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에 쓰여진 이 책에서 말한다. 오늘날 강간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 가운데 인종주에에 빠진 작가들이 아주 많다고.

인종주의에 기반한 흑인 강간범 신화와 흑인여성의 성적 문란이라는 테마는 사실상 오늘날 한국사회에 사는 우리들이 보기에는 정말 말도 안돼서 대꾸할 가치도 없어보이는데 미국사회에서는 20세기 말까지도 그 힘을 잃지 않고 통용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어떤 사회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논리가 전혀 논리적이지 못하고 거짓일뿐인데도 그 사회에서 그 논리가 통용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흑인을 위한 린치는 흑인 강간범 신화로 인해 당연시되고 강력한 추진력을 얻게 된다. 더 많은 흑인 남성들이 죽임을 당하고 더 많은 흑인 여성들이 백인에 의해 강간을 당한다. 그리고 교회는 그에 대해 "하나님은 강간 살인은 용서해도 인종혼합은 용서하시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학교에 등교하는 어린 흑인 여학생이 경찰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까? 이것을 단지 인간의 본성이 악한 것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이 뒤에는 남부의 경제를 식민화하고 흑인 노동력의 야만적인 착취를 유지함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북부의 자본가들이 있다. 또한 이 자본가들은 자본가를 향한 백인 노동자의 적개심을 흑인 노동자들에게 돌림으로써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지킨다. 그러면 이 평범한 가난한 백인들은 왜 자본가가 아니라 흑인들에게 분노의 돌팔매를 던지는가? 한 때 인간의 근본적으로 이성적이고 따라서 논리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설득하면 억압적인 세계의 파괴를 위해 싸우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가 당연히 오리라고 생각했다.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바로 이 이성과 합리의 세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실제 세상과 인간의 마음은 늘 이런 이성과 합리의 세계를 비웃듯 다르게 흘러간다. 다른 사람을 때리면 안돼. 괴롭히면 안돼라는 이런 명제가 뭐가 어렵지? 너무 당연한거잖아. 그런데 세상에는 왜 이런 일이 끝도 없이 일어나는거지? 사람과 세상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생각이 빠트린 것은 무엇이지? 


 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전방향적인지도 잊지 말아야 한다. 흑인 강간범 신화는 흑인 여성의 성적문란함이라는 쌍생아를 낳고 흑인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정당화했다. 또한 공포를 작그하는 린치라는 행위는 그 자체로 남성의 지배를 강화하는 역할을 해 가부장제를 강화시킴으로써 흑인여성뿐만 아니라 백인여성을 억압하는 도구도 되었다. 그리고 앞에 말했듯 가난한 백인 남성 노동자들에게는 자본가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흑인에게로 돌리는 역할까지 말이다. 사실상 이중 무엇이 가장 중요한 영향이고 결과인가는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다. 모두가 중대한 있어서는 안되는 폭력이다. 그들이 전방위적이라면 그들에 대한 싸움 역시 전방위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약자에게 필요한건 공감이고, 그 공감에서 나오는 연대이다.  너무 식상한 결론이지만 연대 없이는 싸움의 승리가 없는데 어떡하라고.....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쟁점이 되었던 이대남과 이대녀의 대결구도는 정말로 그들의 대결인가? 그 대결을 공론장으로 이끌어낸 이들이 따로 있지는 않은가? 노동시장을 자본의 입맛에 맞게 조정하려는 의도와 맞물려있지는 않은가? 사실상 역사는 늘 반복되는데 본질은 그대로이고 겉에 걸친 옷만 갈아입을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속는다. 나의 눈을 가리는 그 속임수에서 어떻게 탈피하고 길을 찾을 것인가?


  분명히 무조건적으로 옳아보이는 어떤 운동이 처지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배운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임신중지권은 당시 백인 여성들에게는 당연히 쟁취되어야 할 여성의 권리였지만, 수많은 흑인여성들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많은 흑인여성들은 자신이 처한 비참한 사회적 경제적 환경에 의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들에게 더 절박한 것은 자신의 아이를 낳고자 욕망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었던 것이다. 흑인여성들에게 또는 가난한 백인 여성들에게 더 절박한 것은 임신중지권이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재생산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둘은 대립되는 생각이 아니다. 그러나 당대 페미니스트의 임신중지권 요구가 이런 흑인 여성들의 처지를 공감하고 이해하지 않는 한 이 두 세력이 함께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이 1981년작이라는 것을 떠올리는건 책의 마지막 장에 가서이다. 여성해방의 전제 조건으로서 가사노동의 문제를 다루면서 작가는 가사노동을 사회화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렇지만 오늘날에 와서 보면 가사노동의 수많은 부분이 사회화 되었지만 그럼에도 가사노동은 여전히 여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예를 들면 내 어머니 세대에서 육아는 사실상 젖먹이를 벗어나고 나면 끝나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그냥 큰다고....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까지 돌봄은 지속된다. 그 돌봄이 끝나고 나면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인하여 부모세대에 대한 돌봄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 돌봄노동까지 포함하는 가사노동의 끝을 어디까지 사회화할 수 있을지, 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아직 정확한 답변을 내리기 어렵다. 또한 작가가 독점자본주의의 타도와 사회주의로 완전한 여성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것 역시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은 이왕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 역시 시대적인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뭐 어쩔 수 없다.



책을 덮으면서

  오랫만에 진짜 꼼꼼하게 책을 읽었고,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들을 대부분 정리했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따로 쓰지는 않을 듯하다. 미국의 인종차별의 역사와 여성운동의 역사를 교차시키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리는 결론은 역시 해제에서 정희진샘이 말했던 공감의 연대이다. 역사상 수많은 진보와 인권을 위한 운동들이 나의 문제와 타자의 문제를 구별하지 못하고, 심지어 타자를 계속 타자로 던져두는 억압을 인지하지 못함으로써 실패해왔다.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실패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사회에서의 타자들은 누구인가? 여성, 20대 젊은이들, 이주노동자와 여성들, 장애인들, 성적소수자들...... 기준을 어디에 갖다대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이러한 타자들의 연대는 나와 당신의 공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역시 변함없는 진리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3-02-17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본질은 그대로이고 걸친 옷만 바꿔 입는다‘는 바람돌이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입장차에 연대가 절실한데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은 그 연대가 깨지는게 이득이란걸 너무 잘 알기에 갈수록 교묘하게 갈등을 조장하죠. 완독 수고하셨어요!
저는 이 책 인종주의와 성차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서 특히 좋았어요^^*

바람돌이 2023-02-17 22:53   좋아요 1 | URL
저도 인종주의와 성차별이 만나는 지점과 그 둘이 어긋나는 지점들을 보고 그걸 또 오늘 우리 현실과 비교해서 생각해볼 수 있어 좋은 독서였어요.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제 생각의 폭을 넓혀갈 수 있다는게 너무 좋은거 같아요. 물론 또 이런 책을 읽고 바라보는 현실은 너무 갑갑해서 속이 터지기도 하구요. ㅎㅎ

책읽는나무 2023-02-17 2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언뜻 듣기만 하고, 깊게 생각해 보지 못한 흑인 여성들에 대한 성차별과 인종차별에 대해 읽으며 왠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그리고 바람돌이님의 리뷰도 쏙쏙 날카롭게 읽힙니다. 공감이 결여된 연대는 쓸모가 없습니다. 공감이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마지막 문구를 기억하겠습니다.

바람돌이 2023-02-17 22:54   좋아요 1 | URL
저도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결합되는 순간이나 같이 싸워야 할 사람들이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과정같은걸 제대로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날카롭게 읽으시고 나무님의 날카롭고 예술적인 100자평도 기대합니다. ^^

은오 2023-02-17 22: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은 왜 웃기시면서 정리도 잘하시는거죠 제발 하나만해주세요ㅠ

바람돌이 2023-02-17 23:00   좋아요 2 | URL
그럼 웃기는 쪽으로.... 제가 항상 꿈꾸는 사람이 웃기는 사람입니다만..... ^^

그레이스 2023-02-17 23: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사노동의 사회화!
제가 심각하게 생각해왔던 부분이예요.~

바람돌이 2023-02-18 00:09   좋아요 2 | URL
집안일하는 여자 치고 이거 생각안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 책에 보면 그런 장면 나와요. 집안 청소를 전문 청소노동자들이 와서 해주는거죠. 그들은 그걸로 임금을 받고 여기에 드는 비용은 사회복지 정책으로 국가 지원이 되어서 아주 가난한 노동자도 쉽게 서비스를 이용하고요. 아 진짜 제가 원하는바입니다. 그리고 우리집앞에 3시세끼 밥해주는 곳 있으면 진짜 좋겟어요. ㅎㅎ

희선 2023-02-18 0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깊이있게 잘 보셨군요 모두가 좋은 걸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런 것도 생각해 봐야 할까 싶기도 하네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보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다르겠습니다 모두를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람은 그러기 어렵기도 하네요 다른 것도 보게 해주는 게 이런 책이겠습니다 책도 한쪽으로 치우칠 때 있겠지만... 그런 것도 볼 수 있어야 할 텐데 싶네요


희선

바람돌이 2023-02-25 12:08   좋아요 0 | URL
오랫만에 꼼꼼하게 책읽기를 한 것 자체가 저에게는 또 좋은 일이었습니다. 공부하는 느낌으로 약간 자아도취랄까요? ㅎㅎ 그리고 모든 책은 어차피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제대로 판단하고 나의 입장을 찾는 것이 중요한거겠죠. 항상 관심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