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출근 길 비가 약간 왔지만 뭐 이정도면 괜찮다 싶어서 오늘 도 걸어서 출근
그런데 비오는 날의 풍경은 새롭고 또 예쁜데 사람은 거의 없네....
뭔가 좀 낭만적인 느낌의 출근길이다. (도착하니 오늘 지각자 속출, 차 엄청 막히는..... ㅎㅎ)
아무도 안 밟은듯한 저 벚꽃잎들을 사뿐히는 안되고(몸무게 때문에) 어쨌든 즈려밟으며 걷는 기쁨. ㅎㅎ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을 어제 다 읽었는데 동일한 주제아래 여러 필진들이 글이 모인 책이다.
그러다보니 글마다 편차가 좀 많은건 흠이지만 또 좋아하는 이라영샘과 정희진샘의 글은 역시 너무 좋았다.
특히 이런 구절들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이다. 다시 말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이다. 다양한 시선이 경합하지 않고 하나의 시선이 지배할 때 우리의 인식은 축소되어 편협함을 벗어나기 어렵다. (6쪽, 이라영)
소수자들의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는 해석하는 위치를 점령한 주류 서사에 균열을 내는 저항 행위다. (16쪽, 이라영)
작품의 내용은 네 가지 측면에서 진부하다. 첫째, 인간의 조건인 '일상의 노동'과 '초월성'을 대립시킨다. 초월성은 노동을 부정하는 부정의이자 젠더화된 언설의 대표적 관념이다. 둘째, 초월적 인간이 되려는 강력한 동기가 경제력을 가진 여성에 대한 분노와 '일하는 여성=구차한 현실'이라는 성차별에서 나온다. 셋째, 여성의 도구화로 이를 재현한다. 마지막은 일제시대라는 배경을 강조하며 <날개>를 '지식인의 고뇌'로 읽는 천편일률적 독해다. 읽기의 진부함이다. 식민지 시대에는 지식인 남성만 고통스러우가? 게다가 <날개>의 남성 주인공이 살아가는 방식과 목소리는 어느 시공간에나 존재한다. - 186쪽, 정희진 -
내가 갖고 싶은건 세상을 제대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언어이고, 그 언어를 이분들이 내게 준다.
그래서 나는 내게로 오는 말이 얼버무리거나 우회하지 않고 용감하게 직진해오기를 바란다.
그 직진 또한 엄청난 용기임을 안다.
언어가 분명할 수록 그것은 그 만큼의 책임을 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이 용감한 언어와 문장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