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를 위한 나의 첫 고전읽기 수업 나의 첫 수업 시리즈
박균호 지음 / 다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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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보면서 굉장히 인상깊었던 대목이 있었다.

 

엘릭스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다면, 에이드리언은 카뮈와 니체를 읽었다. 나는 조지 오웰과 올더서 헉슬리를 읽었다. 콜린은 보들레르와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 어디까지나 도식화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렇다. 당연히 우리는 허세덩어리였다. 달리 청춘이겠는가. 우리는 '벨탄샤웅'이니 '슈투름 운트 드랑'이니 하는 용어를 즐겨 썼고, '그건 철학적으로 자명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상상력의 첫번째 의무는 위반하는 것이라고 서로에게 다짐하듯 확언했다.......그래서 콜린의 어머니는 내가 당신 아들의 '어둠의 천사'라고 여겼고, 우리 아버지는 내가 <공산당 선언>을 읽는게 엘릭스 탓이라고 했고, 엘릭스의 부모는 콜린이 미국 하드보일드 범죄소설을 읽는다고 콜린의 부모에게 일러바쳤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솔직히 시시껄렁한 그냥 흔한 영국의 고등학생들이다.

이들이 무슨 특별한 엘리트 학교(우리로 치면 각종 국제고나 자사고들)를 다니는 아이들이 아니란 얘기다.

나머지 이들의 대화를 보면 우리 나라 고등학교 애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들은 허세를 정말 제대로 부릴 수 있는 아이들이다.(청소년기의 독서는 원래 허세로 시작한다. 나도 그랬다.)

철학과 고전으로 허세를 부리는 고등학생?

너무 멋지지 않은가 말이다.

이 책의 이 대목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우리 고등학교 아이들 중에서 철학이나 고전에 대한 이야기를 저렇게 낄낄거리고 얘기하면서 허세를 부릴 수 있는 아이들이 몇이나 될까?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도 나의 독서 허세를 받아줄만한 친구를 주변에서 찾기는 정말 어려웠다.

지금도 전교에 한두명쯤 있을까?

특정 분야에 덕후들은 제법 있지만 철학책을 읽고 질문하는 아이는 여태까지 딱 1명 만났다. 작년에.....

(너무 반가웠다. 특히나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줘서 속으로 무척이나 고마웠다. ^^)

 

영국이나 유럽의 교육은 저런 철학이나 인문학, 고전에 대한 이야기를 저렇게 막막 농담으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걸까?

유럽의 대학입시 자격시험을 생각하면 그럴법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수업시간에 끊임없이 저런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저렇게 자연스럽게 대화가 나오기는 힘들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이 반가웠다.

독서교육에 대한 중요성은 늘 이야기되고 새로운 방법들이 시도되고 하지만, 결국 입시와 부딪히면 다 부질없는 게 되어버리고 마는 우리 현실속에서도 그래도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말이다.

입시교육의 아성은 너무도 단단하여 무너지기 힘들지만 그것이 무너져야만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

구조를 바꾸기 위한 노력과 그 구조의 틈을 벌리기 위한 작은 노력들은 같이 가야 한다는것이다.

 

청소년이 어떻게 고전을 읽을 수 있을까를 제시하려면 일단 힘을 빼야 한다.

고전이라는 말이 주는 어렵고 심각하다는 느낌을 빼야 한다.

생각해보자. 안 그래도 어깨힘 빡 주고 큰 결심해야 고전이라걸 읽어볼까 싶은데 그 고전을 소개하는 책조차 무겁고 엄숙하다면 지레 겁먹는게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정말 힘 빼고 읽어도 된다.

 

고전에는 이렇게 인간과 사회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이 담겨있습니다. 그 통찰이 당대 사회의 모습만 보여 주는 게 아니라 미래사회를 예견하기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인간은 행복과 자유를 추구했고 선과악을 품고 있었습니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항해사들의 모습이 요즈음 직장인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며, 그러한 인간의 모습은 먼 미래에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 P5

 

 

인용문에서 앞의 말들이 심각하지만 뒤의 예는 살짝 힘을 빼준다.

야 너희들이 직장 다니면 그냥 노예처럼 일하게 되는거야. 아빠 엄마 봐. 직장의 노예처럼 살고 있잖아. 뭐 이런 말을 하는 듯하다. 실제 본문에서는 이런 고전에 대한 힘주기와 힘빼기가 적절히 뒤섞여있다.

다른 말로 하면 고전을 읽음으로서 느낄 수 있는 허세의 기쁨과 평범한 나의 삶과의 연결로 인해 가질 수 있는 친근함을 적절하게 섞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어떤 책은 어떤 아이들에게는 배신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함정이 있지만.... 예를 들면 장 그르니에의 섬이나 루소의 에밀, 다윈의 종의기원, 아 이런 책은 고전이 재밌다고 했던 작가를 향해 돌을 던지고 싶어질지도..... ^^)

 

이런 고전과 삶의 연결의 예들을 들어보자.

<레 미제라블>을 통해 빈곤을 대하는 태도와 난민 문제의 연결, 안톤 체호프의 단편 <내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계속된 논쟁거리 중 하나인 사형제도의 존치 여부에 대해 묻는 식의 사회문제와의 연결이 1부에서 진행된다.

2부에서는 자연과의 공존을 묻는데 장 그르니에의 <섬>의 에피소드 한꼭지와 유기동물 안락사 문제를 연결시키고, <종의 기원>을 동물 복지 문제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집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아이들이 많은걸 생각해보면 이런 꼭지를 읽으면 저 책들을 읽고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3부와 4부에서 역시 다양한 고전들과 다양한 삶의 양태들을 연결시키려 시도하고 있다.

물론 이런 모든 연결이 완전히 적절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오셀로>에서 주인공 오셀로의 부인과 스마트폰을 필요불가결하다는 점 하나로 연결하는 건 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책은 고전의 심오함을 가르쳐주려는 책이 아니라 청소년이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고전에 접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일종의 실용서다.

따라서 힘빼기는 무엇보다 중요하고, 책이 가볍다고 느껴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힘빼기를 위한 노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 아이들이 고전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이 일단은 중요하지 않겠나말이다.

그래야 좋은지 안좋은지를 알지.....

요즘 책하고는 담쌓기 하고 있는 우리집 큰 딸에게 슬며시 이 책을 밀어넣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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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5 0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6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21-02-1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스 저 책 읽은 거 같은데 왜 어째서 기억에 없을까요 🤔 따님에게 추천하신다니 제가 먼저 읽고싶어졌어요

바람돌이 2021-02-16 00:27   좋아요 0 | URL
그런 책이 한두권이 아닙니다. 저 책은 오래 전에 읽었는데 저 대목이 저에게는 너무 강렬했어요. 저 대목 찾는다고 책을 다시 뒤적였는데 내가 읽은 책인지도 가물가물하더군요. ㅎㅎ

stella.K 2021-02-15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균호님 팬이 되가시는 것 같습니다.ㅎㅎ

바람돌이 2021-02-16 00:28   좋아요 0 | URL
좋은 작가의 팬은 행복의 한 방법이죠. 그런 의미에서 전 점점 행복해지는거 같아요. ㅎㅎ

초딩 2021-02-15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아주 좋은 예 같습니다.
생각의 탄생처럼
고전을 읽다 각 고전이 연결되어 통찰이 생기고 이 것이 지식을 습득하는 아이들에게 내면의 눈을 뜨게 해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바람돌이 2021-02-16 00:29   좋아요 0 | URL
아이들이 고전까지는 아니라도 책좀 읽었으면 좋겠는데 참 어렵네요.

cyrus 2021-02-15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분야는 달랐어도 독서를 좋아했던 고등학교 친구 한 명이 있었어요. 그 친구는 한국사와 판타지 소설을 좋아했어요. 그때는 판타지 소설을 왜 읽느냐고 구박한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그저 재미있어서 보는 거라고 대답하면서 웃고 넘어가더라고요. 도서관에 같이 가면 저를 위해서 자기 회원증 카드로 책 몇 권 빌려줄 정도로 정말 착하고 좋은 친구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녀석도 저랑 비슷한 덕후 기질이 있었을 같은데, 대학교에 다닌 이후부터 연락이 끊어졌어요. 만약 그 친구가 지금도 독서를 좋아하고, 저랑 계속 연락하면서 만나고 있다면, 과연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궁금해요. 그 녀석이 제가 서평을 쓰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궁금하고요.

바람돌이 2021-02-16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마 그 친구분은 여전히 책을 좋아하고 읽는 책의 범위는 더 깊어지고 넓어졌을 테고요. cyrus님이 그러듯 가끔 cyrus님을 떠올리며 그 친구는 지금 뭘 읽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