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정치학의 아포리아: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


  그렇다면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스피노자 정치학의 문제 또는 대상은 어떤 것인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는 대중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의 1부에 수록된 {스피노자와 정치}에서부터 2부의 「스피노자, 반오웰」이나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는 개념은 발리바르가 스피노자 정치학을 해석하는 가장 중심적인 개념으로 작용하고 있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는 개념은 사실은 스피노자가 고대 로마의 역사가였던 타키투스의 {연대기Annales}에서 따온 “[대중들은] 공포를 느끼지 않으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Terrere nisi paveant”는 문장에서 유래하는 것이다(스피노자는 {정치론} 7장 27절과 {윤리학} 4부 정리 54의 주석에서 각각 한 차례씩 이 표현을 인용하고 있다). 이처럼 스피노자가 불과 단 두 차례 사용한 표현에 불과하지만, 발리바르는 이 문장, 또는 이 문장을 통해 표현되는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는 개념이 스피노자 정치사상의 이론적 핵심 및 그것이 내포하는 근본적인 아포리아를 드러내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중적 공포야말로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온전한 민주주의의 구성 불가능성을 보여주며, 더 나아가 근대 정치학에서 전개된 민주주의 개념 자체의 아포리아를 집약적으로 표현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발리바르는 네그리와 갈라지고 있다. 

  네그리는 1981년 {야생의 별종}이라는 스피노자 연구서를 출간함으로써 스피노자 연구에 일대 전환점을 마련해주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정치론}에 나오는 물티투도multitudo 개념, 또는 국내 네그리 연구자들의 번역을 따른다면 “다중” 개념을 스피노자의 정치학, 더 나아가 스피노자 철학 체계의 핵심 개념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이 다중 개념에서 초월적ㆍ법적 매개 없이 스스로 자신의 생산적ㆍ정치적 역량을 구성하고 표현할 수 있는 정치적 존재론의 토대를 발견한다. 곧 이 개념은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을 저술하면서 경험한 현실의 정치적 세계, 다중의 상상적 역량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그 이전까지의 초월적 형이상학을 포기하고 그 대신 다중 자신의 자발적인 구성의 역량을 표현하기 위해 제시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는 이 개념이 스피노자 사상의 단절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근대 정치사상에서 가장 대담하고 가장 완성된 해방의 존재론의 기초를 제공해준다고 간주한다. 네그리에 따르면 다중은 자율적인 집합적 주체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반대로 발리바르는 1982년에 처음 발표된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라는 논문에서 물티투도, 또는 발리바르 자신이 제시한 번역어에 따르면 “대중들masses”이 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 개념이라는 점에서는 네그리에 동의하지만, 이 개념의 중요성은 이중적 측면에 있다고 주장한다. 곧 대중들, 또는 대중운동을 표현하는 물티투도라는 개념은 기존의 법적ㆍ제도적 질서를 초과하는 정치적 세력이 항상 존재한다는 점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이는 그 자체로 자율적이거나 능동적인 해방의 역량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양가적인 성격을 띠는 역량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발리바르가 분석하고 강조하는 것이 바로 타기투스의 인용문을 통해 표현되는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는 개념이다. 곧 발리바르는 이 문장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 통치자들이 무자비하고 걷잡을 수 없는 대중들의 소요와 폭력에서 느끼는 두려움(“대중들에 대한 공포”)이며, 다른 한편으로 대중들이 통치자들의 권력과 압제에 대해 느끼는 공포(“대중들의 공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통치자들로서는 기성의 법적ㆍ제도적 질서 안에 존재하지만 이 질서로 완전히 포섭하거나 억압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끊임없이 이 질서를 동요시키고 위협하는 대중들의 집합적 행동이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또 반대로 대중들의 편에서는 자신들의 사고와 행위의 자유를 제한하고 이에 대한 저항을 처벌과 폭력으로 억압하는 통치자들의 폭력이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가 이러한 이중적인 공포야말로 국가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점을 인식했지만, 동시에 이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이론적으로 고심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정치론󰡕이 민주정을 다루는 11장에서 단 4절까지만 진행된 채 중단된 것은 그의 죽음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이론적 아포리아의 표현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발리바르는 바로 이 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이론적 강점이라고 본다. 곧 이러한 대중들의 양가성을 이상적인 규범적 모델(곧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 등에서 자주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 자연적인 국가”,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로서 민주주의)에 따라 가상적으로 해소하거나 심지어 보수주의적으로 통제, 억압하려고 하지 않고, 이것이 함축하는 난점들을 끝까지 전개하면서 당대의 주어진 이론적ㆍ정치적 공간 속에서 이 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 스피노자의 이론적 독창성과 현재성이 있다고 본다.

  어떤 점에서 이것이 이론적인 강점이 될까?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떤 점에서 이것이 스피노자의 이론적 현재성의 핵심적인 내용이 될까? 이 책에 수록된 발리바르의 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얼마간 다른 강조점을 지닌 답변들이라고 할 수 있다. 


 1) 자기 자신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


우선 발리바르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는 이중적 공포는 사실은 대중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공포에서 유래한다는 점이다. 곧 대중들이 스스로의 정념적인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절하지 못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을 자율적인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대중들에 대한 공포와 대중들의 공포를 낳는 핵심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발리바르의 분석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표현되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그렇다.


[{정치론} 7장 27절의]이 분석은 다음과 같이 다시 표현될 수 있다. 곧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 주권자와 시민들은 동등하게 다중의 일부를 형성한다. 따라서 최종 심급에서 근본적인 질문은 항상 다중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곧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킬 수 있는 자질의 문제가 된다.(이 책 107쪽[쪽수 확인])


하지만 스피노자는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절대 권력이 실존한다면, 이는 인민 전체가 소유하는 권력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적 계산의 논리에 따르면 군주제와 귀족제 이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문제를 민주정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러한 한 걸음은 용어모순이다. 곧 항상 이미 대중 전체에 속하기 때문에, 대중으로 복귀할 위험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나 있는 권력이라는 개념은 도대체 어떤 것일 수 있겠는가?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대중이 본성상 “권력의 보유자들에게 가공할 만한 존재라면”({정치론} 8장 4절),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사실상 권력을 절대적이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면, 한계(민주정)로 이행한다 해도 권력을 보유한 대중이 대중 자신에게 가공할 만한 존재가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지극히 미약한 수준에서라도―어떻게 보증할 수 있는가?(이 책 179쪽[쪽수 확인])


  이 구절들에서 발리바르가 주목하고 있는 점은 우선 민주주의 개념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법적 관점에서 정의된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아포리아다.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법적인 정의에 따르면 군주정은 군주 혼자서 주권자 곧 통치자가 되는 정체이고, 귀족정은 다수의 귀족들이 통치하는 정체이며, 민주정은 “인민 또는 대중들의 집합적 통치”다. 따라서 이러한 분류법에 따를 경우 민주정은 인민이나 대중들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스피노자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정치체의 안전을 위해서는 “대중들로의 복귀”를 피해야 한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대중들로의 복귀는 주권의 통일성의 와해, 따라서 정치체의 해체를 의미하며, 이는 결국 자연상태로의 복귀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중들은 한편으로는 민주정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통치자의 위치에 놓여야 하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체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피해야 하는 대상의 위치에 놓이기도 하는 셈이다.

  따라서 형식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을 정치의 공간에서 배제하거나(이것이 바로 홉스의 노선이다) 아니면 대중들이 이미 자치의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고 (부당) 전제하거나 해야 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 두 가지 노선을 모두 거부하면서 한편으로는 ({정치론} 3장 2절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1)) 대중들이 모든 정치체의 기초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들의 자치의 불가능성을 긍정하고 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엔 비일관적인 것으로 보이는 스피노자의 이러한 모순적인 태도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첫째, 대중들이 모든 정치체의 기초에 놓이게 되므로, 군주정이나 귀족정 역시 법적 정의와 무관하게, 또는 그에 앞서 자신의 존재를 대중들의 역량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군주정이나 귀족정이 자신의 정체政體를 보존하고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곧 정치적 “절대성”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적 질서 안에 대중적인 토대를 확보해야 한다. 이는 곧 대중들의 욕망과 의견이 충분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정치적 결정 과정에서 대표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는 군주정이나 귀족정 내부에서 항상 이미 민주주의 또는 민주화 과정이 진행되고 있고 또 진행되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둘째, 대중들이 그 자체로 통치의 역량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곧 대중들이 스스로의 정념을 합리적으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대중들의 통치 역량을 증대시키는 문제는 민주주의의 고유한 정치적 과제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제는 모든 민주주의는 항상 자기 내부에 분열을, 따라서 갈등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중들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대중들이 둘로(그 이상으로) 분할된다는 것, 따라서 필연적으로 갈등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구조적인 것이다. 곧 이러저러한 계몽주의적 교육이나 주의주의적인 동원 또는 제도적인 대의장치의 마련 등을 통해 온전히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이는 이런 방법들이 전혀 무익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왜 이러한 갈등이 나타나고, 또 그 경우 어떤 정치적ㆍ제도적인 해결책이 발명되어야 하는지 좀더 체계적으로 해명될 필요가 있다. {신학정치론}에 대한 발리바르의 분석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시사적인 통찰을 제공해주고 있으므로, 좀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신정 분석의 의미


  이 책 1부 2장에 나오는 발리바르의 {신학정치론} 해석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선 이 해석은 {“자본”을 읽자}에 나오는 알튀세르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새롭게 해명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읽기라는 문제, 따라서 글쓰기/기록하기écrire라는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인물인 스피노자는 또한 역사이론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을 처음으로 제시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Althusser 1996c, p. 8. 강조는 알튀세르)


스피노자에 대한 알튀세르의 논의 중에서 제일 덜 주목받고 있지만, 또한 제일 놀라운 사례 중 하나로 꼽힐 만한 이 주장은 겉보기에는 매우 당혹스러운 주장이다. 사실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역사에 관한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또 역사에 대한 고찰이 전혀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 주제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상당히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역사철학 또는 역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18세기 말 계몽주의 이후, 특히 독일 관념론 이후 하나의 철학적 주제로 등장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알튀세르의 지적은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라는 비난까지 받을 만하다.

  그런데 여기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역사이론은 그것 혼자서만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과 결부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마치 후자가 없이 전자는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이 양자를 결부시켰다는 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고유한 철학적 업적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읽기”라는 문제, “글쓰기/기록하기”라는 문제와도 결부시키고 있다.

  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가 거의 언급하지도 않은 그의 “역사이론”에 주목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 역사이론이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더 나아가 이는 “읽기”나 “글쓰기/기록하기”의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처럼 의문들은 끊임없이 생겨나지만,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에 관한 그의 다른 언급들과 마찬가지로, 대담한 주장을 한 마디 던져놓은 다음, 마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다른 논의로 성큼 건너뛰고 있다.

  발리바르의 해석은 바로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해주는데, 왜냐하면 그는 바로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에서 하나의 역사이론(“역사철학”이 아니라)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발리바르는 성서에 나타나 있는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 및 전개과정을 분석하고 있는 17장만이 아니라 성서에 대한 역사적 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신학정치론}의 전반부(곧 1장-15장)의 분석 역시 하나의 역사이론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먼저 그는 스피노자의 성서 비평은 “이차 수준의 역사”(또는 스피노자의 표현대로 하면 “비판적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성서는 히브리 백성들의 상상에 기초를 둔 하나의 역사적 담론이며, 스피노자의 성서 비평은 이러한 역사적 담론에 대한 이차적 담론, 곧 비판적 역사라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그는 성서는 바로 서사敍事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서사는 히브리 민족의 고유한 역사적 기록/글쓰기의 관행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알튀세르의 표현대로 “글쓰기/기록”이라는 문제, 그리고 이에 대한 “읽기/독해”의 문제를 역사의 문제이자 철학의 문제로 제기한 최초의 인물인 셈이다.    

  그리고 발리바르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역사이론을,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자면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 곧 대중들의 상상이라는 문제와 결부시킨다. 발리바르의 분석에서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상상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제시되고 있다.

  우선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무지가 있다. “이러한 이차 수준의 서사는 재구성될 수 있는 한에서의 사건들의 필연적인 연쇄과정 및, 자신들을 움직이는 원인들 대부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역사적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역사의 “의미”를 상상하는 방식을 자신의 대상으로 한다.”(이 책, 쪽[원고 파일 26쪽]) 대중들의 상상은 비판적 역사의 필연적인 구성 요소인데, 왜냐하면 이러한 비판적 역사의 소재를 이루는 성서 및 히브리 인민의 삶 자체가 상상의 요소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대중들의 삶이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실제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이를 상상에 따라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는 스피노자의 일반적인 인간학적 테제에서 따라나온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고 있지만,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야기시킨 원인들에 대해서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는다."({윤리학} 1부 「부록」) 자신들의 욕망은 의식하되 그러한 욕망을 낳은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가상을 낳으며,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현실의 진정한 창조주(곧 전능한 의지와 권능을 가진 존재자)에 대한 또다른 가상을 낳는다. 이러한 자유와 목적론의 가상은 인간의 근본적인 두 가지 가상이며 미신의 온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서의 서사가 이러한 가상에 기초하여 전개된다는 것은 스피노자 인간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따라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의 기초가 되었던 정치적 상상의 요소가 있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17장에서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가 주목하는 것은 히브리 국가의 구성이 일종의 계약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계약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이중적인 계약의 형식을 띠고 있다. 곧 이는 주권자와 신민들 사이에 맺어지는 정치적 계약이면서 동시에 야훼라는 신에 대한 개개의 신자들(곧 개개의 히브리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종교적 계약이기도 하다2). 따라서 히브리 백성들에게 신은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주권자이기도 하며, 신의 계율의 위반은 동시에 국법의 위반을 의미했다. “요컨대 시민법과 종교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 국가는 신정 국가라 불릴 수 있었다.({신학정치론} 17장 7-8절, 282-283; 모로판, 544-546)”

  스피노자 자신이 말하고(“이 모든 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의견opinione magis quam re에 속하는 것이다.” {신학정치론} 17장 8절, 모로판, 546; 이 책, 76쪽)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이중적 계약이라는 것은 물론 하나의 허구다. 하지만 이러한 허구는 매우 실제적인 효과를 낳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허구를 통해 하나의 국가가 구성될 수 있었고, 적어도 모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놀랄 만한 안정과 번영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구가 이처럼 중요한 결과를 낳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신을 각 개인의 신으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히브리 민족 전체의 신으로, 따라서 히브리 국가의 유일한 주권자로 만듦으로써, 각자가 신에게 바치는 절대적 헌신과 복종이 동시에 국가에 대한 헌신과 복종으로 되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왜 이러한 이중적 계약이 필요한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는 무엇보다도 오랜 노예 생활 때문에 스스로 국가를 구성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히브리 인민들의 “미개인 같은 심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허구에 기초한 히브리 신정국가는 역사적으로 유일한 국가인 것처럼, 일반적인 설명적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여기서 보편적인 논점을 도출해낸다. 곧 발리바르는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스피노자 분석의 요체를 민주주의(또는 국가 일반)에 대한 법적 관점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발리바르는 신정이 내포하는 이중적 측면에 주목한다. 신정은 한편으로 민주정과 등가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과의 계약을 통해 신에게 모든 권력을 부여하고 자신들을 신의 백성으로 재인지함으로써, 히브리인들 모두는 신 앞에서 동등한 신의 백성들, 신의 시민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상상적 민주정”은 민주정의 핵심인 집합적 권리, 집합적 주권을 “다른 무대”로 옮겨놓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곧 신정에서 인민들 스스로가 동등하게 집합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이는 신이라는 진정한 주권자가 초월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한에서다(곧 신의 거주지로서 신전이 특별한 경배와 존경의 대상이 되는 한에서). 따라서 신정은 집합적인 주권이 초월적인 신의 자리, 비어 있는 상징적 자리의 매개를 통해서만 실행될 수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발리바르의 질문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제 고유한 의미의 민주정으로 되돌아가 보자. 개인들이 신과의 동맹이라는 허구(곧 주권의 상상적인 자리 이동) 없이도 명시적인 “사회계약”에 따라 직접 집합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명되면, 문제는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대중들의 미신은 차치한다 해도, 이는 분명히 그렇지 않다. 권리의 동등성과 의무의 상호성 위에 구성된 민주 국가는 개인적 의견들의 결과인 다수결 법칙에 따라 통치된다. 그러나 다수결 법칙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주권자가 공적인 이익과 관련된 활동을 명령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존중받을 수 있게 만드는 절대적 권리를 지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 외에도 또한 야심들보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선호하는 것, 곧 “이웃을 자기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의 필요성에 대한 합의가 지배하고 있어야 한다.(이 책, 77쪽)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일회적인 것에 불과한 히브리 신정국가는 사실은 정치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중요한 보편적 교훈을 제공해준다. 그것은 첫째, 법적 제도만으로는 민주주의(또는 국가 일반)는 충분한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대중들의 정념적 삶을 조절할 수 있는 별도의 메커니즘 내지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둘째, 하지만 정념적 삶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종교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히브리 신정국가가 개인들의 종교적 삶과 정치적 삶을 일체화함으로써 상당한 기간 동안 정치적 통합을 이뤄내긴 했지만, 이러한 국가의 통합, 일체화는 그 자체가 정념적인 양가성에 지배받고 있다. 왜냐하면 신자들끼리의, 국민들끼리의 놀라운 유대는 신과의 동일시/정체화를 매개로 한 서로에 대한 정념적 사랑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랑의 이면은 초월적인 신의 감시와 처벌에 대한 공포와 잠재적인 적으로서 이웃에 대한 일반화된 증오를 동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예수는 이처럼 종교적 삶과 정치적 삶을 일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삶을 정치적, 교권적 권위로부터 분리하여 이를 각자의 믿음과 판단에 따른 윤리적 실천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하나의 문화혁명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는 신자로서의 개인들을 정치적 권위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자체로부터 분리시켰으며, 또 그에 비례하여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신의 말씀을 내면화된 도덕법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또다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셋째, 상상계가 개인의 삶 및 사회적 삶에서 구성적인 요소로 존재하는 한에서 대중들은 ‘자기 자신’(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과 합치할 수 없다는 것, 곧 대중들은 온전한 자율적 주체로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반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대중들은 초월적인 타자(신이나 절대 군주)와의 동일시/정체화를 통해서만 통일성을 얻을 수 있으며, 이 경우 대중들의 역량은 쉽게 자기 자신에 맞선 파괴적인 역량으로 전도되기 쉽다는 점에 상상적인 동일시/정체화의 위험이 존재한다.  


1)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 인도되는 듯한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

2)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개념, 특히 호명 테제와 이중적 거울 구조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이 분석에 준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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