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정치학의 아포리아: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


  그렇다면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스피노자 정치학의 문제 또는 대상은 어떤 것인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는 대중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의 1부에 수록된 {스피노자와 정치}에서부터 2부의 「스피노자, 반오웰」이나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는 개념은 발리바르가 스피노자 정치학을 해석하는 가장 중심적인 개념으로 작용하고 있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는 개념은 사실은 스피노자가 고대 로마의 역사가였던 타키투스의 {연대기Annales}에서 따온 “[대중들은] 공포를 느끼지 않으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Terrere nisi paveant”는 문장에서 유래하는 것이다(스피노자는 {정치론} 7장 27절과 {윤리학} 4부 정리 54의 주석에서 각각 한 차례씩 이 표현을 인용하고 있다). 이처럼 스피노자가 불과 단 두 차례 사용한 표현에 불과하지만, 발리바르는 이 문장, 또는 이 문장을 통해 표현되는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는 개념이 스피노자 정치사상의 이론적 핵심 및 그것이 내포하는 근본적인 아포리아를 드러내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중적 공포야말로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온전한 민주주의의 구성 불가능성을 보여주며, 더 나아가 근대 정치학에서 전개된 민주주의 개념 자체의 아포리아를 집약적으로 표현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발리바르는 네그리와 갈라지고 있다. 

  네그리는 1981년 {야생의 별종}이라는 스피노자 연구서를 출간함으로써 스피노자 연구에 일대 전환점을 마련해주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정치론}에 나오는 물티투도multitudo 개념, 또는 국내 네그리 연구자들의 번역을 따른다면 “다중” 개념을 스피노자의 정치학, 더 나아가 스피노자 철학 체계의 핵심 개념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이 다중 개념에서 초월적ㆍ법적 매개 없이 스스로 자신의 생산적ㆍ정치적 역량을 구성하고 표현할 수 있는 정치적 존재론의 토대를 발견한다. 곧 이 개념은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을 저술하면서 경험한 현실의 정치적 세계, 다중의 상상적 역량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그 이전까지의 초월적 형이상학을 포기하고 그 대신 다중 자신의 자발적인 구성의 역량을 표현하기 위해 제시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는 이 개념이 스피노자 사상의 단절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근대 정치사상에서 가장 대담하고 가장 완성된 해방의 존재론의 기초를 제공해준다고 간주한다. 네그리에 따르면 다중은 자율적인 집합적 주체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반대로 발리바르는 1982년에 처음 발표된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라는 논문에서 물티투도, 또는 발리바르 자신이 제시한 번역어에 따르면 “대중들masses”이 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 개념이라는 점에서는 네그리에 동의하지만, 이 개념의 중요성은 이중적 측면에 있다고 주장한다. 곧 대중들, 또는 대중운동을 표현하는 물티투도라는 개념은 기존의 법적ㆍ제도적 질서를 초과하는 정치적 세력이 항상 존재한다는 점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이는 그 자체로 자율적이거나 능동적인 해방의 역량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양가적인 성격을 띠는 역량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발리바르가 분석하고 강조하는 것이 바로 타기투스의 인용문을 통해 표현되는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는 개념이다. 곧 발리바르는 이 문장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 통치자들이 무자비하고 걷잡을 수 없는 대중들의 소요와 폭력에서 느끼는 두려움(“대중들에 대한 공포”)이며, 다른 한편으로 대중들이 통치자들의 권력과 압제에 대해 느끼는 공포(“대중들의 공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통치자들로서는 기성의 법적ㆍ제도적 질서 안에 존재하지만 이 질서로 완전히 포섭하거나 억압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끊임없이 이 질서를 동요시키고 위협하는 대중들의 집합적 행동이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또 반대로 대중들의 편에서는 자신들의 사고와 행위의 자유를 제한하고 이에 대한 저항을 처벌과 폭력으로 억압하는 통치자들의 폭력이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가 이러한 이중적인 공포야말로 국가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점을 인식했지만, 동시에 이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이론적으로 고심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정치론󰡕이 민주정을 다루는 11장에서 단 4절까지만 진행된 채 중단된 것은 그의 죽음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이론적 아포리아의 표현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발리바르는 바로 이 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이론적 강점이라고 본다. 곧 이러한 대중들의 양가성을 이상적인 규범적 모델(곧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 등에서 자주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 자연적인 국가”,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로서 민주주의)에 따라 가상적으로 해소하거나 심지어 보수주의적으로 통제, 억압하려고 하지 않고, 이것이 함축하는 난점들을 끝까지 전개하면서 당대의 주어진 이론적ㆍ정치적 공간 속에서 이 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 스피노자의 이론적 독창성과 현재성이 있다고 본다.

  어떤 점에서 이것이 이론적인 강점이 될까?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떤 점에서 이것이 스피노자의 이론적 현재성의 핵심적인 내용이 될까? 이 책에 수록된 발리바르의 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얼마간 다른 강조점을 지닌 답변들이라고 할 수 있다. 


 1) 자기 자신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


우선 발리바르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는 이중적 공포는 사실은 대중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공포에서 유래한다는 점이다. 곧 대중들이 스스로의 정념적인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절하지 못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을 자율적인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대중들에 대한 공포와 대중들의 공포를 낳는 핵심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발리바르의 분석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표현되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그렇다.


[{정치론} 7장 27절의]이 분석은 다음과 같이 다시 표현될 수 있다. 곧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 주권자와 시민들은 동등하게 다중의 일부를 형성한다. 따라서 최종 심급에서 근본적인 질문은 항상 다중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곧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킬 수 있는 자질의 문제가 된다.(이 책 107쪽[쪽수 확인])


하지만 스피노자는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절대 권력이 실존한다면, 이는 인민 전체가 소유하는 권력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적 계산의 논리에 따르면 군주제와 귀족제 이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문제를 민주정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러한 한 걸음은 용어모순이다. 곧 항상 이미 대중 전체에 속하기 때문에, 대중으로 복귀할 위험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나 있는 권력이라는 개념은 도대체 어떤 것일 수 있겠는가?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대중이 본성상 “권력의 보유자들에게 가공할 만한 존재라면”({정치론} 8장 4절),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사실상 권력을 절대적이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면, 한계(민주정)로 이행한다 해도 권력을 보유한 대중이 대중 자신에게 가공할 만한 존재가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지극히 미약한 수준에서라도―어떻게 보증할 수 있는가?(이 책 179쪽[쪽수 확인])


  이 구절들에서 발리바르가 주목하고 있는 점은 우선 민주주의 개념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법적 관점에서 정의된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아포리아다.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법적인 정의에 따르면 군주정은 군주 혼자서 주권자 곧 통치자가 되는 정체이고, 귀족정은 다수의 귀족들이 통치하는 정체이며, 민주정은 “인민 또는 대중들의 집합적 통치”다. 따라서 이러한 분류법에 따를 경우 민주정은 인민이나 대중들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스피노자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정치체의 안전을 위해서는 “대중들로의 복귀”를 피해야 한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대중들로의 복귀는 주권의 통일성의 와해, 따라서 정치체의 해체를 의미하며, 이는 결국 자연상태로의 복귀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중들은 한편으로는 민주정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통치자의 위치에 놓여야 하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체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피해야 하는 대상의 위치에 놓이기도 하는 셈이다.

  따라서 형식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을 정치의 공간에서 배제하거나(이것이 바로 홉스의 노선이다) 아니면 대중들이 이미 자치의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고 (부당) 전제하거나 해야 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 두 가지 노선을 모두 거부하면서 한편으로는 ({정치론} 3장 2절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1)) 대중들이 모든 정치체의 기초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들의 자치의 불가능성을 긍정하고 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엔 비일관적인 것으로 보이는 스피노자의 이러한 모순적인 태도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첫째, 대중들이 모든 정치체의 기초에 놓이게 되므로, 군주정이나 귀족정 역시 법적 정의와 무관하게, 또는 그에 앞서 자신의 존재를 대중들의 역량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군주정이나 귀족정이 자신의 정체政體를 보존하고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곧 정치적 “절대성”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적 질서 안에 대중적인 토대를 확보해야 한다. 이는 곧 대중들의 욕망과 의견이 충분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정치적 결정 과정에서 대표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는 군주정이나 귀족정 내부에서 항상 이미 민주주의 또는 민주화 과정이 진행되고 있고 또 진행되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둘째, 대중들이 그 자체로 통치의 역량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곧 대중들이 스스로의 정념을 합리적으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대중들의 통치 역량을 증대시키는 문제는 민주주의의 고유한 정치적 과제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제는 모든 민주주의는 항상 자기 내부에 분열을, 따라서 갈등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중들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대중들이 둘로(그 이상으로) 분할된다는 것, 따라서 필연적으로 갈등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구조적인 것이다. 곧 이러저러한 계몽주의적 교육이나 주의주의적인 동원 또는 제도적인 대의장치의 마련 등을 통해 온전히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이는 이런 방법들이 전혀 무익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왜 이러한 갈등이 나타나고, 또 그 경우 어떤 정치적ㆍ제도적인 해결책이 발명되어야 하는지 좀더 체계적으로 해명될 필요가 있다. {신학정치론}에 대한 발리바르의 분석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시사적인 통찰을 제공해주고 있으므로, 좀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신정 분석의 의미


  이 책 1부 2장에 나오는 발리바르의 {신학정치론} 해석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선 이 해석은 {“자본”을 읽자}에 나오는 알튀세르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새롭게 해명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읽기라는 문제, 따라서 글쓰기/기록하기écrire라는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인물인 스피노자는 또한 역사이론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을 처음으로 제시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Althusser 1996c, p. 8. 강조는 알튀세르)


스피노자에 대한 알튀세르의 논의 중에서 제일 덜 주목받고 있지만, 또한 제일 놀라운 사례 중 하나로 꼽힐 만한 이 주장은 겉보기에는 매우 당혹스러운 주장이다. 사실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역사에 관한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또 역사에 대한 고찰이 전혀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 주제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상당히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역사철학 또는 역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18세기 말 계몽주의 이후, 특히 독일 관념론 이후 하나의 철학적 주제로 등장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알튀세르의 지적은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라는 비난까지 받을 만하다.

  그런데 여기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역사이론은 그것 혼자서만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과 결부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마치 후자가 없이 전자는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이 양자를 결부시켰다는 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고유한 철학적 업적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읽기”라는 문제, “글쓰기/기록하기”라는 문제와도 결부시키고 있다.

  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가 거의 언급하지도 않은 그의 “역사이론”에 주목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 역사이론이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더 나아가 이는 “읽기”나 “글쓰기/기록하기”의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처럼 의문들은 끊임없이 생겨나지만,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에 관한 그의 다른 언급들과 마찬가지로, 대담한 주장을 한 마디 던져놓은 다음, 마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다른 논의로 성큼 건너뛰고 있다.

  발리바르의 해석은 바로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해주는데, 왜냐하면 그는 바로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에서 하나의 역사이론(“역사철학”이 아니라)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발리바르는 성서에 나타나 있는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 및 전개과정을 분석하고 있는 17장만이 아니라 성서에 대한 역사적 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신학정치론}의 전반부(곧 1장-15장)의 분석 역시 하나의 역사이론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먼저 그는 스피노자의 성서 비평은 “이차 수준의 역사”(또는 스피노자의 표현대로 하면 “비판적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성서는 히브리 백성들의 상상에 기초를 둔 하나의 역사적 담론이며, 스피노자의 성서 비평은 이러한 역사적 담론에 대한 이차적 담론, 곧 비판적 역사라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그는 성서는 바로 서사敍事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서사는 히브리 민족의 고유한 역사적 기록/글쓰기의 관행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알튀세르의 표현대로 “글쓰기/기록”이라는 문제, 그리고 이에 대한 “읽기/독해”의 문제를 역사의 문제이자 철학의 문제로 제기한 최초의 인물인 셈이다.    

  그리고 발리바르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역사이론을,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자면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 곧 대중들의 상상이라는 문제와 결부시킨다. 발리바르의 분석에서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상상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제시되고 있다.

  우선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무지가 있다. “이러한 이차 수준의 서사는 재구성될 수 있는 한에서의 사건들의 필연적인 연쇄과정 및, 자신들을 움직이는 원인들 대부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역사적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역사의 “의미”를 상상하는 방식을 자신의 대상으로 한다.”(이 책, 쪽[원고 파일 26쪽]) 대중들의 상상은 비판적 역사의 필연적인 구성 요소인데, 왜냐하면 이러한 비판적 역사의 소재를 이루는 성서 및 히브리 인민의 삶 자체가 상상의 요소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대중들의 삶이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실제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이를 상상에 따라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는 스피노자의 일반적인 인간학적 테제에서 따라나온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고 있지만,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야기시킨 원인들에 대해서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는다."({윤리학} 1부 「부록」) 자신들의 욕망은 의식하되 그러한 욕망을 낳은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가상을 낳으며,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현실의 진정한 창조주(곧 전능한 의지와 권능을 가진 존재자)에 대한 또다른 가상을 낳는다. 이러한 자유와 목적론의 가상은 인간의 근본적인 두 가지 가상이며 미신의 온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서의 서사가 이러한 가상에 기초하여 전개된다는 것은 스피노자 인간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따라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의 기초가 되었던 정치적 상상의 요소가 있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17장에서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가 주목하는 것은 히브리 국가의 구성이 일종의 계약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계약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이중적인 계약의 형식을 띠고 있다. 곧 이는 주권자와 신민들 사이에 맺어지는 정치적 계약이면서 동시에 야훼라는 신에 대한 개개의 신자들(곧 개개의 히브리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종교적 계약이기도 하다2). 따라서 히브리 백성들에게 신은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주권자이기도 하며, 신의 계율의 위반은 동시에 국법의 위반을 의미했다. “요컨대 시민법과 종교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 국가는 신정 국가라 불릴 수 있었다.({신학정치론} 17장 7-8절, 282-283; 모로판, 544-546)”

  스피노자 자신이 말하고(“이 모든 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의견opinione magis quam re에 속하는 것이다.” {신학정치론} 17장 8절, 모로판, 546; 이 책, 76쪽)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이중적 계약이라는 것은 물론 하나의 허구다. 하지만 이러한 허구는 매우 실제적인 효과를 낳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허구를 통해 하나의 국가가 구성될 수 있었고, 적어도 모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놀랄 만한 안정과 번영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구가 이처럼 중요한 결과를 낳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신을 각 개인의 신으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히브리 민족 전체의 신으로, 따라서 히브리 국가의 유일한 주권자로 만듦으로써, 각자가 신에게 바치는 절대적 헌신과 복종이 동시에 국가에 대한 헌신과 복종으로 되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왜 이러한 이중적 계약이 필요한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는 무엇보다도 오랜 노예 생활 때문에 스스로 국가를 구성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히브리 인민들의 “미개인 같은 심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허구에 기초한 히브리 신정국가는 역사적으로 유일한 국가인 것처럼, 일반적인 설명적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여기서 보편적인 논점을 도출해낸다. 곧 발리바르는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스피노자 분석의 요체를 민주주의(또는 국가 일반)에 대한 법적 관점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발리바르는 신정이 내포하는 이중적 측면에 주목한다. 신정은 한편으로 민주정과 등가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과의 계약을 통해 신에게 모든 권력을 부여하고 자신들을 신의 백성으로 재인지함으로써, 히브리인들 모두는 신 앞에서 동등한 신의 백성들, 신의 시민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상상적 민주정”은 민주정의 핵심인 집합적 권리, 집합적 주권을 “다른 무대”로 옮겨놓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곧 신정에서 인민들 스스로가 동등하게 집합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이는 신이라는 진정한 주권자가 초월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한에서다(곧 신의 거주지로서 신전이 특별한 경배와 존경의 대상이 되는 한에서). 따라서 신정은 집합적인 주권이 초월적인 신의 자리, 비어 있는 상징적 자리의 매개를 통해서만 실행될 수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발리바르의 질문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제 고유한 의미의 민주정으로 되돌아가 보자. 개인들이 신과의 동맹이라는 허구(곧 주권의 상상적인 자리 이동) 없이도 명시적인 “사회계약”에 따라 직접 집합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명되면, 문제는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대중들의 미신은 차치한다 해도, 이는 분명히 그렇지 않다. 권리의 동등성과 의무의 상호성 위에 구성된 민주 국가는 개인적 의견들의 결과인 다수결 법칙에 따라 통치된다. 그러나 다수결 법칙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주권자가 공적인 이익과 관련된 활동을 명령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존중받을 수 있게 만드는 절대적 권리를 지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 외에도 또한 야심들보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선호하는 것, 곧 “이웃을 자기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의 필요성에 대한 합의가 지배하고 있어야 한다.(이 책, 77쪽)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일회적인 것에 불과한 히브리 신정국가는 사실은 정치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중요한 보편적 교훈을 제공해준다. 그것은 첫째, 법적 제도만으로는 민주주의(또는 국가 일반)는 충분한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대중들의 정념적 삶을 조절할 수 있는 별도의 메커니즘 내지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둘째, 하지만 정념적 삶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종교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히브리 신정국가가 개인들의 종교적 삶과 정치적 삶을 일체화함으로써 상당한 기간 동안 정치적 통합을 이뤄내긴 했지만, 이러한 국가의 통합, 일체화는 그 자체가 정념적인 양가성에 지배받고 있다. 왜냐하면 신자들끼리의, 국민들끼리의 놀라운 유대는 신과의 동일시/정체화를 매개로 한 서로에 대한 정념적 사랑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랑의 이면은 초월적인 신의 감시와 처벌에 대한 공포와 잠재적인 적으로서 이웃에 대한 일반화된 증오를 동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예수는 이처럼 종교적 삶과 정치적 삶을 일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삶을 정치적, 교권적 권위로부터 분리하여 이를 각자의 믿음과 판단에 따른 윤리적 실천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하나의 문화혁명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는 신자로서의 개인들을 정치적 권위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자체로부터 분리시켰으며, 또 그에 비례하여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신의 말씀을 내면화된 도덕법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또다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셋째, 상상계가 개인의 삶 및 사회적 삶에서 구성적인 요소로 존재하는 한에서 대중들은 ‘자기 자신’(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과 합치할 수 없다는 것, 곧 대중들은 온전한 자율적 주체로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반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대중들은 초월적인 타자(신이나 절대 군주)와의 동일시/정체화를 통해서만 통일성을 얻을 수 있으며, 이 경우 대중들의 역량은 쉽게 자기 자신에 맞선 파괴적인 역량으로 전도되기 쉽다는 점에 상상적인 동일시/정체화의 위험이 존재한다.  


1)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 인도되는 듯한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

2)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개념, 특히 호명 테제와 이중적 거울 구조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이 분석에 준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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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으로서 스피노자 철학


  스피노자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아마도 범신론자라는 편견만큼이나 뿌리 깊은 편견 중 하나는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의 편견이라면, 이는 스피노자가 형이상학자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1), 스피노자가 형이상학자라는 사실을 이유로 스피노자가 정치학자라는 점을 (원칙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자다라는 언표는 암묵적으로 스피노자에게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정치학이 없다는 언표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좀더 미묘한 형태로 변형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가 정치적 저술을 남기긴 했지만, 역시 스피노자 철학의 본질 내지는 요체는 그의 형이상학에 있다는 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좀더 구체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의 본질 내지는 요체는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이 아니라 󰡔윤리학󰡕에 있다고 표현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경우 범위는 다시 더 좁혀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윤리학}은 5부로 이루어져 있고, 1부에서 5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부는, 상이한 제목이 달려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상이한 논의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 이런 식의 주장이 제기되곤 한다. 곧 {윤리학}의 핵심은 1부에 있는데, 왜냐하면 「신에 대하여De Deo」라는 제목이 붙은 데서 알 수 있듯이 1부는 유일한 실체로서 신을 주제로 하고 있고, 바로 여기서 형이상학이 논의되기 때문이다2). 또는 마르샬 게루가 {윤리학} 1, 2부에 대한 기념비적인 주석서를 남긴 데서 알 수 있듯이, 존재론을 다루는 1부와 인식론을 다루는 2부가 {윤리학}의 핵심이라는 주장을 듣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 경우 배제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사소한 것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왜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의 요체를 담고 있는 이 책에 {제 1철학}이나 {형이상학} 또는 그냥 간단히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하필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왜 그는 1부와 2부로 끝내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길게 5부까지 책을 썼을까? 물론 다음과 같은 질문은 더욱 더 제기되지 않는다. 왜 그는 {윤리학}의 집필을 중단하고 5년여 동안이나 {신학정치론} 같은 사소한 책을 쓰는 데 몰두했을까? 왜 그는 생애의 말년에 {정치론} 집필에 몰두했으며, 왜 그럼에도 그 책을 완성하지 못했을까?  

  이 책에 수록된 발리바르의 글들이 공통의 출발점으로, 곧 공통의 비판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이러한 편견들이다. 발리바르는 이 책 첫머리에서 바로 이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스피노자와 정치. 처음 보기에는 단순한 이 정식에 얼마나 많은 역설이 존재하는가! 만약 정치가 역사의 질서라면, 여기 이 철학자는 자신의 전 체계를, 인식은 신을 인식하는 것이며 “신은 곧 자연”이라는 관념의 전개로 제시한다. 만약 정치가 정념의 질서라면, 여기 이 철학자는 인간의 욕망 및 활동을 “기하학자들의 방식에 따라 [...] 곡선과 평면, 입체의 문제들”(󰡔윤리학󰡕 3부 서문)로 인식하자고 제안한다. 만약 정치가 현재성 안에서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면, 여기 이 철학자는 현자와 훌륭한 주권자란 모든 독특한 사물을 “영원성의 관점에서”(󰡔윤리학󰡕 5부) 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그가 우리에게 순수한 사변이 아닌 정치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가?(이 책, 9쪽)


  이런 편견에 맞서 발리바르는 처음부터 자신의 과제를 “스피노자 정치학의 문제들로부터 출발하여 이 문제들의 통일성을 탐구하면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소개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또 「대중들의 공포」에서는 “스피노자의 사상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는 점을 긍정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사상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는 주장은 그 자체로 일의적인 것은 아니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가령 알렉상드르 마트롱은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자들 중에서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에서 정치학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체계적으로 입증한 사람인데, 그에게 스피노자의 사상이 정치적이라는 주장은 발리바르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곧 그에게 이 주장은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에 함축되어 있는 개체성에 관한 일반 명제로부터, 또 {윤리학} 3부 이하에서 전개되는 인간학에 관한 명제로부터 체계적으로 연역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역으로 󰡔{윤리학}으로 대표되는 스피노자의 체계는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관한 논의를 통해서만 완결될 수 있다는 점을 뜻한다. 따라서 마트롱은 {윤리학}의 마지막 5부에 나오는 (겉보기에는) 매우 수수께끼 같고 비의적秘義的인 내용들이 사실은 정치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3)

  반면 네그리 같은 경우는 마트롱과 달리 스피노자의 체계는 연역적이고 통일적인 게 아니라, 단절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은 초기부터 후기까지 변화하지 않은 채 완전한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근본적인 단절을 경험한다. 이러한 단절은 바로 1665-1670년에 이르기까지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을 집필하던 시기에 발생했는데, 이를 통해 스피노자는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자에서 실천적인 구성의 정치학자로 변모한다. 다시 말해 마트롱의 주장과 달리 {윤리학} 1-2부에 담겨 있는 스피노자의 철학은 르네상스의 신플라톤주의 신학의 유산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초월적 형이상학이며, 스피노자 철학의 정수, 스피노자 철학의 진정한 핵심은 {윤리학} 3-4부와 {정치론}에 담겨 있는 실천적 구성의 존재론/정치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에게 “스피노자의 철학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면, 이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과의 단절을 먼저 요구한다. 

  이 책에서 발리바르가 택하고 있는 입장은 이 두 사람의 관점과 모두 구분된다. 우선 그는 네그리와 달리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과 정치학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곧 발리바르의 관점에 따를 경우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스피노자 존재론을 특징짓는 자연주의적 관점에 따라 논증되고 서술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존재론(및 인식론)은 정치학의 주장 및 분석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적인 전제 또는 적어도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정치학의 논의에 내재적인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마트롱과 달리 존재론과 정치학의 관계는 연역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곧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정치학에 관한 논의는 그의 형이상학적 기초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존재론에 내재한 난점 내지는 아포리아를 드러내고, 또 더 나아가 이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이는 특히 2부 첫 번째 논문에 나오는 대중들이라는 개념 또는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라는 개념에 대한 분석에서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네그리처럼 양자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파악하지는 않지만,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그의 형이상학 체계에 대해 파생적인 위치에 있지 않고 구성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네그리에 좀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발리바르가 네그리와 공유하고 있는 또다른 점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당대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정세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트롱은 스피노자의 정치학을 그의 철학 체계로부터 엄밀하게 연역해내는 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당대의 정세와 같은 ‘외재적인’ 요인들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는 반면4), 네그리와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철학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이데올로기적 형세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또 그것들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변모하고 발전해 나갔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다만 네그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관계라는 좀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을 채택하여, 스피노자의 철학적 발전을 발흥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대한 해방적 생산력의 저항과 대응이라는 노선 위에서 고찰하고 있는 반면5), 발리바르는 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기론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정치적 개입과 이론적 분석을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차이는 네그리가 스피노자에서 마르크스에 결여된(또는 마르크스를 능가하는) 정치적 존재론(다시 말해 해방적인 생산력을 이론화할 수 있는 개념적 수단)을 찾고 있는 반면6), 발리바르는 이 책 2부의 세 번째 논문이 보여주듯이, 스피노자에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또는 일반화된 경제론)을 보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 비판(또는 일반화된 이데올로기론)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에게 “스피노자의 철학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면,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이라는 두 가지 저서로 축소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 이 두 권의 저서야말로 스피노자의 가장 중요한 저서라고 주장한다는 뜻도 아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당대의 네덜란드 연합주 공화국에서 제기되었던 정치적 쟁점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심과 개입으로부터 자신의 문제, 자신의 대상을 얻어왔으며, 이러한 문제, 대상은 󰡔윤리학󰡕을 포함한 스피노자의 성숙기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정치학, 더 나아가 현실의 정치적 쟁점에 대한 그의 개입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 우리가 이 말을 비판적인 의미(곧 칸트 이래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온 서양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된)가 아니라 통용되는 의미에서, 곧 제 1철학적인 주제들에 관해 깊은 사변을 전개하는 철학자라는 의미에서 받아들인다면.

2) 이는 사실은 헤겔로부터 유래하는 태도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마슈레 2004 참조. 

3) 특히 Matheron 1969 참조. 그 이후 발표한 여러 논문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에 관한 마트롱의 생각은 조금씩 변화하고 좀더 치밀하게 다듬어지고 있지만, 이런 점에서는 불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욱이 마트롱은 80년대 후반 이후에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곧 그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체계적으로 고찰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4) 이런 점에서 마트롱은 스피노자 연구에서 마르샬 게루의 구조적ㆍ발생적 방법론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루는 {윤리학}의 1, 2부, 곧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연구의 대상으로 한정하고 있고(그는 {윤리학}의 나머지 부분들은 그의 연구서 3권에서 다룰 예정이었으나, 죽음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서양 철학의 전통과 스피노자 철학을 매우 체계적으로 대비하여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트롱과 대비되지만, 구조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나 이론적 체계 외부의 요인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트롱과 일치한다. 이는 크리스치안 라체리(Lazerri 1998)나 로랑 보베(Bové 1995) 같은 그의 제자들의 연구에서 마찬가지로 엿볼 수 있는 특징이다. 

5) 네그리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지배관계와 생산력/해방 운동이라는 두 가지 대립항에 대해 매우 체계적으로(그리고 얼마간 독단적으로) 두 가지 사상적 계보를 할당하고 있다. 곧 전자는 홉스에서 루소, 헤겔로 이어지는 초월적 매개의 노선이며, 후자는 마키아벨리에서 스피노자를 거쳐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노선, 다시 말해 일체의 외재적 매개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조직하고 표현하는 내재적 구성의 노선이다.

6) 이러한 스피노자의 정치적 존재론, 특히 다중 개념은 마이클 하트와 공저한 {제국}이나 {다중}의 핵심적인 이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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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5-18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각주 기능이 있으니 정말 편하군 ...
 

* 이번에 출간될 {스피노자와 정치}의 역자 해제입니다.

사실은 좀 "허접"해서 올리기가 부끄러운데, 어차피 인쇄돼서 나올 글이니까, 미리 매맞는다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스피노자와 정치}에 수록된 발리바르의 글들을 간단하게(그런데 사실 분량이

많은 편이죠 ... -_-a) 개괄해본 글입니다.

원래는 알튀세르의 스피노자 해석과의 관련성과 차이점을 중심으로 글을 쓸 생각이었는데, 분량도

너무 많아지고 시간도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 알튀세르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은 한 부분만

제외하고는 모두 뺐습니다. 언제 이 점에 관한 논의를 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해제를 보시면 알겠지만, 지난 번에 문제가 됐던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는 번역본에

수록하기로 했습니다. 저보다는 사실 출판사 사장님의 열정이 더 큰 계기가 됐는데, 여러 군데 문의해본

결과 법적으로 전혀(또는 거의)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어서 수록하기로 했습니다. 어찌 됐든 독자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까 합니다.

 

관개체성의 철학자 스피노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에 대하여



  이 책은 국내에 잘 알려진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에 관한 주요 연구를 묶은 책이다. 이 책에는 한 권의 단행본과 세 편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글들은 지난 20여년 동안 발리바르가 발표한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들 중에서 역자가 보기에 국내에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들을 선별한 것이다1).

  1부에 수록된 {스피노자와 정치Spinoza et la politique}는 1985년 프랑스대학출판부PUF에서 내는 “철학들Philosophies”이라는 총서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저작이다. 문고본 판형의 작은 책자이지만, 이미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스피노자 정치철학에 관한 권위 있는 해설서로 널리 인정받아 온 책이다(우리가 번역 대본으로 삼은 것은 1996년에 나온 제 3판이다).

  2부에 수록된 글들 중 첫 번째 논문인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는 발리바르가 1982년 이탈리아의 우르비노Urbino에서 열린 스피노자 탄생 350주년 기념 국제 학술회의에서 발표했다가 1985년 유명한 {현대Les Temps modernes}에 수정ㆍ보완하여 실은 글이다(우리가 번역 대본으로 사용한 것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1997년 {대중들의 공포. 마르크스 전후의 철학과 정치La Crainte des masses. Philosophie et politique avant et après Marx}에 수록된 완결본이다). 이 논문은 발리바르가 발표한 스피노자에 관한 첫 번째 논문일 뿐만 아니라 현대 스피노자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논문이기도 하다.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이 논문의 중요성은 안토니오 네그리의 {야생의 별종}(1981)과 더불어 스피노자 철학에서 대중들multitudo이라는 개념의 위치를 체계적으로 해명한 최초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더욱이 네그리와는 여러 가지 점에서 대비되는 관점에서 대중들이라는 개념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이라는 글은 알렉상드르 마트롱 기념 논문집인 {이성의 건축Architectures de la raison}(1996)에 수록된 글로서,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을 관개체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논문이다. 이 글은 비교적 적은 분량임에도 현대의 스피노자 연구, 더 나아가 구조주의 철학의 이론적 진전을 위해 매우 풍부한 시사점을 제시해 주는 글이다.

  마지막 세 번째 논문인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서 정치의 타율성으로」는 국제 스피노자 학회에서 내는 {스피노자 연구Studia Spinozana} 제 9호(1993)에 수록된 글로서, 스피노자에서 루소를 거쳐 마르크스 또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는 근대 정치학의 역사를 조감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이론적 해결책의 실마리를 스피노자의 정치학에서 찾고 있다2).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스피노자의 이데올로기 비판의 결합을 이론적 과제로 제시하고 있는 이 글은 우리에게 90년대 이후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사실 발리바르는 별도의 소개가 필요 없을 만큼 국내 인문사회과학계에 널리 알려진 철학자다. 발리바르는 80년대 한국사회성격논쟁 당시 이른바 PD파의 이론적 작업의 중요한 철학적 전거가 되었고, 90년대 초에 마르크스주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모색 작업에서도 막대한 이론적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 발리바르의 저작들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못했는데, 제일 마지막으로 번역된 발리바르의 저서가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balibar 1995)인 점을 생각하면, 10년 동안 거의 소개가 되지 못한 셈이다3). 사실 발리바르가 국내 사회과학계에 미친 영향을 감안한다면, 그의 저작들의 번역이나 소개는 상당히 단편적ㆍ선별적으로 이루어져온 편이다. 예컨대 발리바르(및 알튀세리엥)의 연구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을 수 있는 {“자본”을 읽자}는 아직까지도 국내에 소개되지 못하고 있으며4),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과 공동으로 저술한 {계급, 민족, 인종. 애매한 동일성들Classe, nation, race. Les identités ambiquës}(1988) 역시 일부만 소개되었을 뿐 책 전체가 번역되지 않고 있다. 더 나아가 90년대 중반 이후 발리바르가 매우 체계적이고 집약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반폭력의 정치와 유럽 구성에 관한 작업들도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못하고 있다5).

  이는 그의 스피노자 연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발리바르는 국내에서는 주로 알튀세르의 제자로서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주목할 만한 이론가로 알려져 있지만, 스피노자에 관한 탁월한 연구자로서도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실제로 지난 80년대 이후 발리바르는 집약적인 연구를 통해 스피노자 철학 및 정치학의 새로운 면모를 밝혀줌으로써 스피노자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개척해왔지만, 국내에는 고작 그의 논문 한편만이 번역되었을 만큼(발리바르 1996)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발리바르의 이론 체계에서 스피노자 철학이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고려해볼 때, 또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연구의 독창성과 영향력을 감안할 때 이는 매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여기 우리가 묶어서 펴내는 이 책은 그동안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던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 특히 그의 스피노자 연구의 중요한 일부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를 위하여: 발리바르의 최근의 이론 작업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이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스피노자론을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지난 10여년 간 수행된 발리바르의 연구 작업에 대해 간단히 개괄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발리바르의 철학 연구는 알튀세르의 이른바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한다. 알튀세르는 1965년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를 출간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을 시작했다. 알튀세르의 작업은 마르크스주의의 철학 범주들을 이론적으로 쇄신함으로써 헤겔 변증법과 구분되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독자성을 밝히고, 이를 기반으로 1950년대 이후 소련과 중국의 갈등으로 표출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 운동의 융합)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 피에르 마슈레, 자크 랑시에르Jacque Rancière, 로제 에스타블레Roger Establet와 함께 {“자본”을 읽자}를 공동 저술ㆍ발표함으로써, 알튀세르의 작업에 동참한다. 그 이후 그는 80년대 중반까지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을 기반으로 역사 유물론에 관한 깊이 있고 독창적인 연구를 수행했는데, 이 시기의 작업들은 {역사유물론 연구}(1974)나 {민주주의와 독재}(1976) 같은 저작들, 또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1991)와 {역사유물론의 전화}(1993) 같은 논문 선집을 통해 국내에 잘 알려져 있다.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일종의 해체 작업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이러한 연구는 현실 사회주의(또는 역사적 공산주의)가 몰락한 90년대 들어 좀더 광범위한 역사적ㆍ이론적 전망 아래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라는 폭넓은 주제의 연구로 심화ㆍ발전되고 있다. 곧 80년대 까지 발리바르가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범주들(잉여가치, 계급투쟁, 이행, 이데올로기, 당, 대중,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 등과 같은)의 아포리아를 분석하면서 마르크스의 이론적 독창성과 한계를 해명하는 데 치중했다면, 9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아포리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근대성의 철학적 기초에 관한 연구에서 세계화와 유럽의 구성이라는 현실 정세에 이르기까지 작업의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80년대 이후 발리바르가 본격적인 스피노자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일반 구도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90년대 이후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 작업은 크게 세 가지 소주제로, 곧 근대의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 구조주의 운동에 대한 철학적 평가, 자본주의의 세계화 및 유럽의 구성이라는 정세에 대한 이론적ㆍ정치적 분석 등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중에서 근대의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탐구는 다시 세 가지 분야로 구분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고6), 둘째는 근대철학에서 의식과 정신, 주체 같은 범주들이 발명되고 전개되어온 과정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이고, 셋째는 근대 정치철학의 범주들에 대한 재고찰이다. 첫 번째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는 뒤에서 좀더 자세하게 논의할 생각이니까 논외로 한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연구는 발리바르의 이론적 독창성을 잘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연구들이다.

  근대의 철학적 인간학에 관한 연구는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축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던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이론적으로 정교화하기 위한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론 혁명의 공통점 중 하나는 사고와 활동의 중심으로서 주체라는 관점을 비판한 데 있다고 지적했다. 프로이트의 경우는 의식을 인간의 사고 활동의 한 부분으로 국지화시키고, 무의식 개념을 정신 장치의 핵심으로 파악함으로써 탈주체적인 문제설정을 제시했다면7), 마르크스의 경우는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라는 근대의 정치적(또는 자유주의적) 이념을 경제과정의 착취를 위해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적 보충물로 간주함으로써 근대 주체 개념을 해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그 이후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1970)에서 이데올로기론의 관점에서 이러한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좀더 정교하게 전개하고 있다(Althusser 1991/1995 참조).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의 문제설정의 난점을 보완ㆍ정정하고 있다. 이를 위해 발리바르는 하이데거 이래 현대 철학의 논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른바 “주관성의 형이상학”이라는 통념이 주체에 관한 칸트주의적 관점을 데카르트로 투사한 데서 비롯한 것이라는 점을 해명하고 있다(Balibar 1989). 곧 그에 따르면 이는 프랑스 혁명과 독일 관념론이라는 이중적인 전환점을 통해 등장한 “시민 주체”라는 개념 및 그것의 아포리아, 곧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으로 또는 봉기적 주체와 예속적 주체로의 분할을 얼마간 (상상적으로)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리바르의 주체 개념의 계보학적 재고찰은 한편으로는 하이데거의 관점과는 다른 시각에서 근대의 주체 철학의 주요 개념들(의식, 영혼/정신, 주체 등)의 전개 과정을 탐색하는 작업8)과 프랑스 혁명을 통해 등장한 “시민 주체” 또는 “인권과 시민권의 주체”라는 통념에 내재한 개념적ㆍ제도적 쟁점들을 주체화subjectivation 양식에 대한 분석의 관점에서 수행하는 작업9)으로 분화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발리바르 작업의 두 번째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세계화 및 유럽의 구성이라는 정세에 대한 이론적ㆍ정치적 분석이다. 사실 이 분야는 발리바르 연구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가장 많은 업적들을 배출하고 있는 분야다. 발리바르의 연구의 초점은 민주주의라는 서양 근대 정치의 가장 일반적인 제도에 대한 개념적ㆍ정치적 분석에 맞춰져 있다.

  개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분야의 연구는 근대 정치철학의 범주들에 대한 재고찰과 상당 부분 중첩된다. 발리바르의 연구는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로서 프랑스 혁명기의 「인권선언」, 특히 거기에서 공표된 인간과 시민의 동일성, 평등-자유egaliberté 명제에서 출발한다. 우선 발리바르는 인간과 시민의 동일성은 모든 사람이 이러저러한 인간적ㆍ제도적 차이 이전에 인간 자체로서 시민의 권리, 따라서 정치의 보편적 권리를 가진다는 점을 확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는 근본적으로 봉기적인 언표행위이며,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유형의 차별에 맞서 저항할 수 있는 원리로서 기능한다. 또한 발리바르는 이러한 명제와 쌍을 이루는 평등-자유 명제, 곧 평등과 자유의 상호 전제, 상호 구성이라는 명제가 인권의 정치의 근거를 제공하면서 근대의 정치적 담론과 제도의 모형을 이루고 있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명제이기 때문에, 제도적인 갈등과 분화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제도적인 갈등과 분화는 두 개의 축, 소유라는 축과 공동체라는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곧 공동체의 축을 중심으로 인민의 평등한 연합이라는 관점과 민족 공동체라는 관념이 대립하는 것처럼 소유의 축을 중심으로 해서 노동의 소유와 자본의 소유가 대립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의 정치적 제도와 담론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축에 따라 전개된 역사적 형태들을 고찰하는 게 필요하다.

  더 나아가 발리바르는 성의 분할(또는 성적 차이)과 육체와 정신의 분할(또는 지적 차이)이러한 평등-자유 명제로 환원될 수 없는 ‘탈근대적인’ 정치적 모순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곧 성의 분할은 근대 공동체가 성립하기 위한 현실적ㆍ상상적 전제를 이루고 있으며, 반대로 지적 차이는 개인과 집단이 소유자가 되기 위한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처럼 두 가지 정치적 매개의 전제를 이루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학적 차이들은 근대의 정치적 제도의 경계에 위치해 있으며, 고유하게 탈근대적인 정치적 과제들을 제기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발리바르는 민족 형태와 주권 같은 공동체 개념과 소유 개념의 전개 과정에 대한 이론적ㆍ역사적 분석을 수행하고 있다10).

  아울러 발리바르는 「정치의 세 가지 개념: 해방, 변혁, 시빌리테」(1995)라는 논문에서 근대 정치의 세 가지 유형을 분류한 이후, 반폭력의 정치 또는 시빌리테의 정치라는 문제설정에 따라, 해방과 변혁의 정치에 고유한 아포리아에 대한 분석 및 새로운 진보 정치의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반폭력의 정치를 구체화하고 확장할 수 있는 이론적ㆍ정치적 쟁점으로서 유럽의 구성을 둘러싼 정치적, 법적, 제도적 문제들 및 유럽과 미국의 관계에 대한 분석에 몰두하고 있다11).

  마지막으로 구조주의 운동의 이론적 쟁점에 대한 재고찰은 발리바르 연구의 세 번째 축을 이루고 있다. 사실 발리바르는 이전부터 알튀세르를 비롯해서 라캉과 푸코 또는 캉귈렘에 관한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지만12), 최근에는 알랭 바디우와의 논쟁을 거쳐13) 구조주의 운동 전체에 관한 이론적 분석으로 연구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14). 이 분야에서 발리바르의 이론적 관심은 “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structuralism/poststructuralism”라는 전형적인 영미식 구분법에서 벗어나 구조주의 운동의 전개와 분화 과정을 좀더 내재적으로 분류하고 평가하는 데 맞춰져 있다. 주제상으로 본다면 이는 “구조 대 주체(인간)”, 또는 “구조 대 역사”라는 불모의 이분법15)에서 벗어나, 구조 안에서 주체의 발생과 재생산을 구조주의의 핵심적인 이론적 쟁점으로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16).

  지금까지 간단히 윤곽을 묘사해본 90년대 이후 발리바르의 작업은 (탈)마르크스주의와 (탈)근대성에 대한, 더 나아가 세계화의 정세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ㆍ정치적 고찰들로 간주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발리바르의 작업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더니즘(또는 문화이론) 계열의 일부 “이론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허망한 언어유희라든가 대중문화와의 거울놀이와 달리, 현실 정세(탈공산주의라고 하든 세계화라고 하든 또는 유럽의 구성이라고 하든 간에)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 기초하여 이 정세를 구조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근대 정치제도의 아포리아를 밝혀내고, 또 이 정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이데올로기적ㆍ이론적 틀을 이루고 있는 근대의 철학적 개념들의 흐름을 계보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발리바르의 작업은 비단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자들 및 활동가들에게도 현재의 정세에 대한 분석과 정치적 실천을 위해서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주고 있으며, 그만큼 체계적으로 수용되고 학습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발리바르의 이러한 작업은 그가 지난 80년대 이후부터 수행해온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들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상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 묶어서 펴내는 이 책은 발리바르의 최근의 작업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번 읽고 공부해볼 만한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발리바르의 이론 작업의 일반 구도와 관련해서 본다면, 이 책에 실려 있는 글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1) 정치(학)으로서 스피노자 철학

(2) 스피노자 정치학의 아포리아로서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

(3) 관개체성의 “존재론”

(4)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성


이제 이 주제들을 간략하게 고찰하면서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해석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이 글들의 출전은 각 글의 앞에 표시해 두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2) {스피노자 연구}9호의 주제는 “스피노자와 근대성”이었다.

3) 그 이후 논문 두어 편 정도가 번역되었지만, 수용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4) 이 책(사실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글만 수록되어 있는 영역본)은 지난 90년대에 번역된 적이 있으나, 심한 오역 때문에 사실상 국내의 논의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5) 하지만 올해 안에 최원 씨의 번역으로 도서출판 b에서 발리바르의 대작인 {대중들의 공포: 마르크스 전후의 정치와 철학}(1997)이 출간될 예정이고, 세계화와 유럽의 구성이라는 정세에 대한 발리바르의 철학적ㆍ정치적 고찰을 집약하고 있는 {세계화와 반폭력의 정치}(원제는 {우리, 유럽의 시민들? 국경들, 국가, 인민Nous, Citoyens d'Europe? Les Frontières, l'Etat, le peuple}(2001)인데, 책 내용의 이론적 함의를 좀더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국역본 제목을 약간 바꾸어봤다)도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어서, 국내 독자들도 머지 않아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6) 스피노자에 관한 발리바르의 저술 목록은 책 뒤에 붙은 「참고문헌」을 보기 바란다.

7) 근대 주체철학의 핵심은 의식과 자기의식을 주체의 본질적인 속성 또는 활동으로 간주하는 데 있음을 고려해볼 때, 프로이트의 관점은 한편으로 의식을 부차적인 정신 활동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 정신의 심급들(의식, 전의식, 무의식으로 보든 이드, 자아, 초자아로 보든) 사이의 분할과 갈등, 왜곡이 정신 장치에 내재적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프로이트 자신이 스스로 평가하듯 주체 개념과 관련하여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룩했다고 할 만하다. 

8) 특히  Identité et différence. L'invention de la conscience. Seuil, 1998(이 책은 존 로크의 {인간 지성에 관한 시론} 중 「동일성과 차이」 장을 번역한 뒤, 여기에 매우 긴 해설과 용어 해설, 주석 등을 붙인 책이다); “âme”, “conscience”, “praxis”, “sujet”, in Cassin 2004 등 참조.

9) Balibar 「'인권'과 '시민권': 평등과 자유의 현대적 변증법」, 윤소영 옮김,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공감, 2004(원본은 Balibar 1992에 수록); “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Emancipation, transformation, civilité”, in La Crainte des masses. Galilée, 1997; “Homo nationalis”, “Prolégomènes à la souveraineté”, in Nous, citoyens d'Europe? Découverte, 2001; “Is a Philosophy of Human Civic Rights Possible?”, The South Atlantic Quarterly 103. 2/3, 2004; “Le renversement de l'individualisme possessif”, in Hervé Guineret et al. eds., La Propriété: Le propre, l'appropriation. Ellipses, 2004. 등.

10) Balibar 1992; Nous, citoyens d'Europe? 앞의 책; Droit de cité. PUF, 2002.

11) L'Europe, l'Amérique, la guerre. Découvrte, 2003 이외에 최근의 여러 논문, 대담 등을 참조.

12) Ecrits pour Althusser. Décourvete, 1991;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윤소영 옮김, 이론, 1993; 「푸코와 마르크스: 명목론이라는 쟁점」, 「라캉과 철학: 주체성과 상징성의 이론이라는 쟁점」,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와 라캉}. 공감, 1995 등 참조.

13) “Les universels”, in La Crainte des masses; “Équivocité de l'universel?”, in Le temps philosophique. no.3, 1998 등 참조.

14) 이러한 연구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발리바르가 미국의 철학자 존 라이크만John Rajchman과 미국의 뉴프레스New Press 출판사에서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이라는 논문 선집의 편집 책임을 맡게 된 일이었다고 한다.

15) 이는 사실 구조주의 전성기에 독일과 영미권에서 구조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제시했던 전형적인 대립항들이다. 최근에는 지젝이 자신의 일부 저작에서 이러한 대립항으로 유희를 벌이고 있기도 하다. 

16) 여기에 관해서는 특히 “Le structuralisme: une destitution du sujet?”,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no.1/200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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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5-18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놀라운 알라딘!!
이제 드디어 각주(미주?) 기능도 추가됐군 ...

瑚璉 2005-05-19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 하지만 올해 안에 최원 씩의 번역으로 : 씨의 오자이겠지요.
6) 스피노자에 관한 발리바르의 저술 목록은 책 뒤에 붙은 「참고문헌」을 보기 바란다. : 참고문헌 부분을 보기 바란다가 적절한 표현이 아닐런지요.

aporia 2005-05-19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 책이 드디어 나오는군요!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 원고는 이제 인쇄소에 넘어갔나요? 몇 가지 눈에 띄는 게 있어서요. 발리바르 작업의 두 번째 축에서 보면, '탈근대'라는 말과 '탈현대'라는 말을 혼용해 쓰고 계시는데, 'modernity'를 '근대성'으로 번역하신 듯 하니 뒤의 말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또 'equaliberte'라 쓰시고 이를 '자유-평등'이라 옮기셨는데, 우선 egaliberte나 equaliberty가 아닐지요? 영어와 불어가 섞여 있어서. ^^ 그리고 '자유-평등'의 경우 '더 나아가'로 시작하는 문단에서는 '평등-자유'로 옮기셨는데, 이 역시 통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관련해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전 '평등-자유'가 더 좋은 것 같아요. 발리바르가 다른 곳에서 이 말이 신조어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로마 등에서 유래한 '평등한 자유' 등을 이은 것이라고 말했고, 또 (아마 [Citizen Subject]였던 것 같은데) 'egaliberte'의 핵심은 자유 개념에 평등 개념을 '단락'(이걸 '대체보충'이라고 부르고 싶은 유혹을 느끼네요...)한 것이며 그 역은 아니라고 말한 기억이 있어서요(사실 '평등한 자유'는 자연스럽게 말이 되는데 '자유로운 평등'은 좀 이상하게 들리는 게 사실이에요). 즉 egalite와 liberte의 순서가 알파벳 순서는 아닌 듯 하고, 따라서 자유와 평등도 가나다 순보다는 의미의 순서를 지켜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어요.
감사합니다. 이번 책 나오면 또 사인 받으러 갈께요!

가을산 2005-05-19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balmas 2005-05-1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호정무진님~, 콕 집어내셨군요. 이거 참 창피해서 원 ...
주 5)의 "씩"은 "씨"로 고쳤습니다. 그런데 주 6)은 그냥 넘어가도 될 것 같아서
고치지 않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호정무진님. ^^;;
아포리아님, ㅋㅋ 해제를 몇 번 읽어봤는데도 눈에 뭐가 씌었는지 그게
안보였네요. 지적하신 부분은 다 고쳤습니다. ^_________^
하마터면 또 한 소리 들을 뻔 했군요.
ㅎㅎ 가을산님, 예, 드디어 ...
고맙습니다. :-)

NA 2005-05-19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대중들의 공포'가 나오게 되었군요. 잘 됐습니다. 도서출판 b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는 모르겠으나, 저 개인적으로는 그냥 이해하고 넘어갔으면 싶군요. 뭐 다른 번역이 두 개 나오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요. 번역도 해석의 문제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니 독자들로서도 도움이 될테고 말이지요. 그나저나 저도 서둘러서 이 번역일을 마무리지어야 할텐데 큰일 입니다. 이번 방학은 꼼짝없이 여기에 매달리게 생겼군요. 벌써부터 무지 덥군요.^^

balmas 2005-05-19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예, 결국 수록했습니다.
도서출판 b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어서, 더 이상 여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여튼 최원 님의 관심이나 배려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여기도 벌써 더위 소식이 들려오지만 미국은 훨씬 더울 것 같은데,
고생 좀 하시겠군요.
 

 

도서출판 예경에서 재고도서 50% 할인판매를 한다는군요.

관심 있는 분들은 얼렁 가보세요. ^_____^

아래 그림 누르시면 출판사 홈페이지로 바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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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5-14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서 알릴께요^^

balmas 2005-05-14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러세요. 물만두님, 며칠 못본 새에 훨씬 더 귀여워지셨네요. ㅋㅋ

stella.K 2005-05-14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댓글 짱이어요. ㅎㅎ.

balmas 2005-05-14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스텔라님, 그렇게 생각하시면 추천 한 방 하셔야죠.^^;;;

stella.K 2005-05-14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발마스님은 아무 때나 추천이래 흥~! 추천 남발하면 안돼욧!

물만두 2005-05-14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은 제가 했어요^^ 그리고 장미만두라 불러주세요. 오늘만요^^

아침해 2005-05-14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사고 싶었던 [프리핸드 드로잉과 스케칭]을 샀어요. 그런데 2권 이상 이라야 할인이 되서, 마땅히 살 책이 없어 같은 책을 2권 샀습니다. 미련한가? 선물로 누구 줘야지~

balmas 2005-05-14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장미만두님, 추천 고마워요. ^^
스텔라님, ㅎㅎ 귀엽게 봐주시고, 겸사겸사 추천 한 방도 ... ^^;;;
아침해님/ 추천 please~~ ㅋㅋ

아침해 2005-05-15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곡하게 원하시니 추천. 두번 하려고 했더니 '이미 했습니다' 나오네요.
그런데 추천하면 좋은건가요?

balmas 2005-05-15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담이예요, 아침해님. ^^
그리고 추천은 원래 한 번밖에는 안된답니다.
어쨌든 추천 감사드려요. ㅋㅋ

해적오리 2005-05-15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덕분에 좋은 책 구입하게 되네요.
오늘 예술치료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미술 공부를 좀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발마스님 덕택에 자크 드미 영화도 봤어요. 재밌더라구요.

balmas 2005-05-15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감사합니다, 날나리님.(이름이 아주 독특하세요 ... ^^;;)
정작 저는 영화를 못봤답니다. ㅠ.ㅜ 재미있으셨다니 더 배가 아프군요. 으흑.
 

 

몇 달 전 선배들과 사적인 모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떻게 역자 후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한 여자 선배가 정색을 하고서 자신이 최근 사서 읽은 책의 역자 후기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쏟아냈다. 말의 요지는, 자신의 책도 아니고 번역한 책의 후기에다가 그동안 아이들과 놀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느니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남편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느니, 이런 사적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무엇 때문에 늘어놓느냐는 것이다. 자신은 직접 저술한 책에다가도 그런 식의 이야기는 낯 뜨거워서 쓰지 못하겠는데(실제로 그 선배가 저술한 책이나 번역한 책의 서문이나 후기는 매우 짧은 데다가 사적인 이야기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너무한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내가 뭘 어쨌다고 ... -_-a).


그런데 내 생각에는, 그 책이 어떤 책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책을 번역한 사람은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일 것 같다. 사실 유럽의 저자와 미국(영국은 또 미국과는 좀 차이가 있다)의 저자가 서문이나 후기를 쓰는 방식은 상당히 다른 편이다. 유럽의 저자들(물론 인문학 분야의 저자들이다)은 [서문]이나 [후기]를 아예 잘 쓰지 않는 데다가, 쓴다고 해도 거기에는 자신의 사생활과 관련된 내용은 전혀(또는 적어도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이 쓰는 내용은 책의 저술과 관련하여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말(대개 매우 간략하다) 정도이고,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한 표시는 한 두 줄의 헌사(스승이나 동료 또는 아버지나 어머니, 부인이나 남편 등에게 바치는)로 끝내는 경우가 많다(내가 읽은 헌사 중,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감동적이었던 것 중 하나로 “일곱 가지 재능과 일흔 가지 불운을 갖고 계셨던 아버지에게”라는 헌사가 있었다).    


반면 미국 저자들(물론 모두 다 그런 건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이 쓴 저자 서문은 마치 수첩의 한 두 페이지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고유명사들이 길게 나열되어 있다. 책의 저술과 관련하여 학문적으로 도움을 받은 사람에 대한 감사의 표시는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하다. ○○대학의 아무개와 xx는 이런저런 점에 도움을 줬고, 또 △△△대학의 yyy는 책을 한 권 다 읽어줬고, 또 누구는 절반을 읽어줬고, 모모는 한 장을 읽어줬고, ⊗⊗ 대학의 대학원생들은 수업에 열심히 참여해줬고, 특히 그 중에서도 aa, bb, cc, dd는 이렇게저렇게 해줬고, ▽▽ 도서관의 아무개 사서는 자료를 잘 찾아줬고, ZZ 출판사의 누구누구는 참을성 있게 오래 기다려줬고, 익명의 아무개 심사위원은 좋은 비판과 유익한 제안을 많이 해줬고 fff 부인은 타이핑을 열심히 해줬고 ... 이런 식이다. 어떤 때는 100명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수첩에다 일일이 기록해두지 않고서야 그걸 어찌 다 기억할까 ...). 물론 이게 끝이 아니다. 그 다음 이제 가족이나 친척, 친구에 관한 감사의 말이 나올 때다. 귀여운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해줬고, 사랑스러운 우리 남편, 우리 아내, 우리 동생, 우리 엄마, 아빠, 맛있는 파이요리를 해준 무슨무슨 아줌마, 낚시를 함께 가준 누구누구 아저씨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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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5-14 0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이닷! 후다닥.... 후다닥. 근데, 뭐, 역자/저자맘이겠지만, 독자로선 왠만한 작가가 아니고서야 개인적인 얘기 쓰는건 훌훌 넘어가고 재미없을것 같은데 말이죠.

NA 2005-05-14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득키득 아마 영화 아카데미 시상식의 영향력이 아닐까 싶군요^^ 미국 사람들이 원래 인사치례가 심한 편입니다. 저도 적응을 못하는데, 하루에 열두번을 같은 사람을 만나도 열두번 모두 '하이, 하우 아 유 투데이, ...오 아임 파인, 그레이트'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집에 큰일이라도 났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죠. 아, 그리고 꼭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줘야 된다고(이 부분이 특히 저는 어려워하는 부분인데). 안 그러면 섭섭해 한다고... 좀 과장이 섞였겠지만 ... 대충 사실인 듯 싶습니다. 모두들 행복병에 걸렸다고나 할까. 셀프 에스팀 암이라는 병도 있는데, 행복병과 다를 바 없는 병이겠지요. 이 나라에서는 '난 내가 싫어'라는 말 하면 정신병원에 보내려 듭니다. 좀 이상한 나라죠. 후기 잘 쓰시기 바랍니다. ^^

가을산 2005-05-14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역자 후기라도 가족에게 고맙다는 말 정도는 봐줘도 될 것 같아요.
근데, 역자 후기가 너무 길어서 - 어떤 후기는 20쪽이 넘는 경우도 봤어요. - 마치 후기를 빌어서 요점 정리 및 자신의 의견을 줄줄 늘어놓아서 오히려 책에 폐가 되는 경우도 봤어요.

chika 2005-05-14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의견에 한표!
제가 기억하는 감동적인 헌사는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를 쓰고 아내에게 바친 헌사요. ^^

클리오 2005-05-14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 후기는 주로 조심스럽게들 쓰기 때문에 잘 모르겠구요. 저자 서문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파리의 치마 밑'의 서문. 장장 10여 페이지에 이르는데 그동안 자신에게 학문적 공격을 펼쳤던 사람을 실명만 거론하지 않을 뿐 집요하게 반박하고 있죠.. ^^ 저자 후기가 요즘 자세해지는 것은, 재미있기도 하잖아요.. 학문적인 면에서는 저자가 서 있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관점'(편견)에 대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하구요.. ^^ 전 저자,역자 후기 재밌어요...

마냐 2005-05-14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저자, 역자 후기 좋아해요. 그리고 무성의하게 이름 주르륵 나열하는 경우와 한 사람, 한 사람 고마움이 느껴지는 그런 경우를 비교해보는 재미두 있구..ㅋㅋㅋ

balmas 2005-05-14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ㅎㅎ 정말 그렇죠. 이름만 한 100여개 나열되어 있는 <감사의 말> 같은 걸 보노라면, <쫌> 그렇더라구요.
ctrl님/ ㅋㅋ 그렇군요. 옛날 우리나라 양반들이 서로 인사하는 것을 재현한 광경을 본 적이 있는데, 한 5분 넘게 서로 계속 절을 주고받으면서 이런저런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데, 정말 대단하더라구요. 미국도 조금 있으면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요? ^^
가을산님/ 흑흑, 바로 그런 폐의 주범이 바로 저랍니다.(-_-v) 지난 번 [헤겔 또는 스피노자]도 그랬고 이번에도 20페이지가 넘어간다죠 ... ㅠ.ㅜ
치카님/ 가을산님과 이하동문 ...
클리오님/ 그것도 뭐 잘 써야 재미있는 게 아닐까요? ㅎㅎ
마냐님/ 글쎄 말예요, 그런 걸 좋아하는 분들이 꽤 많더라구요. 여자분들 중에는
특히 아내(남편)와 아이들이나 가족, 친구 등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써놓은
서문이나 후기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stella.K 2005-05-14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이 글 재밌네요. 저는 서론이나 역자 후기에서 뒷부분은 그다지 읽지는 않죠. 근데 짧막하게 누구한테 감사한다 정도는 좋은데 주절이 주절이 이름 밝히는 건 좀 짜증나요. 그래서 뭐 어쩌라구? 뭐 그런 식이죠.
이거 2편도 있나 보죠? 언능 쓰세요!

MANN 2005-05-14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차이가 있었군요- 저도 "A는 ~를 해 줬고, B는 ~를 해 줬고..." 이런 식으로 잔뜩 나열한 서문을 보고 무척 신기해했던 적이 있거든요(그 상세함에, 그리고 그걸 다 기억했다는 점에;). 물론 다 기억한 게 아니라 어디 기록해놓은 거겠지만, 그런 것까지 빼먹지 않고 다 기록해놓았다는 것도 신기하고... 그러고보니 그런 서문이 있는 책은 미국책이었던 것 같네요.

영화 크레디트가 연상되네요. 이 창작물이 완성되는 데까지 도움을 준(세세한 사항에서라도) 사람들을 기록해 놓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거기에 이름이 실린 사람들 빼고는 잘 안 볼 것 같다는 점에서요. ^^;

balmas 2005-05-14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ㅎㅎ 재미있으시면 추천도 한 방 해주셔야죠. ^^;;;
이 글 2편도 있는데, 지금 정작 제 역자 후기 쓰느라고 2편은 조금 더 있어야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MANN/ ㅋㅋ 그렇지, 관련된 사람들이야 꼼꼼하게 보겠지만, 보통 사람들이야
누구 이름이 거기 있는지 기억 못하겠지 ...

stella.K 2005-05-14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그 정도는 아닌데...2편 잘 쓰시면 할께요. ㅋㅋ.

balmas 2005-05-14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 두고 보겠습니다.

chika 2005-05-14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역자 후기를 길게 쓰시나요? 시시콜콜이? 그...그렇다면, 알라딘 얘기도 등장할까요? 책의 출판과정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문제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과정에서 좋은 말씀을 해 주신 알라딘 서재지기님들에게 감사의 인사 어쩌구... ㅋㅋㅋ
(이런 생각하니 재밌습니다! ^^)
- 역자 후기를 쓰신다고 하니 완성이군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ㅎㅎ

balmas 2005-05-1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역자 후기가 좀 길긴 긴데, 그런 이야기는 안들어간다죠, 아마. ^^;;

가을산 2005-05-15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폐가 된다는 말 취소! ^^;;
음... 책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으로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아요. ^^ 진짜루요.

balmas 2005-05-15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완전히 엎드려 절받기잖아요 ...
어쨌든 가을산님 말씀에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

krinein 2005-05-16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후기라... 저로서는 그게 길디 긴 감사의 글이건, 신변잡기의 감상이건, 책 내용의 요약이나 서평이건, 책을 둘러싼 원저작의 사정이건, 출판을 둘러싼 일화건, 아니면 그냥 역자가 하고싶은 말이라도 있는편이 훨씬 좋았습니다. 역자의 글이 없거나 부실하면 어쩐지 읽어보기도 전에 짐짓 번역에 대해 신뢰가 떨어졌다는.... 암튼 책 못지 않게 역자 후기도 기대해 봅죠^^

balmas 2005-05-16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크리네인님, 감사 ...
가을산님과 더불어 용기를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

가을산 2005-05-16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따우님 의견 강추입니다!

menwchen 2005-05-17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따우님 의견에 강추 보냅니다...^^*
그리고 아무런 코멘트도 없는 번역판은 우리네 출판 풍토에서 이 물건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공작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워낙에 베끼기 출판이 극성을 부린터라....
우리 출판 풍토에서 그리고 번역이 정말 신뢰를 줄 수 있을 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이런 사람인데, 어쩌구 저쩌구 해서 번역을 하게 되었습니다..뭐 이 정도는 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좋은 것은 소논문을 실어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요^^*
두서가 없네요T.T;

balmas 2005-05-17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하하하, 따우니이이이임~~~~~~~
가을산님, 멘님, ㅋㅋㅋ
그럴 줄 알고 써넣었습니다.
"신부 급구.
아래로 연락 바람. 016 xxx oooo
신부의 소재를 알려주시는 분에게는 후사함."

balmas 2005-05-18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넣고 싶은 마음이야 태평양 같지만,
온동네에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 차마 넣지 못했나이다 ...

로드무비 2005-05-20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넣으세요, 넣어요, 넣으시라니까요.
역자후기 때문에라도 책이 날개 돋힌 듯 팔리지 않을까요?^^

조선인 2005-05-2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저자 서문이랑 역자 후기부터 읽고 책을 읽어요. 다 읽은 다음에 서문이랑 후기 또 읽구요. 사회과학 서적의 경우 길잡이가 없으면 워낙 헤매는 터라. *^^*

balmas 2005-05-20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무비님, 정말 그걸 넣으면 더 잘 팔릴까요?
사실은 저도 잘 모르는 분야의 책에 정성스런 해제가 달려 있으면 반갑답니다.
그 정도 서비스는 있어야 할 텐데 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