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와 윤리 - 변화와 책임의 사회철학 철학의 정원 8
문성원 지음 / 그린비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은 부산대 인문학연구소에서 내는 [코기토]라는 학술지에 수록될 서평입니다.

아직 교정이 다 끝나지 않은 글이니까, 이 글에 대해 논평하거나 토론할 분은

[코기토]에 실린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레비나스에 기반을 둔 사회철학의 모색

 

 

문성원 교수(이하 필자로 약칭)는 사회철학 전공자나 프랑스철학 전공자에겐 낯익은 이름이다. 루이 알튀세르에 관한 학위논문({철학의 시추}, 백의, 1999)에서 {배제의 배제와 환대}(동녘, 2010)를 거쳐 지금 서평의 대상이 된 이 책에 이르기까지, 필자는 줄곧 현대 프랑스 철학과 사회철학이 만나는 자리에서 사고하고 글을 써왔다. 따라서 프랑스 철학에 입각한 사회철학이 필자의 주요 관심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필자의 이러한 지향이 좀더 뚜렷이, 그리고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특히 레비나스의 철학에 대한 필자의 애정과 관심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의 성격을 레비나스에 기반을 둔 사회철학의 모색이라고 규정해볼 수 있다.

 

이 책은 전체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타자와 책임”이라는 주제 아래 5편의 논문을 싣고 있으며, 로컬리티, 주변, 책임, 이웃, 윤리의 문제에서 타자라는 개념이 어떻게 등장하고 또 어떤 의의를 지니고 있는지 해명하고 있다. 2부는 “새로움과 윤리”라는 제목에 따라 4편의 논문을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용서라는 문제와, “잘 있음”을 넘어서는 “있음과 달리”로서의 윤리의 문제, 시간과 새로움이 함축하는 윤리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 책의 핵심적인 철학적 입장이 표명되고 있는 곳은 바로 2부라고 할 수 있다. 3부는 “표현과 욕망”이라는 표제 아래 이미지, 차이, 욕망과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의 주요 주제들이 논의되고 있다. 마지막 4부에서는 “진리와 정의”라는 제목 아래 좀더 거시적인 사회철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4부에 수록된 글들은 필자의 이전 저작들의 문제의식과 좀더 맞닿아 있는 반면에, 1부와 2부에 수록된 글들은 필자가 좀더 최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현재의 사회경제적, 문화적 질서에 대하여 프랑스 철학, 특히 레비나스의 사상이 어떤 “저항의 장소 또는 적어도 피난의 장소”(7쪽)를 제공해줄 수 있을까라는 화두로 집약될 수 있다.

 

이러한 화두와 관련하여 이 책은 들뢰즈(ㆍ가타리)냐 레비나스냐라는 대결 구도를 논의의 줄기로 삼고 있다. 이는 필자가 보기에 들뢰즈ㆍ가타리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해체론적인 사상, 곧 “유동성과 끊임없이 ‘차이지는 차이’가 근본적임을 입증하는 것이 이들의 지향이며, 짐짓 고정되어 보이는 영토와 체계를 부단한 탈영토화의 운동을 통해 흔들어 놓는 것이 이들의 추구하는 바”(103쪽)인 반면, 레비나스는 “변화를 수용하는 열림의 자세와 아울러 그러한 변화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109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들뢰즈ㆍ가타리의 사상이 “불확실성 속에서 새로움을 기대하고 희구하는” 사상인 반면(필자에 따르면 데리다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역시 “어떤 정해진 해결책이나 정의의 상태가 아니라 약속의 이루어짐에 대한 기다림”(160쪽)이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궁여지책”(161쪽)이라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자기 중심적인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움을 나타내는 타자 개념과 더불어 그 새로움의 해악을 막는 윤리라는 기준을 제시해준다는 것이 이러한 대결 구도가 함축하고 있는 논점이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질서”(109쪽)는 때로는 주변-중심의 관계로 표현되기도 하고, 의사들의 파업 사태로 인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거래 관계에 지나지 않”는 “호혜성의 문제”(59쪽)로 이해되기도 하고, 다위니즘에 기반을 둔 경쟁 이데올로기로 나타나기도 하며, 나르시시즘적인 욕망(3부 3장)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질서를 넘어서는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과 윤리 개념은, 필자에 따르면 대단히 포괄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철학적 통찰을 제공해줄 수 있다.

 

이런저런 기회에 필자의 글을 접해온 평자에게 이 책은 필자의 지적인 미덕 몇 가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현실에 기반을 두고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려는 필자의 지속적인 태도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의 철학자가 한국의 현실에 입각하여 사유하고 성찰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글을 쓰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실제로 이렇게 한국이라는 레퍼런스에 뿌리를 두고 사유하고 글을 쓰는 철학자, 특히 프랑스 철학 전공자를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한국의 철학, 한국의 철학자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곳보다는 그 철학적 고향들인 독일, 미국, 프랑스에 있으며, 그 고향들을 자신들의 레퍼런스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자신들의 삶을 레퍼런스로 삶기에는 그들의 사유가 아직 허약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필자의 일관된 철학적 태도는 매우 드물고 값진 것이라 할 만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덕목은 명확하면서 유려한 글쓰기를 꼽을 수 있다. 이점 역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간주될 수 있지만, 이러저러한 철학적인 주제에 관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필자 자신의 선명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면서 정확히 논의를 전개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의 글과 같이 막힘없이 술술 읽히는 철학적인 글은 설렁설렁 되는 대로 쓰이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오랜 시간을 거쳐 숙달된 문체의 힘과 더불어 일관되고 깊은 문제의식이 곁들여 있기 마련이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젊은 철학도나 인문학도에게 교과서와 같은 모범이 될 만하다.

 

그렇다고 해서 평자가 이 책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이나 불만, 또는 바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자는 줄곧 불만이나 의문을 품으면서 이 책을 읽었고, 그것은 서평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우선 필자의 논의가 다소 개략적이라는 점이 불만스럽다. 필자는 이 책에서 레비나스를 중심으로 들뢰즈ㆍ가타리, 데리다, 알튀세르, 바디우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하이데거나 로티, 월저, 롤즈 같은 독일과 영미 철학자들에 관해서도 폭넓게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평자가 보기에 이들 철학자들 가운데 레비나스에 관해서만 비교적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질 뿐, 다른 철학자들의 경우는 개략적인 인용과 논의 이외에는 깊이 있는 분석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필자 자신이 서두에서 지적하듯(8쪽), 레비나스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개념과 이론을 빌려와서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사고해보려는 필자의 지적 관심에서 비롯한 결과일 수도 있다. 곧 필자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회적으로 부딪히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사유하는 것이지,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론 자체를 면밀히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이 면밀하고 심도 있게 검토되고 설득력 있는 해명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물론 아주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안타깝게도 썩 훌륭한 결과가 산출된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레비나스 철학과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다. “해체와 윤리”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의 철학적 기반은 레비나스 철학에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필자는 레비나스의 철학적ㆍ윤리적 의의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신자유주의의 거침없는 욕망에 휘둘리는 현실 속에서 선명한 저항의 장소 또는 적어도 피난의 장소를 제공해 줄 수”(7쪽) 있으며, 로컬리티의 문제나 분단의 문제(1부 1장)에서도, 의약분업과 관련된 의사 파업의 문제에서도(1부 3장), 경쟁 이데올로기 극복의 과제에서도(1부 4장), 웰빙의 문제(2부 3장)에서도 레비나스는 우리가 해법을 찾을 수 있는 철학적ㆍ윤리적 보고로 제시된다. 따라서 필자가 레비나스의 철학적 위력을 그처럼 높게 평가하고 있는 만큼 이 책에는 레비나스의 사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분석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평자가 보기에 이 책에는 잘 알려져 있는 레비나스 사상의 이런저런 개념들(타자 내지 타인, 전체, 무한, 향유, 거주 등)에 관한, 역시 잘 알려져 있는 이런저런 내용만 제시되고 있을 뿐, 레비나스에 관한 다른 글이나 저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무언가 새롭거나 독창적인 분석이 제시되지는 못하고 있다. 오히려 평자로서는 레비나스를 그처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필자의 태도가 다소 놀랍다.

 

아마도 필자에게 레비나스 철학은, 칸트의 초월론 철학이나 아니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인 준초월론(quasi-transcendentalism)에 비견될 수 있는, 아니 그것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종류의 초월(론) 철학, 곧 타자에 입각한 초월(론) 철학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따라서 필자는 그것을 초월론적 주관성에 입각한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호혜성에 기반을 둔 상호주관성의 철학도 넘어서는, 타자와의 비대칭적 관계에 입각해 있고, 타자의 독특성을 존중하는 매우 새로운 초월(론) 철학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필자가 레비나스의 철학이 이러한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실제로 논증하는 데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필자는 타자와의 비대칭적 관계,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이며, 그것은 호혜성에 입각한 서양 근대의 철학이나 현재의 삶의 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지평을 제공해준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데 그치는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필자가 “나와 타자의 관계는 비대칭적일뿐더러,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은 무한하”(115쪽)다고 말하고, “레비나스의 독특성과 무한은 ... 초월과 직결”(120쪽)된다고 말하면서도 굳이 레비나스 철학에서 종교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그 대신 그것은 “윤리적 초월”(120쪽)이라고 역설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윤리적 초월과 종교적 초월 사이에 그처럼 넘어설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는가? 유일자인 신과의 관계가 구체적인 이웃들, 이웃에 있는 타자들과의 관계로 번역된다고 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초월성의 관계가 사라질 수 있을까? 레비나스가 타자와 관련하여 그 닿을 수 없고 넘어설 수 없는 초월성을 강조하고 타자에 대한 우리의 책임,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한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일상화하고 구체화할수록 그 초월성은 더 강화되는 것이 아닐까?

 

평자가 보기에 필자가 제시하는 레비나스는 신과의 초월적 관계를 새로운 휴머니즘과 도덕주의로 번역하고 싶어 하는 철학자, 이웃사랑을 강조하는 철학자다. 특이한 점은 이웃을 사랑하되, 우선 나 자신과 내 가족을 돌본 뒤에 이웃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나 자신 및 내 가족과 똑같이 이웃을 사랑할 것도 아니라, 나와 내 가족에 앞서 이웃을 사랑할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 사랑은 자아에 앞서야 하는 사랑이고, 동일성 중심적인 질서, 호혜적 관계를 넘어서는 무한한 책임의 모습을 띤 사랑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랑은 말하자면 테레사 수녀 같은 이에게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타자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이 필요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인 사회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게, 또는 “선명한 저항의 장소 또는 적어도 피난의 장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피난의 장소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저항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필자가 레비나스 철학이 신자유주의적 현실에 대한 저항의 장소가 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훨씬 더 먼 길을 걸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필자의 논의와 주장이 때로는 상당히 막연한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논의 자체의 설득력이 약화되는 경우도 눈에 띈다. 가령 필자는 4장 1절에서 다위니즘을 “반목적론의 가장 대표적이고 강력한 형태”(77쪽)라고 말하면서, 의도적 목적을 내세우지 않고도 유기적 조직과 기능의 존재 이유를 잘 설명해줄 수 있다는 점을 다위니즘의 장점으로 들고 있다. 그러나 다위니즘이 “살아남음”에 초점을 두고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음에 대하여 “사태를 지배하고 제어하는 원리의 자격”(79쪽)을 부여함에 따라, 오늘날 사회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는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견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필자가 다위니즘으로 지칭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다윈 사상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다윈 사상을 계승하는 여러 종류의 생물학 이론을 가리키는가? 또는 그 중에서 특정한 일부, 특히 사회생물학이나 유전자 결정론을 지칭하는가? 아니면 다윈 사상에 대한 통속화된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가? 필자가 막연하게 다위니즘이라고 지칭하는 것만으로는 과연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리고 이 경우 필자의 주장은 다윈 사상 전체 및 다윈 사상을 계승하는 여러 생물학의 흐름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윈주의 생물학은 무용한 학문인가? 또는 적어도 다윈주의 생물학 자체는 경쟁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인가? 따라서 경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윈주의 생물학은 모두 배격해야 하는 것인가? 또한 레비나스 철학은 다윈주의 생물학 전체와 대립하는 철학인가? 이런 여러 가지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지만, 과연 필자의 생각이 무엇인지 이 책만으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들뢰즈ㆍ가타리의 철학이 후기-자본주의의 특징적 면모들과 부합하는 발상을 드러내고 있다”(98쪽)거나 “들뢰즈ㆍ가타리의 사회철학은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일종의 비역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99쪽)라는 주장, 또는 데리다가 “이전에는 치열하게 비판했던 레비나스의 타자를 ‘환대’하게”(258쪽) 된다는 주장은 상당히 대담한 주장인데도, 필자는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들뢰즈ㆍ가타리에 관한 주장에 대해서는 주로 지젝이 후원자로 등장하지만, 지젝의 논의가 타당한 근거를 지닌 것인지는 검토되지 않으며, 데리다에 관해서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논거도 제시되지 않는다.

 

필자의 글쓰기의 특징 중 하나는 우리가 흔히 ‘2차 문헌’이라고 하는 문헌들에 대한 검토나 논의가 매우 적다는 점이다. 이 책의 중심을 이루는 레비나스나 들뢰즈ㆍ가타리, 데리다 등에 관한 논의에서 언급되는 ‘2차 문헌’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필자의 주장이 기대한 만큼 충분한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2차 문헌’에 대한 검토가 적다는 것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지 않을까? 어떤 텍스트는, 특히 그것이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텍스트일수록, 그것이 남긴 흔적들, 또 그 텍스트 자체가 흔적을 이루는 그 이전의 흔적들과 분리될 수 없다. 그 흔적들의 연관망과 분리되면, 그 텍스트는 아주 빈곤한 것이 되거나, 더 나쁜 경우에는 흔히 ‘원전’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초월적인 타자, 찬미와 경배의 대상인 타자가 될 뿐, 분석과 해체, 산종(散種)의 텍스트가 되기는 어렵다. 우리가 ‘2차 문헌’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은 그러한 분석과 해체, 산종의 노력의 다른 표현들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2차 문헌’에 대한 검토가 적다는 것은, 이 책에서 레비나스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텍스트들이 아직 충분한 분석과 해체, 산종의 텍스트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의 이면인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다음 번 책에서는 타자(들)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 텍스트들의 해체와 산종의 움직임 속에서 펼쳐지기를 기대해본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쾅! 2013-03-29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데리다를 읽기 위해서는 레비나스를 읽을 필요가 있죠.

레비나스를 읽다보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에드워드 카의 말이 헛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죠.

하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그 헛소리에 사로잡혀 있죠.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깨려고 노력해야죠.

그렇다고 해도 레비나스와 데리다는 또 다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