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으로서 스피노자 철학


  스피노자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아마도 범신론자라는 편견만큼이나 뿌리 깊은 편견 중 하나는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의 편견이라면, 이는 스피노자가 형이상학자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1), 스피노자가 형이상학자라는 사실을 이유로 스피노자가 정치학자라는 점을 (원칙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자다라는 언표는 암묵적으로 스피노자에게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정치학이 없다는 언표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좀더 미묘한 형태로 변형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가 정치적 저술을 남기긴 했지만, 역시 스피노자 철학의 본질 내지는 요체는 그의 형이상학에 있다는 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좀더 구체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의 본질 내지는 요체는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이 아니라 󰡔윤리학󰡕에 있다고 표현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경우 범위는 다시 더 좁혀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윤리학}은 5부로 이루어져 있고, 1부에서 5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부는, 상이한 제목이 달려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상이한 논의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 이런 식의 주장이 제기되곤 한다. 곧 {윤리학}의 핵심은 1부에 있는데, 왜냐하면 「신에 대하여De Deo」라는 제목이 붙은 데서 알 수 있듯이 1부는 유일한 실체로서 신을 주제로 하고 있고, 바로 여기서 형이상학이 논의되기 때문이다2). 또는 마르샬 게루가 {윤리학} 1, 2부에 대한 기념비적인 주석서를 남긴 데서 알 수 있듯이, 존재론을 다루는 1부와 인식론을 다루는 2부가 {윤리학}의 핵심이라는 주장을 듣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 경우 배제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사소한 것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왜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의 요체를 담고 있는 이 책에 {제 1철학}이나 {형이상학} 또는 그냥 간단히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하필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왜 그는 1부와 2부로 끝내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길게 5부까지 책을 썼을까? 물론 다음과 같은 질문은 더욱 더 제기되지 않는다. 왜 그는 {윤리학}의 집필을 중단하고 5년여 동안이나 {신학정치론} 같은 사소한 책을 쓰는 데 몰두했을까? 왜 그는 생애의 말년에 {정치론} 집필에 몰두했으며, 왜 그럼에도 그 책을 완성하지 못했을까?  

  이 책에 수록된 발리바르의 글들이 공통의 출발점으로, 곧 공통의 비판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이러한 편견들이다. 발리바르는 이 책 첫머리에서 바로 이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스피노자와 정치. 처음 보기에는 단순한 이 정식에 얼마나 많은 역설이 존재하는가! 만약 정치가 역사의 질서라면, 여기 이 철학자는 자신의 전 체계를, 인식은 신을 인식하는 것이며 “신은 곧 자연”이라는 관념의 전개로 제시한다. 만약 정치가 정념의 질서라면, 여기 이 철학자는 인간의 욕망 및 활동을 “기하학자들의 방식에 따라 [...] 곡선과 평면, 입체의 문제들”(󰡔윤리학󰡕 3부 서문)로 인식하자고 제안한다. 만약 정치가 현재성 안에서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면, 여기 이 철학자는 현자와 훌륭한 주권자란 모든 독특한 사물을 “영원성의 관점에서”(󰡔윤리학󰡕 5부) 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그가 우리에게 순수한 사변이 아닌 정치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가?(이 책, 9쪽)


  이런 편견에 맞서 발리바르는 처음부터 자신의 과제를 “스피노자 정치학의 문제들로부터 출발하여 이 문제들의 통일성을 탐구하면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소개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또 「대중들의 공포」에서는 “스피노자의 사상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는 점을 긍정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사상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는 주장은 그 자체로 일의적인 것은 아니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가령 알렉상드르 마트롱은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자들 중에서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에서 정치학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체계적으로 입증한 사람인데, 그에게 스피노자의 사상이 정치적이라는 주장은 발리바르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곧 그에게 이 주장은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에 함축되어 있는 개체성에 관한 일반 명제로부터, 또 {윤리학} 3부 이하에서 전개되는 인간학에 관한 명제로부터 체계적으로 연역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역으로 󰡔{윤리학}으로 대표되는 스피노자의 체계는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관한 논의를 통해서만 완결될 수 있다는 점을 뜻한다. 따라서 마트롱은 {윤리학}의 마지막 5부에 나오는 (겉보기에는) 매우 수수께끼 같고 비의적秘義的인 내용들이 사실은 정치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3)

  반면 네그리 같은 경우는 마트롱과 달리 스피노자의 체계는 연역적이고 통일적인 게 아니라, 단절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은 초기부터 후기까지 변화하지 않은 채 완전한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근본적인 단절을 경험한다. 이러한 단절은 바로 1665-1670년에 이르기까지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을 집필하던 시기에 발생했는데, 이를 통해 스피노자는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자에서 실천적인 구성의 정치학자로 변모한다. 다시 말해 마트롱의 주장과 달리 {윤리학} 1-2부에 담겨 있는 스피노자의 철학은 르네상스의 신플라톤주의 신학의 유산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초월적 형이상학이며, 스피노자 철학의 정수, 스피노자 철학의 진정한 핵심은 {윤리학} 3-4부와 {정치론}에 담겨 있는 실천적 구성의 존재론/정치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에게 “스피노자의 철학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면, 이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과의 단절을 먼저 요구한다. 

  이 책에서 발리바르가 택하고 있는 입장은 이 두 사람의 관점과 모두 구분된다. 우선 그는 네그리와 달리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과 정치학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곧 발리바르의 관점에 따를 경우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스피노자 존재론을 특징짓는 자연주의적 관점에 따라 논증되고 서술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존재론(및 인식론)은 정치학의 주장 및 분석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적인 전제 또는 적어도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정치학의 논의에 내재적인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마트롱과 달리 존재론과 정치학의 관계는 연역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곧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정치학에 관한 논의는 그의 형이상학적 기초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존재론에 내재한 난점 내지는 아포리아를 드러내고, 또 더 나아가 이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이는 특히 2부 첫 번째 논문에 나오는 대중들이라는 개념 또는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라는 개념에 대한 분석에서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네그리처럼 양자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파악하지는 않지만,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그의 형이상학 체계에 대해 파생적인 위치에 있지 않고 구성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네그리에 좀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발리바르가 네그리와 공유하고 있는 또다른 점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당대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정세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트롱은 스피노자의 정치학을 그의 철학 체계로부터 엄밀하게 연역해내는 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당대의 정세와 같은 ‘외재적인’ 요인들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는 반면4), 네그리와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철학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이데올로기적 형세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또 그것들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변모하고 발전해 나갔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다만 네그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관계라는 좀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을 채택하여, 스피노자의 철학적 발전을 발흥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대한 해방적 생산력의 저항과 대응이라는 노선 위에서 고찰하고 있는 반면5), 발리바르는 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기론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정치적 개입과 이론적 분석을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차이는 네그리가 스피노자에서 마르크스에 결여된(또는 마르크스를 능가하는) 정치적 존재론(다시 말해 해방적인 생산력을 이론화할 수 있는 개념적 수단)을 찾고 있는 반면6), 발리바르는 이 책 2부의 세 번째 논문이 보여주듯이, 스피노자에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또는 일반화된 경제론)을 보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 비판(또는 일반화된 이데올로기론)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에게 “스피노자의 철학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면,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이라는 두 가지 저서로 축소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 이 두 권의 저서야말로 스피노자의 가장 중요한 저서라고 주장한다는 뜻도 아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당대의 네덜란드 연합주 공화국에서 제기되었던 정치적 쟁점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심과 개입으로부터 자신의 문제, 자신의 대상을 얻어왔으며, 이러한 문제, 대상은 󰡔윤리학󰡕을 포함한 스피노자의 성숙기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정치학, 더 나아가 현실의 정치적 쟁점에 대한 그의 개입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 우리가 이 말을 비판적인 의미(곧 칸트 이래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온 서양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된)가 아니라 통용되는 의미에서, 곧 제 1철학적인 주제들에 관해 깊은 사변을 전개하는 철학자라는 의미에서 받아들인다면.

2) 이는 사실은 헤겔로부터 유래하는 태도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마슈레 2004 참조. 

3) 특히 Matheron 1969 참조. 그 이후 발표한 여러 논문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에 관한 마트롱의 생각은 조금씩 변화하고 좀더 치밀하게 다듬어지고 있지만, 이런 점에서는 불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욱이 마트롱은 80년대 후반 이후에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곧 그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체계적으로 고찰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4) 이런 점에서 마트롱은 스피노자 연구에서 마르샬 게루의 구조적ㆍ발생적 방법론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루는 {윤리학}의 1, 2부, 곧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연구의 대상으로 한정하고 있고(그는 {윤리학}의 나머지 부분들은 그의 연구서 3권에서 다룰 예정이었으나, 죽음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서양 철학의 전통과 스피노자 철학을 매우 체계적으로 대비하여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트롱과 대비되지만, 구조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나 이론적 체계 외부의 요인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트롱과 일치한다. 이는 크리스치안 라체리(Lazerri 1998)나 로랑 보베(Bové 1995) 같은 그의 제자들의 연구에서 마찬가지로 엿볼 수 있는 특징이다. 

5) 네그리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지배관계와 생산력/해방 운동이라는 두 가지 대립항에 대해 매우 체계적으로(그리고 얼마간 독단적으로) 두 가지 사상적 계보를 할당하고 있다. 곧 전자는 홉스에서 루소, 헤겔로 이어지는 초월적 매개의 노선이며, 후자는 마키아벨리에서 스피노자를 거쳐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노선, 다시 말해 일체의 외재적 매개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조직하고 표현하는 내재적 구성의 노선이다.

6) 이러한 스피노자의 정치적 존재론, 특히 다중 개념은 마이클 하트와 공저한 {제국}이나 {다중}의 핵심적인 이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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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5-18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각주 기능이 있으니 정말 편하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