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와 민족 트랜스 소시올로지 11
니라 유발-데이비스 지음, 박혜란 옮김 / 그린비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월 10일자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입니다.


-----------------------------------------------------


몇 년 전부터 네이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런저런 문헌을 읽다 보면 종종 마주치게 되는 필자가 니라 유발-데이비스였다. 특히 네이션과 여성의 문제라는 주제가 나올 때면 어김없이 그녀의 이름을 볼 수가 있었다. 언젠가 읽어봐야지 벼르던 참에 그녀의 대표작 중 한 권이 번역ㆍ출간되었길래, 냉큼 이 달의 서평 대상 도서로 골라잡았다.


이 책의 기본 관심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네이션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1980년대 이래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에 관한 연구는 양적으로 엄청나게 증가했으며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의 도입으로 이론상으로도 질적인 도약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 책이 처음 출간된 90년대 후반까지 여성의 입장에서 네이션의 문제를 고찰하는 저작은 매우 드물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네이션에 관해 페미니즘적인 접근법을 도입한 문제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왜 네이션의 문제가 페미니즘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사고하는 데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서구 중심적인 페미니즘에 대한 반성의 소산이다.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받는다는 공통의 조건을 지니고 있지만, 서구의 여성과 이슬람 여성, 아프리카의 여성, 아시아의 여성은 억압의 방식과 차별 및 배제의 경험에서 각각 다르다. 따라서 자매애라는 추상적 연대의 몸짓은 오히려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 현실을 은폐하기 십상이다.


또한 네이션은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일반적인 틀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에게 중요한 문제다. 네이션은 세상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가장 효과적이고 일상적인 준거다. 그런데 여성은 네이션의 생물학적 재생산의 임무를 할당받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러시아, 어머니 아일랜드, 어머니 인도”(88쪽)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적 정체성의 상징이 되기를 강요받는다. 여성이 이 역할을 거부하거나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추방과 살해, 모욕과 배제 같은 각종 폭력이 가해진다. 정신대 문제를 ‘민족의 수치’라고 덮어두려고 하거나 위안부 박물관 건립이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보는 시선은 어찌 보면 네이션 속에서 여성의 위상을 전형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네이션과 젠더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현실에 직면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횡단성의 정치를 제안하고 있다. 횡단성의 정치는 “‘동질적인 출발점’을 가정함으로써 포함이 아닌 배제로 끝나는 ‘보편주의’, 그리고 ‘차별적인 출발점’으로 인해 어떤 공통된 이해나 진정한 대화도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가정하는 ‘상대주의’”(233쪽)와 구별되는 정치적 전망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논점을 포함한다. 우선 횡단성의 정치는 자기 중심의 상실을 가정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흔히 연대나 통합이라는 명목 아래 소수나 약소자의 양보를 강요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이 경우 연대의 근거가 사라질뿐더러 연대 자체가 무비판적인 동질화로 변질되기 쉽다. 연대가 진정한 연대이기 위해서는 연대하는 이들 각자의 개성과 정체성, 삶의 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


둘째, 서로 상이하고 독특한 이들 사이의 ‘옮기기’의 방식이 모색되어야 한다. 횡단성의 정치는 연대하는 이들과 일괄적으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뿌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함께 양립할 수 있는 목표와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본문이 240쪽에 불과한 적은 분량의 책이어서 빨리 읽을 수 있겠거니 짐작했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까 만만치 않았다. 이는 이 책이 고도의 형이상학적 사변으로 이루어진 책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책이 비서구 사회의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억압의 사례들, 그리고 그에 맞서는 다양한 형태의 여성 투쟁들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어려움은 늘 추상적으로만 사고하는 필자와 같은 한국의 남성 철학도의 한계에서 기인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필자에게 구체성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 호된 죽비와 같은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민과 서사
호미 바바 엮음, 류승구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이번 주 토요일 [경향신문] "새로 읽는 명저" 코너에 실릴 서평을 하나 올립니다.


--------------------------------------------------------------


 

호미 바바는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는 전혀 낯선 인물이 아니다.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과 함께 탈식민주의론 3대 이론가로 거론될 만큼 그는 현대 문화이론계의 스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주저인 [문화의 위치]만이 아니라 그에 관한 개론서도 국내에 이미 번역되어 있으며, 국내 학자들의 연구 논문도 수십 편에 달한다.


이처럼 대단한 인물이니 그의 저작이 수십 권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특히 ‘제대로 된’(곧 밥값을 하는) 학자라면 1년에 논문 5~6편이나 저서 한두 권쯤은 거뜬히 써내야 한다고 믿는 한국의 몰상식한 상식에 입각하면, 이 세계적인 석학은 아마도 1년에 논문 수십 편은 써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1949년생인 그가 지금까지 출판한 책이 고작 두 권이고, 그나마 그 중 한 권은 그를 포함한 15명의 학자의 논문을 묶은 편저서라고 한다면 어떨까? 저서는 논문 두 편으로 계산하고 공저에 수록된 논문은 1/저자 수로 따지는 한국식 계산법에 따르면 그는 60이 넘도록 겨우 논문 2와 1/15편을 쓴 셈이다. 이런 그가 한국 학계의 성소(聖所)인 하버드 대학의 석좌교수에 인문학 연구소장까지 맡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시간강사 자리나 하나 얻을 수 있었을까?


[국민과 서사]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네이션과 서사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존재함을 밝히는 15명의 학자들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내러티브로서의 국민」이라는 제목이 붙은 바바의 서론은 이 점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사실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국민이라는 주장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1983) 이후 거의 상식적인 것이 되었다. 게다가 앤더슨은 근대 국민의 형성이 신문과 소설 같은 상상적 형식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이전까지 역사가와 정치학자의 전문 분야였던 국민, 국민국가, 민족주의 연구에 많은 문학 연구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럼 문학연구는 국민의 정체를 밝히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바바는 국민을 서사 작용의 문제로 보는 것은 개념 대상 자체를 바꾸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국민이나 민족을 확고한 실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이 서사 작용의 산물이라는 것은 좀처럼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에 수록된 필자들은 반대로 주장한다. 곧 국민이나 민족이 불변의 실체로 간주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것이 어떤 서사 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단군이라는 시조, 이민족의 침입과 분단 및 전쟁이라는 역경, 새로운 부흥의 기적 같은 서사는 민족을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지속되는 역사의 주체의 자리에 위치시키며, 이를 통해 현존하는 국민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질서를 공고히 한다.


반대로 국민을 서사의 효과로 이해하게 되면, 국민은 더 이상 불변적 실체가 아니라 양가성과 균열, 이질성을 포함한 불안정한 구성물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대항 이데올로기의 난점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책의 화두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타자와 소수자들의 이질성에 기반을 둔 저항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몇 권의 책을 번역해본 경험에 비춰보면 이 책은 번역자에게는 악몽과 같은 책이다. 호미 바바의 난해한 논문만 해도 여느 책 한 권을 번역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이 책은 이 논문 외에도 영문학, 불문학, 라틴 아메리카 문학, 아프리카 문학에서 국민과 민족주의 문제를 다루는 박식한 필자들의 글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책의 번역을 시도하는 일 자체가 상당한 지적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데, 역자는 꼼꼼한 역주와 인용 문헌들에 대한 세심한 검토를 곁들여 이 힘든 일을 성실히 수행해내고 있다. 독자들로서는 더없이 감사한 일이지만, 과연 역자에게는 몇 분의 몇 편의 업적이 귀속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간의 생산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 번역총서 3
앙리 르페브르 지음, 양영란 옮김 / 에코리브르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향신문 1월 7일자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 하나 올립니다.

 

 

-------------------------------------------------

 

 

서양철학자들의 책을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졌을 법하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나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 또는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 같은 책들은 한결같이 시간의 문제를 철학의 중심에 놓고 있다. 왜 이들은 시간의 문제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할까? 반면 왜 이들은 공간의 문제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것일까?

 

20세기 프랑스 철학자인 앙리 르페브르는 서양철학의 이러한 경향에서 아주 예외적인 인물이다. 그는 공간의 문제야말로 우리 시대의 지배와 저항, 억압과 혁명의 핵심 쟁점이라고 간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공간의 생산}은 그의 공간에 대한 사유를 집약하고 있는 대표적인 저작이다. 오랫동안 풍문으로만 전해지던 이 대작을 한글로 술술 읽으면서 문외한인 필자가 서평의 욕심까지 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역자의 값진 노고 덕분이다.

 

“공간 분석” 내지 “공간학”(549쪽)이라는 조심스러운 명칭이 붙은 르페브르 작업의 출발점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기획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토대와 상부구조로 이루어진 생산양식에 따라 역사를 구분하며, 토대의 모순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고 파악한다. 르페브르는 이러한 원칙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러한 역사유물론의 관점에는 “각각의 사회는 저 마다의 공간을 생산한다”(77쪽)는 전제가 빠져 있다. 이것은 각각의 사회, 곧 각각의 생산양식은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에 의해 규정될 뿐만 아니라 공간에 대한 집단적 생산에 의해서도 구별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새로운 생산양식의 출현, 다시 말해 기존 생산양식의 변혁은 기존의 공간 질서에 대한 전복과 새로운 공간 관계의 생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르페브르는 공간 생산의 세 가지 계기를 구별한다. 공간적 실천과 공간 재현, 재현 공간이 그것들이다. 공간적 실천이란 지각된 공간을 뜻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일상적인 반복된 활동을 통해 공간을 물리적으로 생산하고 지배하고 전유하는 작용을 가리킨다. 일하고 걷고 공부하고 놀이하는 등과 같은 개인의 일상적인 활동과 이러한 활동을 연결하는 사회적 관계망들이 공간적 실천이다.

 

반면 공간 재현이란 인지된 공간을 의미하며, 공간에 관한 다양한 종류의 이론적 담론에 따라 규정되는 공간을 가리킨다. 이것은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들이 이론화한 기하학적 공간이고 도시계획자들이 설계하는 공간이며, 그에 따라 실제의 공간을 구획짓고 배열하는 기술관료들의 공간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재현 공간이란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서 체험된 공간이다. 우리는 어떤 공간이나 장소에 대해 상징적으로 이러저러한 의미를 부여한다.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의 장소라든가 조상의 넋이 살아 있는 선산, 독립선언의 기억이 아로새겨진 성소, 젊음의 거리 등이 단순한 물리적 공간과 구별되는 재현 공간의 예들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적인 구별을 통해 르페브르가 보여주려는 것은 공간이 지니고 있는 중층성과 복합성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간은 자본의 높은 수익을 보장하기 위한 장이며, 저항과 전복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위계적으로 재편되는 곳이다. 강남과 비강남, 수도권과 지방 같은 간단한 구도를 상기하는 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르페브르에 따르면 공간은 단순히 지배의 공간만이 아니며 전면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 곳도 아니다. 19세기에 파리 외곽으로 밀려났던 파리의 빈민들이 파리 코뮌을 통해 다시 파리의 주체로 재등장했던 것처럼, 도시는 연대와 소통, 차이와 횡단의 가능성이 구현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르페브르는 공간을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산물로서, 더 나아가 생산 작용 자체로 파악함으로써, 공간이 지닌 복합성과 활력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공간의 생산}은 기묘한 모순을 담고 있는 책이다. 한 편으로 이 책은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할 만큼 꽤 복잡한 논의와 독창적인 가설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의 여러 대목에서 르페브르는 논의의 흐름에서 벗어나 분방한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충분히 음미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한 손에 펜을 들고 줄을 그으며 꼼꼼히 읽어가면서도 때로는 한 대목에 멈춰서 자유롭게 이런저런 상상을 해가면서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나는 이 책의 페이지들을 꽤 넘긴 뒤에야 깨달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마치 오래된 도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로이카 2012-01-07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에 들어왔다가 반가워서 안부 여쭙습니다. 이 책 재미있어 보이네요. 좀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almas 2012-01-07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오랜만이시네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좋은 서평 많이 부탁드립니다. 저말고도 여러분들이 에로이카 님의 서평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책은 재미가 있기는 한데 선뜻 권하기는 사실 좀 어려운 책입니다. 르페브르가 일관되고 명료하게 주제를 이끌어가지 않고 중간중간에 워낙 다른 이야기들을 많이 섞어놔서, 집중력을 갖고 읽기는 쉽지 않은 책이거든요. 특히 1장 [이 책의 구상]은 제일 나중에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책의 전반적인 개요를 보여주는 게 1장의 목표일 텐데,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책의 논점을 파악하기 더 어렵게 하는 것 같더라구요. ㅎㅎ 하여튼 이 책에서 르페브르의 글쓰기는 상당히 유별난 것 같습니다.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3
질베르 시몽동 지음, 김재희 옮김 / 그린비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번 주말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을 하나 올립니다.

 

---------------------------------------------------- 

사람의 생각은 얼마나 독창적일 수 있을까? 사실 사람들의 생각이 독창적인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라고 믿는 것은 익히 알려진 통념들이기 십상이다. 철학자나 인문학자의 경우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철학자나 인문학자의 생애는 ‘누구누구에 대한 연구’에 바쳐진 생애이며, 그것도 이른바 대가들이 남긴 누구누구에 대한 연구에 주석을 다는 일에 바쳐진 생애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본다면 프랑스의 기술철학자 질베르 시몽동(1924-1989)은 경이로운 예외가 아닐 수 없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와 니체, 프로이트의 독창성을 칭송하는 뜻에서 그들을 19세기 사상의 사생아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이야말로 사상가에게는 최고의 호칭이 아닌가), 그렇다면 시몽동이야말로 마땅히 20세기 사상의 사생아라고 부를 만하다. 그는 기술에 관한 우리의 두 가지 통념을 완전히 뒤엎으면서 기술에 관한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술에 관해 너무 비관적이거나 너무 낙관적이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공상과학영화에서 즐겨 다루듯이, 기술이 자연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결국 인간을 기술의 노예로 만들게 되리라는 막연한 공포심을 갖고 있다. 그런가 하면 기술 예찬론자들은 기술이 인간을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왔으며, 앞으로도 더욱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전자가 기술적 대상은 (자연 및) 인간에 대해 적대적 존재자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후자는 기술적 대상을 오직 인간의 유용성에 봉사하는 단순한 도구로 간주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시몽동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는 기술적 대상에 대한 동일한 인식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기술적 대상의 본질은 자동성이라는 믿음이다. 20세기 후반 사이버네틱스 이론을 통해 널리 유포된 이런 믿음은 기술적 대상 또는 간단히 말하면 기계에 대한 세 가지 통념을 함축한다. 하나는 기계가 미리 결정된 작용만을 하도록 규정돼 있다는 결정론적 통념이다. 둘째, 따라서 기계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존재자라는 생각이다. 셋째, 이 두 가지 통념은 결국 기계는 인간과 전혀 무관한 것이며(왜냐하면 인간은 자유롭고 능동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반(反)인간적이라는 생각을 낳는다. 기계는 인간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도구로 남을 때 유용한 것이지만, 기술적 자동성은 인간의 통제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몽동은 우선 자동성이 기술적 대상의 본질을 이룬다는 생각을 반박한다. 기술의 본질은 오히려 비결정성에 있다. 곧 기술적 대상은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외부 정보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열린 체계다. 다만 생명체는 완전히 “구체화”되어 있는 데 반해, 기계는 항상 어느 정도의 “추상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닌다. 쉽게 말하면, 기계는 생명체와 달리 정보를 생산하고 소통할 수 있는 독자적인 힘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술적 대상들은 자신의 고유한 진화 과정에 따라 발전하지만, 인간의 작용을 필요로 한다. 이때 인간과 기술적 대상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관계다. “인간은 자기 주위에 있는 기계들의 상설 발명가이자 조정자로 존재하는 기능을 갖는다. 인간은 자신과 함께 작용하는 기계들 가운데 존재한다.”(14쪽)

그렇다면 기술을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생태운동가들이나 기술의 유용성에 대한 맹목에 젖은 테크노크라트들 모두 기술적 소외를 강화하고 있을 뿐이다. 시몽동이 보기에 우리 문명의 중요한 과제는 이러한 기술적 소외를 극복하는 것, 곧 기술공학적 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인문학 독자들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과학기술자들과 생태 운동가들에게 널리 읽혀야 할 책이다.

필자가 알기로 이 책은 아직 어느 나라에서도 완역된 적이 없으며, 영역본이 이제 출간을 앞두고 있다. 그것은 시몽동의 사상이 그만큼 혁신적이고 독창적이어서 외국만이 아니라 프랑스 국내에서도 그동안 충분히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중요한 책을 유려한 한글로 읽게 된 것은 역자의 헌신적인 노고 덕분이다. 역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이 글은 오는 11월 5일 (토)부터 경향신문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명저 새로 읽기"에 실릴 서평입니다.

신문에는 지면상 다소 축약된 글이 실릴 예정입니다.

새롭게 번역된 책이 또 상당한 오역본이라는 점은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출판사에서 좀더 책임감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가?

 

자크 랑시에르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 지난 2008년 방한할 때까지 국내에 랑시에르를 아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하지만 방한과 함께 [무지한 스승],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가 출간된 이후 불과 2년여만에 10여권의 저작이 소개되고 문학계에서는 그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왜 랑시에르가 이렇게 주목받을까? 그것은 철학, 문학, 정치, 역사, 영화 등을 가로지르는 그의 독창적인 글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치,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사유가 깊이 있고 신선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성찰이 집약된 책이 [불화]라면,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는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 담겨 있는 책이다.

그가 우선 문제 삼는 것은 최근 저명한 프랑스 지식인들(장-클로드 밀네르, 베니-레비 등)이 제기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발이다. 이들에 따르면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무정부주의의 과잉(자유와 권리를 누릴 만한 자격이 없는 무리들의 방종)과 무제한적인 소비(재화, 향락 등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하려는 성향)라는 이중의 과잉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는 곧 민주주의가 문명의 중심에 내재하는 원죄 내지 도착(倒錯)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몰락 이전에는 전체주의가 문제였다면, 이제는 “대중적 개인주의”로서의 민주주의 자체가 문제다.

하지만 랑시에르에 따르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들의 증오는 사실은 평등한 집단인 인민에 대한 공포이자 그들이 구현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공포의 표현이다. 플라톤 이래 서양 정치사상의 지속적인 공리 중 하나는 대중에게는 통치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민주주의는 위험한 정체(政體), 곧 독재나 전체주의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정체라는 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사실은 “과두제적인 통치에 대한 본성적 충동”, 곧 “인민을 몰아내고 정치를 몰아내려는 충동”(169쪽-번역은 수정)의 발현이며, 인민 없는 통치, 곧 정치 없는 통치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민주주의 때문에 생겨나는 일일까? 아니면 오히려 민주주의의 결핍 때문에 생겨나는 일일까?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의 기준으로, 개인의 권리 보호, 사유재산 보장, 법치, 주기적인 선거, 권력 분립 등으로 꼽는다. 중요한 기준들이다. 하지만 이것들만으로는 현재 세계 전역에서 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위기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 흔히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했다고 말하는 서유럽과 미국 같은 나라들에서 소수의 금융 권력이 거대한 부를 독점하고, 인종주의 테러와 이민자 추방, 정치권의 부패와 비리 같은 현상들이 나타날까?

따라서 랑시에르는 문제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곧 “우리의 “민주주의들”이 겪고 있는 악은 무엇보다 소수 지배자들의 게걸스러운 탐욕과 연결된 악”(156쪽)이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에서 살고 있지 않”고 오히려 “과두제적 법치국가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모든 국가는 과두제 국가다. 그럼에도 과두제 국가에 민주주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통치자들이 선량하거나 뛰어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인민이 권리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기 때문이다. 대의제가 과두제 권력의 단순한 도구에서 벗어난 것 역시 인민이 행위를 통해 실질적 대표성이 관철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시민의 권리”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현실을 부여하는 사람들의 권리다.”(158쪽) 민주주의란 자신과 타인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이들의 행위 자체인 것이다.

이 책은 지난 2009년 같은 출판사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심각한 오역 때문에 거센 비판을 받고 출판사 스스로 수거ㆍ폐기한 바 있다. 그럼 새로 번역된 이 책은 사정이 훨씬 좋아졌을까? 평자의 생각으로는, 지난 번 오역본보다는 상태가 다소 좋지만 학문적으로 평가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번역이다. 이런저런 다수의 오역들이 곳곳에서 눈에 띌뿐더러, “이중구속”을 뜻하는 “double bind”를 같은 페이지에서 한번은 “이중적인 모습”으로, 한번은 “이중적 연계”(74쪽)라고 번역하거나,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를 “프랭크 갈브레이스”(60쪽)로, 울리히 벡을 “율리츠 벡”(193쪽)으로 표기하는 등의 사례도 보인다. 이는 역자의 잘못도 있겠지만, 그에 앞서 출판사 편집부의 기본 소양에서 비롯한 문제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역자보다 편집부를 바꿔야 하는 것일까? 제대로 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읽기 위해서는 세 번째 번역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