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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ㅣ 정희진의 글쓰기 4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평점 :
글은 사람의 결과다.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26쪽
정희진선생님의 책을 읽다 보면 결국 내가 어떻게 삶을 사느냐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내 글을 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나의 글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나 스스로가 나라는 인간을 어떻게 만들어왔는가를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같은 영화를 봐도 흔히 말하는 꽂히는 부분은 다 다르다. 그것이 당연하다. 우리들은 모두 다르게 각자의 자신을 만들어왔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모든 세계관, 담론은 부분적 세계관이다. 페미니즘이든 마르크스주의든 모두 부분적 세계관이다.(50쪽) 이것은 앞으로의 내 삶을 어렵게도 쉽게도 만든다. 거대담론 하나로 세상을 설명하는 것은 어찌보면 참 쉽다. 대충 끼워 맞추다보면 맞아 들어간다. 그럼 개인은 그 거대 담론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면 된다. 그것이 훌륭한 삶이라고 자위할 수 있고, 그래서 뿌듯한 삶을 산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20 대와 30 대가 그렇게 달려간 삶이다. 그러나 늘 세상은 그렇게 달려가는 나에게 아닌 장면들을 보여줬고, 그것은 혼란이기도 했고 좌절이기도 했었다. 사회의 진보가 그 구성원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았고, 경제적 부의 성장이 평등의 실현으로 나아가지도 않았다. 심지어 평등을 말하던 사람들이 그 구성원들조차도 억압하는 모습을 무수히 봐야했다. 그속에서 느껴야 했던 혼란과 좌절이 요즘에 와서야 좀 메꿔지는 기분이다. 정희진선생님의 책을 읽다보면 그렇다.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쉽게 말하던 것들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역지사지가 그렇다. 쉽게 다른 입장에서 생각해봐라고 하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여기지만 그렇다면 세상에 그 많은 부조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 나의 그 수많은 고민들 - 인간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생긴 - 역시 세상 사람들이 나와 같을 것이라는 희망때문이었음을 깨닫는다. 전장연이 아침 출근길의 지하철 시위를 한다. 그들은 정권과 싸우는 것보다도 더 지하철로 출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각과 더 싸워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왜 역지사지하지 않는걸까? 이렇게 물으면 답이 없다. 그것은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각자가 딛고 서있는 땅, 존재의 근거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고,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저쪽 장애인의 땅으로 건너가지 않을거라고 암묵적으로 믿는 것이다. 타인의 일이고, 소수의 일이고, 소수가 다수의 불편을 초래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역지사지는 존재를 옮기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그러면 우리는 희망이 없는가?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정말로 역지사지를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해야 한다. 공부는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므로......
모든 공부와 앎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시각이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은 결국 내가 나의 계급적, 성적, 개인적 한계들 때문에, 또는 개인적 욕망 때문에 무엇을 보지 못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배제된 사람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다. 정희진선생님의 책을 읽는다는건 바로 이런 것들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는 것은 굉장히 큰 기쁨과 고통을 함께 동반한다. 나의 한계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로 인해 맞게 되는 다른 지점은 나에게 새로운 인식의 차원을 열어주는 것이다.
나는 영화나 책을 집중해서 보지만, 완전히 믿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노력하는 편이다. 본 것이 지식으로 자리잡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앎은 기존의 앎을 비워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 148쪽
영화든 책이든 어떤 부분에 내가 반응을 보이고 꽂히는가는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끊임없이 내가 올바르게 반응하고 있는지, 지금의 내 위치는 바른 위치인지 돌아보고 점검해야 한다. 그것이 공부의 의미라는 것을 이 책이 내게 가르쳐준다. 설사 이 책이 그런 의미가 아니어도, 이같은 결론이 나의 오독이라 하더라도 나의 결론이 내 삶을 좀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