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 - 예술의 최전선
진중권 엮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미술을 가리켜 이데아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활동으로 낙인찍는다. 미술은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한 현실 세계를 또 다시 모방하기 때문에 이데아로부터 떨어져도 한참이나 떨어진, 다분히 저급한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플라톤이 20세기 추상미술회화를 만났더라도 여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19세기까지도 가시적 외부 세계를 묘사하는데 충실했던 미술은 추상표현주의 화파의 등장 이후 비로소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미술은 더 이상 대상의 재현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고유한 대상이 된다. “미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추상회화의 포문을 연 클레가 남긴 말이다. 예술가는 이제 창조된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 자체를 모방한다. 

모사에서 창조로 나아갔던 근대 이후 회화미술의 흐름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갖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20세기의 사진과 영화가 실재를 모사한 가상으로서 기술복제시대를 열었다면, 21세기의 디지털 이미지는 실재와는 상관없이 자체 합성된 가상으로서 기술복제시대의 다음 단계인 '기술합성시대'를 열었다고 선언한다. 근대 회화미술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매체예술 분야에서도 동일한 방향의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기술복제시대의 사진과 영화가 모더니즘의 두 축인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을 낳았다면, 이 시대의 혁신적 매체인 디지털 이미지는 어떤 미학적 현상과 사조를 낳게 될 것인가. 이 책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러 미디어아티스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러한 의문을 풀어나가고 있다.  

첫 번째 인터뷰이로 등장한 로이 애스콧은 가상과 실재를 넘나드는 가변현실 속에서 21세기의 자아는 '생성적 이고 창발적'인 성격으로 변모한다고 말한다. 가상현실 속에서 새롭게 구축되는 자아는 '분열'이나 '상실'이 아 니라, '생성'과 '해방'을 의미한다. 이제 자아는 양자물리학에서 전자나 아원자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가상과 현실에 다중적으로 혼재한다. 또한 그는 가상현실이 종내에는 인간의 영적 세계까지도 담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이 단계를 '식물현실'이라고 정의하는 그는, 물리적 현실과 가상현실, 그리고 식물현실의 경계가 최종적 으로 무화되어 인간 의식이 이 세 가지 장(場) 사이를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상태야말로 기술합성시대의 인류가 도달해야 할 궁극의 지점이라고 말한다.  

반면, 사이버 페니는 가상현실을 다중자아 생성의 장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세계로 본다. 그에 따르면 가상현실을 비롯한 컴퓨터 기술은 그 사상적 토대를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두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과 심신의 통합을 추구하는 예술과는 도저히 맥락이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논리-수학적 기호체계, 보편성, 효율성, 최적성 등을 근본적인 가치로 하는 과학기술은 예술의 내재적 특질이나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와는 상극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미디어 아트 작업을 논하기 전에 미디어라는 기술이 그 도구적 적합성을 가지고 있는가, 과연 그것이 예술의 도구로 쓰이기에 적합한가 하는 점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한다. 

근대 문명도 겨우 적응해 가고 있는 처지에 첨단 기술문명에 대한 논의를 파악하려니 다소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인터뷰 대담이라는 형식이 주는 박진감 덕분에 주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재미있게 읽힌다. 특히 저자가 인터뷰어로 나선 챕터를 읽다 보면 문득 백분토론의 한 장면이 연상되기도. 일례로 컴퓨터 게임 기술의 가능성에 무한한 기대를 품고 있는 어느 미디어아티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로 나선 저자는, 비디오게임이 제공하는 모험의 기회들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당면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물질의 저항이 없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가짜 체험이 아닌가, 전쟁게임에 몰입한 학생들이 분절되지 않은 원시적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점은 오히려 시대를 퇴보한 듯이 느껴지지 않는가 등등 공격적인 질문을 연신 쏟아내는데, 이에 대한 인터뷰이의 답변도 질문 못지않게 체계적이고 적확해서 관전의 묘미가 상당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