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와 윤리 - 변화와 책임의 사회철학 철학의 정원 8
문성원 지음 / 그린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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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부산대 인문학연구소에서 내는 [코기토]라는 학술지에 수록될 서평입니다.

아직 교정이 다 끝나지 않은 글이니까, 이 글에 대해 논평하거나 토론할 분은

[코기토]에 실린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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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에 기반을 둔 사회철학의 모색

 

 

문성원 교수(이하 필자로 약칭)는 사회철학 전공자나 프랑스철학 전공자에겐 낯익은 이름이다. 루이 알튀세르에 관한 학위논문({철학의 시추}, 백의, 1999)에서 {배제의 배제와 환대}(동녘, 2010)를 거쳐 지금 서평의 대상이 된 이 책에 이르기까지, 필자는 줄곧 현대 프랑스 철학과 사회철학이 만나는 자리에서 사고하고 글을 써왔다. 따라서 프랑스 철학에 입각한 사회철학이 필자의 주요 관심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필자의 이러한 지향이 좀더 뚜렷이, 그리고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특히 레비나스의 철학에 대한 필자의 애정과 관심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의 성격을 레비나스에 기반을 둔 사회철학의 모색이라고 규정해볼 수 있다.

 

이 책은 전체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타자와 책임”이라는 주제 아래 5편의 논문을 싣고 있으며, 로컬리티, 주변, 책임, 이웃, 윤리의 문제에서 타자라는 개념이 어떻게 등장하고 또 어떤 의의를 지니고 있는지 해명하고 있다. 2부는 “새로움과 윤리”라는 제목에 따라 4편의 논문을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용서라는 문제와, “잘 있음”을 넘어서는 “있음과 달리”로서의 윤리의 문제, 시간과 새로움이 함축하는 윤리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 책의 핵심적인 철학적 입장이 표명되고 있는 곳은 바로 2부라고 할 수 있다. 3부는 “표현과 욕망”이라는 표제 아래 이미지, 차이, 욕망과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의 주요 주제들이 논의되고 있다. 마지막 4부에서는 “진리와 정의”라는 제목 아래 좀더 거시적인 사회철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4부에 수록된 글들은 필자의 이전 저작들의 문제의식과 좀더 맞닿아 있는 반면에, 1부와 2부에 수록된 글들은 필자가 좀더 최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현재의 사회경제적, 문화적 질서에 대하여 프랑스 철학, 특히 레비나스의 사상이 어떤 “저항의 장소 또는 적어도 피난의 장소”(7쪽)를 제공해줄 수 있을까라는 화두로 집약될 수 있다.

 

이러한 화두와 관련하여 이 책은 들뢰즈(ㆍ가타리)냐 레비나스냐라는 대결 구도를 논의의 줄기로 삼고 있다. 이는 필자가 보기에 들뢰즈ㆍ가타리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해체론적인 사상, 곧 “유동성과 끊임없이 ‘차이지는 차이’가 근본적임을 입증하는 것이 이들의 지향이며, 짐짓 고정되어 보이는 영토와 체계를 부단한 탈영토화의 운동을 통해 흔들어 놓는 것이 이들의 추구하는 바”(103쪽)인 반면, 레비나스는 “변화를 수용하는 열림의 자세와 아울러 그러한 변화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109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들뢰즈ㆍ가타리의 사상이 “불확실성 속에서 새로움을 기대하고 희구하는” 사상인 반면(필자에 따르면 데리다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역시 “어떤 정해진 해결책이나 정의의 상태가 아니라 약속의 이루어짐에 대한 기다림”(160쪽)이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궁여지책”(161쪽)이라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자기 중심적인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움을 나타내는 타자 개념과 더불어 그 새로움의 해악을 막는 윤리라는 기준을 제시해준다는 것이 이러한 대결 구도가 함축하고 있는 논점이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질서”(109쪽)는 때로는 주변-중심의 관계로 표현되기도 하고, 의사들의 파업 사태로 인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거래 관계에 지나지 않”는 “호혜성의 문제”(59쪽)로 이해되기도 하고, 다위니즘에 기반을 둔 경쟁 이데올로기로 나타나기도 하며, 나르시시즘적인 욕망(3부 3장)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질서를 넘어서는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과 윤리 개념은, 필자에 따르면 대단히 포괄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철학적 통찰을 제공해줄 수 있다.

 

이런저런 기회에 필자의 글을 접해온 평자에게 이 책은 필자의 지적인 미덕 몇 가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현실에 기반을 두고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려는 필자의 지속적인 태도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의 철학자가 한국의 현실에 입각하여 사유하고 성찰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글을 쓰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실제로 이렇게 한국이라는 레퍼런스에 뿌리를 두고 사유하고 글을 쓰는 철학자, 특히 프랑스 철학 전공자를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한국의 철학, 한국의 철학자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곳보다는 그 철학적 고향들인 독일, 미국, 프랑스에 있으며, 그 고향들을 자신들의 레퍼런스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자신들의 삶을 레퍼런스로 삶기에는 그들의 사유가 아직 허약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필자의 일관된 철학적 태도는 매우 드물고 값진 것이라 할 만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덕목은 명확하면서 유려한 글쓰기를 꼽을 수 있다. 이점 역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간주될 수 있지만, 이러저러한 철학적인 주제에 관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필자 자신의 선명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면서 정확히 논의를 전개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의 글과 같이 막힘없이 술술 읽히는 철학적인 글은 설렁설렁 되는 대로 쓰이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오랜 시간을 거쳐 숙달된 문체의 힘과 더불어 일관되고 깊은 문제의식이 곁들여 있기 마련이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젊은 철학도나 인문학도에게 교과서와 같은 모범이 될 만하다.

 

그렇다고 해서 평자가 이 책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이나 불만, 또는 바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자는 줄곧 불만이나 의문을 품으면서 이 책을 읽었고, 그것은 서평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우선 필자의 논의가 다소 개략적이라는 점이 불만스럽다. 필자는 이 책에서 레비나스를 중심으로 들뢰즈ㆍ가타리, 데리다, 알튀세르, 바디우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하이데거나 로티, 월저, 롤즈 같은 독일과 영미 철학자들에 관해서도 폭넓게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평자가 보기에 이들 철학자들 가운데 레비나스에 관해서만 비교적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질 뿐, 다른 철학자들의 경우는 개략적인 인용과 논의 이외에는 깊이 있는 분석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필자 자신이 서두에서 지적하듯(8쪽), 레비나스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개념과 이론을 빌려와서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사고해보려는 필자의 지적 관심에서 비롯한 결과일 수도 있다. 곧 필자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회적으로 부딪히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사유하는 것이지,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론 자체를 면밀히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이 면밀하고 심도 있게 검토되고 설득력 있는 해명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물론 아주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안타깝게도 썩 훌륭한 결과가 산출된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레비나스 철학과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다. “해체와 윤리”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의 철학적 기반은 레비나스 철학에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필자는 레비나스의 철학적ㆍ윤리적 의의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신자유주의의 거침없는 욕망에 휘둘리는 현실 속에서 선명한 저항의 장소 또는 적어도 피난의 장소를 제공해 줄 수”(7쪽) 있으며, 로컬리티의 문제나 분단의 문제(1부 1장)에서도, 의약분업과 관련된 의사 파업의 문제에서도(1부 3장), 경쟁 이데올로기 극복의 과제에서도(1부 4장), 웰빙의 문제(2부 3장)에서도 레비나스는 우리가 해법을 찾을 수 있는 철학적ㆍ윤리적 보고로 제시된다. 따라서 필자가 레비나스의 철학적 위력을 그처럼 높게 평가하고 있는 만큼 이 책에는 레비나스의 사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분석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평자가 보기에 이 책에는 잘 알려져 있는 레비나스 사상의 이런저런 개념들(타자 내지 타인, 전체, 무한, 향유, 거주 등)에 관한, 역시 잘 알려져 있는 이런저런 내용만 제시되고 있을 뿐, 레비나스에 관한 다른 글이나 저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무언가 새롭거나 독창적인 분석이 제시되지는 못하고 있다. 오히려 평자로서는 레비나스를 그처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필자의 태도가 다소 놀랍다.

 

아마도 필자에게 레비나스 철학은, 칸트의 초월론 철학이나 아니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인 준초월론(quasi-transcendentalism)에 비견될 수 있는, 아니 그것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종류의 초월(론) 철학, 곧 타자에 입각한 초월(론) 철학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따라서 필자는 그것을 초월론적 주관성에 입각한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호혜성에 기반을 둔 상호주관성의 철학도 넘어서는, 타자와의 비대칭적 관계에 입각해 있고, 타자의 독특성을 존중하는 매우 새로운 초월(론) 철학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필자가 레비나스의 철학이 이러한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실제로 논증하는 데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필자는 타자와의 비대칭적 관계,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이며, 그것은 호혜성에 입각한 서양 근대의 철학이나 현재의 삶의 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지평을 제공해준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데 그치는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필자가 “나와 타자의 관계는 비대칭적일뿐더러,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은 무한하”(115쪽)다고 말하고, “레비나스의 독특성과 무한은 ... 초월과 직결”(120쪽)된다고 말하면서도 굳이 레비나스 철학에서 종교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그 대신 그것은 “윤리적 초월”(120쪽)이라고 역설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윤리적 초월과 종교적 초월 사이에 그처럼 넘어설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는가? 유일자인 신과의 관계가 구체적인 이웃들, 이웃에 있는 타자들과의 관계로 번역된다고 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초월성의 관계가 사라질 수 있을까? 레비나스가 타자와 관련하여 그 닿을 수 없고 넘어설 수 없는 초월성을 강조하고 타자에 대한 우리의 책임,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한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일상화하고 구체화할수록 그 초월성은 더 강화되는 것이 아닐까?

 

평자가 보기에 필자가 제시하는 레비나스는 신과의 초월적 관계를 새로운 휴머니즘과 도덕주의로 번역하고 싶어 하는 철학자, 이웃사랑을 강조하는 철학자다. 특이한 점은 이웃을 사랑하되, 우선 나 자신과 내 가족을 돌본 뒤에 이웃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나 자신 및 내 가족과 똑같이 이웃을 사랑할 것도 아니라, 나와 내 가족에 앞서 이웃을 사랑할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 사랑은 자아에 앞서야 하는 사랑이고, 동일성 중심적인 질서, 호혜적 관계를 넘어서는 무한한 책임의 모습을 띤 사랑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랑은 말하자면 테레사 수녀 같은 이에게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타자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이 필요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인 사회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게, 또는 “선명한 저항의 장소 또는 적어도 피난의 장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피난의 장소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저항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필자가 레비나스 철학이 신자유주의적 현실에 대한 저항의 장소가 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훨씬 더 먼 길을 걸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필자의 논의와 주장이 때로는 상당히 막연한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논의 자체의 설득력이 약화되는 경우도 눈에 띈다. 가령 필자는 4장 1절에서 다위니즘을 “반목적론의 가장 대표적이고 강력한 형태”(77쪽)라고 말하면서, 의도적 목적을 내세우지 않고도 유기적 조직과 기능의 존재 이유를 잘 설명해줄 수 있다는 점을 다위니즘의 장점으로 들고 있다. 그러나 다위니즘이 “살아남음”에 초점을 두고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음에 대하여 “사태를 지배하고 제어하는 원리의 자격”(79쪽)을 부여함에 따라, 오늘날 사회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는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견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필자가 다위니즘으로 지칭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다윈 사상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다윈 사상을 계승하는 여러 종류의 생물학 이론을 가리키는가? 또는 그 중에서 특정한 일부, 특히 사회생물학이나 유전자 결정론을 지칭하는가? 아니면 다윈 사상에 대한 통속화된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가? 필자가 막연하게 다위니즘이라고 지칭하는 것만으로는 과연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리고 이 경우 필자의 주장은 다윈 사상 전체 및 다윈 사상을 계승하는 여러 생물학의 흐름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윈주의 생물학은 무용한 학문인가? 또는 적어도 다윈주의 생물학 자체는 경쟁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인가? 따라서 경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윈주의 생물학은 모두 배격해야 하는 것인가? 또한 레비나스 철학은 다윈주의 생물학 전체와 대립하는 철학인가? 이런 여러 가지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지만, 과연 필자의 생각이 무엇인지 이 책만으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들뢰즈ㆍ가타리의 철학이 후기-자본주의의 특징적 면모들과 부합하는 발상을 드러내고 있다”(98쪽)거나 “들뢰즈ㆍ가타리의 사회철학은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일종의 비역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99쪽)라는 주장, 또는 데리다가 “이전에는 치열하게 비판했던 레비나스의 타자를 ‘환대’하게”(258쪽) 된다는 주장은 상당히 대담한 주장인데도, 필자는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들뢰즈ㆍ가타리에 관한 주장에 대해서는 주로 지젝이 후원자로 등장하지만, 지젝의 논의가 타당한 근거를 지닌 것인지는 검토되지 않으며, 데리다에 관해서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논거도 제시되지 않는다.

 

필자의 글쓰기의 특징 중 하나는 우리가 흔히 ‘2차 문헌’이라고 하는 문헌들에 대한 검토나 논의가 매우 적다는 점이다. 이 책의 중심을 이루는 레비나스나 들뢰즈ㆍ가타리, 데리다 등에 관한 논의에서 언급되는 ‘2차 문헌’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필자의 주장이 기대한 만큼 충분한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2차 문헌’에 대한 검토가 적다는 것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지 않을까? 어떤 텍스트는, 특히 그것이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텍스트일수록, 그것이 남긴 흔적들, 또 그 텍스트 자체가 흔적을 이루는 그 이전의 흔적들과 분리될 수 없다. 그 흔적들의 연관망과 분리되면, 그 텍스트는 아주 빈곤한 것이 되거나, 더 나쁜 경우에는 흔히 ‘원전’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초월적인 타자, 찬미와 경배의 대상인 타자가 될 뿐, 분석과 해체, 산종(散種)의 텍스트가 되기는 어렵다. 우리가 ‘2차 문헌’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은 그러한 분석과 해체, 산종의 노력의 다른 표현들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2차 문헌’에 대한 검토가 적다는 것은, 이 책에서 레비나스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텍스트들이 아직 충분한 분석과 해체, 산종의 텍스트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의 이면인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다음 번 책에서는 타자(들)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 텍스트들의 해체와 산종의 움직임 속에서 펼쳐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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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03-29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데리다를 읽기 위해서는 레비나스를 읽을 필요가 있죠.

레비나스를 읽다보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에드워드 카의 말이 헛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죠.

하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그 헛소리에 사로잡혀 있죠.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깨려고 노력해야죠.

그렇다고 해도 레비나스와 데리다는 또 다르죠.
 
백색신화 - 서양이론과 유럽중심주의 비판 경성대문화총서 25
로버트 J. C. 영 지음, 김용규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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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에 실릴 서평 하나 올립니다.

경향신문 서평은 이것이 마지막 서평입니다.

계속 쓰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워낙 밀린 일들이 많다 보니

도저히 시간 내기가 어려워서 이번 서평을 마지막으로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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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영은 국내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영미 비평계에서는 잘 알려진 이론가다. 그는 특히 데리다, 알튀세르를 비롯한 현대 프랑스철학에 깊은 조예를 지닌 탈식민주의 비평가로 명망을 떨치고 있는데, 그의 대표작 중 한 권이 오늘 소개할 [백색신화](1990)다. 20여 년 전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 이 책의 원서를 복사해놓고, 언젠가 읽어야지 하면서 계속 미뤄두고 있다가 반갑게도 몇 년 전에 번역이 되어 재미있게 읽은 뒤 독자들에게도 소개하고 싶어서 서평을 쓰게 되었다.

 

국역본은 “서양이론과 유럽중심주의 비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영어 원서의 부제는 Writing History and the West다. “역사의 서술과 서양” 정도로 옮길 수 있는 이 제목은 이 책의 내용을 집약적으로 잘 전달해준다. 그리고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가 하나의 단일한 역사적 시간의 산물이라면, 그 순간은 1968년 5월이 아니라 알제리의 독립전쟁이 될 것이다”라는 이 책 초판의 첫 문장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탈식민주의를 연결하려는 저자의 지적ㆍ정치적 관심을 잘 표현해준다.

 

지난 1990년대 이후 국내에는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 이른바 ‘포스트 담론’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와 이제는 인문사회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빼놓기 힘든 지적 담론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초기에 수용될 때만큼 격렬하지는 않다고 해도 포스트 담론에 대한 거부감은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으며, 특히 진보 지식인들에게 포스트 담론은 여전히 경원과 거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거부감은 포스트 담론이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에 기여하고 그것을 대체한 가짜 진보 담론, 또는 이데올로기라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의 국내의 지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러한 판단과 거부감이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 해도 포스트 담론과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는 단순히 경원하고 거부해도 좋을 만큼 그렇게 간단한 관계는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의 원인 중 하나는 그것에 고유한 이론적 난점과 맹목에 있으며, 포스트 담론은 그러한 맹목을 바로 잡으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로버트 영이 화두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다. “볼셰비키적인 보편성은 어떻게 번역 불가능한 것들과 지금까지 무시당해온 특수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가?”(26쪽)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로버트 영은 장-폴 사르트르와 루이 알튀세르라는 마르크스주의 최후의 이론가들의 난점에서 출발해서 미셸 푸코, 에드워드 사이드를 거쳐 프레드릭 제임슨 및 호비 바바와 가야트리 스피박에 이르는 30여 년 동안의 서양의 역사이론과 탈식민주의 비평의 문제적인 역사를 훌륭하게 서술하고 있다. [백색신화]를 읽고 나면 20세기 후반의 진보 사상의 역사가 새롭게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이 책을 제대로 읽어내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너무 어렵다고 느끼는 독자라면, 이 책보다 10여년 뒤에 출간된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박종철출판사, 2005)을 먼저 읽어보는 것이 좋다. [백색신화]가 매우 논쟁적인 일종의 사상사 책이라면, 후자의 책은 마르크스주의에서 탈식민주의에 이르는 사상의 경로를 20세기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탈식민주의를 연결해보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필독서라고 할 만하다.

 

어려운 책을 번역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을 역자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다. 이 책은 여러 이론가를 다루고 있고 그들의 사상이 매우 집약적으로 농축돼 있어서 번역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책이다. 모두 등재지 논문 쓰는 데만 힘을 쏟는 상황에서 이런 책을 붙잡고 오랜 시간 동안 씨름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용기와 책임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 해도 여러 대목에서 오역들이 눈에 띄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역본을 낼 때 이 오류들을 바로 잡는다면, 이 중요한 책이 훨씬 더 큰 가치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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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012-06-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은 다른 사람이 번역해도 더 잘 번역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간단히 말해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마저도 "역사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헤겔의 영향력이 가공할만한 수준이라는 것도 동시에 보여준다.

그 역사주의가 바로 자본주의적 근대성과 식민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게 만드는 혹은 사유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역사주의를 제거하고 자본주의적 근대 및 유럽중심주의적인 근대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트리컨티넨탈 마르크스주의"를 만들려는 게 로버트 영이 주장하는 프로젝트다. 그래서 10년 뒤의 책에 술탄-갈리에프나 문화적 혼종(잡종)으로 식민주의에 저항한 마리아떼기까지 얘기하는 것이다. 마오 쩌둥을 너무 긍정적으로 서술한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런데 마르크스주의가 헤겔로 대표되는 역사주의로부터(랑케도 포함된다)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날 수 있다면 아마도 미래의 세계는 크게 바뀔 것이다.

역사주의를 배우는 것을 배우지 말기.


여담으로 하고 싶었던 말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미셸 푸코를 "국사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외견상 역사책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를 다룬 철학책이라고 생각한다.

광기의 역사 영문판 번역 서문을 읽으면 푸코가 식민주의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란혁명에 대해 "오바"했던 해프닝도 일어난 게 아닐까? 푸코 사진을 자세히 보면 솔직히 미친 사람 같아 보인다. 눈에 광기가 어려 있다.

구조주의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나는 언어학자 소쉬르도 구조주의 같지가 않다. 하지만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영국의 경험주의나 대륙의 합리주의가 둘 다 이성을 강조하는 "합리주의"라고 생각하지만 위대하신 분들이 소쉬르를 그렇게 가르치고 경험주의나 합리주의를 그렇게 가르치니 난들 어쩌겠는가?

마지막으로 발마스 님은 decoionization 및 decolonialism 과 postcolonialism을 어떻게 번역할지 가끔 궁금하다.)
 
말과 사물 현대사상의 모험 27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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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 한 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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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1966)은 푸코의 저작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이지만 이 책을 좋은 번역으로 접해볼 기회를 갖지 못한 대개의 국내 독자들에게는 꽤 당혹스러울 만한 책이다.

 

우선 이 책은 [광기의 역사](1961)의 독자들이 보기에 낯선 책이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데카르트의 [성찰](1641)과 광인들의 대대적인 감금(1640)이 정확히 동일한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면서, 근대의 합리성이 어떻게 광기의 배제에 기초를 두고 있는지 분석한다. 따라서 이성과 광기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으며, 해방되어야 할 것은 광기다. 반면 [말과 사물]은 더 이상 광기를 이성과 대립하는 위치에 놓고 있지 않으며, 광기의 역사가 아니라 ‘인문과학의 고고학’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일종의 합리성의 역사, 이성의 역사를 쓰려고 시도한다.

 

그런가 하면 이 책은 푸코의 또 다른 유명한 책, [감시와 처벌](1975)의 독자들에게도 상당히 낯선 책이다. 푸코 하면 권력의 이론가, 지식과 권력의 계보학자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책에는 규율이나 감옥, 감시에 관한 논의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대신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서양 르네상스(16세기)와 고전주의 시기(17-18세기)의 수많은 학자들, 문필가들의 저술에 관한 그야말로 박학다식한 논의가 종횡무진 펼쳐지기 때문이다. 푸코는 저 많은 책들을 언제 다 읽었을까? [말과 사물] 앞에서는 박식한 인문학자들마저도 평범한 교양 독자들이 떠올릴 법한 소박한 질문을 저절로 던져보게 된다.

 

하지만 [광기의 역사]와도 다르고 [감시와 처벌]과도 다른 이 책은 사실 푸코의 일관된 지적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푸코는 초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늘 근대성의 한계를 모색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근대성이라고 부른 것은 대략 프랑스혁명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서구 문명을 가리킨다. 이 시기의 성격과 한계를 밝히기 위해 푸코는 르네상스에서 고전주의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인 진보의 노선에 따라 역사를 분석하는 기존의 역사학 방법론을 거부하고, 대신 근대와 이전 시기들 사이의 불연속성을 새롭게 고찰한다.

 

특히 [말과 사물]은 고고학이라는 새로운 역사학 방법론에 따라 근대 인문과학이 이전 시기와 다른 새로운 ‘에피스테메’의 성립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어떤 역사적 시기에 존재하는 다양한 지적 담론들의 차이와 대립, 거리의 관계가 전개되는 장(場)을 뜻하는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은 근대의 합리성이 고대 그리스는 고사하고 르네상스나 고전주의 시기와도 무관한 새로운 바탕에 기반하여 성립했음을 보여준다. 인문과학의 주체이자 대상인 “인간은 최근의 발견물이자 출현한 지 두 세기도 채 안 되는 형상”(20쪽)이라는 푸코의 충격적인 주장은 이러한 탐구의 결론인 셈이다.

 

1970년대에 들어 푸코는 분석의 영역을 담론에서 비(非)담론으로 바꾸고, 고고학 대신 계보학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채택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말과 사물]의 결론의 폐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근대 담론만이 아니라 근대 권력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밝히려는 새로운 시도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 책은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푸코 사상의 연속과 불연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너뛸 수 없는 책이다.

 

이 책이 국내에 처음 번역ㆍ출간된 것은 1987년이었으며, 이번에 나온 책은 근 30여 년 만에 새로 번역해서 낸 책이다. 그 사이의 온축 덕분인지 아니면 역자의 능력 덕분인지, 새 번역은 이전 번역보다 훨씬 정확하고 잘 읽히는 좋은 번역이다. “선험적 감성학” 내지 “초월론적 감성학”이라고 번역하는 게 적절할 원어가 “선험적 미학”(437쪽)으로 번역되는 등 사소한 시빗거리가 없지는 않지만, [광기의 역사]와 [말과 사물] 같은 난해한 대작을 공들여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 비하면 그야말로 사소한 투정에 불과하다. 푸코의 가장 유명하지만 가장 덜 알려진 이 책을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읽을 수 있게 됐으니 우선 역자에게 깊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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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2-05-04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구입한 책입니다. 귀한 책이라... 열심히 읽어보려구요^^

balmas 2012-05-05 02:39   좋아요 0 | URL
비연님 오랜만이시네요.^^ 잘 지내시죠? 최근에 책을 구입하셨군요. 재미있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

독자 2012-05-0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광기의 역사>에 대해 안과 밖으로 이분된 것이 아니라 모두 안에 있다고 '푸코의 이분법'을 비판한 데리다가 생각나는 군요. 프랑스혁명을 이성의 절정 또는 광기의 절정으로 이해한 푸코의 독특한 시선도 저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군요.

다른 출판사에서 푸코의 책들이 출간되고 있으니 가능성은 없다고 보지만 혹시 그린비에서도 푸코의 책들이 출간되는 건가요? <푸코> 평전이 있는 걸 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달랑 평전만 있으니까 좀 어색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balmas 2012-05-23 03:12   좋아요 0 | URL
ㅎㅎ 예. 짐작하신 대로 그린비에서는 제가 알기로는 푸코 원전을 번역할 계획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럴 기회가 없다고 해야겠죠. 아시다시피 저작권이 있어야 책을 번역할 수 있는데, 푸코 주요 저작은 이미 거의 출간된 상태고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역시 저작권이 다 판매된 상태여서 번역을 하고 싶어도 법적으로 그럴 만한 기회가 없답니다.

Joule 2012-05-05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푸코의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하고 있었는데 벌써 읽으셨네요. 예전에, 음... 한 5-6년쯤 전에 <말과 사물>을 읽긴 읽었는데 그땐 이해도 잘 안 되고 얼른 와 닿지도 않았었어요.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이번에는 좀 다를까요.

그리고 뭐 하나만 여쭤보고 싶어요. 이번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어보려고 하는데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책은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추영현 번역, 피앤비에서 나온 황태연 번역, 책세상에서 나온 조현진 번역입니다. 세 권 중에 어떤 책을 선택하면 난해한 번역문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진만 빼고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꼭 읽어보시지 않았어도 발마스 님 느낌에 난 이 책이 좀 나을 것 같다 정도로 찍어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

balmas 2012-05-06 03:4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줄님.^^
[말과 사물]은 사실 재미있게 읽기는 쉽지 않은 책입니다. 워낙 많은 담론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고, 게다가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전개된, 우리와 그다지 관련이 없는 담론들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만만치 않답니다. 그래도 이번 번역본은 번역도 잘 돼 있고 군데군데 상당히 매력적인 논의들이 많아서 읽어볼 만한 것 같습니다.^^

[에티카]를 읽으시겠다니 반가운 말씀이네요.^^ 말씀하신 번역본 중에는 유감스럽게도 제가 읽어본 게 없네요. 그래서 제가 읽어본 것 중에서 권하자면 서광사에서 나온 강영계 교수의 [에티카]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실 강영계 교수의 번역본은, 개념 번역의 정확성이라든가 스피노자 논의 맥락의 세심한 전달 등에서는 꽤 문제가 많긴 해도, 전반적으로 큰 오역이 많지 않고 가독성도 좋은 편입니다. 그래서 국역본 중에서 권한다면 강 교수의 번역본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물론 새로 나온 번역본들 중에서 더 좋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것은 나중에 한번 읽어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

Joule 2012-05-07 00:55   좋아요 0 | URL
둘 다 반가운 소식이네요. 푸코도, 스피노자도. 강영계 번역의 <에티카>는 집에 있어요. 소중한 주말에 짬을 내어 다정한 답변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D
 
성찰 1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37
르네 데카르트 외 지음 / 나남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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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 토요일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을 한 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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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웬만한 교양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다 다 알고 있는 서양 근대 철학의 아버지다. 또한 ‘코기토 에르고 숨’,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인문학에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말이다. 이렇게 유명한 인물이니 전집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그의 주요 저작은 당연히 다 번역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가장 중요한 책인 [성찰]이 라틴어 원전에서 직접 번역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또 [성찰]과 분리될 수 없는, 그리고 오늘 소개하려고 하는 [성찰에 대한 학자들의 반론과 데카르트의 답변]은 올해 들어서야 마침내 한글로 번역되었다.

 

사실 교양 독자들이라면 대부분 이름을 알고 있는 홉스, 로크, 버클리, 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같은 근대 철학의 대가들의 저작 중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책들은 손에 꼽을 정도이며, 전문가들이 신뢰할 수 있게 번역한 책들은 더욱 더 적다. 이는 그만큼 국내 철학계가 아직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런 상황에서 번역ㆍ출간된 데카르트의 이 저작은 매우 반갑고 고마운 책이다.

 

보통 독자들만이 아니라 대개의 철학 전공자들도 잘 모르는 [성찰]의 비밀 아닌 비밀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성찰]은 데카르트의 대표작이지만, 이 책에는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는 명제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에는 ‘에고 숨, 에고 에그지스토’, 곧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는 명제가 나올 뿐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양자 사이에는 꽤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성찰]과 더불어, 그에 대한 반론과 답변을 묶은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한다.

 

또한 「옮긴이 해제」에서 잘 소개하고 있듯이 [성찰]은 처음부터 다른 학자들과의 토론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다. 저명한 데카르트 연구자 장-뤽 마리옹의 표현을 빌린다면 [성찰]은 애초부터 ‘답변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성찰]에서 전개되는 논변을 충분히 음미하기 위해서는 7개의 반박문과 더불어 데카르트의 답변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굳이 이런 배경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반박문을 집필한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의 면면을 본다면 이 책은 충분히 흥미를 끌 만하다. 가령 두 번째 반박문은 데카르트의 후원자이자 당대 유럽 지식계의 소통 창구였던 메르센 신부가 집필했고, 세 번째 반박문은 홉스가 썼으며, 포르 루아얄 수도원의 지도자였던 앙투안 아르노는 네 번째 반박문에서 날카롭게 데카르트를 비판하고 있다. 또 근대 유물론 철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피에르 가상디는 가장 긴 다섯 번째 반박문을 썼다.

 

논쟁의 주제들 역시 [성찰]의 거의 모든 주제를 망라하고 있다. 신존재증명, 정신과 신체의 연합, 회의의 타당성, 데카르트 관념이론의 성격, 자유의 본성, 사고하는 주체의 정체 등 근대 철학의 주요 쟁점들이 이 반박과 답변에 담겨 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초기 근대 철학이 이 한 권의 책 속에 집약돼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만큼 근대 철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책이다.

 

좀더 상세하고 엄밀한 검토는 전문적인 토론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겠지만, 성글게 읽어본 바에 따르면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라틴어에 능숙한 데카르트 전공자가 번역해서 원전을 일일이 살피지 않고도 충분히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을 만큼 번역이 잘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책의 말미에 역자가 덧붙인 「해제」는 이 책의 몇 가지 쟁점에 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돕고 있다. 그러나 사족처럼 덧붙인다면, 본문에 나오는 전문 용어들이나 논쟁의 배경에 관해 좀더 상세한 역주가 있었더라면, 그리고 책의 구조와 논쟁의 쟁점들에 대한 좀더 폭넓은 해제가 있었더라면, 이 번역은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닐 수 있었을 것 같다. 물론 이 사소한 딴죽이 이 번역의 의의와 역자의 노고를 결코 훼손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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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012-04-10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전에 문예출판사(이현복 역)에서 나온 "성찰"보다 이 책의 번역이 더 좋다는 뜻인가요? 그리고 혹시 "피로사회"라는 책을 읽으셨다면 그 책에 대한 발마스 님의 서평이나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balmas 2012-04-11 04:07   좋아요 0 | URL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성찰]이고, 지금 서평의 대상이 된 책은 이 [성찰]을 둘러싸고 데카르트 비판가들과 데카르트가 주고받은 반박과 답변의 기록이니까 두 책이 서로 다르죠.

[피로사회]는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할 만한 게 없습니다.

nom 2012-05-01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선 [성찰]은 데카르트의 대표작이지만, 이 책에는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는 명제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에는 ‘에고 숨, 에고 에그지스토’, 곧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는 명제가 나올 뿐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양자 사이에는 꽤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성찰]과 더불어, 그에 대한 반론과 답변을 묶은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한다." 이 주제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코기토 에르고 숨’이 아니라‘에고 숨, 에고 에그지스토’가 제시되는 이유에 대한 데카르트의 자신의 언급은 없는 건가요?

balmas 2012-05-01 04:27   좋아요 0 | URL
예 데카르트 자신의 언급은 나오지 않죠. 이 주제에 흥미를 갖고 있다면 학위논문 주제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cplesas 2012-07-08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태원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제서야 이름을 걸고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기존 nom이라는 가명의 댓글은 저의 것입니다. 저의 이름을 숨기려는 의도는 없었으며, 알라딘 서재로 로그인이 이어진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만큼 이 곳이 낯설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선생님께 데리다의 <입장들>과 <법의 힘>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는, 전남대 철학과 학생 이무영이라고 합니다. 그때는 학부생이었는데, 지금은 석사를 졸업하는 시점에 있어요. 선생님께 질문드린 바로 그 주제로 석사논문을 작성해서 제출하였습니다. 덧붙여 원석영 선생님의 국역본 도움에 힘입은만큼, 오늘 <성찰> 국역본에 서평을 달다가, 선생님의 링크를 보고 다시 여기로 들르게 되었습니다. 한번쯤 꼭 뵙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제가 서울에 살지 않아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군요. 많은 번역서들 자주 접하고 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드립니다. :)

balmas 2012-07-09 11:08   좋아요 0 | URL
무영님 반갑습니다. 벌써 석사졸업을 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제로 논문을 쓰셨네요. 앞으로 공부에 많은 진전이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종종 들르세요.
 
젠더와 민족 트랜스 소시올로지 11
니라 유발-데이비스 지음, 박혜란 옮김 / 그린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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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자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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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네이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런저런 문헌을 읽다 보면 종종 마주치게 되는 필자가 니라 유발-데이비스였다. 특히 네이션과 여성의 문제라는 주제가 나올 때면 어김없이 그녀의 이름을 볼 수가 있었다. 언젠가 읽어봐야지 벼르던 참에 그녀의 대표작 중 한 권이 번역ㆍ출간되었길래, 냉큼 이 달의 서평 대상 도서로 골라잡았다.


이 책의 기본 관심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네이션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1980년대 이래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에 관한 연구는 양적으로 엄청나게 증가했으며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의 도입으로 이론상으로도 질적인 도약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 책이 처음 출간된 90년대 후반까지 여성의 입장에서 네이션의 문제를 고찰하는 저작은 매우 드물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네이션에 관해 페미니즘적인 접근법을 도입한 문제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왜 네이션의 문제가 페미니즘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사고하는 데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서구 중심적인 페미니즘에 대한 반성의 소산이다.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받는다는 공통의 조건을 지니고 있지만, 서구의 여성과 이슬람 여성, 아프리카의 여성, 아시아의 여성은 억압의 방식과 차별 및 배제의 경험에서 각각 다르다. 따라서 자매애라는 추상적 연대의 몸짓은 오히려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 현실을 은폐하기 십상이다.


또한 네이션은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일반적인 틀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에게 중요한 문제다. 네이션은 세상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가장 효과적이고 일상적인 준거다. 그런데 여성은 네이션의 생물학적 재생산의 임무를 할당받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러시아, 어머니 아일랜드, 어머니 인도”(88쪽)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적 정체성의 상징이 되기를 강요받는다. 여성이 이 역할을 거부하거나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추방과 살해, 모욕과 배제 같은 각종 폭력이 가해진다. 정신대 문제를 ‘민족의 수치’라고 덮어두려고 하거나 위안부 박물관 건립이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보는 시선은 어찌 보면 네이션 속에서 여성의 위상을 전형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네이션과 젠더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현실에 직면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횡단성의 정치를 제안하고 있다. 횡단성의 정치는 “‘동질적인 출발점’을 가정함으로써 포함이 아닌 배제로 끝나는 ‘보편주의’, 그리고 ‘차별적인 출발점’으로 인해 어떤 공통된 이해나 진정한 대화도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가정하는 ‘상대주의’”(233쪽)와 구별되는 정치적 전망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논점을 포함한다. 우선 횡단성의 정치는 자기 중심의 상실을 가정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흔히 연대나 통합이라는 명목 아래 소수나 약소자의 양보를 강요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이 경우 연대의 근거가 사라질뿐더러 연대 자체가 무비판적인 동질화로 변질되기 쉽다. 연대가 진정한 연대이기 위해서는 연대하는 이들 각자의 개성과 정체성, 삶의 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


둘째, 서로 상이하고 독특한 이들 사이의 ‘옮기기’의 방식이 모색되어야 한다. 횡단성의 정치는 연대하는 이들과 일괄적으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뿌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함께 양립할 수 있는 목표와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본문이 240쪽에 불과한 적은 분량의 책이어서 빨리 읽을 수 있겠거니 짐작했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까 만만치 않았다. 이는 이 책이 고도의 형이상학적 사변으로 이루어진 책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책이 비서구 사회의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억압의 사례들, 그리고 그에 맞서는 다양한 형태의 여성 투쟁들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어려움은 늘 추상적으로만 사고하는 필자와 같은 한국의 남성 철학도의 한계에서 기인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필자에게 구체성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 호된 죽비와 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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