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 시선의 권리
자크 데리다 지음, 마리-프랑수아즈 플리사르 사진, 신방흔 옮김 / 아트북스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데리다는 현재 인문사회과학 및 예술이론 분야에서 전세계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심지어 영미 학계에서는 데리다의 작업에 관한 논의가 하나의 독자적인 하위학문(sub-discipline)을 이루고 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데리다의 이론적 작업은 여러 학문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인문사회과학 및 예술이론 분야의 이론적 발전을 위해서는 데리다의 작업을 소개하고 이해하는 일은 필수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데리다의 중요한 예술론 저서 중 한 권인 [시선의 권리](아트북스)의 출간은 원칙적으로 환영할 만한 일임에 틀림 없다. 데리다는 문학에 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회화에 관해서도 여러 권의 책(La vérité en peinture(1978), Mémoires d'aveugle(1990), Atlan: Grand format(2001), Artaud le Moma(2002))을 낸 적이 있지만, 사진, 포토로망에 관해 이처럼 체계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이 책이 거의 유일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벨기에 출신의 사진작가인 마리-프랑수아즈 플리사르의 포토로망에 관해 데리다가 긴 ‘해설’을 붙이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진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격조 높은 사진들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지만, 데리다가 덧붙인 탁월한 ‘해설’은 이 책을 통상적인 사진집(과 해설)의 차원을 넘어, 이미지와 문자, 보기와 말하기/쓰기, 장르와 젠더, 현전/현상과 환영/유령 및 더 나아가 시선과 감시, 법과 권력 등에 관한 예술적, 철학적 논의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번역이 제대로,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게 이루어졌을 때의 이야기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이는 대부분의 국내 독자들에게는 하나의 전설, 신화일 따름이다. 사실 국내의 데리다 독자들은 이미 이같은 사실과 소문, 현실과 신화 사이의 참담한 괴리를 여러번, 너무나 자주 경험한 바 있다. 아쉽게도 이는 이 번역본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인데, 이 책은 [그라마톨로지](민음사, 1996)나 [해체](문예출판사, 1996), [불량배들](휴머니스트, 2003) 등과 더불어 데리다 저서의 최악의 오역본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런저런 기회에 지적했던 것처럼 데리다는 현대뿐만 아니라 철학사 전체를 통틀어 볼 때에도 보기드문 문장가(그에 비견할 만한 현대의 이론가는 라캉 정도일 것이다)여서, 이론적인 논증과 수사학적인 어법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글을 쓰며, 그의 작업이 갖는 의의, 중요성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논증과 수사학의 결합이 산출해내는 의미효과들에 있다. 따라서 데리다 저서에 대한 번역의 성패는 이러한 의미효과들을 얼마나 정확히, 얼마나 충실하게 옮겨내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하지만 내가 읽은 바로는 이 책의 역자는 “dont”이나 “que”와 같은 프랑스어의 초보적인 관계대명사의 용법이나 과거시제의 용법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격자구조”나 “액자구조”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en abyme”를 줄곧 “심연 속으로”라고 번역하거나 “독촉”과 더불어 “총합”이라는 의미를 지닌 “sommation”이라는 단어를 줄곧 “독촉”이라고만 번역하는 등의 일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결과이며, 더 나아가 복잡하게 뒤얽힌 논증과 수사학의 결합을 풀어내어 이해 가능한 표현으로 전달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로 가득차 있는 이 번역본은, 데리다를 신비스러운 인물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쓰는 데도 외국에서는 놀라운 명성을 누리고 있는 불가사의한 인물로 만드는 데 기여할 뿐, 독자들이 미묘한 논의들을 통해 산출되는 놀라운 의미효과들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데리다의 이론적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 번역본의 상태가 어떤지 다른 독자들도 직접 확인해보라는 뜻에서 좀 길긴 하지만,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처음에 제시된 것은 번역본에 나온 번역문들이고, 그 다음은 해당 원문, 마지막은 이 서평의 필자가 수정한 번역문들이다. 그리고 번역본의 번역문들에 내가 추가한 [원문 그대로]라는 표시는 원본의 불어 단어를 잘못 옮기거나 우리말 맞춤법이 잘못된 것들이다.



101쪽 번역문: 당신은, 그리고 당신들은 내가 이 이미지들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에게 계속해서 말하는 이야기들을 결코 모를 것이다.

원문 I 페이지: Tu ne sauras jamais, vous non plus, toutes les histoires que j'ai pu encore me raconter en regardant ces images.

수정 번역문: 자네는, 그리고 당신/들 역시, 내가 이 이미지들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에게 했던 모든 이야기들을 결코 알 수 없을 걸세.


이 문장은 데리다의 해설의 첫 번째 문장인데, 여기에서 문제는 시제가 잘못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불어 시제는 “ai pu”라고 해서 복합과거로 되어 있는데, 역자는 이를 “계속해서 말하는”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문장 이외에도 이 번역본에서는 간단한 불어 시제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는 경우가 여럿 보이는데, 이는 역자가 불어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소한 것 한 가지를 지적하자면 역자는 “tu”라는 불어 단어를 “당신”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tu”라는 단어는 같은 또래의 친구 사이나, 선생과 학생 같이 나이 차이나 지위의 차이가 있지만 친숙한 사이에서 쓰이는 단어다. “tu”를 “당신”이라고 번역하는 게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데리다의 ‘해설’은 신원이나 성별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둘 이상의 사람들이 계속 대화를 주고받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고, 구어체 문장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중 어떤 사람은 상대방을 “tu”라고 부르고, 또 어떤 사람은 상대방을 “vous”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tu”라고 부르는 경우는 “자네”나 “너”라고 번역하는 게 좋을 것이다.

  위의 문장에 대한 대화 상대방의 반응을 살펴보자.


101쪽 번역문: 이 이미지들? 그러니까 이 이미지들은, 플롯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보거나 알아차리게 되는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플롯을 감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원문 I 페이지: Ces images? Il faudrait alors qu'elles donnent quelque chose à voir ou à reconnaître, flnalement, à l'instant où une intrigue se dénoue. Or, j'en ai du moins le sentiment, on s'ingénierait plutôt à nous dissimuler quelque chose.

수정 번역문: 이 이미지들? 그렇다면 결국 이 이미지들은, 하나의 플롯이 결말을 짓게 되는 순간에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또는 인지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선사해주어야 하겠지. 그런데 나는 [이처럼 이미지들에 이야기의 구조를 부여함으로써―인용자 삽입] 사람들이 우리에게 오히려 무언가를 감추려고 애쓰는 것 같다는 생각, 또는 적어도 느낌이 드는데.


  여기서 대화 상대방은 앞 문장의 화자가 “이미지들”을 “이야기들”과 연계시키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곧 이야기라는 것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과 같은 목적론적 구도에 따라 전개되기 마련이며, 따라서 이미지들을 이야기들과 결부시키는 것은 이미지들에 대해, 처음부터 이미지들과 상이한 질서에 속하는 이야기/언어의 구조를 외재적으로 강제하는 셈이 된다. 이 문단의 두 번째 문장은 바로 이런 의도를 문법적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다. 불어에서 “il faut que”는 “해야 한다”나 “일 수밖에 없다”는 뜻을 갖는 비인칭적 표현인데, 이 문장에서는 조건법에 따라 “il faudrait que”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두 번째 문장은 ‘그처럼 이미지들을 이야기들과 결부시키면, 이미지들은 이야기에 고유한 목적론적 구도에 따라 확정된 자신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더 나아가 화자는 마지막 문장에서 이미지들에 이야기의 구조를 부과함으로써 이미지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사람들on”, 곧 불특정한 어떤 사람들이 무언가 다른 것을 은폐하기 위해 제시하는 술책에 말려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번역본에서는 이런 논의의 의미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번역이 되어 있다. 같은 쪽의 다른 문단들도 유사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이를 일일이 지적할 필요는 없고, 이제 다음 쪽의 문장들을 살펴보자.



102쪽 번역문: 일견 시퀀스들의 엄청난 비가역성이 바라보고, 묘사하고, 판독하는 사람을 지배한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결코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문 I~II 페이지: Au premier regard, une rigoureuse irréversibilité des séquences commande à qui regard, décrit, déchiffre, elle sous-entend du moins, car jamais rien n'est dit ... 

수정 번역문: 처음에는 사진들의 진행séquences을 규제하는 어떤 엄격한 비가역성이 바라보고 기술하고 판독하는 사람을 지휘하는 것처럼 보이지. [또는]―왜냐하면 [사진들에서는] 결코 어떤 것도 말해지지 않기 때문에―적어도 이 비가역성은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이 문장에서 잘못 번역된 것은 세 가지이지만, 제일 핵심적인 것은 “그러나 결국”이라는 접속사 부분이다. 사실은 원래의 불어 문장에는 명시적인 접속사가 존재하지 않으며, 콤마와 “적어도du moins”라는 숙어가 접속사 구실을 하고 있다. 번역본처럼 접속사를 이처럼 번역하게 되면, “사진들의 진행을 규제하는 엄격한 비가역성의 지휘”와 “비가역성의 암시” 사이의 관계가 역접의 관계로 잘못 이해될 뿐만 아니라, 뒤에 나오는 “왜냐하면 결코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문장의 뜻은, 우리가 이 사진집 또는 포토로망을 처음 볼 때에는, 마치 시퀀스들, 또는 사진들의 진행을 규제하고 있는 어떤 엄격한 비가역적 규칙이 우리에게 사진들을 바라보고 기술하고 판독하는 모종의 객관적인 규칙이나 근거를 제시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본다면, 사진들은 결코 어떤 것도 언어적으로 표현하지는 않기 때문에(“결코 어떤 것도 말해지지 않기 때문”), 이런 종류의 객관적인 해석의 규칙이나 근거가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으며, 다만 적어도 어떤 서사 가능하고 판독 가능한 내용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고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du moins”로 연결되는 두 문장, 두 절 사이의 관계는 축소나 제한의 관계에 있지 역접이나 대립의 관계에 있지 않다.

  이 문장에서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역자가 이 문장에 붙인 다음과 같은 역주다. [역주: 사진이(시선이) 무엇인가를 암시할 때,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은 것이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달리 말하면 침묵 속에서만 사진의 시퀀스들은 암시되고 무엇인가를 말한다고 데리다는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데리다가 언어가 말하지 못하는 것을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다고 우선적으로 지적하려는 것이다. 언어는 워낙 그 속성이란 것이 말할 수 없는 것, 혹은 말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데리다는 생각한다. 즉 언어는 어떤 한 단어로 말해질 때 그 단어 이외의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고서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해진 것에는 더 많은 말해지지 않은 것이 담지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언어에서나 사진에서나 데리다가 그토록 자주 침묵을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사진에서 데리다는 언어를 통해 말해지지 않을 것을 말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그러려면 사진은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침묵을 통하여서만, 바로 말이 결하고 있는 것을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163-164쪽)]

  이 역주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번역본에 달려 있는 대부분의 역주들은 독자들이 문장의 의미나 데리다의 수사학적 어법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데리다의 논의를 더욱 막연하고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제대로 명료하게 이해는 되지 않지만 무언가 신비하고 심오한 것을 전달하는 듯한 인상을 갖게 만드는 번역문, 그리고 이를 더욱 조장하는 역주들, 데리다가 선사(禪師)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 다음 문장을 보자.


103쪽 번역문: 미장 드뫼르mise en demeure는 번역 불가능한 표현이다. 그것이 법에 관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합법성을 고려하는, 어떤 사람이 바라보고 자신의 시선 안에 배치하고 붙잡아두고 시야에 간직하거나 사진으로 ‘찍을’ 권리, 즉 이 책의 제목인 시선의 권리droit de regard[원문 그대로-인용자]에 관여한다. 문제의 이미지들의 텍스트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것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시선의 권리, 오직 바라보기의 권리만을, 혹은 여러분이 그 시점에 대해 순응할 권리만을 허용한다.

원문 페이지 II: Mise en demeure, expression intraduisible, parce qu'il y va de la loi. Il y va de la légitimité, il y va du titre qu'on peut avoir à regarder, à disposer sous son regard ou à détenir par le regard, à prendre en vue ou à "prendre" des photographies, il y va donc du titre: droit de regards. Un texte d'images à regard vous accorde, comme à ses "personnages", un droit de regarder, seulement de regarder ou de vous approprier par la vue ...

수정 번역문: 미장드뫼르는 번역이 불가능한 표현인데, 왜냐하면 여기서는 법이 문제되기 때문이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적법성이며, 바라볼 수 있고 자신의 눈으로 배치할 수 있는, 또는 시선으로 붙잡아두고 시야에 두거나prendre en vue 사진들을 “찍을prendre” 수 있는 자격titre일세. 따라서 제목titre,『시선들의 권리/감시권』이 문제인 셈이야. 바라보아야 할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한 텍스트는, 텍스트 내의 “인물들”에 대해 그렇게 하듯이 당신/들에게 하나의 시선의 권리/감시의 권리를 부여하지. 단지 바라볼 권리만을, 또는 당신/들이 시각을 통해 전유할 수 있는 권리까지도. 


이 문단의 번역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droit de regards”의 번역이다. 우선 이 책의 제목은 “시선” 또는 “감시”라는 의미를 갖는 “르갸르regard”가 단수로 쓰이지 않고 복수로 사용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단수냐 복수냐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데리다의 해설이 다루고 있는 중심 주제 중 하나가 복수의 시선들 사이의 관계―권력 관계일 수도 있고 성적 관계일 수도 있고, 지각과 기술의 관계일 수도 있는―라는 점을 감안하면(이는 해설이 진행될수록 더욱 문제가 된다), 복수로 쓰인 “regards”와 단수로 쓰인 “regard”를 잘 구분해서 번역하는 게 필요하다. 더 나아가 “regard”는 단순히 “시선”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감시”를 의미하기도 하며, 특히 이 문단처럼 법, 적법성, 권력 등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는 “regard”가 지닌 “감시”라는 의미를 좀더 강조해둘 필요가 있다. 실제로 마지막 문장처럼 “단지 바라볼 권리”와 “당신/들이 시각을 통해 전유할 수 있는 권리”가 구분되는 경우에는 “regard”를 각각 “시선”과 “감시”로 파악해야 데리다의 논의가 이해될 수 있다.

  이 문단과 이어지는 다음 문단을 보자.


103쪽 번역문: 그것은 분명 법칙에 관한 문제이나 또한 법칙에 의해 통제되는 시간에 관한문제이기도 하다. 사물들은 질서에 의해 감시당한다. 시선의 권리의 시간은, 마치 사진의 기호체계 안에서처럼 심연을 향한 연속 반복, 즉 사진 속의 사진, 다른 연작 속에 재편입된 연작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준엄한 기한délai de rigueur에 입각해서 전개된다. 미장 드뫼르는 시간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결코 넘치지 않을 시간이고, 계산되고 운율이 있는 일직선적인 시간이자 극적인 시간이다.

원문 페이지 III: Il y va certes de la loi mais aussi d'un temps réglé par la loi. Un ordre le surveille. Le temps du droit de regards se développe, comme on dit dans le code de la photographie, non seulement par la répétition de génériques en abyme, une photographie dans l'autre, une série dans l'autre réinsérée, mais comme le délai de rigueur. La mise en demeure donne le temps, mais un temps à ne pas déborder, un temps mesuré, rythmé, cadencé, un temps dramatique.

수정 번역문: 분명 여기에서는 법이 문제되지만, 또한 법에 의해 규제되는 하나의 시간이 문제되기도 하지. 하나의 질서가 이 시간을 감시하고 있지. 시선들의 권리/감시의 권리의 시간은 사람들이 사진술의 용어법에 따라 말하듯이, 현상/전개되네se développe. 단지 도입장면들génériques을 격자구조[액자구조, en abyme]에 따라 한 사진을 다른 사진 속에 담고 사진들의 한 연속장면을 다른 연속장면 속에 재삽입하는 식으로 반복함으로써 현상/전개될 뿐만 아니라, 엄격한 기한으로서도 현상/전개되는 것이지. 미장드뫼르는 시간을 선사하지만, 이 시간은 결코 어겨서는 안되는 시간, 박자가 있고 리듬이 있고 운율이 있는 극적인 시간이야.


  이 문단에서 특히 잘못된 점은 “en abyme”를 “심연을 향한”이라고 번역하고 “répétition de génériques”를 “연속반복”이라고 번역한 점이다. 이 문단이 제대로 번역되지 못한 것은 역자가 이 두 용어 사이의 체계적인 연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en abyme”는 “en abîme”, 곧 “심연 속에서”와는 달리 “격자구조” 또는 “액자구조”를 뜻한다. 격자구조란 원래 어떤 무늬나 모양 안에 같은 무늬나 모양이 들어 있는 것을 뜻하는데, 소설이나 영화 같은 예술 분야에서는 하나의 이야기 속에 또다른 이야기를 삽입하는 기법을 가리킨다(액자소설을 상기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따라서 “en abyme”는 플리사르의 포토로망에서 사용되고 있는 기법 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지, “심연 속에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데리다는 이를 부연하기 위해 바로 뒤에 “한 사진을 다른 사진 속에 담고 사진들의 한 연속장면을 다른 연속장면 속에 재삽입하는 식으로”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책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플리사르의 포토로망에서 이러한 격자구조가 반복해서 사용되는 곳은 사진들의 한 계열이 끝나고 새로운 계열이 시작되는 곳이다. 곧 플리사르는 새 등장 인물이 앞 장면의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를 바라보는 장면으로부터 새로운 계열을 시작하는 기법을 여러 번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génériques”라는 단어의 의미는 바로 이처럼 새로 시작되는 장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도입장면들”로 번역되는 게 적합할 것 같다. 사실 “génériques”는 이 책에서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들 중 하나인데, 이는 이 단어가 “유(類)”나 “속” 같은 의미 이외에도 영화 첫머리에 제목, 제작자, 배역, 감독 따위의 이름들을 표시해놓는 자막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맥락에서는 라틴어 어원인 “genus”의 의미, 곧 “시작” “기원”이라는 의미를 직접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단어가 “유”나 “속”과 같이 집합을 가리키는 용어라는 점을 감안하면,  “génériques”는 “사진들의 계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또한 뒷부분에 가서 이 단어는 “genre”나 “génération”과 같이 같은 어원을 갖는 다른 단어들과 함께 수사법적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이 문단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용어의 적절한 의미와 상호연관성을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한데, 이 번역본은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문단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제 서너 문단을 건너 뛰어서 다음 문장을 보기로 하자.


104쪽 번역문: 당신은 반복하기를 좋아하고, 그것으로부터 전체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데, 마치 그 전체가 형성되지 않을 듯이 그러하며, 그것에 당신을 굴복시키지도 않는다.

원문 페이지 III: Mais tu aimes à le répéter, tu en fais toute une histoire, comme pour marquer que la sommation n'aura pas lieu, et que tu n'y céderas pas.

수정 번역문: 하지만 자네는 그 말[결코 모든 이야기들을 알 수 없고, 심지어 하나의 이야기조차 전체적으로 알 수 없다는 말―인용자]을 기쁘게 되풀이하면서, 시시한 이야기를 계속 대단한 이야기인 양 늘어놓고 그것만으로도 이야기 하나를 온전히 만들어내고 있군. 마치 [이야기들의] 총합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듯이/자네에게는 독촉이 제기되지 않는다는 듯이, 그리고 자네는 거기에 기꺼이 불응하겠다는 듯이 말이지.


  이는 겉보기에는 간단한 문장같지만, 사실은 번역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문장이다. 번역본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첫째, 원문에는 “aimes à le répéter”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반복하기를 좋아하는”이라고 번역해서는 안되며, “le”라는 지시대명사가 가리키는 것, 곧 “반복”, “되풀이”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래야 다음 구절인 “tu en fais toute une histoire”의 의미가 이해될 수 있다. 번역본에서처럼 “그것으로부터 전체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데”라고만 하면, “그것”이 무엇인지가 이해되지 않고, “전체 이야기를 만들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 다음 불어에서 “en faire toute une histoire”는 숙어적으로는 “시시한 이야기를 대단한 것처럼 늘어놓다”는 것을 의미하며,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으로부터 이야기 하나를 온전히 만들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데리다의 논의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그것"은 앞 구절에 나온 “le”를 가리킨다. 따라서 첫 구절의 “le”를 정확히 파악해야 두 번째 구절의 의미도 좀더 분명히 이해될 수 있다.

  셋째, 번역본은 “sommation”이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불어에서 “sommation”은 영어의 “sum”과 같이 “총합”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또한 영어의 “summons”처럼 “독촉” “소환”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리고 “sommation”은 여기에서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결합해서 파악한다면, 지금 이 문장의 화자는 앞 문장의 화자, 곧 “결코 모든 이야기들을 알 수 없고, 심지어 하나의 이야기조차 전체적으로 알 수 없다”고 되풀이함으로써 자신이 목적론의 위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화자의 태도에서 은연 중에 드러나는 자기기만의 위험을 비꼬듯이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다음 두 문단을 연속해서 보기로 하자. 이 두 문단은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번역하기도 어려운 문단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것들이다.



104쪽 번역문: 나, 너, 당신, 그, 그녀, 사람들on, 우리, 너희들, 그녀들, 그들―모두와, 무대에 올려져 있고mise[원문 그대로―인용자] 지금 여기ici meme[원문 그대로―인용자]서 작동되고 있는, 지정하고mandés 요구하고demandés, 명령하는commandes[원문 그대로―인용자] 모든 것은 가능한 거의 모든 이야기가 말해지도록 서로를 독촉한다. 그리고 하나의 금지를 겸하는 그와 같은 명령이 오직 하나(의 이야기)로부터만 비롯하는 듯이 보이지만 당신은 하나뿐인, 신중하게 순서매겨진 포토그람들의 병치, 포즈들의 불연속적인 연속을 이해한다. 또한 각각의 내적인 ‘말해지는 것들adresse’, 각각의 생략부호는 단수든 복수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당신’과 ‘너’라는 양태사들 모두 하나의 사진적인 문법을 통해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문 페이지 III-IV: Je, tu, vous, il, elle, on ,nous, vous, elles, ils ― tous et toutes mis en scène et en jeu ici même, mandés et demandés, commandés, mis en demeure de se raconter presque toutes les histoires possibles, et l'ordre aussitôt doublé d'un interdit semble venir d'une seule, tu entends, d'une seule juxtaposition, discrètement ordonée, de photogrammes, d'une série discontinue de poses. Et chaque "adresse" implicite, chaque apostrophe, au singulier ou au pluriel, au masculin ou au féminin, dans toutes les modalités du “vous” et du “tu” paraît conjuguée par une grammaire photographique.

수정 번역문: 나, 너, 당신, 그, 그녀, 사람들, 우리, 너희들, 그녀들, 그들 ― [따라서] 남성 모두tous와 여성 모두toutes는 무대 위, 바로 여기에서 연기하도록 올려져 있으며, 가능한 거의 모든 이야기를 서로에게 이야기하도록 소환되고 요구받고 명령받고 독촉받고 있지. 그런데 하나의 금지와 더불어 곧바로 이중화되는 명령/질서ordre는 [이 모든 이야기들 중에서] 단 하나의 [이야기], 자네도 이해하겠지만, 은밀하게 질서지어진/순서화된 포토그람들의 단 하나의 병치, 포즈들의 단 하나의 불연속적 계열로부터 도래하는 것처럼 보이지. 그리고 단수나 복수, 남성이나 여성 가릴 것 없이 “당신/들”과 “너”의 모든 양상들 속에 암묵적으로/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부름adresse”, 각각의 돈호법apostrophe은 사진의 어떤 문법에 의해 활용되는conjuguée 것처럼 보이지. 


104쪽 번역문: 사진의 문법 대신 나는 차라리 특정한 사진기구의 수사 혹은 호색성에 의해서, 그것의 렌즈의 권력, 그것의 앵글 범위,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몽타주들, 이미지의 객관화와 사취, 시선의 권리, 침묵하는 내적 질서/명령, 주체의 위치에 당신들을 지정하는 잠재적 몸짓, 움직임, 상황, 위치 들[원문 그대로-인용자]에 의해서 굴절된 말을 사용하겠다. 차례로 바라보기 또는 바라보여지기, 하지만 항상 결코 유일한 것은 아닌 ...... .

원문 페이지 IV: Au lieu de photogrammaire, je dirais plutôt déclinée par la rhétorique ou aussi bien l'érotique d'un certain appareil photographique, par le pouvoir de son objectif, l'écart de ses angles, les montages auxquels il peut donner lieu, objectivation et captation d'images, droit de regard, ordre intimé en silence, autant de gestes, de mouvements, de situations et de positions possibles vous assignant telle place de sujet: regardant ou regardé, tour à tour et point toujours seul.

수정 번역문: 사진의 문법[에 의해 활용된다기보다는] 나는 오히려 어떤 사진 장치의 수사법에 의해 또는 그것의 에로티시즘에 의해서도, 그리고 그 렌즈objectif의 권력에 의해 곡용(曲用)된다déclinée고 말하겠네. 렌즈의 각도의 범위, 사진 장치가 산출할 수 있는 몽타주들, 이미지들의 렌즈화/객관화objectivation 및 포착, 시선/감시의 권리, 침묵하고 있는 내밀한 질서/명령, 당신/들을 특정한 주체 위치로 지정해 놓는 태도들, 움직임들, 상황들, 가능한 위치들 모두에 의해 곡용되는 것이지. 차례차례 [다른 이를] 보거나/감시하거나 [다른 이에게] 보이거나/감시되거나 하지, 결코 항상 혼자서만 [보거나 보이거나/감시하거나 감시되거나] 그러는 건 아닐세.  


  이 두 문단의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단어들은 “활용”과 “곡용”이다. 앞 문단의 화자는 사진들 속에서 단 하나의 이야기, 단 하나의 계열, 병치에 따라 질서지어진 어떤 명령과 금지의 구조, 따라서 권력의 구조를 발견하며, 사진의 문법에 따라 "너" “당신/들”이 활용되는 방식(알튀세르식으로 말하자면 호명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속에서 사진의 장치에 내재한 권력의 구조가 다른 많은 이야기들, 질서들을 자신의 질서 안으로 포섭하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을 발견한다. 따라서 첫 번째 화자에 따르면 사진에 고유한 권력, 사진에 고유한 시선/감시의 메커니즘은 초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반면 두 번째 문단의 화자는 활용보다는 곡용이 문제라고 보고 있다. 곧 어떤 타자(또는 대타자), 어떤 권력이 자신의 예속자들을 이렇게저렇게 배치하고 위치시키고 포섭하는 일방적인 메커니즘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보고/감시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도록/감시되도록 만드는 메커니즘이 문제라고 보고 있다. 이 경우 권력의 메커니즘은 초월적이라기보다는 횡단적/평면적이고, 이원적(“너”, “당신/들”)이라기보다는 다원적이며, 인격적이라기보다는 익명적이다.

  왜 이러한 차이가 “활용”과 “곡용” 사이의 대비로 나타날까? 좀 막연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대비는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인도유럽어에서 활용은 동사의 변화를 가리키는데, 이는 주어/주체의 변화에 따라 같은 동사/같은 행동이 변화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가령 불어에서 “가다”라는 의미의 “aller”라는 동사는 각각의 주어에 따라 “나는 간다je vais” "너는 간다tu vas", "그/녀가 간다il/elle va" "우리가 간다nous allons" "너희들이 간다vous allez", "그/녀들이 간다ils/elles vont" 등으로 활용된다. 반면 곡용은 명사류가 성, 수, 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활용의 경우 문제는 각각의 주어/주체들이 단독으로 수행하는 행위/동작인 데 반해, 곡용의 경우에는 주어/주체들 사이의 관계가, 또는 주어/주체들 사이의 관계에 따른 주어/주체의 변화양상이 문제라는 점이다. 격변화가 상당히 소멸한 불어보다는 격변화가 좀더 엄격하게 유지되고 있는 독일어의 예를 들면, “나”라는 의미의 대명사 “ich”는 주격(1격)은 “ich” 소유격(2격)은 "meiner" 여격(3격)은 “mir” 대격(4격)은 “mich”로 변화된다. 그래서 각각의 명사류는 주체들 사이의 관계에 따라 형태가 바뀌게 된다. 예컨대 “나는 너를 사랑한다Ich liebe dich”에서 “나ich”는 주격으로 쓰이고 “너du”는 대격인 “dich”로 쓰이지만, 반대로 “너는 나를 사랑한다Du liebst mich”에서는 “너”가 주격으로 쓰이고 “나”는 대격인 “mich”로 사용된다. 따라서 곡용에서는 활용과는 달리 주어/주체들 사이의 관계에 따라 주어/주체가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활용이 초월적/이원적/인격적인 권력관계를 나타내는 데, 그리고 곡용은 평면적/다원적/익명적 관계를 나타내는 데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첫 번째 문단과 두 번째 문단의 차이가, 두 문단의 화자가 각자 파악하고 있는 사진의 권력의 메커니즘의 차이가 “활용”과 “곡용”의 차이로 대비되는 것이 (충분히는 아닐지 몰라도) 어느 정도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문단을 더 보기로 하자.


105쪽 번역문: 아니, 여기서 말하기를 강요당하는 침묵, 다시 한번 우리로서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가능한 발화parole에 다른 방식으로 부합한다. 그것이 가진 침묵으로서의 전략은 다른 예술 매체를 통해서는 조금이라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사진의 사건은 일종의 또다른 구조를 가지는데, 이것이 내가 말하라는 명령에 따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바로 그것이다.

원문 페이지 IV: Non, le mutisme don't il est ici demandé de parler, et nous ne savons pas encore à qui, se rapporte autrement à la parole possible. La stratégie de son silence n'a rien à voir avec le médium de ces autres arts. L'événement photographique a une autre structure, c'est ce que je devrais vouloir dire sous sa loi.    

수정 번역문: 아니, 여기에서 말하도록 요구되고 있는, 그리고 누구에게 이러한 요구가 제기되는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침묵작용mutisme은 가능한 말과 다른 식으로 관계맺게 되지. 그 침묵의 전략은 이 다른 예술 매체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사진의 사건은 다른 구조를 갖고 있고, 내가 이 구조의 법칙에 따라 말해보아야/의미를 전달해야 할 것devrais vouloir dire이 바로 이러한 구조이지.


  이 문단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고 번역하기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 문단은 우리가 인용하지 않은 바로 앞 문단의 화자가 이 사진집, 포토로망에 언어/담론이 부재하는 것을 “목소리 없는 예술들, 곧 회화, 조각, 음악”의 경우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반박하면서, 이 사진집, 포토로망에 나타나는 침묵작용은 다른 비언어예술과 다른 고유한 구조를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단에 대해 역자가 붙인 11번 역주를 한번 보자. “침묵은 말해질 수 없는 것 혹은 말해지지 않은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이 사진의 이미지를 통해 보여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진은 부분들과 시퀀스, 롤들이 반복되고 그 반복의 연속성이 순서를 바꾸어 역전의 구도를 가능하게 하므로 이러한 가능성 속에서 더욱 말해질 수 없었던 것이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더 나아가 여기에서 침묵은 사진의 특성상 부분과 부분 사이에 항상 분절을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빈 공간과 같은 것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빈 공간은 사진 시퀀스의 불연속적인 연속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이후 데리다가 사진 속의 사진, 혹은 전체와 부분으로서 시간의 가역적인 플레이를 주장하게 하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가역성, 전체가 부분들로 다시금 재삽입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하여 역전되는 이야기, 서술 등의 특성은 사진이 가지는 매체의 특징으로서 다른 매체와 구별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이후 명령에 딸, 즉 필연성을 가지고 데리다는 설명하겠다는 것이다.”(164쪽)

  이 역주의 내용이 올바른 것인가 여부는 둘째치고라도 이런 식의 역주가 과연 이 맥락에서 필요한 것인지, 이는 또 하나의 (불필요한) 선문답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다음 두 개의 문단을 보자. 앞의 문단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고, 두 번째 문단은 상당히 긴 편이다.


105-106쪽 번역문: 여기서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적어도 기술하기 시작한다.

                  

                  아니, 아니. 나는 이미지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며, 당신의 응시를 바라보고 그것을 따르고 있다. 이미 말한 것처럼, 나는 단어라고 불리는 이것들[역주 16: 이미지들]이 누구에게 말해져야 할지 모른다. 후자(이러한 것)는 분명 망설임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지만 개개의 사람들personnes 사이에서 일어나는 망설임[역주 17]은 아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위해 쓰는 것을 알고 있으며 내가 지금 오직 당신만을 위해 말하고자 애쓰는 가장 중요한 내용도 알고 있다. 나는 오직 당신과 더불어 바라보고, 당신만이 여기서 내가 감수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시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오직 우리만을 바라보며, 그로부터 시대착오l'anachronie적 성격을 띠며, 결과적으로 보아야 할 어떤 것과도 무관하며, 그런 것을 제시하지도 않는 것, 그리하여 아마도 이 사진 연작과 무관한 채로 남아 있는 이 단어들의 자리바꿈이 존재하게 된다[역주 18]. 그것은 오히려 여러 가지 의미의 범주들 사이에서 수신자에게 생기는 망설임이다. 그러므로 수신이 통보된 지역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망설임인 것이다. 여기서 사행(事行)procés[원문 그대로-인용자]이 발생한다: 그러니 말이란 게 한 번의 호흡으로du même coup 하나 이상의 남자와 하나 이상의 여자를 호명하므로 나는 동시에 (남성) 청중un spectateur와 여성 청중la spectatrice[원문 그대로-인용자]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인가? 

원문 페이지 IV-V: Voilà qu‘on commence à raconter, au moins à décrire.

                  

                  Non, non je renvois aux images, je regarde et suis vos regards. Je l'ai dit, je ne sais pas à qui il aurait été demandé d'adresser ces choses qui sont des mots; cela peut signifier l'hésitation, certes, mais non pas entre des personnes singulières ― tu sais que j'écris, moi, pour toi, et que de l'essentiel en ce moment je ne parle qu'à toi seule, je ne regarde qu'avec toi, toi seule a droit de regard sur ce que je risque ici, cela ne regarde que nous, d'où l'anachronie, le déplacé de ces mots qui n'ont et ne donnent finalement rien à voir, demeurant peut-être sans rapport avec ces suites photographiques ― mais une hésitation entre plusieurs catégories de destinataires, et donc de lieux pour accusés de réception. Voilà le procès: vais-je du même coup, car on s'adresse toujours à plus d'un et plus d'une, parler pour un spectateur, pour une spectatrice?

수정 번역문: 이제 드디어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적어도 기술하기 시작하는 것이군.


            아니, 아니 나는 이미지들에 준거하고 있고, 당신/들의 시선들을 바라보고 따르고 있어. 이미 말한 것처럼 나는 단어들이라는 이 사물들이 누구에게 전달되도록 요구받고 있는지 알지 못해. 이는 분명 망설임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개별 인물들/단수 인칭들 personnes singulières 사이에 존재하는 망설임은 아니지(자네는 내가 자네에게/자네를 위해 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순간 본질적인 것은 내가 자네에게만 말하고 있다는 사실임을 알고 있지. 나는 자네하고만 관계하고 있고/자네하고만 바라보고 있고je ne regarde qu'avec toi, 자네 혼자만이 내가 여기서 위험을 무릅쓰고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시선의 권리/감시의 권리를 지니고 있지. 이 일은 우리에게만 관계된 일이고/이것은 우리만을 바라보고 있고cela ne regarde que nous, 바로 이로부터 이 단어들, 볼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며 결국 아무런 볼 것도 선사하지 못하고qui n'ont et ne donnent finalement rien à voir, 이 연속적인 사진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아마도 관계가 없는 채로 남아 있게 될 이 단어들의 비시간순서적anachronie 성격, 제자리에서 벗어난/부적절한déplacé 성격이 나오게 되지). 이는 오히려 여러 가지 범주의 수신자들destinataires 사이에서, 따라서 소환장 수령자들을 위한 장소들lieux pour accusés de réception 사이에서 존재하는 망설임이지. 바로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소송이 시작되지. 나는 동시에 ― 왜냐하면 사람들은 항상 하나의 남성 이상, 그리고 하나의 여성 이상에게/더 이상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것에게plus d'un et plus d'une 자신을 전달하기 때문이지 ― 한 남성관객과 한 여성관객에게 말을 하게 될까? 


  이 두 문단도 매우 번역하기 까다로운 문단들이다. 우선 첫 번째 문단에서 원문의 “on”을 “우리”라고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on”은 상대방 화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곧 이 문단의 뜻은 “사진과 담론, 언어와 이미지의 차이를 그렇게 강조하면서, 어떻게든 이 사진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더니, 이제 너도 어쩔 수 없이 이 사진들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구나”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말 어법에서는 “너”나 “자네”라는 주어를 생략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기 때문에, 수정 번역문에서는 주어 없이 번역을 했다.

  두 번째 문단은 이러한 반응에 대한 재반론이다. 곧 이 문단의 필자는 자신이 담론활동, 이야기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는 점을 처음부터 강조하면서, 자신(및 상대방 화자)이 말하는 단어들/언어의 수신자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의 내용은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이어서 제대로 파악해내기가 어렵다.

  우선 (1) 나와 너/미지의 수신자들 또는 소환장 수령자들의 대비, (2) 단수 인칭들/범주들의 대비, (3) 이미지들/단어들 사이의 대비가 이루는 체계에 주목할 수 있다. 두 번째 문단의 논의에 따르면 “나”와 “너” 같은 개별적인 인물/인격들 사이에는 시선/보는 것만이 문제될 뿐이며, 망설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데리다는 “ne regard que”라는 어구를 여러번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만을 바라보다”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하고만 관계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데리다가 이 어구를 사용함으로써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나와 너 같이 대면하고 있는 사이에서는 “regard”만 요구될 뿐 단어들/언어는 필요치 않다는 점이다(여기에서 우리는 당연히 레비나스를 떠올리게 된다). 반면 단어들/언어는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또 이 사진집에 대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수신자들, 소환장의 수령자들에게 전달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문단의 화자는 자신이 이 수신자들이 누구인지, 또 소환장을 수령하게 될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알지 못한 채 말을 하고, 단어들을 전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망설임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말해주듯이 이 망설임은 성별의 문제, 젠더의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수사법적 표현은 “car on s'adresse toujours à plus d'un et plus d'une”라는 문장, 특히 “plus d'un et plus d'une”이다. 불어에서 “plus”는 “보다 더”라는 의미를 갖는 부사인데, 이것이 “ne”라는 단어와 함께 “ne ... plus”라는 형태로 쓰이게 되면, “(더 이상) 아니다”라는 의미도 갖는다. 따라서 “plus d'un”은 “하나 이상”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또한 동시에 “하나가 아님”이라는 의미도 갖게 된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여기에서는 “un”과 “une”가 번갈아 사용되었다는 점인데, “un”은 남성명사나 관사(“한 남자un homme”에서처럼)로서 “하나”를 가리키며, “une”은 여성명사나 관사(“한 여자une femme”)로서 "하나"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맥락에서 “plus d'un et plus d'une”이라는 어구는 단지 “하나 이상의 남성과 하나 이상의 여성”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정도가 이 두 번째 문단의 대략적인 의미인데, 이 문단이 의미하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을 두고 꼼꼼히 대화의 전후 맥락들을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원래는 지금까지 살펴본 번역문들의 두 배 가량 되는 내용들을 검토하고 수정하려고 했지만, 지루하고 힘들기도 하거니와 이 일에만 매달려 있을 여유가 없어서, 번역문에 대한 검토는 이 정도로 그치려고 한다. 필요하다면 나중에 다시 해볼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이 정도의 검토만으로도 이 번역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리고 데리다를 번역하는 일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보다시피 이 번역본은 매쪽마다 오역이 나오는 게 아니라 거의 매 문단마다 오역이 나올 정도로 번역에 문제가 많으며, 병기된 불어 철자들에 다수의 오류가 있고 상당수의 비문들도 존재한다. 이는 출판사 쪽에서 거의 교열이나 교정을 보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역자만이 아니라 출판사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문학동네의 자회사인 아트북스 같은 출판사라면, 그리고 “데리다의 3대 예술서의 하나”―무슨 근거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라고 광고할 만큼 이 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면, 더 나아가 역자가 불어 능력을 거의 갖추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면, 데리다 전문가나 적어도 불어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외주를 줘서 이 책의 번역을 꼼꼼하게 교열하고 교정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이 번역본의 상태는 출판사에서 이런 과정을 생략한 채 이 책을 출간했음을 잘 말해준다. 그런 마당에 “3대 예술서 중 하나”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럴 바에야, 재판을 찍을 경우에는 아예 [자크 데리다, 시선의 권리]라는 민망한 제목을 빼고 대신 [마리-프랑수아즈 플리사르의 포토로망: 시선의 권리]라는 제목으로 고쳐내는 게 옳을 것이다. ‘포토로망의 번역본’이라는 말이 앞뒤가 맞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한 가지 더 어이없는 점은 [북 앤 이슈]라는 서평 전문지를 내는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이런 참담한 오역본을 이 달의 우수도서로 선정했다는 사실이다. 이 단체 쪽 이야기로는 “책의 출간에 의의를 두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 단체는 국내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고질적 문제점 중 하나가 오역의 문제라는 점은 전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한국 출판인들의 모임이 한국 출판계의 실정을 그처럼 모른다면, 누가 한국 출판계의 실정을 자각하고 바로 잡겠는가?

  따라서 한국출판인회의의 공신력 역시 이 책으로 인해 시험을 받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위촉해서 달마다 우수한 도서들을 선정하는 일은 매우 바람직하고 장려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데리다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데리다의 책이 이처럼 우수도서로 선정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나는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달의 최악의 도서들 중 한 권으로 꼽힐 만한 오역본을 우수 도서로 선정해놓으면, 이 단체의 권위를 믿고 이 책을 마음놓고 사서 읽는 독자들이 입게 될 피해는 과연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이래저래 이 책의 출간과 우수도서 선정은 한국 출판계 및 인문학계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또하나의 사건, 또하나의 해프닝으로 기록될 것 같다. 제발 이런 류의 참담한 사건, 이런 식의 어이 없는 해프닝은 이번으로 끝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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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2004-10-01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지금 마구 졸음이 와서 글을 끝까지 못 읽었어요; 나름대로 옆에 사전도 펼쳐놓고 열심히 읽어보려고 했는데 -.- 여튼 참 힘드셨겠어요;

그리고 궁금한 것 하나 : 맨 첫 문장에 나오는 "...j'ai pu encore..."에서, pu는 어떤 기능을 하나요? pouvoir의 과거분사인 듯한데, 책의 번역과 balmas님의 번역 모두 pouvoir에 해당하는 의미는 담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요. pu를 고려한다면, "나 자신에게 했던 모든 이야기들"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할 수 있었던 모든 이야기들"이 되지 않는지... 그냥 혹시나 해서 여쭙습니다;;

balmas 2004-10-01 0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맞습니다. "pu"는 pouvoir의 과거분사죠.
그러니까 그대로 번역한다면 "나 자신에게 할 수 있었던 모든 이야기들"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할 수 있었던"과 "했던" 사이에 큰 의미상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읽기 쉽게 "했던"이라고 옮긴 거죠.

가을산 2004-10-0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님, 그럼 '추천할 만한 번역서'로는 어떤 것이 있나요?
데리다, 그람시, 들뢰즈, 네그리 이런 사람들 책으로요.
정말 모르겠어요.... ㅜㅡ

딸기 2004-10-06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에 관심이 많으시구나...가 아니고,
리뷰와 페이퍼에 철학자들의 이름이 많이 보이네요. 무서워졌어요. ^^

paby 2004-11-02 0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진태원으로 검색해 보세요. 바로 balmas님 자신의 번역!

마냐 2005-04-08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악의 오역으로 꼽힌 책들의 출판사들, 이름값은 하는 줄 알았는데...꼭 그런건 아닌 모양이군요. 저 책을 그저 휙휙 사진만 구경하고 데리다 글은 보는척 마는척 한 인간도 있슴다. 뭐, 사진만으로도 인상적이었슴다만...^^;
암튼, 지성을 유머로 감춘 발마스님의 이중성, 넘 좋아요. ^^

balmas 2005-04-08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지성하면, 역시 박지성이죠. ㅋㅋ

zelatop721 2010-08-14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데리다 번역본으로 추천할만한 책들 리스트를 부탁드립니다. 아주 개인적인 리스트로요.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이데아총서 9
발터 벤야민 지음 / 민음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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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하루빨리 좀더 많은 작품이 번역,소개되어야 할 사람 중 하나다. 이는 단순히 그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문필가, 철학자, 문예이론가 중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아마도 20세기 전반기의 사상가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의 현재와 장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고, 빛을 비춰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놀라운 이미지 이론과 매체 이론이 그렇고,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신학과 유물론, 또는 신학적 유물론이 특히 그렇다.
   이 분야의 글로는 말년에 씌어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보통 [역사철학테제]라고 번역되지만―와 초기의 단편 한 두개만이 국내에 소개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파리 아케이드](“Passagen Werk”)를 비롯한 이 분야의 글들은, 좀더 체계적으로 소개된다면, 벤야민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사상적 지형도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하고 그릴 수 있게 해줄 것으로 믿는다.

    반성완 교수가 번역한 이 책은 지난 20여년 동안 국내에서 가장 널리 읽힌 벤야민 번역본이다. 벤야민이라는 이름이 아직 생소했던 시기에, 더욱이 군사독재의 엄혹한 탄압이 짓누르고 있던 시기에, 난해한 벤야민의 글들을 짜임새 있게 묶어서 소개한 공로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벤야민을 번역해본 사람이라면, 그 일이 얼마나 힘겹고 생색이 안 나는 일인지 알 것이다. 벤야민을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문장들을 틈새 없이 조밀하게 이어주는 깊은 논리전개를 따라잡아야 하고,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본문만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지만 벤야민이 매우 친숙하게 사용하는 개념들, 이론들, 이데올로기들의 유래를 추적해서 밝혀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느닷없이 솟구쳐 오르는 번득이는 통찰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말고 잘 붙잡아두었다가 옮겨 담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들이 이 번역본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소시켜 주지는 않는다. 이 책의 역자가, 20세기 독일 지성계의 귀중한 유산을 번역, 소개하기 위해 오랫동안 애써온 반성완 교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 번역본이 지닌 문제점이 무엇인지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번역가의 과제] 앞부분에 해당하는 320쪽의 논의를 보자. 번역문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떤 상대적 개념들은, 그것들이 처음부터 인간들에게만 관련되지 않는 경우에만 그 자체의 가장 좋은 의미를 보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잊을 수 없는 삶이나 아니면 잊을 수 없는 순간―비록 우리가 그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고 하더라도―이라는 말을 운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그러한 삶이나 순간이 잊혀져서는 안된다는 요구를 할 경우, 잊혀져서는 안된다는 이 말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는 요구를 내포하고 있을 따름이며, 나아가서는 동시에 인간에게도 해당될 수도 있는 어떤 영역 즉 신에 대한 기억에 대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 개념들]은 원문이 'Relationsbegriffe'이니까 [관계 개념들], 또는 [관계적 개념들]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건 매우 사소한 문제다(하지만 321쪽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문제다). 맞줄 사이의 [우리]도 'alle Menschen'의 번역이니까 [모든 인간들]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역시 사소한 문제다. 그러나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는 요구]를 [인간이 부응할 수 없는 요구]로 고쳐야 하고, [인간에게도 해당될 수도 있는 어떤 영역 즉 신에 대한 기억]을 [그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어떤 영역, 즉 신의 기억]으로 고쳐야 한다는 건 중대한 문제다. 번역문만으로는 벤야민의 논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뒤에 나오는 “언어적 형상의 번역성 여부는, 그것이 비록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번역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논의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도 [비록 '어떤' 언어적 형상물들이 인간에게는 번역될 수 없다 하더라도, 이 형상물들의 번역 가능성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수정되어야, 앞의 논의와 일관성있게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321쪽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문은 그것이 번역될 수 있음으로 해서 번역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은 원전의 번역 가능성 덕분에 원전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와 같이 주어를 바꿔 번역해야 역시 논의의 문맥이 이해될 수 있다. 이것들은 이 번역본이 지닌 문제점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시간이 있고 지면이 허락한다면 이런 문제점은 수도 없이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는 벤야민 전공자가 여럿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벤야민 저작의 번역이 이처럼 더딘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제 제대로 번역된 벤야민 저작들을 읽고 싶다는 게 단지 나의 바램만은 아닐 것이다. 무거운 짐을 떠안기는 것 같아 딱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아니면 이 일을 누가 감당하겠는가? 벤야민 전공자들의 노력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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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9-10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카페에서 알게된 바에 따르면, 그 주인장이 [모스크바 일기장]의 번역 초고를 완성한 상태고, 조만간 출판될 예정이랍니다. 주인장이 올린 몇편을 보니, 아직 초고라 그런지 어색한 문장이 좀 있더군요. 기대 반 의구심 반입니다.

balmas 2004-09-10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가요?
벤야민 저작들이 출간되는 건 반가운 일인데, 번역이 제대로 됐으면 좋겠군요.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앞으로 종종 들르시기 바랍니다.^^
 
글쓰기와 차이 동문선 문예신서 162
자크 데리다 지음, 남수인 옮김 / 동문선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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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번역된 데리다 책들(데리다의 저서 및 해설서) 중 많은 수가 심각한 오역으로 훼손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잘 알려진 일이다. 그렇다면 이 번역본은 좋은 번역본일까? 알라딘의 편집자는 이 책을 “Editor's Choice”로 표시해 놓았고, 서평자 중 한 사람은 서평의 제목을 “데리다 번역본 가운데 가장 낫지 않을까 ...”로 달아놓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은 그래도 믿고 구입해볼 만한 번역본인 듯하다.

그런데 다른 서평이 재미있다. 실례인지 모르지만 일부분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와~~ 뭐 이렇게 어렵냐? 장장 10일 동안이나 자세히, 꼼꼼히 읽었다. 그런데도 잘 모르겠다. 원래 철학 하면 어려운 것이라는 내 고정관념을 더욱 강고히 만든 책 중 하나가 바로 이 글쓰기와 차이다. 도대체 글쓰기와 이 책 내용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무식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볼 때 이 서평자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고, 이 서평은 매우 좋은 서평이다. 국내의 데리다 번역의 문제점을 몇 줄로 집약해서 표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국내의 데리다 번역본은 10여일 동안 꼼꼼하게 읽은 독자가 잘 모르겠다고 탄식을 하게 만들 만큼 내용을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철학은 어려운 것이라는 고정관념만 강화시키고 있다.

둘째, 하지만 데리다는 원래 어려운 철학자 아닌가? 이런 반론이 제기될지 모르겠다.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논증이 복잡하고 내용이 심오해서 한번 읽어서는 내용 전체를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수학이나 물리학처럼 사용되는 언어나 기호가 지극히 전문적이어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철학이 어렵다면 아마도 전자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이 번역본은 데리다의 어려움을 전자보다는 오히려 후자에 가까운 어려움으로 만들고 있다. 이는 “도대체 글쓰기와 이 책 내용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무식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위의 서평자의 지극히 정직한 고백에서 잘 나타난다. 이 서평자는 책 제목이 [글쓰기와 차이]이니 책을 읽어보면 당연히 제목에 관해 이해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도무지 그 연관성을 알 수가 없다고 탄식하고 있다.(그런데 역자는 알고 있을까? 왜 이 책의 제목이 <글쓰기와 차이>인지, 도대체 '차이'가 '글쓰기'와 무슨 관계에 있는지?)

그렇다면 이제 데리다 책을 사보겠다고 나설 독자가 있을까? 책 제목의 뜻도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는 번역본이 가장 나은 번역본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그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사람들말고는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데리다와 교양대중의 거리는 더 멀어질 것이고, 철학과 교양대중의 거리도 더 멀어질 것이다. 전문가들은? 그들에게 이런 번역본이 연구에 참조가 될까? 그들이 이런 번역본을 강의나 수업교재로 사용할 수 있을까? 아마도 (대학원 수업이라면) 차라리 영역본을 권할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 번역은 왜 하는 것일까? 아마도 출판사로서는 이미 계약해 둔(또는 오히려 전매해둔) 저작권을 사용하기 위해서, 역자는 업적을 올리기 위해서 했으리라. 대중의 교양습득이나 전문가들의 연구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저작권 계약과 번역,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끊임없는 오역의 악순환을 야기시키는 근본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원인을 제거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누구 해답을 아는 분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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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1-25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그렇게 어렵지 않던데... 이제 대딩 1학년입니다만. 케바케 아닐지요. 그냥.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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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남한에는 두 종류의 지젝 독자들이 있다. 한 부류의 독자들은 대중문화를 다루는 지젝의 절묘한 솜씨에 매료되어 있다. 사실 정부와 학계, 산업계와 언론계가 한 목소리로(이는 참 보기드문 일이다. 그러나 정말로?) 21세기는 문화산업의 시대이고, 우리의 살 길은 문화산업을 육성하는 데 있다고 소리높여 합창하는 시기에, 지젝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문화적 소비대상이자 벤치마킹의 모델일 수밖에 없다. 난해한 독일 관념론 철학과 라캉의 이론이 발하는 아우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자상하게 문화를 향유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학계여 지젝을 본받으라!! 그리고 이미 지젝을 흉내내고 해설서까지 쓰는 학자들까지 생겼으니, 남한의 문화산업은 전도가 양양하다.
    다른 부류의 독자들은 전자와는 정반대로(그러나 정말로?) 지젝에서 급진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주체를 일방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무의식의 주체"를 주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알튀세르와 달리, 이데올로기를 "과학과 대립하는 것"으로 사고하지 않고(알튀세르에 관한, 정말로 지긋지긋한 영미식 토포스다! 이거야말로 이데올로기 그 자체다),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무의식적인 장소(또는 이데올로기의 실재계적 공백)을 발견하여, 이데올로기론을 새로운 정점으로 끌어올렸다고 한다(브라보!!). 어떤 부류의 독자들이 진정한 지젝의 독자들일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그런데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기는 있는 것일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나는 왜 역자가 제목을 이렇게 번역했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 오역도 바로잡을 겸 재판을 찍을 계획이 있다면, 그 때는 그 이유를 꼭 알려주었으면 고맙겠다)은 지젝의 원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이다.
    우선 헤겔을 비롯한 독일관념론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통달해 있는 전문 학자로서의 지젝의 면모가 있다. 실제로 그는 헤겔과 정신분석학으로 각각 학위를 하는 보기드문 지적 인내심을 보여주었다(그런데 왜 자크-알랭 밀레는 지젝의 논문을 자기 총서에 출판해주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그는 지젝을 자기 오른팔처럼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이런 지적 토대에 기초하여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자신의 이론적 과제로 제시하는 이론가 지젝의 모습이 있다. 이 과제는 푸코와 하버마스 사이의 근대성 논쟁의 배후 쟁점으로서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논쟁이라는 문제로 제기된다. 이 문제에 관한 지젝의 테제는 라캉은 욕망의 그래프를 4단계로, 또는 2층으로 제시할 줄 알았던 반면, 알튀세르는 1층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곧 알튀세르는 호명 테제에만 그쳤을 뿐, 어떻게 호명을 넘어서는, 또는 호명을 벗어나는 주체가 존재할 수 있는지는 사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정말로? 지젝은 때로는 스스로 속는 척한다).
    그리고 대중문화 분석가, 향유자로서 지젝의 모습이 있다. 그가 유고 영상기록 보관소에 틀어박혀 탐닉했던 미국 영화들은 단순히 이론을 예시하기 위한 소재에 그치지 않고(그랬더라면, 지젝이 그렇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이론, 또는 진리의 증거 자체가 되어버린다. 어떤 이론, 어떤 진리? 물론 라캉의 이론, 라캉의 진리다. 따라서 지젝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젝 또는 라캉에 동일화되는 과정이며, 대중문화에서 이들의 이미지를 읽어내는 것이다.
    93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지젝이 자신의 문제, 곧 라캉과 알튀세르의 논쟁을 좀더 정교하게 전개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지젝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부정적인 것과 머물기], [이데올로기의 유령] 등에서, 자신이 이미 했던 이야기들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왜 그는 로베르트 팔러의 비판에 답변을 하지 않을까?).
    지젝이 대중문화에서 벗어나 급진정치 쪽으로 갈 수 있을까? 그가 과연 급진정치를 통해, 스스로 말하듯 라캉의 말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또는 그는 이미 대중문화에 너무 깊이 중독된 게 아닐까? 그런데 이 질문들은 의미가 있는 질문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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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09-3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 잘 이해는 못했지만 추천은 하죠

balmas 2004-10-10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고마울 데가 ...
 
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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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폭력의 세기>는 흔치 않은 깊이를 지닌 책이다. 적은 분량이지만, 권력과 폭력 같은 정치학의 기본 개념들에 대해 깊이 있고 참신한 논의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반면 이 책의 번역은, 심각한 오역이 문제되는 건 아니지만, 영어의 통사 구조를 그대로 옮긴 게 여실히 드러나는 전형적인 번역투 문장들로 되어 있어서 읽기가 매우 불편하다). 아렌트의 논지는 (1)권력과 폭력은 대립적인 개념들이지만, (2)서양 정치학의 한 전통으로부터 양자를 같은 것으로, 또는 적어도 동류의 것으로 파악하는 관점이 생겨났으며, 이는 결국 20세기에 폭력 혁명론의 예찬자들을 낳게 되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렌트가 보기에 폭력은 본성상 도구적인 것이며, 폭력은 어떤 부당한 압제나 횡포에 맞서 행사되었을 때 정당화될 수 있다. 즉 폭력이 유일하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는 부당하게 실행된 권력에 대해, 다른 어떤 대용물이 아니라 바로 그 권력을 응징하고 바로 잡기 위해 행사된 경우다. 반대로 권력은 [제휴해서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상응](74쪽)하는 것으로 정의되며, 따라서 집단성을 특징으로 갖고 있다. 하지만 권력의 좀더 중요한 특징은 정당화를 요구하는 폭력과 달리 정당성(legitimacy)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 즉 폭력은 사후적인 결과들에 따라 정당화되거나 정당화되지 않지만, 권력은 정치적 공동체의 기원에서 자신의 정당성의 원천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예컨대 제헌의 행위와, 쿠데타 또는 반혁명의 행위는 엄격하게 구분됨을 의미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 정치, 특히 20세기 정치의 문제점은 권력과 폭력의 이러한 본질적 차이가 망각되고 은폐되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는 16세기 절대주의 권력론 이래 근대 정치철학은 정치를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 이해하고, 권력 역시 [조직되고 합법화된 폭력]으로 간주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관점은 정치와 권력에 대한 유일한 관점도 바람직한 관점도 아니며, 오히려 좀더 근원적이고 심오한 이해 방식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형성하는 공적인 참여 행위로 권력을 이해하는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적 경험, 그리고 18세기의 미국 혁명의 경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부에 제기되는 폭력혁명론의 위험은 폭력의 도구적 성격을 망각하고 폭력을 목적화한다는 데만 있지 않다. 아렌트에 따르면 폭력혁명론의 진정한 위험은 과학기술의 진보와 관료제의 확산에 따라 생겨난 [전쟁과 폭력의 자율화] 경향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이러한 경향을 저지하고 근절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더욱 부추기고 심화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정치와 권력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적어도 문제의 위치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가 내리고 있는 결론이다.

아렌트의 매력은 서양의 철학 전통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복잡한 현실 문제들에 대해 명쾌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아렌트의 논의는 혁명적이거나 진보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읽는 이에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또한 바로 이 때문에 아렌트의 논의는 보수적인 것은 아닐지 몰라도 지나치게 규범적인 방향으로 경도될 위험이 있다. 예컨대 이런 질문을 해보자. 폭력과 권력이 구분되는 [시점]은 어느 시점인가? [누가] 이 양자를 구분하는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제헌의 행위와 쿠데타는 [언제], [누구]에 의해 구분되는가?

아렌트는 [과거시제]로 말하고 [적]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라는 인칭을 사용할 권리를 부당전제하고 있다. 이는 아렌트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와 미국혁명이라는 두 가지 위대한 정치적 전통이 지니는 규범적 힘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는 이 두 전통은 [현재의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또 오늘의 투쟁 속에서 [변용]되고 [변혁]될 수밖에 없음을 그가 얼마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20세기 후반이 탈혁명의 시대이며, 문제는 오래된 혁명의 전통을 [복원]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이 역시 하나의 폭력일 수 있음을. 따라서 경계는 권력과 폭력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권력 자체 내에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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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7-09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제목만 읽고서라도 추천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시는군요.
한나 아렌트....
한동안 무척 좋아했고(현재도 좋아하지만) 비판적으로 읽어내야 할 필요가 있는 작가란 점에서.... 매우 동의하는 바입니다. 추천 꾸욱....

balmas 2004-07-09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앞으로는 제목에 좀더 신경을 써야겠군요.
감사.^^

balmas 2004-10-24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좀 빨리 보시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