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탈 -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지음, 김응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실릴 촌평입니다. 글과 관련하여 논평하거나 토론하고자 하는 분들은 [창작과비평]에 실린


판본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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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최근 국내에서 가장 왕성하게 번역되는 외국 사상가 중 하나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그의 저작([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인간사랑 2003)은 결코 좋게 평가할 수 없는 번역 탓에 거의 반향을 얻지 못했지만, 대표작으로 꼽히는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이 출간된 후 최근 사오년간 가속이 붙어 올해에만 네권의 책이 번역되었다. 이 중 이번에 서평 대상으로 고른 책은 버틀러가 그리스의 문화이론가인 아테나 아타나시오우(Athena Athanasiou)와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국내에 소개된 버틀러 책들 가운데는 가장 최신의 저작(영어판은 2013년 출간)이고 정치적인 것에서의 수행성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점이 마음을 끌었다.


처음 이 책을 손에 들었을 때는 버틀러의 사상에 관한 대중적인 해설용 대담집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또한 주요 사상가들과의 대담집이 보통 그렇듯이, 질문자가 사상가의 사상에 관하여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 사상가가 그의 저작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점들을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방식을 따를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 역시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타나시오우라는 생소한 학자는 이 책의 조연이 아니라 주연 중 하나였으며, 이 책의 화두를 이끄는 사람이 버틀러가 아니라 바로 그라고 해도 좋을 만큼 능동적인 대화 주체였다. 그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논의할 박탈이라는 개념을 대담의 화두로 제안하면서, 이 개념에 입각하여 어떻게 페미니즘, 신자유주의, 인종주의, 극단적 폭력 등과 같은 폭넓은 주제를 다룰 수 있을지 흥미로운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버틀러의 저작, 특히 2000년대 이후의 윤리정치적인 저술에 기반을 두면서 동시에 그 저술에 담긴 이론적 개념들을 신자유주의탈식민주의성소수자정치적 저항 등과 같은 쟁점들에 관하여 폭넓고 자유롭게 변주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나누는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고 독창적인 논의들은 특히 포스트 담론에 입각한 정치철학 및 윤리학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건설적인 자극을 준다.


이 글에서는 총 21개의 꼭지로 이루어진 이 대담집을 이끌어가는 몇 가지 주요 개념, 곧 박탈(dispossession), 관계성, 취약성, 감응성(affectivity), 수행성 등에 주목하고 싶다.


옮긴이(김응산)가 박탈이라고 번역한 ‘dispossession’이라는 단어는 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저자들이 이 단어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닌 양가적인 의미 때문이다. 첫째, ‘dispossession’은 말 그대로 박탈을 가리킨다. 곧 이 단어는 우리가 장소와 생계, 주거지, 음식, 보호 등을 빼앗길 수 있는 존재라는 점, 따라서 이를 우리에게서 박탈할 권리와 힘을 지닌 권력에게 우리가 종속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둘째, 하지만 이 단어는 또한 존재론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타인에게 원초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공통으로 전제된 소유적 개인주의의 원리와는 달리 ‘dispossession’이라는 개념은 우리 각자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율적 개인이 아니며,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의 쾌락과 고통을 어떤 지속된 사회계 혹은 지속적인 환경에 빚지고 있는 상호 의존적인 존재(이상 23)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타자와의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실은 우리의 삶 그 자체라는 점을 가리킨다.


그리고 자아 내지 개인 주체의 원초적인 타자 의존성이라는 의미로 인해 ‘dispossession’이아주 문제적인 개념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만약 이 개념의 뜻이 첫번째 측면으로 국한된다면, 비판적인 이론과 정치의 목표는 꽤 단순해진다. 부당하게 자신의 소유와 권리를 박탈당한 각각의 개인 및 집단 들에게 그들에게 고유하게 속하는 소유와 권리를 회복시켜주거나 부여해줌으로써, 개인들 사이의 평등한 자유의 질서를 확립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자유주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아 내지 개인들이 원초적인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그 본질 및 정체성에서, 그리고 삶의 과정 자체에서 타자에 의존적인 존재들이라면, 자유주의를 넘어선 이론적 분석과 실천적 해법이 요구된다. 이 책은 이 문제에 대한 난상토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가적인 측면을 드러내기에 과연 박탈이라는 번역어가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박탈이라는 번역어는 오히려 첫번째 측면에 너무 경도된 것이 아닌가? 첫번째 측면에서는 부당한 법적정치적물리적인 탈취, 몰수라는 뜻이 핵심인 반면, 두번째 측면에서는 자율적인 자아 내지 개인 주체가 성립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자기소유(self-possession 내지 self-ownership)가 타자와의 원초적 관계에 의해 사후에 성립되는 것이며, 더욱이 이러한 원초적 관계를 은폐하거나 억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따라서 두번째 측면에서는 소유적 개인주의의 전제인 소유 및 자기소유의 논리적 불가능성과 윤리적 폭력성을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사실 탈소유로 옮기는 편이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전자의 의미가 약화되기 때문에, ‘탈소유라는 번역어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따라서 ‘dispossession’이라는 개념에 대한 적절한 번역어가 무엇인지는 열려 있는 문제이며, 말 그대로 개념적 번역과 이론적 ()창조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dispossession’의 문제는 감응성’, ‘affectivity’의 문제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원초적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성립되는 관계적인 존재들이라면, 그러한 관계의 구체적인 양상을 표현하는 용어가 바로 ‘affectivity’ 및 ‘affect’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자는 이 용어들을 일관되게 감응성감응이라는 용어로 옮기고 있다. 이러한 번역은 정동성, 정동, 심지어 정동하다’(능동태인 affect의 번역이다), ‘정동되다’(수동태인 affected의 번역이다) 같은 괴상한 신조어들을 남용하는 일부 연구자들의 번역보다는 훨씬 사려 깊은 태도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감응보다는 정서라는 개념에 기반을 둔 번역이 이 책의 논의를 이해시키는 데도 더 낫고, 미국 문화이론계의 논의를 우리 식으로 전유하고 변용하는 데도 더 낫다.


우리가 어떤 감정이나 정서를 느낄 때 여기에는 항상 타자와의 관계가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타자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타자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분노하거나 즐거워하며, 타자의 기쁨을 시샘하거나 부러워한다. 더욱이 스피노자(B. Spinoza)의 정서 모방(affectuum imitatio) 개념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은 항상 이미 타자의 욕망을 모방함으로써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 내지 정서는 항상 신체적인 작용을 수반한다. 우리가 기쁨을 느낄 때 신체적인 역량 내지 에너지도 증가하며, 우리가 고통이나 자괴감을 겪을 때 우리의 신체도 무기력해진다. 우리의 분노는 동시에 강렬한 신체적인 반응을 촉발하며, 흐뭇한 마음은 신체적인 이완을 낳는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affect affectivity가 뜻하는 바이다.


그런데 다음 번역문을 보자. “이와 같은 반응의 성향은 우리를 경첩에서 어긋난(out of joint)” 상태로, 그리고 우리 스스로로부터 이탈하도록, 곧 자기 정신줄을 놓도록(beside ourselves)” 만드는 다양한 감응, 곧 분노와 절망, 욕망, 격분, 희망 등의 감정 속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123) 내가 볼 때 여기에서 감응대신 정서라는 번역어를 쓴다면, 논의의 내용이 더 분명히 드러난다. 논의의 요점은 분노, 절망, 욕망, 격분 같은 정서들이 강렬한 신체적 반응을 촉발하면서 우리의 평정한 상태를 깨뜨리고 우리를 평상시와 다른 모습으로 만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out of joint’‘beside ourselves’ 같은 표현이 함축하는 바이다. “공감과 친절함, 연대는 물론이고 긴장, 괴로움 혹은 갈등과 같은 강렬하고도 정치적인 감응적 요소들을 통해(286) 같은 대목도 정서적 요소들이라는 번역이 이해를 더 쉽게 해준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affectaffectivity가 정서의 차원을 넘어서는 신체적 변화의 차원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그 경우에는 정서적 변용()’이나 그냥 변용()’ 같은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183~85면에 집중적으로 나오는 심급이라는 용어는 원문 “instance”의 번역인데, 이 경우에도 사례내지 경우로 옮기는 편이 낫다. 전체적으로 꽤 공을 들인 꼼꼼한 번역인데, 이처럼 몇 가지 용어 선택이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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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설솔술 2016-11-25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엇습니다.^^ 번역자는 유민석이 아닌 김응산씨네요.

balmas 2016-11-27 16:5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살설솔술님.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사실 괄호 부분은 편집부에서 교정 과정 중에 추가한 것인데, 제가 미처 확인을 못했습니다. 나중에 정정 안내를 하도록 편집부에 이야기해두겠습니다.

질문 있어요 2017-01-02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이 강추하신 <박탈>을 읽고 있습니다.
제가 철학용어가 익숙치 않다보니 읽어도 명확히 이해를 못하네요.
그래서 용어 질문 좀 드리고 싶은데, 괜챦으시죠?
‘현전의 형이상학‘과 ‘자기 현전‘이 계속 나오는데, 어떻게 이해를 하면 될까요?

새해부터 귀챦게 해드려, 지송합니다^^

balmas 2017-01-02 19:0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질문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현전>이라는 번역어보다는 사실 <현존>이라는 번역어가 더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용어들은 어쨌든

모두 하이데거 철학에서 유래한 것들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 알라딘 서재의 다음 글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http://blog.aladin.co.kr/balmas/1583071
 
존재론적, 우편적 -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 바리에테 18
아즈마 히로키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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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여름호에 실릴 촌평 하나 올립니다. 


일본의 비평가인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에 대한 서평입니다. 


아직 교열이 끝난 글이 아니므로, 혹시 논평을 하거나 토론을 하실 분은 [창비]에 실린 판본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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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를 읽다 말기

   

 

우선 내게 아즈마 히로끼(東浩紀)는 매우 낯선 인물이라는 점을 밝혀두어야 할 것 같다. 서평 대상인 {존재론적, 우편적: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存在論的,郵便的, 조영일 옮김)을 비롯해서 그의 책이 국내에 몇권 번역되어 있지만, 나는 아즈마 히로끼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른다. 사실 나는 일본의 문화계 및 학술계 전반에 관해 꽤 무지한 편이다. 우리나라에 많은 책이 번역되어 있는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책 두어권을 읽어본 정도이고, 그외에 니시까와 나가오(西川長夫)나 우까이 사또시(鵜飼哲) 같은 이들의 저작, 그리고 얼마 전에 국내에 소개된 사또오 요시유끼(佐藤嘉幸) 같은 젊은 연구자들의 현대 프랑스철학에 관한 연구서를 필요에 따라 한두권씩 읽어본 정도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해 서평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이 책이 데리다(J. Derrida)에 관한 연구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이 20대 중반의 아즈마 히로끼를 일약 카라따니 코오진의 후계자로 부각시킨 역작이라는 소문은 진작부터 듣고 있었기에, 과연 어떤 책일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읽었던 몇몇 일본 학자나 비평가 들의 책이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도 대단한 소문과는 달리 그저 그런 저서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예상도 있었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이 책은 특이하게도 평자의 이 두가지 기대 내지 예상에 모두 들어맞았다. 이 책은 역작이라고 볼 만한 장점과 자신의 지적 성취를 스스로 잠식하는 약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4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첫 문장에서 저자는 본서의 목적은 자크 데리다에 대한 해설(9)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데리다 해설서라기보다는 한가지 집요한 질문을 바탕으로 데리다 사상을 재구성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탈구축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이 책을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물음은 도대체 데리다는 왜 그와 같은 기묘한 텍스트를 쓴 것일까?”(13)이다. 여기서 기묘한 텍스트라고 지칭되는 것은 1970년대에 출간된 데리다의 {산종(散種)}(La dissémination, 1972), {조종(弔鐘)}(Glas, 1974), {회화에서의 진리}(La vérité en peinture, 1978), {우편엽서}(La carte postale, 1980) 같은 저술이다. 이 저술들의 기묘함은 1960년대 저작들과 달리 더이상 제도적인 논문’, ‘저작의 체계를 지키지 않고, 극도의 실험적 스타일, 신조어들의 빈번한 출현, 데리다 자신의 여러 텍스트에 대한 암묵적 참조 등으로 인해 극도로 난해하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이론화의 칸스터티브(constative)한 형태에서 에크리튀르(écriture)의 퍼포머티브(performative)한 양태로의 전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데리다 자신의 넘어짐(15)을 가리킨다.


어떤 넘어짐이 문제일까? 그리고 데리다는 무엇에 걸려 넘어진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우리는 책의 후반부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데리다가 1970년대의 실험적 텍스트들을 통해 하이데거처럼 심연에 대해 사색하는 위대한철학자(263)가 되는 것에 저항하려고 했지만, 아즈마가 데리다파(397)라고 부르는 전이(轉移)의 메커니즘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곧 데리다는 자신이 스승으로 숭배되고 자신의 철학적 주제와 스타일이 모방됨으로써 자신을 중심으로 삼는 하나의(또는 여럿의) 학파가 만들어지는 것, 다시 말하면 자신이 일종의 초월론적 중심, 부재하면 부재할수록 더욱 숭고해지는 그런 중심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편적 탈구축(235)을 시도했지만, 1980년대 이후 그는 전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끼가 특히 {우편엽서}에서 읽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전이를 둘러싼 철학적·정신분석적·정치적 쟁점이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데리다의 탈구축에는 두 종류가 존재한다는 점으로 집약된다. 아즈마가 카라따니 코오진을 따라 괴델적 탈구축”(또는 부정신학적 탈구축)이라고 부르는 첫번째 탈구축은 어떤 하나의 체계에서 출발하여 그 체계의 내재적인 역설을 드러내는 것, 오브젝트레벨과 메타레벨 사이의 결정불가능성에 의해 텍스트의 최종적 심급을 무효화하는 전략(111~12)으로, 그는 특히 초기 데리다 작업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데리다에게는 이것과 구별되는 또다른 탈구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편적 탈구축이다. “우편=오배(誤配) 시스템(185)이라고 지칭되는 우편적 탈구축은 하이데거, 라깡, 크립키, 지젝이 벗어나지 못한 부정신학적 탈구축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편적 탈구축을 집약하는 편지가 도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명제는 시니피앙의 분할 가능성(117)을 가리키며, 따라서 비세계적 존재를 복수적이고 능동적으로 파악(204)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역으로, 괴델적 탈구축에서 부각되는 초월론적 시니피앙은 우편공간이 야기한 망령적 효과’, ‘불가능한것의 복수성을 말소시(155) 결과이다.


데리다 자신은 명확히 하지 않은 우편적 탈구축을 작업가설로 설정한 이후, 아즈마는 4장에서 데리다를 넘어 카르나프, 하이데거, 프로이트의 텍스트를 논리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의 접목이라는 시각에서 검토한다. 그러다가 372면 이하에서 정신분석적인 전이의 문제를 제기한 뒤 그의 논의는 얼마 못 가 갑작스럽게 중단된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그가 전이작용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편적 탈구축의 핵심이라고 보기 때문이며, 데리다 및 데리다 학파에 관한 논의와 참조를 중단하는 것, 그리고 데리다 읽기를 중지하는 것이 데리다파의 전이(398), 즉 서양 형이상학의 체계를 근원적으로 탈구축하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탈구축적인 논문과 저서를 산출함으로써 오히려 그러한 형이상학의 제도를 지속하고 데리다를 포함한 탈구축 사상을 그 형이상학의 한 부분으로 동화시키는 결과와 절단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책의 독창성은 {우편엽서}를 데리다 사상의 중심(또는 중심 아닌 중심)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특히 두가지 논의를 인상깊게 읽었다. 첫번째는 1장과 2장에서 제시된 쏠 크립키(Saul A. Kripke)의 명명이론에 대한 탈구축적인 독서로, 이는 지젝의 정신분석적 비평을 훨씬 넘어서는 흥미로운 분석이다. 두번째는 2장과 3장에서 전개된 우편적 탈구축에 관한 논의인데, {우편엽서}에 관한 분석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반면 이 책은 뚜렷한 약점과 한계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괴델적 탈구축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이라고 할 만큼 끝도 없이 괴델적 탈구축, 부정신학적 탈구축에 대한 언급이 끝도 없이 나온다. 하지만 그 내용은 실상 매우 단순하고 빈곤하다. 유일한 초월론적 중심, 더욱이 역설로만 표시되기 때문에 접근 불가능한 중심을 설정하는 사상이 그가 말하는 괴델적 탈구축이기 때문이다. 초기 데리다 작업(및 더 나아가 하이데거와 라깡의 사상)이 과연 이러한 괴델적 탈구축으로 환원되는지 여부도 논란거리가 될 수 있지만, 괴델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이라는 이원론적 문제설정이 데리다 사상을 분석하기에 적절한 것인지는 더 의심스럽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가 유사 초월론”(quasi-transcendentalism, 국역본에는 의사 초월론(258)이라고 되어 있다)에 관해 단 한차례, 그것도 괴델적 탈구축의 한 표현에 불과하다고 언급하는 것은 매우 증상적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유사 초월론이야말로 그가 작위적으로 설정한 괴델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의 이분법을 탈구축할 수 있게 해주는 문제설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즈마 히로끼는 이 책의 논의를 중단하는 것이 그 자신의 관점에 일관된 태도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더 썼다 하더라도 데리다 사상에 관해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밝혔을지는 의문이다.

 

상당히 전문적인 철학적 논의를 다루는 책인데 매끄럽게 잘 읽히는 것은 역자의 노고 덕분이다.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한국에서 사용하지 않는 일본어 표현들(‘소행’ ‘폐역’ ‘쟁이’ ‘지견’ ‘비급)이 적지 않게 그대로 사용되어 독서를 방해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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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6-05-13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데리다의 해체가 `유물론`인지 잘 보여주는 책이었다 생각이 드네요
 
역사용어사전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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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글은 한국서양사학회에서 내는 학술지 [서양사론]에 실릴 {역사용어사전}에 대한 서평입니다.


아직 교열이 다 끝나지 않은 글인 만큼, 이 글에 대해 토론하거나 이 글을 인용하실 분들은 


[서양사론]에 실린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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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과 탈근대성의 교차로에서-{역사용어사전}에 관하여




I. 머리말


  역사학 전공자도 아닌 일개 철학도가 한국 역사학계의 일대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용어사전󰡕의 서평을 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처음 서평을 부탁받은 이후 내내 이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난 몇 년 간 󰡔역사비평󰡕의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역사학계의 동향을 어깨 너머로 관찰한 것 말고는 역사학에 관해 이렇다 할 식견이 없고 사전 제작에 직접 참가한 경험도 없으니, 이중의 의미에서 문외한이라고 할 만한 필자가 이 대작에 대해 평가를 한다는 게 여러 모로 걸맞지 않은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글을 써나가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역사학계에서 필자 같은 철학도에게 이런 서평의 기회를 준 것은, 지난 몇 년 동안 수백 명의 역사학 전공자들의 힘을 모아 일궈낸 이 성과에 대하여 자기만족이나 자화자찬에 머물지 않고 좀 더 엄정한 자기 평가를 통해 앞으로 더욱 좋은 사전들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다른 전공 분야 연구자(필자가 적임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의 비평적 시각을 통해 더 객관적인(또는 적어도 더 다양한) 시각을 확보하려는 생각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역사학계에서 더욱 값진 성과를 이룰 수 있도록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는 것이 동료 인문학자로서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또한 철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언젠가는 한국 철학계도 이런 작업에 버금가는 철학 사전을 만드는 일을 시도해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다짐도 이 서평을 쓰게 된 또 하나의 동기였다. 철학이 역사학만큼 국민국가의 문화적 기획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아니고 따라서 근대 이후 여러 나라의 역사학이 배출해온 만큼의 풍부한 사전들을 만들어오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철학이 개념들을 토대로 삼는 만큼 여러 종류의 사전은 철학 연구의 중요한 자원이자 조건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한국 철학계는 오늘 역사학계가 먼저 성취한 이 역저에서 배울 만한 점이 적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이유는 이 서평의 핵심 주제와 맞닿아 있다. 그것은 탈근대적인 사전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또는 사전에서 탈근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주지하다시피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등과 같이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붙은 일련의 담론들은 지난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이해 국내 학계에 급속하게 수용되어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담론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상당히 세심하게 다루어야 하는 주제라는 점을 전제한다면, 필자는 탈근대성이 비가역적인 지적ㆍ문화적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이 주제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포스트’ 담론의 유령들: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편, 󰡔민족문화연구󰡕 57호, 2012 및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 󰡔황해문화󰡕 2014년 봄호,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란 무엇인가?」, 󰡔황해문화󰡕 2014년 겨울호를 각각 참조하라.] 이 책의 「간행사」에서 잘 밝히고 있듯이 근대 이전에도 이미 여러 종류의 사전이 존재해왔으나, 오늘날과 같은 사전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고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국민국가 체계가 성립하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범박하게 말해서 국민국가 체계가 이제 역사적으로 쇠퇴 과정에 접어들었다면, 더욱이 국민국가체계와 연동되어 있는 문화적 근대성(역사학, 철학, 문학 같은 인문학들을 포함하는)의 헤게모니가 와해되어 가고 있다면, 그것을 대체하게 될 새로운 문화적 양식에 대한 모색이 당연히 요구될 것이다. 이것을 역시 범박하게 문화적 탈근대성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사전이라는 것이 근대 국민국가의 문화적 기획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왔다면, 탈근대적 성격의 사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는 근대성과 탈근대성이 교차하는 역사적 시기에 사전을 만들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고민해봐야 할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 문제에 관한 주목할 만한 토론은 Theory, Culture & Society, vol. 23, nos. 2~3, 2006을 참조. 이 학술지는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와 관련된 특집호 및 논문들을 싣고 있다. 가령 초학제성(transdisciplinarity)의 방법론을 특집으로 다루는 2015년 vol. 32, nos. 5~6호 참조.

  

그리고 오늘 필자가 서평을 해보려는 이 책 역시 그러한 고민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사전의 위상을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에 관해 여러 차례 숙고하면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 사전은 근대와 탈근대의 교차로에 놓인 사전이라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평가할 수 있는지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II. 역사 용어 개념의 독창성


  우선 이 사전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를 이루는 역사 용어라는 개념에 대해 몇 마디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처음 이 사전을 접할 때부터 사전의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왜 ‘역사학 사전’이 아니라 ‘역사용어사전’일까? 또는 역사학에서 쓰이는 주요 용어들에 대한 사전이 목적이라면, ‘역사 개념 사전’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역사용어사전’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변의 실마리는 사전 편찬자들을 대표하여 최갑수 교수가 간략하게 제시한 「간행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해명만으로는 이 사전의 구상 및 편제의 토대 구실을 하는 ‘용어’ 개념과 그에 입각한 편제의 원칙, 특히 대표제어, 중표제어, 소표제어의 분류 원칙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사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역사용어사전’(영어로 하면 Dictionary of the Historical Terms)은 역사학 분야에서 쓰이는 여러 용어들의 간략한 낱말 뜻을 제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가령 日本史用語辭典編集委員會 編, {日本史用語辭典}, 東京: 柏書店, 1979 또는 Chris Cook, Dictionary of Historical Terms, Macmillan Press, 1983이나 J. P. Michaux, Elsevier's Dictionary of Art History Terms/ Elsevier's Dictionnaire des Termes d'Histoire de L'Art: French/English-English/French, Elsevier Science Ltd, 2002 등에 그에 해당하며, 인터넷 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개 언어의 역사용어사전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사전의 경우 내용을 보면 낱말의 뜻풀이를 제시하는 사전(辭典)의 성격도 지니고 있으나, 특히 중표제어나 대표제어의 경우는 어떤 사실이나 주제에 대한 포괄적 설명을 제시하는 사전(事典)의 성격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 사전의 기획 및 편집 주체들이 ‘용어’라는 개념에 대하여 상당히 세심하면서 특수한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다행히 이 사전의 편찬 주체들이 이 사전에서 설정한 ‘용어’ 개념과 편찬 방법을 상세하게 해명하는 논문을 통해 필자는 이 의문의 상당 부분을 해결할 수 있었다.[최갑수 외, 「역사용어의 범주와 {역사용어사전}의 편찬방법」, {한국사전학} 제26호, 2015. 출판되기 이전에 이 논문을 제공해준 이동기 교수와 양희영 교수께 감사드린다.] 논문에 따르면 이 사전에서 역사용어 개념은 “역사서술에 자주 등장하는 어휘”라는 일반적인 뜻을 지니되, 문장구조에 입각하여 세 가지 부류로 세분되고 있다. 역사적 설명의 두 가지 부분을 구성하는 주어부와 술어부 가운데 주어부에서는 “인명, 지명, 국명, 민족명, 사료나 저술의 이름, 조약명, 연호, 도량형의 명칭, 특정 제도의 이름, 사건, 풍속, 사상, 집단심성, 특정의 용어”[같은 글, 71쪽] 중, “제도명의 일부 ... 일부 특출한 사건(예컨대 동학농민전쟁이나 프랑스혁명 등)과 특정의 학설(독일의 특수한 길, 동양적 전제주의, 아날학파, 아세아적 생산양식, 가산제국가론 등)”[같은 글, 72쪽]이 표제어로 선정되었다. 술어부 중에서는 “시민혁명, 부르주아지, 근대국가, 절대주의, 봉건제, 시대구분, 노예제, 자본주의, 민족주의, 유럽중심주의, 파시즘 등 보다 특정한 형태의 개념들”이 포함되며, 여기에 더하여 “국민, 문명, 혁명, 국가, 자유, 평등, 법, 계급, 평화, 인권, 화폐, 도시 등 사회과학이나 일상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개념들 ... 에 속하나 과거의 사상(事象)의 이해에 긴요하다고 판단되는 용어들, 예컨대 혁명, 토지제도, 화폐, 도량형, 인구, 계급, 귀족, 도시, 문명, 문화 등”[같은 곳]도 표제어로 포함되었다.

  

논문은 또한 유형에 따라 용어 개념을 분류하고 있는데, 이 경우 역사용어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유형으로 구별된다. 첫째, 과거의 사료에 등장하는 사료용어가 있으며, 둘째, 역사가들이 과거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연구용어가 있고, 셋째, 근현대사 영역에서 주로 서구 용어를 번역한 번역용어들이 있고, 마지막으로 인접학문의 용어들과 접해 있는 인접 학문용어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

  

표제어 선정의 경우 이 사전에서는 주어부에 속한 제도명은 소표제어에 위치시키고, 술어부에 속하는 용어들은 중표제어와 대표제어에 위치시켰다. 이 중에서 한국사ㆍ동양사ㆍ서양사에 모두 해당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대표제어에 편성되었고, 그렇지 못한 것은 중표제어나 소표제어에 편성하되, 그 용어가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현대사 중 어디에 속하는지 역시 고려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대 표제어의 후보가 되는 ‘근대국가, 근대화, 문명, 민주주의, 민족주의, 봉건제, 사회주의, 신분제, 자본주의, 제국주의, 파시즘’ 등은 거의 근대 이후의 역사에 해당하며 사실상 유럽의 역사적 경험을 담고 있는 것”이어서 자칫 “유럽중심주의를 여과없이 재생산하거나 후대의 개념을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시대착오를 범하는 것”[같은 글, 80쪽]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이 논문을 통해 이 사전의 편찬 주체들이 역사용어라는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아울러 이 개념에 입각하여 표제어를 선정하고 적절한 집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무척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거니와 ‘역사 용어’라는 개념을 이처럼 세심하게 범주화하고 그에 입각하여 이 정도 규모의 사전을 제작한 것은 여러 모로 볼 때 매우 독창적인 작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역사 용어는 간단한 뜻풀이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으나, 이 사전에서는 역사적 설명의 구조에서 그 논리적 근거를 찾고 있을 뿐더러 분야별ㆍ시대별 구별에 입각해 표제어로서의 경중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 역사학에서 사용되는 주요 용어들이 어떤 것인지 총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 용어들에 대한 한국 역사학계의 이해 방식과 수준이 어떠한지 역시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사전은, 편찬자와 평자가 언급하듯이 해방 이후 60여 년 간 축적된 한국 역사학계의 지적 노력과 성과의 응축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반면, 이 사전이 지니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과 한계 역시 용어들의 차원에서 노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점은 이 사전의 근대성과 탈근대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함께 이야기해보겠다.


III. {역사용어사전}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필자가 보기에 이 사전은 기본적으로 근대성을 지향하는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 사전이 국민국가 체계를 현재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근대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역사적 질서(또는 문명의 단위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겠다)로 이해하고 있으며, 사전의 궁극적인 의의를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문화적 주체성의 표현에서 찾는다는 사실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편, {역사용어사전},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5 중 「간행사」 참조. 이하 논의의 편의를 위해 이 사전의 쪽수는 본문 중에 숫자로 표시하겠다.] 곧 사전은 단순히 자모의 체계에 따라 구성된 지식의 집적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국가의 자격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격상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이러한 근대 지향적 성격이 다소 과도하게 표현되는 대목도 있으나, 이 사전에 300여명에 이르는 국내 학계의 주요 역사 연구자들이 참여한 점을 미뤄볼 때, 사전다운 사전을 만드는 것을 한국 역사학계의 중요한 과제이자 소임으로 받아들이고, 한국 역사학의 자립성과 성숙성을 측정하는 근본적인 척도로 이해하는 것에 많은 한국 역사학자들이 동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이 사전의 편찬 주체들은 물론이거니와 한 서평자 역시 이 사전 자체를 궁극적인 목표로 간주하지 않고 ‘역사학 대사전’이라는 더 커다란 근대적 프로젝트를 달성하기 위한 한 단계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사전의 근본적인 지향이 근대적이라는 점이 명시적으로 나타난다.[이성규, 「소개와 간평: {역사용어사전}」, {역사학보} 제 226호, 2015 참조]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 사전의 근대성 지향은 다음과 같은 특색을 지니고 있다.     


(1) 이 사전 기획의 출발점에 한국사ㆍ동양사ㆍ서양사로 분리되어 있는 한국 사학계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왜 이러한 분리가 문제가 될까? 그것은 우선 용어상의 통일성의 부재 및 외국 학계(특히 일본)의 특수한 용어들의 범람, 부적절한 용어 번역 때문이다. 동일한 역사적 사실을 두고 연구자나 분야별 전공에 따라 상이하게 표현하는 데서 생기는 불편함은 연구의 차원만이 아니라 교육 및 대중적 소통의 차원에서도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고 한국 역사학의 주요 용어들에 대한 통일적인 개념화 및 표준화를 시도하려는 것이 이 사전의 목표 중 하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단지 용어상의 혼동 및 거기에서 생겨나는 불편함에 있다면 그것은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더 심층적인 이유는 용어상의 통일성의 부재가 사실은 역사에 대한 인식, 역사를 바라보는 기본적 시각의 이질성,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파편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전 편찬자들이나 앞서 언급한 서평자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이러한 이질성 내지 파편성이 한국사ㆍ동양사ㆍ서양사(및 역사교육)로 분리된 한국 역사학계의 제도적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제도적 분화를 통해 각 분야별로 더 전문적이고 밀도 있는 연구를 이룩하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분과 체제에서는 상호 연계와 융합을 통한 역사학이 점차 해체되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성규, 같은 글, 512쪽] 또는 “분과학문체계로 나뉘어져 발전해온 현재 역사학이 각 분과의 전문성 확보로 말미암아 역사학의 정체성 자체가 상실된 데 대한 반성”[최갑수 외, 앞의 글, 78쪽]의 태도를 표현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 사전의 편찬자들을 비롯한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이 이러한 제도적 분과 체제 및 거기에서 비롯된 파편적인 역사 이해를 극복하는 것을 한국 역사학의 기본 과제 중 하나로 삼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2) 이 사전이 한국 역사학의 자립성과 통일성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자 그것을 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구상되고 실현되었다는 점이다. (1)의 특성은 사실 탈식민성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사ㆍ동양사ㆍ서양사의 구별 자체가 일본 사학계의 관행에서 유래한 것이고, 한국 역사학계에서 사용하는 많은 용어들 역시 일본 학계에서 쓰는 용어들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능한 한 일본식 용어의 범람을 막아보고, 한국인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역사용어를 한국사 안에서 발굴”하려고 노력했다는 편찬자들의 견해를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노력은 좀 더 자연스러운 한국어 역사 용어의 확립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대안적 역사상을 모색”[최갑수 외, 같은 글, 같은 곳]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3) 가장 중요한 점이겠지만, {역사용어사전}의 편찬 방식 및 체제 자체가 지극히 근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이래 근대적인 사전들은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여기에서 사전은 주로 사전(事典), 또는 움베르토 에코의 구별법을 원용한다면, 자모사전dictionary이 아니라 백과사전encyclopedia을 가리킨다. Umberto Eco, Kant and the Platypus, Secker and Warburg, 1999; 움베르토 에코, {칸트와 오리너구리}, 박여성 옮김, 열린책들, 2009 참조.] 첫째, 관련 학계의 대표적인 권위자 중 한 사람이 전체적인 책임을 맡아 사전 편찬 작업을 지휘한다. 이 책임자는 또한 분야별로 적절한 전문가를 선택하여 그에게 부분적인 감수의 책임을 부여한다. 그리고 사전의 각 표제어의 집필자는 그 표제어와 관련된 학계의 권위자 또는 적어도 전공자가 맡는다. 아울러 사전의 권위와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검증과 교열의 과정을 거친다. 둘째, 근대적인 사전은 기본적으로 일국적인(또는 한 언어 내적인) 기획으로 고안되고 진행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거니와 그 이후 제작된 각 국의 여러 사전들, 예컨대 프랑스, 독일 등과 같은 서유럽 나라들의 여러 사전들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 성립 이후 제작된 소비에트 백과사전, 중화인민공화국 백과사전, 탈식민지 이후 인도에서 제작된 110권짜리 백과사전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이점에 관해서는 Mike Featherstone and Couze Venn, “Problematizing Global Knowledge and the New Encyclopaedia Project: An Introduction”, Theory, Culture & Society, Vol. 23, nos. 2~3, p. 7 이하 참조.] 따라서 사전 집필은 해당 국가 출신의 전문가들이 해당 국의 언어로 작성함으로써 이루어지며, 분야가 어떻든 그 사전은 해당 국가의 학문적 자립성 및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기본적인 지표 구실을 한다. 셋째, 따라서 근대적인 사전은 정의상 각각의 네이션을 독립적인 문화적 단위로 설정한다. 경험상으로는 다른 나라 및 문화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지만, 원칙적으로 각각의 네이션은 다른 네이션과 구별되는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문화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백과사전을 비롯한 각각의 사전(事典)은 이러한 문화적 통일성을 각 분야의 수준에서 표현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따라서 다른 네이션 및 문화와의 교류 및 상호 영향은 이러한 선행하는 통일성에 기반을 둔 것으로 간주된다. {역사용어사전}은 이러한 근대적인 사전 편찬의 원칙에 전형적으로 부합하는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처럼 원칙적으로 전형적인 근대적 사전을 지향하고 있음에도, {역사용어사전}은 탈근대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측면도 보여주고 있다. 또는 적어도 전형적인 근대적 측면을 넘어서거나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이 사전이 {민족대백과사전}이나 그 이전의 다른 한국사 사전과 달리 한국사의 차원을 넘어서는 역사학 전체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이 사전은 한국의 시각에서 동양사와 서양사를 포함한 역사 전체를 이해하려는 기본적인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좁은 의미의 한국사의 시각 또는 민족주의 사관의 시각과 구별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전의 민족주의 사관이 (식민사관에 맞서) 한국사의 차원에서 독자적인 역사적 발전의 경로와 법칙을 밝히려는 데 주력한 것이었다면, 이 사전은 한편으로 역사의 외연을 한국사 내지 민족사 영역에 한정하지 않고 세계사의 범위로 확장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내포적인 차원에서도 한국인의 시각에서 역사 전체를 파악하고 설명할 수 있는 전망을 확보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학적 근대성의 핵심을 민족 사관 내지 내재적 발전론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이 사전은 이미 그러한 근대성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 이 사전이 비교사적 시각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이 사전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동일한 표제어에 대하여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의 시각에서 각각 설명하는 내용을 나란히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무정부주의에 관하여 동양사의 시각에서 설명한 “무정부주의”와 각각 서양사와 한국사의 시각에서 설명한 “아나키즘”(서) 및 “아나키즘”(한)을 제시한 것이나,[그런데 “무정부주의”와 “아나키즘”(한), “아나키즘”(서)의 경우 anarchism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한 설명에 차이가 있고, 상충하는 대목도 존재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아나키즘”(서)의 설명이 제일 정확하다.] “과거제”에 대한 설명에서 한국, 동양, 베트남의 경우를 비교한 것, “상속제”나 “역법”에 대한 설명에서 서양과 동양, 한국의 역사를 비교사적으로 배열한 것 등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하겠다. “농민봉기”나 “혁명”의 경우에는 동양사와 서양사에서의 논의를 독립적인 표제어로 제시하고 있고, “근대화”, “농업혁명”, “사회진화론” 등에서는 한국사와 서양사의 경우를 비교하고 있다. 또한 이렇게 독립적인 표제어로 배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특히 대표제어에 대한 설명에서는 서양사나 동양사 또는 한국사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세 개의 역사적 시각을 함께 포함하려고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가령 대표제어인 “개화”에서는 중국, 일본, 조선의 상황을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고, “관료제”나 “시대구분” 등도 서양과 동양, 조선(한국)의 경우를 비교사적인 관점에서 해명하고 있다. 


  필자가 이를 탈근대적 측면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이러한 시도가 역사를 이해하는 근대의 지배적인 관점, 곧 유럽중심적 역사학에 대한 탈구축의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식민주의 역사가들이 잘 보여준 바와 같이 근대 역사학은 서양, 특히 유럽을 중심에 두고 구성된 유럽중심적인 역사학이었다.[이점에 관해 필자는 다음 책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유럽을 지방화하기}, 김택현ㆍ안준범 옮김, 그린비, 2014. 이 책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토론은 역사학도만이 아니라 철학도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역사학에서 유럽중심주의는 첫째,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이분법, 둘째, 단일한 보편사로서의 세계사, 셋째, “먼저 유럽에서, 나중에 다른 곳에서”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런 시각에 입각하면 근대는 단순히 여러 시대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전근대(경제적 전근대이든 아니면 정치적 또는 문화적 전근대이든 간에)가 넘어서야 할 규범적인 문턱으로 나타난다. 근대의 문턱을 넘어서야 보편사(또는 보편적 문명사)로서의 세계사에 진입하는 것이 가능해지며, 세계사의 과정을 먼저 개시한 유럽의 모델을 따라 각자 경쟁적으로 근대화의 역사를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유럽중심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역사는 유럽이 보편적인 틀과 규범을 제시한 단일한 역사적 과정으로 제시된다. 반면 이 사전에서 채택하고 있는 비교사적인 전망은 이러한 유럽중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역사를 복수적인 과정들이 상호 연계를 맺고 갈등하며 분화하는 복잡성과 다양성의 견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탈유럽중심주의적인 역사학을 위한 흥미로운 실험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서두에서 필자가 이 사전이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교차로에 놓여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측면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점은 이 사전의 편찬자들 역시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최갑수 등이 발표한 논문에서 필자들은 “현재의 우리들 또한 역사적 변화의 끝자락에 있기에”[]라는 시대 인식을 표현하고 있다. ‘역사적 변화의 끝자락’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 편찬자들과 다른 역사학자들, 그리고 필자 사이에 당연히 이런저런 의견의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필자는 이것을 탈근대성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학처럼 실증성을 중시하는 학문에서는 탈근대성이라는 말 자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지닌 사람들도 있을 테고, 특히 탈근대적 사전이라는 표현 자체를 어불성설이나 용어모순처럼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사전과 관련하여 탈근대성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려는 것은, 개방성상호 연계성, 다수성이라는 개념이다. 필자가 볼 때 이 세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탈근대성은 이미 {역사용어사전}에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다. 개방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사전이 한국 역사학의 범위를 좁은 의미의 한국사에서 동양사, 서양사를 아우르는 더 커다란 역사학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또한 인접 학문들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인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종합 학문으로서 역사학의 성격을 잘 드러낸 점도 평가할 수 있다. 같은 표제어의 경우에도 한국사와 동양사, 서양사 각각의 시각에 따라 집필하거나 동일한 표제어 내에서도 서양과 동양, 한국의 역사적 사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려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상호 연계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다수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 사전에는 아쉬운 점이 있는데, 이점에 관해서는 5절에서 후술하겠다. 따라서 필자가 말하는 탈근대적 사전 또는 사전의 탈근대성이라는 것은 기존의 다른 사전들이나 {역사용어사전}과 전혀 무관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사전에서도 어느 정도 구현되고 있는 특색을 조금 더 진취적으로 살려보자는 취지로 이해할 수 있다.


IV. 몇몇 표제어에 대한 비평


  표제어의 내용과 관련하여 필자가 가장 놀랍게 생각한 것은 마르크스주의라는 표제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사전에서는 마르크스주의 대신 원고지 3매 분량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제시되어 있고, 대표제어 중 하나인 “사회주의” 내에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1830년대 이래 등장한 사회주의 사상 중의 하나였고, 20세기 실현된 사회주의 정치 체제는 사실은 “국가사회주의 체제”(885쪽)였으며, “1989년 동유럽 체제의 몰락으로 역사에서 그 힘을 잃었다”(884쪽)는 평가에 따른 편성인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정치 체제로서 국가사회주의 체제는 몰락했지만, 이념 또는 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여전히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 “사회주의” 집필자의 의도일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사전에는 마르크스주의라는 독립적인 표제어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부재하는 표제어에 준거한다고 할 수 있는 다수의 표제어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공산주의”(한), “공산주의”(동), “마르크스-레닌주의”, “소비에트”, “에르푸르트 강령”, “역사적 유물론”, “유럽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전시공산주의”, “코민테른”, “페레스트로이카”,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이 그것들이다. 이 중에서 “공산주의”, “소비에트”, “페레스트로이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중표제어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과연 마르크스주의라는 부재하는 중심 없이 이 표제어들 간의 역사적 연관성이 이해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사회주의”라는 표제어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연관성일 것이고 아마도 “국가사회주의”나 “현실사회주의”로도 포괄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역사용어사전󰡕은 편찬자나 “사회주의” 집필자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의미에서 역사는 승리자들의 기록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듯 보인다.


  이 사전에는 메타역사적인 용어라고 할 만한 것이 두 개가 수록되어 있는데, “시대구분”과 “역사”라는 표제어가 그것이다. 이 두 표제어는 역사학 자체의 성격 및 그 존립 근거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로운 항목들이다. 이러한 표제어들을 역사용어의 범주 내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 역사학이 상당히 성숙해 있다는 증거로 간주될 수 있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그 밖의 다른 표제어들도 좀 더 포함시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가령 이 사전에는 “근대화”라는 표제어는 존재하지만 “근대성”이라는 표제어는 빠져 있다. 하지만 동일한 어근에 기반을 두고 있음에도 양자 사이에는 내용상의 상당한 차이가 존재할뿐더러, 앞서 지적했다시피 근대라는 것은 단순히 여러 시대 중 하나를 가리키기보다는 ‘전근대’와 ‘근대’를 가르는 기준으로 작용하고 단일한 보편사라는 관념의 개념적(ㆍ이데올로기적)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메타역사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유럽중심적인 메타역사 개념일 것이다. 따라서 만약 근대성이라는 대표제어를 설정하고 그것을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의 시각에서 비교사적으로 설명해본다면, 이 세 가지 역사적 시각 사이의 갈등과 차이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고, 한국 역사학 내에서 유럽중심주의 및 그 대안에 관한 쟁점이 훨씬 선명하게 부각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반면 근대를 단순히 여러 시대 중 하나로 간주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유럽중심적 역사관을 정상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 하나 내용과 관련하여 지적하고 싶은 것은 표제어들의 내용 수준에 꽤 편차가 있다는 점이다. 특정 표제어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겠지만, 몇몇 표제어들의 내용은 과연 충분한 검토와 검증이 이루어졌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 만큼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비문이나 오식이 눈에 띄는 곳도 더러 있었다. 반면 필자가 이해하는 한에서는 “근대국가”나 “대공황”, “대의제”, “봉건제”, “시대구분”, “제국주의”, “젠더”, “혁명”(서) 같은 표제어들은 내용도 풍부할뿐더러 집필 기준에 잘 부합하는 뛰어난 항목들이라고 보인다. 필자가 무지로 인해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다른 여러 표제어들, 특히 동양사와 관련한 표제어들 중에도 탁월한 성과들이 많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유토피아”라는 표제어의 경우에는 제목이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본문에서 설명하듯이 ‘유토피아’라는 용어 자체가 16세기에 토머스 모어가 처음 만들어낸 말인데, 이것을 기준으로 서양의 각종 이상사회론은 물론이거니와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이상사회론까지 모두 포괄할 수 있는가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상사회” 같은 용어가 오히려 조금 더 중립적이고 포괄적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명”이나 “문화” 같은 항목의 경우도 유럽중심주의 비판이나 포스트식민주의적인 성찰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V. 몇 가지 제언


  끝으로 몇 가지 제안을 덧붙이면서 글을 맺기로 하겠다. 


  이 사전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 중 하나는 종이사전의 한계 내에서 하이퍼텍스트성 충분히 구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선 이 사전에 전체 표제어들의 목차를 실었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가나다 순으로 배열하고 책 옆구리에 ‘ㄱ’에서 ‘ㅎ’까지 구별을 해놓았지만, 책 앞부분에 전체 목차를 제시했다면, 독자들이 이 사전에 어떤 표제어들이 수록되었는지 일람하기에 훨씬 편리했을 것이다. 아울러 각 표제어 마지막에 관련 표제어들을 함께 표시해놓았다면, 표제어들 간의 상호연관성이 더 뚜렷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가령 이 사전에서 “여성사”와 “젠더”, “페미니즘”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데, 지금의 편제 방식처럼 각 표제어가 서로 독립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이 사전에 여성과 관련된 어떤 표제어들이 존재하고 그것들 사이에 어떤 내용상의 연관성과 상위성(相違性)이 존재하는지 독자들이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위에서 지적한 바 있는 마르크스주의와 연관된 표제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들 각각의 내용 마지막에 연관된 표제어들을 표시해놓았다면, 전체적인 연관 관계를 이해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이처럼 표제어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좀 더 분명히 해놓는다면, 사전에 대한 훨씬 다양한 독서를 가능하게 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사전의 장단점을 더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전에서는 앞서 지적했듯이 다수성이 충분히 구현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말하는 다수성이란 일차적으로 다수의 견해, 다수의 필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대표제어는 원고지 100매 이상이 되는 방대한 분량의 항목이며, 그것이 다루는 범위도 매우 포괄적이다. 그리고 이렇게 포괄적인 외연을 가진 주제인 만큼 당연히 그 세부적인 논의를 둘러싼 여러 논쟁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사전의 경우 어떤 특정한 입장을 택하기보다 가급적 중도적인 관점에서 주제와 관련된 주요 논쟁들을 소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사전의 성격상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런데 중도적인 관점을 취한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정으로 중립적인 입장일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가령 앞에서 지적했듯이 마르크스주의를 “사회주의”라는 대표제어 내의 하위 항목으로 포함시키는 것이 적절한지, 또는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을 “민족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 일인지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이런 경우 한 사람의 필자에게 대표제어 전체의 집필을 맡기는 것보다 상이한 관점을 가진 두 명의 필자에게 집필을 맡기는 것은 어떨까? 또는 그것이 사전으로서는 너무 논쟁적인 해법이라면, 한 명의 필자가 대표제어의 주요 내용을 집필하되, 그와 상이한 견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종의 “보론”이나 “부록”의 방식으로 전달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약 50여 년 전에 프랑스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1967)라는 저작에서 장-자크 루소의 저작에 대한 탈구축적인 독서를 바탕으로 ‘보충’(supplément)[사실 더 정확히 번역하자면, “대리보충”이나 “대체보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이라는 아주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 바 있는데, 데리다의 원래 논조와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표제어에 보론이나 부록을 덧붙임으로써 단일 필자가 집필하는 경우에 얻을 수 없는 논의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획득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사례들이 존재하는데, 가령 2004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유럽철학어휘사전󰡕의 경우가 그렇다. 이 사전은 여러 모로 혁신적인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Barbara Cassin ed., Vocabulaire européen des philosophies, Seuil/Le Robert, 2004.] 우선 이 사전은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네이션이라는 문화적 단위에 기반을 둔 사전이 아니라, 포스트네이션(post-nation) 내지 트랜스네이션(trans-nation)으로서의 ‘유럽’이라는 단위에 기반을 둔 사전이다. 더욱이 이 사전은 “번역 불가능한 것들의 사전”(dictionnaire des intraduisibles)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대개의 사전들과 달리 “번역 불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사전이다. 여기서 번역 불가능성이라는 관념은 사실은 탁월한 역사적 감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전에서 번역 불가능한 것들이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의(또는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의) 이행 과정에서 생겨나는 소통과 혼란, 단절과 전환, 쇄신과 발명의 측면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가령 프랑스어 “Âme”라는 개념의 경우 보통의 철학사전은 이 개념에 관해, 그리스어의 “프쉬케psykhē”(또는 “누스nous”)에서 유래하고 라틴어의 “아니마anima”나 “멘스mens”를 거쳐 오늘날의 “암므âme”나 “가이스트Geist”, “마인드mind”에 이르게 된 경로를, 대표적인 철학자들(가령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로크, 흄, 칸트, 헤겔, 비트겐슈타인 등)의 몇몇 저작들의 발췌문들을 검토하면서 제시해준다. 그리고 우리말로는 간단하게 “정신”이나 “마음”으로 번역될 수 있다. 반면 이 사전은 고대 그리스에서 고전 로마 시대, 중세 스콜라 시대를 거쳐 근대 초기 유럽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이 여러 단어들이 모두 동일한 지시체를 가리킨다는 전제, 따라서 이 용어들이 모두 선행적인 개념적 통일성을 갖고 있다는 전제를 포기하고, 그 대신 그리스어 프쉬케에서 라틴어 아니마와 멘스로 번역이 될 때, 그리고 라틴어가 근대 초기에 암므나 가이스트, 마인드로 번역이 될 때 어떻게 정신이나 마음에 대한 개념적 이해가 달라지는지, 따라서 각각의 시대마다 어떻게 각자의 고유한 마음과 정신을 발명해내는지 해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수많은 단어들 사이에는 연속성만이 아니라 불연속성, 번역 불가능성이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프랑스어 “âme”나 독일어 “Geist”, 영어의 “mind” 또는 우리말의 “정신”이나 “마음”이 지닌 역사성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필자가 보기에 이 사전의 또 다른 혁신적인 면모는 이러한 번역 불가능성, 개념의 다의성에 충실하기 위해 하나의 표제어를 설명하는 데 적어도 2~3명, 때로는 그 이상의 필자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주체”(sujet)라는 표제어의 경우 고대철학 전문가인 바르바라 카생(Barbara Cassin)과 중세철학의 대가인 알랭 드 리베라(Alain de Libera), 대표적인 현대 프랑스철학자 중 한 사람인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가 공동 집필을 하고, 여기에 더하여 또 다른 고대철학 전문가와 근대 초기 철학 전문가가 일종의 “보론”들을 덧붙이고 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보통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칸트와 헤겔 같은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완성되었다고 간주되어온 주체 개념이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이 드러나며, 이는 서양 근대철학 전체를 새롭게 조명해주는 놀라운 탈구축 효과를 산출한다. 이런 혁신적인 면모 덕분에 이 사전은 철학사전으로서는 드물게도 영어와 아랍어로 번역이 됐다.[Barbara Cassin ed., Dictionary of Untranslatables: A Philosophical Lexicon, trans., Emily Apter et al.,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 참조. 영역본에는 영어권 필자들이 추가한 항목들도 존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역사학과 철학이 다르고 프랑스와 한국의 지적 상황 역시 다르기 때문에 이 사전이 무조건적인 기준이나 모델이 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사전에 대해 갖고 있는 근대적인 통념을 탈구축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주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흔히 탈근대적 사전의 대표적인 사례로 위키피디아를 꼽지만, 위키피디아는 여러 가지 혁신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사전의 분류 방식 및 체제에서는 전형적인 근대적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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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지방화하기 - 포스트식민 사상과 역사적 차이 프리즘 총서 15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지음, 김택현.안준범 옮김 / 그린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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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출신의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트의 [유럽을 지방화하기]가 "프리즘 총서"  15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마이페이퍼"에서 소개할까 했는데, 마침 한국일보에서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요청해서

 

한국일보 서평 원고로 이 책의 소개를 대신하겠습니다.

 

중요한 문제의식과 독창적인 개념화, 빼어난 문체 등이 어우러진 차크라바르티의 걸작이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읽히고 논의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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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초판이 출간된 인도 출신 역사가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아직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단언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이미 고전이 되어가고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이미 10여개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수많은 서평과 논평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 책이 해체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유럽 대륙 내부에서 유럽을 탈식민주의의 시각에서 파악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간된지 불과 15년만에 이 책이 이처럼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1980년대 초 일군의 인도 역사가들이 시작한 서발턴 연구의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이다. 서발턴(subaltern)이라는 말은 원래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회의 하층 계급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던 말이다. 그런데 라나지트 구하를 비롯한 서발턴 역사학자들은 이 용어를 일반화하여 엘리트 집단 이외의 모든 인도인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서발턴 역사학이란 역사에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나타낼 만한 변변한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민초들의 역사를 기록하려는, 더욱이 그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려는 새롭고도 급진적인 역사학 기획이었다. 구하의 [서발턴과 봉기], 스피박의 [서발턴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등이 바로 이러한 기획을 대표하는 저작이며, 차크라바르티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유럽을 지방화하기] 역시 서발턴 역사학의 일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책의 제목이 “유럽을 지방화하기”일까? 유럽을 지방화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여기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역사주의’라는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차크라바르티는 역사주의를 “모든 연구 대상은 그것이 실존하는 내내 통일적인 것으로 이해되며 세속적, 역사적 시간의 발전 과정을 통해 충분히 표현된다고 생각하는 역사에 관한 사유 양식”으로 정의한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세계 전체는 동일한 역사적 패턴에 따라 발전해왔고 또 계속 발전해간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을 특징짓는 것이 “먼저 유럽에서, 나중에 다른 곳에서”라는 구조다. 곧 산업화와 민주주의, 시민권, 인권 등이 먼저 유럽에서 생겨났으며, 유럽을 제외한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에서는 유럽이 이룩한 선진 문명을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서구 내지 유럽은 세계의 모든 문명이 뒤따라야 할 표준적인 모델을 제공해주는 셈이다. 차크라바르티에 따르면 유럽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해준 것이 바로 역사주의였으며, 식민지 체계가 종식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런 사유 방식은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역사에는 단일한 발전과정이 존재하며, 각 나라 및 문명은 이 과정에서 얼마나 앞서 있고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에 따라 그 수준의 정도가 평가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을 해체하려는 것이 바로 유럽을 지방화하기라는 제목이 뜻하는 바다.


 

  그러나 이것을 새로운 보편을 세우자거나 보편을 다수화하자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말하자면 유럽식 보편주의는 한물 갔으니 이제 아시아적 보편을 세울 때가 되었다, 이제 세계의 패권은 아시아로 넘어왔다는 식의 주장이 아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유럽식 역사주의를 모방하는 것에 불과할뿐더러, 헌팅턴 식의 문명충돌론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유럽의 사상 및 문명 전체를 거부하자는 뜻이 아니다. 실제로 차크라바르티가 유럽을 지방화하기 위해 주로 의지하는 사상적 원천은 마르크스와 하이데거 및 푸코 같은 유럽의 사상가들이다. 중요한 것은 단일한 역사 발전 과정을 가정하는 관점을 해체하고, 각각의 문화, 각각의 나라, 각각의 지역에 고유한 역사적 삶의 독특성을 존중하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다.


 

  역사주의는 우리의 삶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정희 시절에는 조국 근대화라는 구호로 나타났고, 지금은 선진국 따라잡기라는 형태로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획일화된 도식이 얼마나 사람들의 삶을, 특히 자크 랑시에르가 말하듯 몫 없는 이들의 삶을 유린하고 있는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유럽을 지방화하기]의 궁극적인 전언은, 서발턴들의 독특한 삶의 역사들에 기반을 둔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테면 탈중심적 보편성, 해체적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화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을 지방화하기]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 차크라바르티는 역사가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고전 저작들은 물론이거니와 헤겔, 후설, 하이데거 같은 독일철학자들과 알튀세르, 푸코, 데리다 같은 프랑스철학자들의 저작들까지 두루 꿰고 있는 데다가, 인도의 역사와 사회, 문학 등에 관한 폭넓은 사료들을 원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서와의 대조 없이 술술 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는 것은 두 번역자의 빼어난 능력과 힘겨운 노력 덕분이다.


 

  ‘유럽을 지방화하기’라는 기획을 어떻게 우리의 역사와 현실 속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질문해보고 또 각자 답변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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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이 2014-10-09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갈 길이 머네요~~~
 
육화, 살의 철학 뉴아카이브 총서 8
미셸 앙리 지음, 박영옥 옮김 / 자음과모음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자음과 모음] 여름호에 실릴 서평을 한 편 올립니다.

 

국내에는 다소 생소한 미셸 앙리라는 현상학자의 저서에 관한 서평입니다.

 

이 글 역시 아직 교정이 끝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이나 토론은

 

[자음과 모음] 여름호에 실린 글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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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셸 앙리(1922~2002)는 프랑스 현상학의 최후의 대가라고 할 만한 사람이다. 독일의 에드문트 후설에서 시작되고 마르틴 하이데거와 막스 셸러 등을 통해 활력을 얻은 ‘현상학 운동’은, 하버마스가 지적한 것처럼(󰡔탈형이상학적 사유󰡕), 그 이후 오히려 프랑스에서 독창적인 계승자를 얻게 된다. 장 폴 사르트르와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실존주의적 현상학,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의 현상학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프랑스적인 현상학 운동의 모습들이라면, 미셸 앙리는 프랑스 현상학이 여전히 창조적 쇄신의 능력을 잃지 않았음을 입증해주는 가장 최근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앙리의 저작은 프랑스에서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들었으며, 독일이나 미국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앙리의 저작 거의 대부분이 영어로 번역되어 있고, 앙리에 관한 연구서나 논문집도 여러 권 나와 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따라서 다소 늦기는 했지만, 󰡔물질 현상학󰡕과 󰡔육화, 살의 철학󰡕의 번역을 계기로 국내에도 이 독창적인 현상학자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논의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서평의 대상이 된 이 책은 앙리의 저작 중 말년에 속하는 책이다. 󰡔현시의 본질󰡕(1963)이라는 방대한 저작을 통해 독자적인 사상의 기틀을 마련한 앙리는 󰡔신체의 철학과 현상학󰡕(1965), 󰡔물질 현상학󰡕(1990) 같은 현상학적인 저작 이외에도, 󰡔마르크스󰡕(1976)나 󰡔정신분석의 계보학󰡕(1985), 󰡔내가 진리다: 기독 철학을 위하여󰡕(1996) 같은 저서를 통해 고유한 의미의 현상학적인 철학의 영역을 넘어, 사회철학, 정신분석 및 기독교 신학의 영역까지 자신의 사유를 확장해갔다. 따라서 󰡔육화, 살의 철학󰡕은 국내의 독자들이 앙리의 원숙한 사상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2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상학의 전복”이라는 제목이 붙은 1부에서는 살의 현상학의 관점에서 후설과 하이데거 현상학의 한계를 밝히고 있다. 2부인 “살의 현상학”에서는 좀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근대 과학을 개시한 갈릴레이적 환원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신체(corps)와 구별되는 살(chair)의 개념에서 찾고 있다. 마지막 3부인 “육화의 현상학-기독교적 의미의 구원”에서는 살의 현상학을 바탕으로 기독교적 구원 개념에 대하여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육화’라는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기독교 신비의 핵심을 이루는 육화의 문제를 현상학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살이라는 앙리의 현상학적 개념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또한 근본적으로 현상학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이 제시하는 대담한 철학적 도전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현상학을 통해 현상학을 넘어서기. 둘째, 육화라는 기독교 신비의 핵심을 신앙의 대상이 아닌 심오한 철학적 통찰로 이해하기.

 

자신의 도전을 정당화하고 완수하기 위해 앙리는 우선 신체와 살의 구별에서 논의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신체가 “길가의 돌멩이” 같은 우주의 타성적 물체 등을 가리킨다면, 살은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을 스스로 겪는 우리의 신체”(13쪽)를 뜻한다. 우리의 살은 “스스로 자기를 느끼고, 고통을 견디고, 자기를 감내하고, 자기를 짊어지며, 항상 다시 태어나는 인상들을 따라서 자기를 향유하는 것”(13~14쪽)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구별은 매우 현상학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현상학을 전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상학적인 이유는, 이러한 구별이 신체에 대한 살의 우위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앙리의 구별은 후설 이래로 다른 현상학자들이 전제하듯이 초월론적인 것으로서의 주관에 근거하여 객관적 질서, 과학적 질서의 가능성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앙리에게 이러한 주관의 핵심은 의식이나 현존재, 심지어 무의식이나 신체도 아니고 “살”이다. 이러한 살의 개념은 “철학자들에 의해 전혀 성찰되지도 않은 마르크스의 한 진술에 의하면 사유는 삶의 양태”(175쪽)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앙리가 시도하는 현상학적 전복 또는 전회에 의하면 “더 이상 우리에게 살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사유가 아니며 반대로 사유가 자기에 접근하는 것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느끼고 견디는 것을, 그리고 결국 사유가 매번 자기인 바의 것이 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삶, 즉 cogitatio의 자기-계시이다.”(174쪽)

 

이러한 입장에 기초하여 앙리는 나타남과 나타나는 것 사이의 구별에 입각한 후설과 하이데거 현상학의 한계를 비판한다. 두 사람의 한계는 나타남을 “세계의 나타남”으로, 곧 탈-자(ek-stase)의 가시화의 순수 지평으로 간주하고, 이에 따라 나타남과 나타나는 것 사이의 무관심한 관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하여 앙리는 후설이나 하이데거가 묻지 않은 “인상 그 자체의 나타남”(96쪽), 즉 “인상의 기원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면서, 그러한 기원을 “고통의 자기-촉발(auto-affection)”(116쪽)에서 찾는다. 이러한 ‘고통을 느낌’은 후설의 이른바 ‘수동적 종합’에 선행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바로 “삶의 자기 안에의 도래”가 성립하게 된다. 왜냐하면 “삶은 자기와의 차이남이 없이 자기를 느끼고 견디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본래적이고 순수한 “정감성(affectivité)”(121쪽)으로서의 이러한 자기를 느끼고 견딤에서 “절대적인 삶의 자기-증여 과정”(182쪽)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학의 전복은 두번째 도전으로서 육화의 계시에 대한 재해석과 연결된다. 이러한 재해석은 사도 요한의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는 진술 및 “말씀이 살이 되었다”(16쪽)는 진술의 수수께끼에서 출발하여, “신의 인간-됨, 말씀의 살-됨으로서 그리스도와 같은 누군가는 가능하며 최소한 생각될 수 있는가?”(34쪽)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색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앙리는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의 가상들이 부딪히게 되는 한계로서 “절대적인 무-능”, “모든 힘보다 오래된, 그것에 내재하는 무-능에 대한 결정적인 직관”(327쪽)에서 출발하여 진정한 자유를 “정념적인/수난적인 소여”(345쪽)로서의 살의 경험에서 발견한다. 이때 “창조는 더 이상 자기 밖에 외적인, 분리된 실존의 이름으로, 그 자체 자율적인 것으로 향유하는 한 실체(entité)의 정립을 의미하지 않는다.”(345쪽) 오히려 창조는 “절대적인 삶의 자기-생성 안에서, 그것의 그치지 않는 도래 안에서만 자기에 도래하는 것의 생성을 의미한다.”(346쪽) 이렇게 “창조의 개념을 생성의 개념으로 대체”(426쪽)하면서 앙리는 삶에 대한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수동성을 의미하는, 따라서 모든 초월성이 배제된 수동성을 뜻하는 “초월론적 정감성”(427쪽)을 “우리의 초월론적인 탄생, [신의-인용자 추가] 자식으로서 우리의 조건”(428쪽)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앙리에 따르면 “모든 초월론적인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이 삶의 자기-계시를 가리키는 것”(482쪽)이 바로 말씀의 육화이다.

 

3

 

앙리의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책은 500쪽이라는 책의 분량이 적게 느껴질 만큼 아주 조밀하고 응축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무언가 우리 삶의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독자들이 받게 된다면, 그것은 (프랑스 현상학 특유의 강점이지만) 앙리가 욕망과 사랑, 불안, 고통, 부조리에 대한 감정 같은 인간의 일상적 경험 끊임없이 참조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앙리의 치밀하고 독창적인 사유를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평자는, 번역서 옆에 놓아둔 불어 원서를 거의 들춰보지 않았다. 그만큼 이 책은 꼼꼼하면서도 유려한 우리말로 잘 번역이 되어 있다. 역자의 값진 노고 덕분에 독자들은 프랑스식 현상학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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