 이후로 지칭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질을 지닌다. 첫째, 작가와 작품의 절대적 관계가 해체된다. 작가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의 작품의 정체성이나 유일성이 의미를 잃는 것이다. 무수한 복제 이미지들이 출현하고 원본의 존재가 유명무실해지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둘째, 모더니즘 예술이 장르 간의 경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영역의 순수성을 확보하고자 했다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은 장르 및 작품 사이의 인용, 혼성, 차용, 융합, 표절, 절충, 교배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ex. 게르하르트 리히터- 기하학적으로 확대해놓은 사진 작품을 통해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허물기, 정밀회화를 통해 사진과 회화의 경계 허물기)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은 더 이상 ‘혁신’이나 ‘새로움의 충격’에 연연하지 않으며 의도적으로 매너리즘을 표방한다. 셋째, 예술 작품에서 보여질 수 있는 온갖 형식적 실험은 모더니즘 시대에 종결되고, 이제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형식’이 아닌 ‘내용’을 주목하게 된다. 관람자는 새롭게 제시되는 형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관조자에서, 작품이 꺼내는 담론을 능동적으로 읽어내는 독해자가 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작품이 꺼내는 이야기는 지극히 다성적인 코드로서 관람자에게 다양한 읽기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이 꺼내는 이야기, 즉 현대미술의 관심과 화두는 무엇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은 다름아닌 ‘타자’의 예술을 제시한다. 계급구조, 인종, 젠더, 변방 문화, 가부장 구조, 자본주의, 여성, 유색인, 동성애자 등. 현대미술은 일종의 정치적 행위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현대미술이 과거의 선동 미술과 다른 점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는 점이다. 

작가는 죽었는가 라캉,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보드리야르, 리요타르 등으로 이어지는 후기구조주의 사유의 흐름은 공통적으로 주체의 죽음을 천명한다. 리요타르 등 주체의 죽음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주체의 붕괴와 증발이 오히려 주체의 복수화, 대중화, 다원화를 가져오며 이는 궁극적으로 창조의 가능성이 무한히 확대되는 계기가 된다고 본다. 이러한 일련의 사상들은 현대미술의 양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현대미술은 끊임없이 작가의 죽음을 암시하는 작품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작품과 작가의 연결 고리를 의도적으로 해체하려는 시도, 작품이 특정 작가에 귀속되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시도 등. 그러나 작가가 소멸했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무수한 작품들이 정작 누구의 작품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화랑가에서 고가에 팔리는 현상은 아이러니이며, 결국 주체의 부재를 증명하려 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증명하려는 주체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이 현대미술의 특징임을 알 수 있다.   

환경, 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 환경미술, 대지미술, 개념미술, 퍼포먼스, 설치미술, 사이버 아트, 인터렉티브 아트, 로버트 스미드슨, 마이클 하이저, 크리스토, 리처드 롱, 마이클 싱어, 앤디 골드워시, 알랜 손피스트, 해리슨 부부.  

현대미술 속의 테크놀로지 테크놀로지를 바라보는 현대미술의 입장은 양면적이다. 테크놀로지를 낙관하는 현대미술가(혁명기 러시아 미술도 이에 해당)들은 테크놀로지를 작품의 풍부한 표현을 위한 ‘도구’로서 응용한 반면, 테크놀로지 문명을 비관하는 현대미술가들(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미술)은 테크놀로지 그 자체를 ‘주제’로 삼아 비판한다.  

현대미술과 설치 설치미술은 모든 장르, 양식, 매체가 한 공간에서 만나는 어떠한 혼성적인 장(場)이 된다. 그리하여 설치미술은 관람자가 시각, 청각, 촉각 등을 두루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심리적, 신체적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관람자에게 보다 능동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설치미술은 모든 양식이 혼성화, 다원화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시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미술전시기법이며, 액자를 뛰쳐나간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술은 이제 감상자와 함께 어울림으로서 삶과 예술을 긴밀하게 접목시킨다. 설치미술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되는 특수성, 일시성을 가진다. 그래서 설치미술은 한 개인이 영속적으로 사유할 수는 없으나 모든 개인이 일시적으로 공유할 수는 있다. 결국 설치미술은 특정 계층에 의한 문화 독점을 비켜갈 수 있다. 그만큼 문화의 대중화 가능성, 공공자산으로서의 미술품의 가능성, 미술의 민주화 가능성을 가진다. 또한 설치미술은 미술가와 관람자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즉, 제시하고 수용하는 일방 관계에서 제안하고 반응하는 상호대화의 방식으로의 전환.  

건축과 미술의 만남 시대를 훑어보면 미술 장르별 분화와 통합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짐을 알수 있다. 16세기 르네상스시대에 회화, 건축, 조각이 분리되었다가 17세기에는 발전적 통합이 이루어지고 바로크 시대에 그 정점에 이르렀다가 모더니스트들의 출현으로 다시 분리된다. 모더니스트들은 예술-비예술, 장르-장르 별로 엄격한 경계를 둠으로서 장르의 독자성을 수호한다. 그러나 1970년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등장함으로서 다시 장르간에 유기적인 통합이 일어나게 된다.  

구겐하임, 현대미술의 새 패트런 미술작품의 후원은 크게 직접 후원(지원금, 포상금 지급), 간접 후원(사설재단이나 개인 수장, 전시, 비평활동), 정부 주도의 공적 후원, 컬렉터나 사립재단의 사적 후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정부 주도의 공적인 후원은 전위적인 최전방 미술 사조의 발전에는 별반 득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예술 탄압의 일환으로 전락하거나 미술의 보수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반면 사적인 후원은 후원자의 다양한 취향이 고려되어 미술 경향 역시 다원적이고 복수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50년대 이후 미술사조의 주도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오게 된 데는 구겐하임 재단의 역할이 컸다. 페기 구겐하임의 업적은 후원 주체의 전위정신이 현대 미술 경향을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문화식민국을 건설하는데 일조한 구겐하임의 이면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로체의 미학
베네데토 크로체 / 예전사 / 1994년 12월
평점 :
품절




1. 크로체의 견해에 따르면, 논리적 지식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기본적으로 직관적이어야 한다. 즉, 모든 논리적 지식은 직관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이 말은 김종흠의 <마술 과학 인문학>에 나오는 내용과 놀라우리만치 일맥상통한다. <마술 과학 인문학>에서는 모든 (논리적인) 과학적 지식이 ‘가설’이라는 (비논리적인) ‘직관’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마음은 미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논리적인 것으로 진행한다. 

2. 감각(인상, 느낌, 미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정서, 욕망, 감정 등 일체 포괄)이란 질료이다. 이 질료가 표현이라는 형식을 만났을 때 비로소 ‘인간의 정신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직관이 이루어지게 된다. 직관은 이미지나 표상일 수 있으며 진정한 의미의 표상은 ‘표현’이다. 즉, 직관은 표현이다. 직관활동은 스스로가 표현하는 만큼의 직관을 가지고 있다. (직관을 결여하고 있는 표현(알맹이는 없고 스킬만 요란한 경우), 혹은 직관은 있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표현(스킬이 부족한 경우) 모두 크로체는 불가능하고 있을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 다시말해 크로체의 견해로는, 꽃을 못 그리는 사람은 꽃을 모르는 거다. 꽃을 알면 잘 그릴 수 밖에 없다.)

3. 표현은 인상(감각)을 조탁하고 형태화 시킨다. 인상은 표현 속에서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지만 그것은 더 이상 인상이 아니다. (형식 안에 이미 그 내용이 조탁된 상태로 포섭되어 있으므로). 표현은 형식이며 인상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미적인 것’이란 ‘형식’을 말한다. 내용은 형식을 만나 실제로 변형되고 난 후에라야 미적인 내용이 되는 것이지 그 이전에는 아니다. 따라서 ‘미적인 것’, 즉 예술은 더 이상 감정의 세계나 심리적 질료가 아니라 형식이며 지식이다. (이론적 정신 중에 직관적 형식의 지식)

4. 예술가는 미적인 것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정열과 평온함 양자를 갖추어야 한다. 전자는 ‘미적인 것’의 질료인 ‘감각’을 풍부하게 확보하기 위함이고, 후자는 ‘감각’을 세련되게 조탁하여 형식화시키기 위함이다. 즉, 정열은 최대한의 감수성, 즉 예술가가 자신의 심리적 기관 속에 흡수하는 풍부한 양의 질료이며, 평온함은 최대한의 냉정, 즉 감정과 정열의 혼란스러움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는 형식. 이 두 가지 요소를 갖추고 나서야 비로소 예술가는 ‘미적인 것’을 완성할 수 있다.

5. 이론적 정신의 1단계인 직관적 형식의 궁극의 분야는 예술이고, 2단계인 지성적 형식의 궁극의 분야는 철학이다. 그럼 과학은 뭐냐. 과학은 직관적인 자료들로 구성된 인식의 집합일 뿐이다. 과학이 궁극의 경지로 승격되려면 자신의 영역을 떠나 철학에 편입되는 길밖에 없다. 그렇다면 역사는 뭐냐. 역사는 그 자신 속에 철학적(2단계적) 특징을 받아들이면서도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채로 남아있는 예술의 산물이다. 즉 1과 2의 짬뽕.     

6. <직관적 형태와 지성적 형태로 구성된> ‘이론적 정신’은 ‘실천적 정신’의 기초가 됨. 즉, 모든 앎은 행동을 위한 앎이다. 물론 이론적 정신이 과다한 햄릿유형의 인간이 있고 실천적 정신이 과다한 혁명가적 인간이 있을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정신은 이론에서 실천으로 이행됨. “인식적 활동이 선행하지 않는 한 결코 진정한 행위, 즉 의지된 행위가 될 수 없다.”

7.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어야 한다. 예술은 학문, 유용성, 도덕 등 모든 사회적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적이다. 그러니까 비평가들이 설령 악마적이고 반사회적이고 대중과 소통이 전혀 안되고 기존의 이론을 초월하는 초특급 예술작품을 만나더라도 왜 이따위 것을 만들었냐고 그 예술품 존재 자체와 작가의 실천적 의지(내용적인 부분)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형식이 불완전한 것을 가지고 비난한다면 또 모를까. (그러나 예술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소산이고 또한 그것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지 않을까. 물론, 크로체의 말은 도덕적 잣대나 대중과의 소통능력의 결여 따위가 예술을 구속할 수는 없다는 의미인 듯하지만. 예술을 위한 예술이어야 한다거나 직관적 지식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예술이라고 하는 걸 보면 크로체는 정말로 모더니즘 미학자인 것 같다.)  

8. 표현의 양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1단계에 해당하는 '표현'은 굉장히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에 '양태'라는 보편개념이 적용될 수 없다. 표현은 그 자체가 오리지날한 것. 그래서 수사학적 범주에 따라 표현들을 구분짓는다거나(ex. 이 표현은 사실적이네, 고전적이네, 장식적이네, 은유적이네 어쩌구) 이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번역한다거나 하는 일은 사실 엄밀히 따지면 무의미한 일이다. 특히나 수사학적 범주들은 학문이나 철학적 비평과 관련된 토론에서나 가치가 있을 뿐이지 문학과 예술 비평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  

9. 미적인 것은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인 것도 아니고 감각적인 쾌감을 주는 것도 아니다. 미적인 것은 순수하게 아름다운 것이다. (순수의 미학) 단, 이때 미적인 것은 반드시 표현된 것만 미적이다. (2번과 같은 주장. 크로체는 예술의 본질을 표현으로 여김)  

10. 미적 개념이란 그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 맘대로 규정되는 것이다. 미적 개념은 지극히 자의적이다.   

11. 미적 생산의 과정 4단계는 다음과 같다: (1)인상 (2)표현 또는 정신적이며 미적인 종합(이 단계가 핵심) (3)쾌락주의적 부수물, 혹은 아름다운 것에서 느끼는 즐거움(미적 쾌) (4)미적 대상으로부터 물리적 현상(소리, 톤, 움직임, 선과 색의 조합 등등)으로의 변환. 미적 재생산도 얼마든지 가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