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운아]를 조금씩 읽다 보니까 <지적 차이>에 관한 흥미로운 고찰이 있어, 두고 생각해보자는 뜻에서 몇 쪽의 내용을 옮겨 적습니다.


 



106쪽


영국인이 말주변이 없다는 것은 많은 농담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청교도주의나 소극적인 국민성 등으로 이를 설명하곤 한다. 그런 설명은 더 심각한 사태를 가려 버리는 경향이 있다. 영국의 노동계급이나 중산계급에 속[107쪽]한 사람들 중에는 전반적인 문화적 황폐하의 결과로 말주변이 없게 되어 버린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자신들의 사고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했다.




그들은 경험을 보다 분명히 밝혀 줄 말을 찾을 때 참고할 수 있는 그런 예들을 갖고 있지 않다. 속담의 형태로 구전되던 전통들은 오래 전에 파괴되어버렸고, 또한 엄격히 기술적인 의미에서는 문맹이 아니라고 해도, 글로 남겨진 문화적 유산들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글을 읽을 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 이상의 문제다. 일반적 문화라 함은 거기에 비춰 개인이 스스로를 알아볼 수 있는, 적어도 자신의 모습 중에서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부분을 알아볼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해야 한다. 문화적으로 박탈당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훨씬 적게 가지는 셈이다. 그들의 경험 중 많은 부분―특히 감정적이거나 내재적인 경험들―은 그들 자신에게 ‘이름지을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된다. 결국 그들의 주된 자기표현 방식은 행위를 통한 것이다. 이것이 영국 사람들이 ‘직접 해보기(DIY)’ 취미에 그렇게 많이 매달리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때 정원이나 작업대는 만족스러운 자기반성에 그나마 가장 가까운 무엇이 된다.




가장 쉬운―그리고 가끔은 유일하게 가능한―대화의 형식은 행위와 관련된 혹은 행위를 묘사하는 대화이다. 말하자면 행위가 하나의 기술이나 과정으로 여겨지는 상황이다. 그때 이야기되는 것은 말하는 이의 경험이 아니라 완전히 외적인 메커니즘 혹은 사태―자동차의 엔전이라든지, 축구 경기, 배수로 혹은 위원회의 운영 등―다. 이런 주제들, 개인적인 부분을 직접 건드리지는 않는 이런 주제들이 오늘날 영국에서 스물다섯 살 이상 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대화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더 어린 사람들의 경우[108쪽]에는 그들 자신의 욕망이 가지는 힘 덕택에 이러한 탈인격화를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대화에는 따뜻함이 있고, 거기서 우정이 생겨나 계속 유지될 수도 있다. 대화의 주제 자체가 가지는 복잡함 덕택에 대화자들이 가까워질 수 있다. 마치 대화자들이 주제 자체의 아주 작은 세부에까지 철저히 살피기 위해 서로 몸을 앞으로 숙이고, 그 과정에서 손을 마주잡는 것만 같다. 그들이 교환하는 전문가적인 의견이 곧 공통의 경험을 상징하게 된다. 이미 죽어 버렸거나 지금 함께 하지 않는 친구를 생각할 때, 남은 친구들은 항상 전륜구동이 더 안전하다고 주장하던 그 친구의 설명을 생각한다. 친구들의 기억 속에서 그 설명은 이제 그들 사이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사샬이 활동하는 지역은 영국 내에서도 문화적으로 가장 심각하게 황폐화한 지역 중의 하나다. 그리고 그가 마을 사람들과의 대화에 어울릴 수 있게 된 것도 순전히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들만의 기술을 이해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때부터 사샬과 마을사람들은 그들의 나머지 공통경험에 대한 메타포가 될 수 있을 하나의 언어를 공유하게 되었다.




사샬은 그 메타포가 그들이 동등한 입장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믿고 싶었다. 그 공통의 언어가 미치는 범위 안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그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등한 입장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나 숲 사람들 사이에서 사샬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그들과 함께 사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면, 어떤 상황에서든, 부끄러워하거나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마을 전체가 이해하지 않으려 하거나 이해 못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는 이해를 해줄 것이다.(임신한 미혼모들은 대부분 아무런 스스럼없이 사샬에게 와서 직접 그 사실을 말한다.) 그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그나마 있다면, 의사에 대한 전통적인 두려움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몇몇 노인들뿐이다. ...




109쪽


일반적으로 사샬의 환자들은 그가 자신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외부로부터의 관심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이런 지역에서 외부로부터의 관심은 은연중의 착취를 암시한다. 그는 신뢰를 얻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동등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그렇게 대접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 사샬이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누구도 그 점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한 특권까지가 지금 모습 그대로의 의사로서 그의 일부분이다. 그 특권이 사샬의 수입이나 타고 다니는 차, 혹은 살고 있는 집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자기 일을 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 제공되는 편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편의를 통해 사샬이 일반인들보다 조금 더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특권으로 여겨질 문제는 아니다. 그에게 그만큼의 안락함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가 특권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의 생각하는 방식이나 말하는 방식 때문이다! ...




110쪽


마을 사람들이 사샬을 특권을 가진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그의 생각이 대단히 인상적이어서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생각하는 방식이 자신들의 생각하는 방식과 다르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린다. 자신들의 상식에 의존하는 데 반해, 그는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상식은 실용적인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단기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만 실용적이다. 상식은 자신에게 먹이를 내미는 손을 깨물어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더 좋은 먹이를 먹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까지만 어리석은 일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상식은 수동적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가능한 것’에 대한 구태의연한 견해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




상식은 기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 무지한 상태로 내버려졌던 사람들이 집에서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의 일부다. 이 이데올로기는 여기저기서 취합한 것들로 구성된다. 아직 살아남은 종교적인 요소가 있는가 하면, 경험적 지식에서 나온 것, 방어적인 염세주의에서 나온 것, 그리고 현재 제공되고 있는 피상적인 교육을 쉽게 하기 위해 취사선택된 것들이 있다. 요점은 무엇인가 하면 상식은 절대 스스로를 가르칠 수 없으며,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결핍되어 있던 기본적인 교육이 회복되는 바로 그 순간, 모든 상식적 생각들은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상식의 기능 전체가 파괴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상식은 탐구하려는 정신, 즉 철학과 구별되는 한에서만 하나의 범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




116쪽


마을 사람들이 사샬의 생각하는 방식을 특권으로 느끼는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지만, 그것은 이유라고 하기에는 좀 합리적이지가 못하다. 한때는 마법적인 권위로 여겨졌던 그런 권위, 그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두려움에 대해 말한다. 모든 충동들이 자연스럽다고, 혹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 준다. 또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를 기억한다. 그는 그런 것들에 대한 경외감이 조금도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꿈과 악몽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흥분을 참지 못할 때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를 ― 핑계가 아니라 ― 이[117쪽]야기할 수도 있다.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사샬의 능력 때문에, 그는 상식 안에서는 무시되거나 거부되어야만 했던 경험들과 연결된다. 이러한 ‘면허’가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 한 명 한 명 안에 들어 있는 갇힌 자아에게 도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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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06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4-12-14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고마워요, 숨어계신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