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선배들과 사적인 모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떻게 역자 후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한 여자 선배가 정색을 하고서 자신이 최근 사서 읽은 책의 역자 후기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쏟아냈다. 말의 요지는, 자신의 책도 아니고 번역한 책의 후기에다가 그동안 아이들과 놀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느니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남편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느니, 이런 사적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무엇 때문에 늘어놓느냐는 것이다. 자신은 직접 저술한 책에다가도 그런 식의 이야기는 낯 뜨거워서 쓰지 못하겠는데(실제로 그 선배가 저술한 책이나 번역한 책의 서문이나 후기는 매우 짧은 데다가 사적인 이야기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너무한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내가 뭘 어쨌다고 ... -_-a).


그런데 내 생각에는, 그 책이 어떤 책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책을 번역한 사람은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일 것 같다. 사실 유럽의 저자와 미국(영국은 또 미국과는 좀 차이가 있다)의 저자가 서문이나 후기를 쓰는 방식은 상당히 다른 편이다. 유럽의 저자들(물론 인문학 분야의 저자들이다)은 [서문]이나 [후기]를 아예 잘 쓰지 않는 데다가, 쓴다고 해도 거기에는 자신의 사생활과 관련된 내용은 전혀(또는 적어도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이 쓰는 내용은 책의 저술과 관련하여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말(대개 매우 간략하다) 정도이고,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한 표시는 한 두 줄의 헌사(스승이나 동료 또는 아버지나 어머니, 부인이나 남편 등에게 바치는)로 끝내는 경우가 많다(내가 읽은 헌사 중,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감동적이었던 것 중 하나로 “일곱 가지 재능과 일흔 가지 불운을 갖고 계셨던 아버지에게”라는 헌사가 있었다).    


반면 미국 저자들(물론 모두 다 그런 건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이 쓴 저자 서문은 마치 수첩의 한 두 페이지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고유명사들이 길게 나열되어 있다. 책의 저술과 관련하여 학문적으로 도움을 받은 사람에 대한 감사의 표시는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하다. ○○대학의 아무개와 xx는 이런저런 점에 도움을 줬고, 또 △△△대학의 yyy는 책을 한 권 다 읽어줬고, 또 누구는 절반을 읽어줬고, 모모는 한 장을 읽어줬고, ⊗⊗ 대학의 대학원생들은 수업에 열심히 참여해줬고, 특히 그 중에서도 aa, bb, cc, dd는 이렇게저렇게 해줬고, ▽▽ 도서관의 아무개 사서는 자료를 잘 찾아줬고, ZZ 출판사의 누구누구는 참을성 있게 오래 기다려줬고, 익명의 아무개 심사위원은 좋은 비판과 유익한 제안을 많이 해줬고 fff 부인은 타이핑을 열심히 해줬고 ... 이런 식이다. 어떤 때는 100명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수첩에다 일일이 기록해두지 않고서야 그걸 어찌 다 기억할까 ...). 물론 이게 끝이 아니다. 그 다음 이제 가족이나 친척, 친구에 관한 감사의 말이 나올 때다. 귀여운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해줬고, 사랑스러운 우리 남편, 우리 아내, 우리 동생, 우리 엄마, 아빠, 맛있는 파이요리를 해준 무슨무슨 아줌마, 낚시를 함께 가준 누구누구 아저씨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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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5-14 0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이닷! 후다닥.... 후다닥. 근데, 뭐, 역자/저자맘이겠지만, 독자로선 왠만한 작가가 아니고서야 개인적인 얘기 쓰는건 훌훌 넘어가고 재미없을것 같은데 말이죠.

NA 2005-05-14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득키득 아마 영화 아카데미 시상식의 영향력이 아닐까 싶군요^^ 미국 사람들이 원래 인사치례가 심한 편입니다. 저도 적응을 못하는데, 하루에 열두번을 같은 사람을 만나도 열두번 모두 '하이, 하우 아 유 투데이, ...오 아임 파인, 그레이트'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집에 큰일이라도 났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죠. 아, 그리고 꼭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줘야 된다고(이 부분이 특히 저는 어려워하는 부분인데). 안 그러면 섭섭해 한다고... 좀 과장이 섞였겠지만 ... 대충 사실인 듯 싶습니다. 모두들 행복병에 걸렸다고나 할까. 셀프 에스팀 암이라는 병도 있는데, 행복병과 다를 바 없는 병이겠지요. 이 나라에서는 '난 내가 싫어'라는 말 하면 정신병원에 보내려 듭니다. 좀 이상한 나라죠. 후기 잘 쓰시기 바랍니다. ^^

가을산 2005-05-14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역자 후기라도 가족에게 고맙다는 말 정도는 봐줘도 될 것 같아요.
근데, 역자 후기가 너무 길어서 - 어떤 후기는 20쪽이 넘는 경우도 봤어요. - 마치 후기를 빌어서 요점 정리 및 자신의 의견을 줄줄 늘어놓아서 오히려 책에 폐가 되는 경우도 봤어요.

chika 2005-05-14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의견에 한표!
제가 기억하는 감동적인 헌사는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를 쓰고 아내에게 바친 헌사요. ^^

클리오 2005-05-14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 후기는 주로 조심스럽게들 쓰기 때문에 잘 모르겠구요. 저자 서문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파리의 치마 밑'의 서문. 장장 10여 페이지에 이르는데 그동안 자신에게 학문적 공격을 펼쳤던 사람을 실명만 거론하지 않을 뿐 집요하게 반박하고 있죠.. ^^ 저자 후기가 요즘 자세해지는 것은, 재미있기도 하잖아요.. 학문적인 면에서는 저자가 서 있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관점'(편견)에 대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하구요.. ^^ 전 저자,역자 후기 재밌어요...

마냐 2005-05-14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저자, 역자 후기 좋아해요. 그리고 무성의하게 이름 주르륵 나열하는 경우와 한 사람, 한 사람 고마움이 느껴지는 그런 경우를 비교해보는 재미두 있구..ㅋㅋㅋ

balmas 2005-05-14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ㅎㅎ 정말 그렇죠. 이름만 한 100여개 나열되어 있는 <감사의 말> 같은 걸 보노라면, <쫌> 그렇더라구요.
ctrl님/ ㅋㅋ 그렇군요. 옛날 우리나라 양반들이 서로 인사하는 것을 재현한 광경을 본 적이 있는데, 한 5분 넘게 서로 계속 절을 주고받으면서 이런저런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데, 정말 대단하더라구요. 미국도 조금 있으면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요? ^^
가을산님/ 흑흑, 바로 그런 폐의 주범이 바로 저랍니다.(-_-v) 지난 번 [헤겔 또는 스피노자]도 그랬고 이번에도 20페이지가 넘어간다죠 ... ㅠ.ㅜ
치카님/ 가을산님과 이하동문 ...
클리오님/ 그것도 뭐 잘 써야 재미있는 게 아닐까요? ㅎㅎ
마냐님/ 글쎄 말예요, 그런 걸 좋아하는 분들이 꽤 많더라구요. 여자분들 중에는
특히 아내(남편)와 아이들이나 가족, 친구 등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써놓은
서문이나 후기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stella.K 2005-05-14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이 글 재밌네요. 저는 서론이나 역자 후기에서 뒷부분은 그다지 읽지는 않죠. 근데 짧막하게 누구한테 감사한다 정도는 좋은데 주절이 주절이 이름 밝히는 건 좀 짜증나요. 그래서 뭐 어쩌라구? 뭐 그런 식이죠.
이거 2편도 있나 보죠? 언능 쓰세요!

MANN 2005-05-14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차이가 있었군요- 저도 "A는 ~를 해 줬고, B는 ~를 해 줬고..." 이런 식으로 잔뜩 나열한 서문을 보고 무척 신기해했던 적이 있거든요(그 상세함에, 그리고 그걸 다 기억했다는 점에;). 물론 다 기억한 게 아니라 어디 기록해놓은 거겠지만, 그런 것까지 빼먹지 않고 다 기록해놓았다는 것도 신기하고... 그러고보니 그런 서문이 있는 책은 미국책이었던 것 같네요.

영화 크레디트가 연상되네요. 이 창작물이 완성되는 데까지 도움을 준(세세한 사항에서라도) 사람들을 기록해 놓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거기에 이름이 실린 사람들 빼고는 잘 안 볼 것 같다는 점에서요. ^^;

balmas 2005-05-14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ㅎㅎ 재미있으시면 추천도 한 방 해주셔야죠. ^^;;;
이 글 2편도 있는데, 지금 정작 제 역자 후기 쓰느라고 2편은 조금 더 있어야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MANN/ ㅋㅋ 그렇지, 관련된 사람들이야 꼼꼼하게 보겠지만, 보통 사람들이야
누구 이름이 거기 있는지 기억 못하겠지 ...

stella.K 2005-05-14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그 정도는 아닌데...2편 잘 쓰시면 할께요. ㅋㅋ.

balmas 2005-05-14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 두고 보겠습니다.

chika 2005-05-14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역자 후기를 길게 쓰시나요? 시시콜콜이? 그...그렇다면, 알라딘 얘기도 등장할까요? 책의 출판과정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문제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과정에서 좋은 말씀을 해 주신 알라딘 서재지기님들에게 감사의 인사 어쩌구... ㅋㅋㅋ
(이런 생각하니 재밌습니다! ^^)
- 역자 후기를 쓰신다고 하니 완성이군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ㅎㅎ

balmas 2005-05-1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역자 후기가 좀 길긴 긴데, 그런 이야기는 안들어간다죠, 아마. ^^;;

가을산 2005-05-15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폐가 된다는 말 취소! ^^;;
음... 책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으로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아요. ^^ 진짜루요.

balmas 2005-05-15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완전히 엎드려 절받기잖아요 ...
어쨌든 가을산님 말씀에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

krinein 2005-05-16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후기라... 저로서는 그게 길디 긴 감사의 글이건, 신변잡기의 감상이건, 책 내용의 요약이나 서평이건, 책을 둘러싼 원저작의 사정이건, 출판을 둘러싼 일화건, 아니면 그냥 역자가 하고싶은 말이라도 있는편이 훨씬 좋았습니다. 역자의 글이 없거나 부실하면 어쩐지 읽어보기도 전에 짐짓 번역에 대해 신뢰가 떨어졌다는.... 암튼 책 못지 않게 역자 후기도 기대해 봅죠^^

balmas 2005-05-16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크리네인님, 감사 ...
가을산님과 더불어 용기를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

가을산 2005-05-16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따우님 의견 강추입니다!

menwchen 2005-05-17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따우님 의견에 강추 보냅니다...^^*
그리고 아무런 코멘트도 없는 번역판은 우리네 출판 풍토에서 이 물건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공작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워낙에 베끼기 출판이 극성을 부린터라....
우리 출판 풍토에서 그리고 번역이 정말 신뢰를 줄 수 있을 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이런 사람인데, 어쩌구 저쩌구 해서 번역을 하게 되었습니다..뭐 이 정도는 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좋은 것은 소논문을 실어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요^^*
두서가 없네요T.T;

balmas 2005-05-17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하하하, 따우니이이이임~~~~~~~
가을산님, 멘님, ㅋㅋㅋ
그럴 줄 알고 써넣었습니다.
"신부 급구.
아래로 연락 바람. 016 xxx oooo
신부의 소재를 알려주시는 분에게는 후사함."

balmas 2005-05-18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넣고 싶은 마음이야 태평양 같지만,
온동네에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 차마 넣지 못했나이다 ...

로드무비 2005-05-20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넣으세요, 넣어요, 넣으시라니까요.
역자후기 때문에라도 책이 날개 돋힌 듯 팔리지 않을까요?^^

조선인 2005-05-2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저자 서문이랑 역자 후기부터 읽고 책을 읽어요. 다 읽은 다음에 서문이랑 후기 또 읽구요. 사회과학 서적의 경우 길잡이가 없으면 워낙 헤매는 터라. *^^*

balmas 2005-05-20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무비님, 정말 그걸 넣으면 더 잘 팔릴까요?
사실은 저도 잘 모르는 분야의 책에 정성스런 해제가 달려 있으면 반갑답니다.
그 정도 서비스는 있어야 할 텐데 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