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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신화 - 서양이론과 유럽중심주의 비판 ㅣ 경성대문화총서 25
로버트 J. C. 영 지음, 김용규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6월 2일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에 실릴 서평 하나 올립니다.
경향신문 서평은 이것이 마지막 서평입니다.
계속 쓰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워낙 밀린 일들이 많다 보니
도저히 시간 내기가 어려워서 이번 서평을 마지막으로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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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영은 국내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영미 비평계에서는 잘 알려진 이론가다. 그는 특히 데리다, 알튀세르를 비롯한 현대 프랑스철학에 깊은 조예를 지닌 탈식민주의 비평가로 명망을 떨치고 있는데, 그의 대표작 중 한 권이 오늘 소개할 [백색신화](1990)다. 20여 년 전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 이 책의 원서를 복사해놓고, 언젠가 읽어야지 하면서 계속 미뤄두고 있다가 반갑게도 몇 년 전에 번역이 되어 재미있게 읽은 뒤 독자들에게도 소개하고 싶어서 서평을 쓰게 되었다.
국역본은 “서양이론과 유럽중심주의 비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영어 원서의 부제는 Writing History and the West다. “역사의 서술과 서양” 정도로 옮길 수 있는 이 제목은 이 책의 내용을 집약적으로 잘 전달해준다. 그리고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가 하나의 단일한 역사적 시간의 산물이라면, 그 순간은 1968년 5월이 아니라 알제리의 독립전쟁이 될 것이다”라는 이 책 초판의 첫 문장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탈식민주의를 연결하려는 저자의 지적ㆍ정치적 관심을 잘 표현해준다.
지난 1990년대 이후 국내에는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 이른바 ‘포스트 담론’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와 이제는 인문사회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빼놓기 힘든 지적 담론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초기에 수용될 때만큼 격렬하지는 않다고 해도 포스트 담론에 대한 거부감은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으며, 특히 진보 지식인들에게 포스트 담론은 여전히 경원과 거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거부감은 포스트 담론이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에 기여하고 그것을 대체한 가짜 진보 담론, 또는 이데올로기라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의 국내의 지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러한 판단과 거부감이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 해도 포스트 담론과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는 단순히 경원하고 거부해도 좋을 만큼 그렇게 간단한 관계는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의 원인 중 하나는 그것에 고유한 이론적 난점과 맹목에 있으며, 포스트 담론은 그러한 맹목을 바로 잡으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로버트 영이 화두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다. “볼셰비키적인 보편성은 어떻게 번역 불가능한 것들과 지금까지 무시당해온 특수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가?”(26쪽)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로버트 영은 장-폴 사르트르와 루이 알튀세르라는 마르크스주의 최후의 이론가들의 난점에서 출발해서 미셸 푸코, 에드워드 사이드를 거쳐 프레드릭 제임슨 및 호비 바바와 가야트리 스피박에 이르는 30여 년 동안의 서양의 역사이론과 탈식민주의 비평의 문제적인 역사를 훌륭하게 서술하고 있다. [백색신화]를 읽고 나면 20세기 후반의 진보 사상의 역사가 새롭게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이 책을 제대로 읽어내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너무 어렵다고 느끼는 독자라면, 이 책보다 10여년 뒤에 출간된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박종철출판사, 2005)을 먼저 읽어보는 것이 좋다. [백색신화]가 매우 논쟁적인 일종의 사상사 책이라면, 후자의 책은 마르크스주의에서 탈식민주의에 이르는 사상의 경로를 20세기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탈식민주의를 연결해보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필독서라고 할 만하다.
어려운 책을 번역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을 역자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다. 이 책은 여러 이론가를 다루고 있고 그들의 사상이 매우 집약적으로 농축돼 있어서 번역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책이다. 모두 등재지 논문 쓰는 데만 힘을 쏟는 상황에서 이런 책을 붙잡고 오랜 시간 동안 씨름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용기와 책임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 해도 여러 대목에서 오역들이 눈에 띄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역본을 낼 때 이 오류들을 바로 잡는다면, 이 중요한 책이 훨씬 더 큰 가치를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