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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 인코그니타 - 고고학자 강인욱이 들려주는 미지의 역사
강인욱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평점 :
오래 전에 일제 식민지 시대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란 대목이 있었다.
방랑벽이 있던 아버지는 툭하면 집을 나가 방랑을 했는데 그것이 만주로 간다고 했던가라는 대목이나, 그 시대 여학교의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만주로 떠났다는 대목이었다.(그게 무슨 책이었는지는 기억이 안나니 안타깝다)
그순간 우리 국토가 대륙과 이어져 있던 시기에 살던 사람들의 공간 개념과 섬이 아니면서도 딱 섬이 되어버린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간감각이 얼마나 다를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었다.
또한 그런 공간감각의 차이가 실제 세계와 역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이 책 <테라 인코그니타>를 읽으면서 예전의 저 생각이 다시 들었다.
길은 이어져 있고 그 길을 통해 수많은 사람과 물자와 생각들이 끊임없이 흘러갔을텐데, 1990년대 초반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되기 이전의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섬처럼 단절되어 어디로도 갈 수없는 고립된자로 살았었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인식에서 넓은 세계를 교류의 흐름속에서 파악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조건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사실상 역사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놓치고 살았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말이다.
물론 그러한 오류가 우리 자신만의 지리적 입장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세계사 교과서는 선사시대가 끝나면 세계 4대문명부터 시작된다.
그 4대문명론에 대해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이 책은 시작된다.
4대문명론은 20세기 초반 제국주의가 전세계를 활보할 때에 만들어졌다. 문명이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발달했고 나머지 지역은 미개하게살았다는 생각은 몇몇 선진국들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우리의 선입견을 깨부수는 후기구석기시대의 유적이 여럿 발견되고 있다.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1만 5000년 전에 만들어진대형 신전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 유적과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2만년 전의 토기가 대표적이다. - P22
4대문명을 배우다보면 마치 그 곳 외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고, 문명이 없었던 것처럼 저절로 인식이 흘러간다.
그런데 이것이 제국주의시대와 함께 만들어졌다는데서 갑자기 아!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결국 우리 자신에게 주어졌던 공간적 한계와 제국주의국가들에 의해 편협하게 그어졌던 인위적 경계가 우리의 역사인식을 국가 영토내로 한정하거나, 세계사적 인식에 있어서도 국가별 지역별 인식으로 한정해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교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의 한계를 가지게 되는데 교류를 끊임없는 흐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절된 행위의 반복으로만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이런 역사인식의 문제는 무엇일까?
국가별 지역별로 동떨어져서 인식하는 역사인식에서는 불가피하게 나와 타자라는 구별이 먼저 전제되게 된다.
나 이외의 것은 타자가 되고 그 타자는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테라 인코그니타(미지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교류와 흐름과 영향이 먼저가 아니라 나와 타자의 구별이 먼저 전제되면 거기서부터 나라는 주체에 대한 과도한 선긋기와 집착이 시작되겠구나싶다.
나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긍지를 가진다는 것은 분명 아무 문제없는 절대명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많은 경우 타자에 대한 배제로 흘러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나와 타자 사이의 선긋기가 전제되는 역사를 우리는 계속 배우고 익혀온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이상할 정도로 심각하게 왜곡되어 나타나는 인종차별, 난민문제에 대한 히스테릭한 반응의 원인이 물론 하나는 아니지만 이런 우리의 역사인식의 한계가 중요한 원인일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와 함께 여태까지 변방으로 여겨졌던 만주와 시베리아와 남미대륙의 역사를 종횡무진 달리면서 우리 역사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독서였다.
또한 민족의 틀에 갇혀있는 역사교육을 교류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역시 내게는 중요한 시사점이었다.
누가 뭐라고 한계를 짓든 실제 역사는 무수히 많은 교류의 흐름속에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며 그렇다면 우리가 그 흐름을 파악하면서 배워야 하는 것은 결국 배제가 아니라 함께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