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과 바람의 문명 - 동양편, 세계사 선생님 김지희와 함께하는 1001일간의 세계문명체험 1
김지희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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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행이란  항상 가슴설렘을 동반한다. 무엇을 보고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여행 역시 만남이다.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사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한 때 처음 문화사와 답사 공부를 시작할 때 각종 건축물의 양식이니 탑의 양식이니를 펼쳐놓고 열심히 외웠다. 답사를 가서도 각종의 양식들과 시대를 확인하느라 바빴다. 그러다 보니 늘 눈에 들어오는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들, 그리고 국보나 보물급에 해당하는 유명한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올 수 밖에 없다.(답사 초보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리라)

근데 시간이 흐르고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좀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건축물의 이름하나 탑의 양식하나 아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하랴.... 그 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가 궁금해진다.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흔적을 찾다보면 폐허로 남은 폐사지에서도 옛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고 건물의 기단부에 잘 보이지도 않게 조각되어진 바닷게의 그림이나 거북이의 익살스러운 조각들에서 옛 건물을 지었던 목수, 조각가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어떤 곳이든 그곳에는 거기를 살아간 사람들이 있다. 눈을 감고 유명한 사람이든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든 그 사람들의 삶의 내음을 맡았을 때 여행은 특히 답사 여행은 한층 즐거워진다. 이제 사람이 빠진 유물만을 보는 답사는 시들하다.

이런 사람을 만나기 위한 답사여행에서 역사 공부는 필수적이다. 물론 공부없이도 누구나가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인간의 면모나 느낌도 있지만 어느정도 해당지역의 역사를 공부하면 훨씬 더 여행의 즐거움은 커질 수 밖에 없다. 이제는 너무 많이 인용되어서 식상하지만 한 번 더 써먹자. '아는만큼 보인다'지 않는가?

나의 경우 국내는 여기저기 시간 날때마다 둘러다니지만 해외 여행은 몇년전에 중국 갔다온게 유일하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불가능하리라. 결국 아쉬움은 늘 쌓이고 이런 저런 여행서들을 뒤적이면서 간접 체험으로 만족할 밖에.. 그래도 언젠가는 나도 가리라는 오기 내지는 희망으로 여행서를 읽는 건 늘 즐겁다. 이 책은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부류의 사람-해마다 해외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여행기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책의 저자가 세계사 교사라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남들이 잘 가지 않는곳(폐허 외에는 남아있는 게 별로 없어서), 하지만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마르고 닳도록 얘기되는곳들이 많은 도판과 함께 실려있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난다 해도 가기 힘든 곳들이 많다. 또한 저자의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각 지역의 여행기와 그 지역의 역사가 상세하게 실려있다. 세계사 공부하는 고등학생들이 교과서 펼쳐놓고 같이 보면 참 좋겠다. 이 책을 굳이 분류하자면 여행서 중에서도 역사기행서라고 할 수 있을려나? 그래도 여행서이다 보니 딱딱한 역사이야기만이 아니라 여행 곳곳에서 만난 현재의 사람들과의 만남도 책의 재미를 살려준다.  여행을 가기전에 그곳의 역사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가장 간단하게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게 이 책이 아닐까싶다. 쉽고 평이하게 대략적인 지역의 역사를 유적, 유물들과 함께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여행에서 시대를 넘은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 준다고나 할까? (단 아주 깊이있는 수준의 역사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수준정도 -하지만 요즘은 고등학교에서도 세계사를 배우는 학교가 많지 않아 이마저도 낮은 수준이라고 얘기하기는 힘들것 같다)

두번째로 이 책의 장점은 저자가 선택한 여행지 자체에 있다. 세계 4대문명과 그리스 로마 문명의 발생지들을 모두 훑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 그리고 그리스 로마 -실로 아메리카 지역을 제외하고 세계 문명의 발생지들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여행서는 내가 알기로는 유일하지 싶다.

앞에 말한 두가지 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저자의 글솜씨가 그리 뛰어나지는 않다. 아주 성실하게 열심히 안내를 하고 있으나 독자를 확 끌어들일 정도의 입담이나 글솜씨를 보여주지 못한다는게 이 책의 한계다. 그리고 가끔 나오는 앞뒤없이 그냥 학생 기행문에서 흔히보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받아야 할 것같다"류의  감상들이 좀 거슬린다. 이건 저자의 필력의 문제일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다음으로는 세계사 교사라면 나름대로의 사관같은걸 가지고 있을 텐데 그런게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지나치게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자신의 관점과 잣대로 그 지역의 역사를 재해석하는 모습이 없다. 그러다 보니 그의 역사 서술은 꼭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같다. 이관점 저관점 다 뭉린킹?늘어놓는...... 나는 객관적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역사에서는 아주 싫어한다. 객관적인 역사는 없다.  객관을 가장한 역사, 그것은 항상 지배층에게 봉사하는 역사였다. 그래서 내가 동의할 수 있든 없든간에 나는 자신의 입장이 분명한 책을 좋아하게 된다. 저자 역시 자신의 사관이나 입장이 없지는 않을텐데 책 속에 그걸 제대로 녹여내지 못한 건 정말 이 책의 치명적인 단점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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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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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에 대한 이미지가 좀 가볍지 않나 싶어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본 소설이다. 근데 소재 자체가 우리나라 1900년대의 멕시코 이민사인지라 가벼울래야 가벼울수 없는 글이었다. 그러면서도 비슷한 소재가 나오는 아리랑처럼 이상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실제로 그랬음직하게 사람들을 되살려 놓고 있다.

이 나라에 제국주의 국가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던 그 시절, 이 땅에서도 못살아 멀리 남의 땅까지 갔던 사람들에겐 어떤 사연들이 있었을까? 다들 만만찮은 사연들이리라. 오죽이나 살기 힘든 시대였는가말이다. 그래도 이 책에서는 그 많은 사람의 사연을 구구절절히 다 풀어놓지는 않는다. 독자의 몫이다.

노예선같은 험한 항해를 마치고 그들이 도착한 멕시코 역시 그들의 꿈대로 신천지는 당연히 아니었다. 가혹한 기후조건, 노동조건하에 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다. 조선에 남아있느니만 못한 삶을... 그래도 그들은 살아낸다. 물론 조선에 남았더라면 살았을 삶과는 천지차이로 다르다. 그들의 성격만큼 다양한 삶들을 주인공들의 심리묘사를 통해 작가는 조심스럽게 이끌어낸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언뜻 등장인물들의 삶이 쉽게 이해 안되는 면이 있다. 가장 극적인건 역시 왕실의 후손인 이종도네 일가다. 아버지인 이종도야 전형적인 조선의 양반으로 산다. 끝까지 선비와 양반의 도를 얘기하면서 무능력하게 시대착오적이게.... 그러나 그외의 가족들 딸 연수는 이정이라는 고아소년과 사랑을 하고 그의 아이를 가지고 그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중인 역관 출신의 악덕 통역관인 권용준의 첩이 되었다가 다시 구한말 제대 군인인 박정훈의 처가되고.... 그녀의 동생 이진우 역시 살길을 찾기 위해 전혀 양반답지 않은 길을 택한다. 권용준에 빌붙어 스페인어를 배우고 그로서 출세의 길을 찾고... 가장 파격적인건 이들의 어머니인 이종도의 아내이다. 연수가 세월이 흐른 후 농장으로갔을 때 어머니는 마야인 감독과 결혼해있다. 조선의 양반하면 떠 오르는 이미지들하고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모습들이 그 때 양반이 어떤 의식의 소유자들인데 이런 타락을.... 차라리 자결을 했으면 했지라는 결론은 지나치게 성급하지 않을까... 인간의 기존 사고체계가 완전히 허물어지는건 쉽지는 않지만 한 번 무너지면 그 속력은 걷잡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군다면 삶에 대한 애착은 말해 무엇하랴? 이들에게 있었던건 살아남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으리라... 일단 그런 생각이 지배하고 나면 기존의 사고방식, 가치관은 쉽게 합리화된다. 그래도 이들의 삶이 더 눈물겨웠다.

소설속의 인물들의 삶이 약간의 거슬리는 비약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 예를 들면 이발사를 하다가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는 박정훈의 경우 -  주인공들의 심리를 따라가다보면 이해되지 못할 변신은 없다. 인간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그런것이 아닐까?

이 소설을 미학적으로 문학적으로 분석할 능력은 내게는 없다. 하지만 대담한 생략과 섬세한 주인공들의 심리묘사를 통해 독자의 몫을 많이 남기고 있다. 그들의 삶을 상상해보고 그 삶의 중간에 있었을 그들의 육체적 심적 고통들을 헤아릴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을 살다보면 단지 살아남는것만이 절대절명의 과제가 되는 그런 때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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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
허경진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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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좋은 책이란 사람의 냄새가 물씬 배어나는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들면서 이 책이 옛 사대부 집안의 생활과 그들의 생각, 삶의 자취를 밟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 했는데 전혀 아니였다. 이 책은 소대헌, 호연재 부부가 아니라 그 집안 곳곳에 남아있는 생활유물들이라 해야 옳겠다. 옛 사람들의 온갖 소소한 생활유물들을 정리해내고 찾아낸다고 참 정성과 노력이 많이 들었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저 옛 유물들의 자료집 수준의 책이다. 주인공 소대헌은 어떤 사람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삶의 자취가 남아있는게 없고 그저 연대기 수준의 글들만 나왔다. 그의 부인인 호연재는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인데 그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글들이 거의 없다. 책의 뒤편이나 중간중간에 그의 시들을 좀더 넣었더라면 훨씬 나았지 않았을까?

그래도 흥미있는 부분은 있었다. 이집에 전해오는 놀이문화들은 다른 곳에서 흔히 보지 못하던 것들이라 흥미있게 읽어졌다. '종정도'라는 놀이판이 있는데 말하자면 '벼슬 올라가는 도표'란다. 설명으로 보면 요즘의 브루마블 비슷한 게임인 것 같다. 주사위를 던져서 말을 진행시키고 가장 높은 벼슬까지 누가 먼저 올라가는가 하는 게임이란다. 게임중간에는 변수도 있어 파직이나 사약 같은 칸도 있었다니 흥미롭지 않은가? 그외에도 흥미로운 게임들이 나와 경직되어 있는 조선 사대부 집안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이 책을 읽고 나서의 아쉬움은 일본인 미야지마 히로시가 지은 '양반(강 출판사)'이라는 책을 보면서 채우는 게 좋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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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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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가 들면서 갑자기 집안의 족보니 문중이니 이런걸 챙기는 아버지를 보면서 의아해 했던 적이 있다. 구구절줄 묵은 옛날 얘기들을 끄집어내면서 족보를 잃어버리는데 누구 책임이 제일 컸다는 둥 명절마다 모이면 핏대를 올리는 집안 어른들, 살기도 빠듯한데 집안 족보에 제대로 이름을 올리기 위해 우리 집 형편으로 거금을 쓰는 아버지, 별 쓸데없는 일도 다한다 싶으며 혼자서  "아마 그 족보, 90%는 가짜일걸요. 그냥 우리 집안은 상놈의 집안이예요"라는 말만 웅얼거렸다. 그러다 안동권씨 집에 시집을 갔더니 이 집은 더하군. 오로지 양반출신 집안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에휴~~~ 좋은 전통인지 나쁜 전통인지 전통의 힘은 참 무섭다. 나도 더 나이들면 지금 어른들처럼 저럴려나... 그 오랜세월 다른 사회를 살아오면서도 참 질기게도 살아남는 것들, 족보, 가문의식, 제사, 아들욕심등(딸만 둘인 나는 지금도 친정아버지나 시댁 어른들의 아들 욕심에 하나 더 나을것을 당부받는다. 다행히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부모님들께서 더 이상 안 낳아도 된다고 해주는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한 몇년동안 소설을 안보다가 요즘 들어서 조금씩 다시 읽기 시작했다. 전에는 특히나 한국의 여성작가들이 자신의 신변잡기나 자기 경험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했던 얘기를 우려먹는다는 느낌이 많아서 좀 식상했었다. 그런데 오랫만에 본 한국소설들은 참 많이 나아가고 있구나 생각이 들어 즐거워진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소재의 폭이 참 넓어졌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변의 세계를 떠나 상상력의 범위가 확대되니 그 상상력을 따라가는 사람도 참 즐겁다. 이 책 역시 종가집이라는 흔치않은 소재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시대를 넘어 반복되는 비극을 그리고 있다. 마르크스가 얘기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종가집에 시집온 불행한 종부가 친정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글로 진행되는 과거는 너무도 가슴아픈 비극이다. 종손 아들을 낳을때까지만 하더라도 집안의 보물로 애지중지 귀함을 받던 며느리가 남편 죽고 종손아들마저 죽고나서 '집안이 잘못되는건 모두 사람이 잘못들어온 탓'이라며 시아버지의 눈밖에 나고, 뱃속에 있던 유복자마저 딸로 태어나자 딸은 종가의 대를 잇지못하게 되엇다는데 거의 실성하다시피 한 시아버지의 발에 밟혀 죽고 자신은 자결을 강요당하고....이런 과정들이 옛고어체에 실려 더욱 더 가슴을 아프게 한다.

현대에 이르면 주인공 조상룡의 할아버지가 옛 비정한 시아버지의 화신으로 나온다. 그는 망해가는 종가를 다시 일으켰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표인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손자 조상룡은 눈에 차지 않는 손자다. 친손자이기는 하지만 무엇 하나 특별난게 없고 결정적으로 그 출신이 자신이 인정하지 않은 혼인을 통해 난 손자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주눅들어 자란 상룡 역시 마음의 상처와 빈 구멍으로 가득찬 사람일 수 밖에 없다. 제대로 된 애정이라곤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그에게  맹몽적인 사랑을 주는 이가 부엌데기 정실이다. 정실이가 다리 병신에다 80kg이 넘는 거구에다 지독하게 못생겼으나 상룡에게 중요한건 그의 자아를 인정해 주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일게다. 이들의 관계는 당연히 할아버지에게 인정 받을 수 없고 소설은 비극을 향해 치닫는다. 그러나 과거의 비극이 시대적 한계에 갇혔던 사람들의 어쩔수 없는 행보로 순전히 비극이었다면, 현대에 이르러 상룡의 할아버지의 비극은 시대착오에 감금된 한 인간의 아집이 스스로 만들어낸 비극이라 아픔보다는 조소를 날리게 된다.

이 소설을 단순히 종가집이야기나 아들 선호사상에 대한 경종정도로 읽고 싶지는 않다. 모든 인간들은 모두 자신의 내면에 자신만의 집을 짓고 산다. 그 집은 너무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있어 왠만한 외풍에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을 아집이라 부르든, 독선이라 부르든....그런 독선을 외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될때는 누구나가 이렇게 비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리라..... 이 책을 나는 오히려 이런 인간성에 대한 성찰로 읽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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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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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 몇년간 역사학계에서 미시사 분야가 논의의 중점이 되면서 몇 가지 미시사적인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생활사에 대한 관심이나 그동안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대상들에 대한 복원 - 예를 들면 조선시대 여성의 내면과 생활을 탐구한 [향량, 산유화로 지다]나 전혀 역사적이지 못한(?) 흔한 말로 시정잡배들을 다룬 [조선의 뒷골목 풍경]같은 책들이 그것들이다. 이런 작업이 어떤 역사적 의의와 전망을 내올 것인가의 논의는 차치하고 또한 책의 수준문제도 일단 제껴두고 어쨌든 이런 시도가 우리 역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그리고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역사에 대한 흥미를 북돋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전문 역사 연구자가 아니라 대부분 국문학이나 한문학 쪽의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게 많이 아쉬운 점이다. - 이런 분야를 받아들이기에 우리 나라 역사학계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 [미쳐야 미친다]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이런 미시사의 한 시도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책이 서술하고 있는 대상들이 지나치게 유명한 인물들-정약용, 박지원, 허균, 박제가 등등-이고 글의 전개가 그들이 남긴 시나 편지글, 산문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미시사의 요건에는 떨어지지만 글의 내용이 여태까지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그들의 내면세계와 일상생활을 다룬다는 면에서 그러하다.

책의 내용은 어찌보면 심심하고 싱겁다. 책제목은 상당히 선정적인데 내용은 그리 쇼킹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조선시대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근엄한 선비로 그려지는-이 곳곳에서 깨지는 경험은 참 신선하다. 거기에 이 책의 진짜 재미가 있지 않을까?

책은 총 3부로 나누어진다. 1부는 뭔가에 미친 사람들이다.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 - 어느 하나에 미칠정도로 몰두해야만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이 제목만으로는 그야말로 진짜 우리가 아는 유교 경전에 미친 선비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글에서 사람들이 미친건 참으로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사소한 것들이다. 꽃에 미친 김군, 표구에 미친 방효량, 벼루에 미친 정철조, 담배에 미쳐 연경(煙經)이라는 책까지 낸 이옥,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고 비둘기 사육에 미쳐 책까지 남겼다는 홍대용은 뭔가?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는 매니아 문화가 조선 후기에 벌써 유행이었다니! 이 장에서는 그래도 가장 마음에 남는건 독서광이었던 김득신이라는 이의 이야기다. 사람이 정말 모자라고 아둔해 -흔한 말로 머리가 무지 나빠 - 공부를 해도 안되자 책 하나를 최소 1만번 이상 읽는 엽기적인 노력을 한다. 더 엽기적인건 그 읽은 횟수를 일일이 세고 있다는 거다. 그럼에도 거의 잊어먹고 곳곳에서 실수를 연발하는 그의 모습은 포복절도하게 하지만 그런 무식한 노력으로 일가를 이뤄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그의 모습은 우리를 주눅들게 하는 역사속 천재들의 모습에만 익숙해져 있던 우리에게 신선한 느낌과 한편 통쾌한 느낌까지 준다.

2부는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교우관계에 대한 글들이다. 풍류라는 말은  조선시대 양반의 허위의식을 대변하는 것 같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글의 사람들은 진정한 풍류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 이 장이다. 허균, 정약용, 홍대용, 박지원 등 이름만 대면 한국인 누구나가 아는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가장 즐겁게 읽은 부분은 역시 박지원이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글들이다. 박지원의 글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전형적인 글과 참 다르다. 정약용의 글들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느낄 수 있는데 분위기가 정말 다르다. 정약용의 글들은 거리가 있다. 그는 조선시대인이고 나는 현대인이라는 거리를 확실히 느끼게 한다. 그러나 박지원의 글은 그와 내가 같은 자리에서 지금 얘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의 이미지가 박지원에 와서 확실히 깨진다. 그래서 박지원의 글들을 읽으면 즐거워진다. 돈좀 꿔 달라는 내용의 글이나 친교를 청해오는 사람에게 '나는 너랑은 같이 놀기 싫어'라는 내용의 글들을 어찌나 천연덕스럽게 하는지, 어찌 이런 표현이 가능한지 감탄할 따름이다. 또한 홍대용과 그의 벗들이 벌이는 음악회는 그대로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낸다.

3부는 앞의 글들에 비하면 약간은 어려운 편이다. 일상속의 깨달음이라는 소제목이 얘기하듯 일상에서 만난 어떤 소재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주장과 신념을 펼치기에 그렇다. 앞의 글들과는 갑자기 주제가 달라진 듯하여 약간은 어리둥절하고 또 그리 혼쾌히 공감이 가는 것도 아니어서 그들은 다시 고정관념속의 조선 선비로 돌아간다.

사실상 옛 글들은 그 고어체와 유교경전에서 따온 갖가지 구절과 고사성어들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쉽게 읽어내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런 글들에 대해 저자는 참 친절하다. 언뜻 이해가 안가는 글들은 참으로 쉽게 해설해줘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 덕분에 나같은 문외한도 옛 글과 옛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터이다. 책을 읽는 내내 즐거운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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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1-20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산지 한참 됐는데 책장에 콕 박혀 있거든요.
바람돌이님의 글을 읽으니 읽고 싶어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