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겨레 기획 시리즈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에 인도의 대표적인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라나지트 구하(Ranajit Guha)를  포함시켰는데, 마침 때맞게 구하의 대표작이자 서발턴 역사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서발턴과 봉기](원제는 Elementary Aspects of Peasant Insurgency in Colonial India)가 번역, 출간됐다.  

국내의 서발턴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성균관대 김택현 교수가 번역을 맡아서, 번역의 질도 충분히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해가 1983년이니까 약 25년여만에 국내에 번역, 소개되는 셈인데, 이 책의 번역을  

시작으로 좀더 활발하게 서발턴 연구가 소개되길 바란다. 비판적인 논의와 응용 및 변용은 당연히  

국내 연구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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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9-01-19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서발턴이라는 말이 나오는 책들은 다 어려워요...

balmas 2009-01-19 19:42   좋아요 0 | URL
번역만 잘됐다면(잘됐으리라고 믿지만) 이 책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거예염.^^

에로이카 2009-01-20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저는 저 "서발턴"이라는 한글 표기가 좀 어색하게 들립니다. "섭얼턴"이나 "서브얼턴"으로 써야 영어 발음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뜻도 좀더 잘 전달될 듯 싶거든요. 지하철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서브웨이"는 그저 샌드위치 가게 상표 말고는 별로 쓸 필요가 없지만, "서붸이"라고 안 쓰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요. 혹 다른 이유가 있다면 좀 가르쳐주셔욤. ^^

balmas 2009-01-20 21:59   좋아요 0 | URL
"서발턴"이라는 표기는 저도 처음 접할 때는 상당히 어색했습니다.^^ 왜 "서브얼턴"이나 "서브알턴"이 아니라 "서발턴"이라고 표기하는지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현행 외래어 표기법 원칙이 그런게 아닌가 합니다.^^;

릴케 현상 2009-01-20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안면이 있는 문학평론가에게 '서발턴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사람이름일 거라고 하더군요.

balmas 2009-01-22 01:4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

딸기 2009-02-03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브알턴, 으로 써주는 편이 그나마 낫겠지만, 결국 그 단어에 해당되는 우리만의 어휘를 못 만들고 있는게 현재 한국 학계의 수준이 아닌가 싶어요. 옛날 프랑스 철학자들 말하는 것 번역될 때만 해도 '논란'은 많았지만 그래도 한자어로라도 표기를 해주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저걸 그냥 '서발턴'이라고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한국 학계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제 눈에는. 한국 독자들에게 설명하기도 힘든, 설명하지도 못해서 영어로 그냥 받아적은 말을 가지고 뭔가를 얘기한다는 것이지 싶어요.

릴케 현상 2009-02-04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발턴한테서^^ 특히 그런 걸 느끼게 되네요

balmas 2009-02-05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산책님/ 생각해보면 저도 처음에 "서발턴"이라는 용어를 접했을 때 이게 뭘 옮긴 말일까 갸우뚱했던 것 같아요.^^ 정말 "서브알턴"이라고 하면 이게 뭘 옮긴 건지 쉽게 알 수 있을 텐데요. ㅎㅎ 제 생각에도 적절한 우리말로 번역하는 게 최선일 것 같은데, 지금으로서는 다들 딱히 좋은 번역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냥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오랫동안, 그 유명한 '근간' 상태에 있던(^^;) 알튀세르의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가 재출간됐군요. 지난 1993년에 처음 출간된 이후 15년만이군요. 처음 출간됐을 때  

읽으면서 섬뜩하기도 하고(자신의 삶에 대한 재구성) 재밌기도 했던(특히 당대 사상계의 동향에 관한 내용) 기억이 

생생한데, 이렇게 새로운 자료가 추가돼서 처음 출간됐을 때보다 훨씬 두툼하게 재출간된 걸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더욱이 이번에 나온 책에는 주제넘게 '해설'까지 쓰게 돼서 더 그렇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알튀세르라는 유령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시길.^^   

용기있는 분들은 말도 한번 건네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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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1-08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도 눈에 띄어서 넣어놨는데, 책소개를 보니 발마스님 이름이 보이더라고요.

balmas 2009-01-09 01:19   좋아요 0 | URL
ㅎㅎ 쑥스럽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1-08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찜 해봅니다.

balmas 2009-01-09 01:20   좋아요 0 | URL
ㅎㅎ 예, 그러셈^^

로드무비 2009-01-08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

balmas 2009-01-09 01:20   좋아요 0 | URL
ㅎㅎ 재밌어염.

류우 2009-01-09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리 책이 와야 할텐데=ㅎㅎㅎ

balmas 2009-01-09 01:21   좋아요 0 | URL
ㅎㅎ 벌써 주문하셨군염.

2009-01-09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9-01-10 01:25   좋아요 0 | URL
그건 특별한 방법이 있다기보다 그냥 꼼꼼하게 읽는 게 중요하지.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따져보면서 읽는 연습을 많이 하면, 언젠가는 좀더 쉬워질 거야.^^
 

 이번 주 토요일부터 격주로 [한겨레] 신문에서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연재가 시작됩니다.

 21세기 현재 외국에서 주목할 만한 작업을 수행하는 저명한 진보 지식인들(주로 사상가 내지 이론가들)을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지금으로 봐서는 대략 27-8회 정도 연재될 것 같은데, 국내의 전문가들이 각자  

한 꼭지씩 맡아서 글을 쓰거나 아니면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생각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아래 글은 전체 기획의 총론격으로 쓴 글인데,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격려, 조언을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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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연재를 시작하며


‘역사의 종말’의 기만적 현실성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던 해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미국의 보수적인 저널 [내셔널 인터레스트]에 역사의 종말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글을 기고했다. 그리고 그 글은 2년 뒤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이라는 제목이 붙은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어 새로운 세계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얼마 못가 그 순진함과 조야함이 드러났다는 의미에서 기만적이었던 이 선언은 하지만 지금까지도 계속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었다(후쿠야마가 석학 대접을 받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역사의 종말에 대한 선언의 현실성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입증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후쿠야마의 선언이 순진하고 더 나아가 기만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사실은 반공주의)의 최종적 승리에 대한 그 선언을 어떻게 실천적으로 논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2009년 벽두에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연재를 시작하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주의 이후 어떤 진보 사상인가

20세기 세계 진보 사상의 흐름이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변주의 역사였다면, 21세기 벽두의 진보 사상은 역사적인 종언을 고한 마르크스주의 ‘이후에’ 어떻게 지배에 맞서 저항할 것인가, 어떻게 사회의 변혁을 사고할 것인가라는 화두와 마주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진보 사상은 근본적으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다룰 지식인들 중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잉여가치의 착취 메커니즘을 유일한 지배의 원리로 간주하지 않으며, 또한 누구도 노동자 계급이라는 ‘역사의 주체’에 근거를 둔 정치적 변혁과 대안 사회의 구성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그 대신 이들은 극단적인 폭력을 수반하는 고도의 과학기술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공백으로 남겨두었던 문제들을 분석하고,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 자신을 포함한 근대 문명 전체에 함축된 모순들을 해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모두 확실하지만 낡은 답변을 되풀이하기보다는 좀더 복잡하고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는 길을 택한 사람들이다.


새로운 진보 사상의 주역은 누구인가

우리가 이번 기획에서 다룰 진보 지식인들은 지난 20세기 후반기를 풍미했던 진보 사상의 대가들의 후예다. 프랑스의 경우 알튀세르, 들뢰즈, 푸코, 데리다 등을 계승하고 있는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랑시에르, 장-뤽 낭시, 브뤼노 라투르, 베르나르 스티글러가 이번 기획의 주인공들이다. 바디우와 발리바르, 랑시에르가 알튀세르의 지적 유산을 비판적으로 극복함으로써 자신들의 이름을 사상의 성좌에 새겨 넣고 있다면, 낭시는 하이데거와 마르크스, 데리다, 블랑쇼의 유산을 독창적으로 종합하여 ‘무위(無爲)의 공동체’라는 독자적인 사상의 경지를 이룩했다. 라투르와 스티글러는 각각 현대과학기술의 발전을 추적하면서 그것이 인간의 삶의 형식을 어떻게 변형시키고 있는지, 또한 비자본주의적인 과학기술 발전의 길은 어떤 것인지 탐색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하버마스와 아펠 이후 독일 비판이론의 전통을 계승한 악셀 호네트와 한스 요아스가 이번 기획의 핵심 인물들이다. 그리고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와 비판이론을 독창적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사상의 지평을 열어가는 크리스토프 멩케도 주요한 인물로 소개될 것이다 아울러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책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화제를 모은 엘마 알트파터나 [히스테리]로 독창적인 여성 연구의 한 차원을 보여준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도 한겨레 독자들의 관심을 끌 것으로 기대한다.

이번 기획에서 제일 역점을 둔 것 중 하나는 이탈리아의 진보 지식인들에 대한 소개다.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걸출한 마르크스주의자를 배출한 이후 20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는 빼어난 진보 지식인들이 대거 출현하면서 세계 사상의 흐름이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이동하고 있다는 다소 때 이른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그들을 모두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이번 기획에서 다룰 안토니오 네그리, 조르조 아감벤, 지안니 바티모는 모두 이미 독자적인 사상의 영역을 개척한 21세기 사상의 선구자들이다.

영미권에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레이먼드 윌리엄스, 프레드릭 제임슨, 이매뉴얼 월러스틴 이후 진보 이론의 최전선에서 작업하는 지식인들이 이번 연재의 중추를 이룰 것이다. 이들 중에는 현대 문화연구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스튜어트 홀이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급진 민주주의의 제창자로 잘 알려진 샹탈 무페가 포함돼 있다. 또 탈근대 사회의 모순적인 삶의 양상들에 대한 섬세한 분석을 수행하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과 저 유명한 [젠더 트러블]의 저자 주디스 버틀러도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게 될 이론가들이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이매뉴얼 월러스틴 이후 가장 주목받는 세계체계론 연구자인 조바니 아리기와 생명공학의 비약적인 발전에 내재한 정치철학적 함의를 추적하고 있는 니콜라스 로즈도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지식인들이다. ‘정보시대 3부작’으로 잘 알려진 도시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스와 비판지리학의 대가 데이비드 하비의 작업에서도 현대 사회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지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거론한 인물들은 이른바 ‘북쪽’, 곧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활동하는 진보 지식인들이다. 하지만 에드워드 사이드 이래 우리가 깨닫게 되었듯이 21세기 진보사상이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숙제는 유럽 중심주의와 식민주의의 유산이다. 우리가 서양 바깥의 진보 지식인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다.

그 중에서 우리가 각별히 주목하는 것은 인도의 지식인들이다. ‘현존하는 인도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라나지트 구하는 소수의 전문가들 외에는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무지하고 가난한 대중을 지칭하는 서발턴(subaltern)에 관한 연구로 20세기 후반 진보 사상의 새로운 시야를 열어 놓은 역사학자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해체론에서 영감을 얻은 가야트리 스피박은 서발턴 연구에 비판적으로 동조하면서 탈식민주의 여성학이라는 새로운 장을 개척한 인물이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티야 센이 가진 것 없는 이들을 위해 제창한 ‘센코노믹스’도 21세기 진보 사상의 중요한 한 축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와 인접한 동아시아 진보 지식인들을 위한 자리도 마련돼 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이 국민국가와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대안을 구상하는지 살펴볼 것이며, 중국의 신좌파 지식인의 대표자인 왕후이가 제창하는 ‘아래로부터의’ 동아시아 연대에 관한 구상을 들을 기회도 갖게 될 것이다. 좀더 많은 인물을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해방 철학의 대가 엔리케 두셀은 우리에게 남아메리카 진보 사상의 진수를 보여줄 것이다.


또 다른 진보의 세기를 위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카지노 자본주의의 거대한 도박 노름에 민중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마치 시계를 거꾸로 돌려 30여년 뒤로 되돌아간 듯 공안통치의 칼날을 사정없이 휘두르는 정권의 기세에서는 광기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반동의 역풍이 거셀수록 진보의 나무는 조금씩 희망의 싹을 틔울 것이다. 우리가 한겨레 독자들과 더불어 새로운 진보의 세기가 시작될 수 있고 또 시작되어야 한다는 믿음과 의지의 씨앗을 뿌리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연재에 많은 독자들의 성원과 조언, 격려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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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1-06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발마스님이 연재하시는건가요? ^^ 토욜 신문 기다려지는데요?

balmas 2009-01-06 20:13   좋아요 0 | URL
ㅎㅎ 저는 그냥 디자인만 했을 뿐이고, 실제로 글을 쓰는 분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 선생님들입니다.^^

Ritournelle 2009-01-06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기대되는 연재입니다.
- 오타 하나 발견했어요. '마누엘 카스텔스' -> 마뉴엘 카스텔로 정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솔직히 카스텔은 별로 진보적인 학자라고 저는 생각을 하진 않지만 그래도 연재에 들어간다면...
- 아! 그리고 혹시 '한스 요아스'는 '한스 요나스'라고 보통 부르지 않나요? 혹시나 해서요...
-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슬라보예 지젝이 빠진 게 조금 아쉽습니다. 근데 지역별로 묶어서 보니까 지젝이 낄데가 조금 애매하기도 한것 같고요.

위의 학자들은 몇몇만 빼고는 거의 다 아는 사람들이군요. 어쨌든 좋은 연재 기대하겠습니다. ^^*

balmas 2009-01-07 02:38   좋아요 0 | URL
ㅎㅎ 예 감사합니다.
근데 "마뉴엘 카스텔"이 맞는 건가요? 저도 잘 모르지만, 동영상 같은 데서 보면 다들 "카스텔스"라고 하던데 왜 "카스텔"이라고 표기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프랑스에서 오래 활동했기 때문인 듯한데, 사실 스페인 출신이니까 "카스텔"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
"한스 요아스"와 "한스 요나스"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한스 요야스는 독일의 중견 철학자, 사회학자죠.
지젝이 빠져서 좀 서운한 분들이 많을 듯한데, 사실 아직 누구를 연재할지 모두 확정된 건 아닙니다. 연재를 해나가면서 다소 조정이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지젝은 얼마전에 한겨레에서 한번 논의가 된 적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일단 제외시켰는데, 섭섭하다는 분들이 많으면 나중에라도 추가를 해야죠.^^;

Mephistopheles 2009-01-06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챙겨봐야할 신문의 한자락을 발견했습니다..^^

balmas 2009-01-07 02:39   좋아요 0 | URL
열심히 봐주시면 고맙죠.^^

릴케 현상 2009-01-07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이 연재글들만 읽어도 대충 그림이 나온단 말이죠^^좋아라~ 맨날 신간 나올 때 사람들이 '이 책이 나오다니!' 하면서 기뻐하는 거 보면 기분 나빠서ㅋ 나오기도 전에 다 안단 말이지 쳇... 혹시 지성사 같은 책 추천하실 거 없나요? 읽고 나서 저도 '아 우리나라엔 왜 이런 책이 빨랑 안 나오는 거야' 할 수 있게요^^

balmas 2009-01-08 01:20   좋아요 0 | URL
ㅎㅎ 진보 사상의 흐름을 조감하는 데는 좀 도움이 되겠죠.^^

Kitty 2009-01-08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발마스님 너무 멋져요 ^^ 신문에 연재를 하시는군요 +_+
사정상 지면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인터넷으로나마 열심히 찾아볼께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화이팅입니다! ^^

balmas 2009-01-09 01:2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제가 연재하는 게 아닌데염.^^; 저는 그냥 첫회 총론만 하나 쓰고 그 다음부터는 전문가 선생님들이 한 사람씩 맡아서 소개하는 거랍니다.
암튼 고맙습니다, 키티님.
키티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올해 좋은 일 많으시길 바랍니다.^^

로드무비 2009-01-08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거이 없어서 조언은 못하더라도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겠습니다.^^

balmas 2009-01-09 01:2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조언하실 게 많잖아요. 문체도 그렇고 맞춤법도 그렇고, 아님 넘 어렵다라든가 등등.^^

나의왼발 2009-01-08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vs버틀러 요런 건 어떨까염?

balmas 2009-01-09 01:24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건 논쟁 시리즈에 어울릴 듯한 주제인데여.

김준열 2009-01-1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 연재 꼬박꼬박 챙겨 읽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balmas 2009-01-15 11:52   좋아요 0 | URL
예, 감사합니다.^^ 앞으로 서재에도 종종 들르세요.

NA 2009-01-15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배님. 1월 10일부터 시작하는 줄 알고 한겨레 인터넷에서 찾아 봤는데 좀처럼 찾질 못하겠더군요. 종이신문에만 나오는가 싶기도 하고, 날짜를 잘못 알았나 싶기도 하고 궁금해서 여기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balmas 2009-01-15 11:53   좋아요 0 | URL
ㅎㅎ 죄송합니다. 진작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 한겨레 사정으로 1주 연기가 된 것 같아요. 이번 주부터 연재가 시작될 겁니다.^^ 제가 전체 필자분들께 다시 한번 공지를 해야겠네요.
 

랑시에르가 한국에 왔다 돌아가고, 알튀세르의 [레닌과 철학] 교정 마쳐서 넘기고,

데리다의 [Marx & sons] 교정도 끝내고, 또 [인문논총]의 원고 교정도 다 넘겨주고 나서,  

한 10여일 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ㄲ ㅑ ~~~~~~

 

왜냐하면 이런저런 원고들, 잡다한 일들 다 끝내고

이제 오랫동안 끝마치려고 별렀던 번역 하나에만 전념할 수 있게 돼서죠.ㅋ

정말로 읽고 싶고 번역하고 싶은 책 번역에만 매진하니까 진도도 잘 나가고

내용도 재밌고 감동적(?)이어서 더 몰입이 되고

아무튼 너무너무 기분이 좋은 요즘입니다.

2009년 1월 4일까지 또 마침 긴 휴가를 보내고 있어서 더욱 더

마음 편히 번역을 즐기고 있답니다.

크리스마스도 신정도 행복하게(??) 번역과 함께 보낼 예정!  

1월 4일까지 초고를 완성하는 것이 목표!!

 

근데 무슨 책이냐구요? ㅎㅎ

에티엔 발리바르의 Nous citoyens d'Europe?(2001)이라는 책입니다.

유럽 공동체의 구성이라는 정세를 중심으로 해서, 세계화, 민족주의/인종주의,

이주와 난민, 인권의 정치, 주권, 국경, 공동체, 민주주의 등과 같이 현대 사회과학의

핵심 문제를 다루는, 정말정말 중요하고 좋은 책이랍니다. ㅎㅎㅎ 물론 제가 볼 때 ... ^^;;  

이 책을 읽은지는 벌써 6년 가량 됐고, 번역 계약 맺은지도 한 3년이 다 됐으니

이번에는 꼭 끝내려고 하는데, 마침 시기가 잘 맞아떨어진 듯. 야호~~~

 

여러분도 행복한 연말 보내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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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12-22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디 쉽게 번역해 주세요. ^^

balmas 2008-12-23 01:33   좋아요 0 | URL
ㅎㅎ 예, 최대한 알아보기 쉽게 하겠습니다.^^

후마니 2008-12-22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때까지는 꼭 주십시오 ... 흑~

balmas 2008-12-23 01:33   좋아요 0 | URL
예, 꼭 해드릴게요, 흑. ㅠ.ㅠ

마늘빵 2008-12-22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책을 하나 잡으셨군요! :) 아직 번역하신 책은 읽지 못했지만 작년 이맘때의 시사IN에서 출판관계자들로부터 받은 평가가 인상적이었죠. ^^

balmas 2008-12-23 01:34   좋아요 0 | URL
ㅎㅎ 새로운 책을 잡은 게 아니라, 오래 묵은 책입니다요. ^^;;;

Kitty 2008-12-23 0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 기분좋으신게 저절로 느껴지네요. ㅋㅋ
번역과 함께(?) 발마스님도 행복한 연말 되세요~~~ 건강 조심하시구요~ >_<

balmas 2008-12-24 01:3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예, 키티님도 크리스마스와 연말 즐겁게 보내세요.^^ 맛있는 거 많이 드시구요.

瑚璉 2008-12-23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면 저는 알아보기 쉽고, 정확하고, 재미있는 번역을 부탁드리겠습니다(^.^).

balmas 2008-12-24 01:3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저는 넘 재밌는데, 다른 분들은 과연 어떠실지? ^^;;

2008-12-25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8-12-26 00:05   좋아요 0 | URL
ㅎㅎ '행복'이 진짜 행복일까염? ^^;;;
그러세요. 그럼 한번 보기로 하죠. :-)

코스모폴리스 2008-12-25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이번에 정치론이 2종 번역되었던데, 번역상태가 어떨까요? 번역하신 분들 모두 비전공자이시던데;;;;

balmas 2008-12-26 00:05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두 종이나 번역돼 나왔네요. 스피노자가 인기가 있긴 한가 봅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시간이 별로 없어서 당장 검토해보긴 좀 어렵고 시간이 약간 걸릴 것 같네요. ㅎㅎ

2008-12-26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6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8-12-26 00:53   좋아요 0 | URL
예, 잘 받았습니다.^^

[해이] 2008-12-26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닌과 철학을 번역하고 계셨네요ㅋㅋㅋㅋ제가 괜히 발리바르 책 빨리 번역하시라고 닥달한 듯 흐흐흐

그럼 진태원선생님판 ISA를 읽을수 있다는! 행복합니다:D

balmas 2008-12-28 01:41   좋아요 0 | URL
ㅎㅎㅎ 번역하고 있었지.^^ 옆에서 누군가 닦달을 해야 일이 빨리 진행되겠지? ㅋ

류우 2008-12-30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반가운 소식이네요-^^
잘 지내셨어요?ㅎ

궁금한게 있는데 레닌과 철학 번역하신건 요번에 [레닌과 철학]글 하나만 번역하신건가요?ㅎ
이번에 나온 공저에 발마스님이 번역한 레닌과 철학이 실렸던데 그게 그 글인지?ㅎㅎㅎㅎㅎㅎ

레닌과 철학 번역하셨다는 말에 맘이 설렜는데ㅎㅎ
혹시나 책으로 나오는 거면 자기비판에 대하여도 혹시 실렸나!!!라고 기대했었다는..ㅠㅠ

balmas 2009-01-01 02:10   좋아요 0 | URL
이번에 [레닌과 미래의 혁명]에 실린 건 그 일부랍니다.^^ 내년에 {레닌과 철학}이라는 책이 단행본으로 그린비 출판사에서 따로 나올 겁니다.^^ 근데 아쉽게도 [자기비판의 요소들]은 실리지 않는답니다. 원래 그건 단행본으로 따로 출판되었거든요. ;;;

2009-01-01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에서 내는 {인문논총}에 실릴 글을 하나 올립니다. 

 국내에는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피에르 마슈레의 후기 문학론을 고찰하는 글입니다.

 {인문논총} 겨울호의 "문학과 철학"이라는 특집의 한 꼭지로 싣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올리려니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서동욱 선생님입니다. 원래 서 선생님이 편집을 맡은

다른 공동 저서에 마슈레의 문학론을 실어달라는 청탁을 오래전에 받고 상당히 긴 원고를 준비했는데,

제가 게으름과 능력 부족 때문에 결국 그 논문집에는 싣지 못하고 이렇게 그 일부만 떼어내서

다른 지면에 싣게 되니, 너무 죄송한 생각이 듭니다. 여러 차례 속을 썩여 드렸는데, 나중에

다른 기회에 빚을 갚을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보르헤스와 데리다에 관한 한 절을 더 추가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점도 아쉽네요.  

이것도 다른 기회에 독립된 글로 발표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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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마슈레와 문학적인 철학

 

I. 마슈레 문학론의 근본 물음―문학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작가든 비평가든 철학자든 또는 한 사람의 독자든 간에 문학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문학에 관한 피에르 마슈레의 성찰에는 항상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또는 (마슈레가 항상 이러한 본질주의적인 질문을 거부해왔으므로) 이 질문과 거의 같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문학적인 것la chose littéraire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깔려 있다. 󰡔문학 생산의 이론을 위하여󰡕나 「이데올로기 형식으로서 문학」 또는 「반영의 문제」 같은 마슈레의 초기 작업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그는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로 간주되겠지만, 문학에 관한 마슈레의 작업 전체를 조망해볼 때, 그의 작업의 본질적인 의미는 ‘문학적인 것’에 대한 탐구에서 찾아야 한다.

문학에 관한 마슈레의 작업은 크게 두 시기로 분류될 수 있다. 󰡔문학 생산󰡕[앞으로 마슈레의 주요 저술에 대해서는 본문 중에 다음과 같은 약어를 사용해서 표기하겠다. 󰡔문학 생산의 이론을 위하여󰡕 → 󰡔문학 생산󰡕; 「이데올로기 형식으로서 문학」 → 「이데올로기 형식」; 󰡔문학은 무엇에 관해 사고하는가?󰡕 → 󰡔문학 사고󰡕]을 중심으로 한 1960년대의 작업은 생산이라는 개념에 기초를 두고, 예술작품은 창조의 대상이 아니라 생산과정으로 간주해야 하며, 비평의 임무는 예술작품의 통일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작품 속의 공백과 간극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중심에 있던 리얼리즘론과 더불어 당대 프랑스 인문사회과학계를 풍미하던 구조주의 비평을 넘어서려는 시도였다. 그의 작업은 프랑스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1970년대 영미권의 문학비평에서는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테리 이글턴이나 프레드릭 제임슨 같이 70년대 이후 영미 문학비평의 중심에 자리 잡은 비평가들이 마슈레의 작업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또 그의 테제들에 응답하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문학론 및 문화론을 구축했다는 사실이 단적인 증거다.

따라서 우리는 마슈레가 1970년대에는 좀더 풍부하고 정치한 문학론을 전개하여 이번에는 ‘문학 생산의 이론을 위하여’가 아니라 ‘문학 생산의 이론’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저작을 출간했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지만, 사실 70년대에 마슈레는 문학이론에 관해 「이데올로기 형식」을 비롯해 3편의 글을 썼을 뿐이다. 이 시기는 일종의 과도기로, 초기에 제안한 생산으로서 문학이라는 관점을 이데올로기 형식으로서 문학이라는 관점으로 정정하려는 시기로 이해될 수 있다. 이제 문학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서 제안한 이데올로기론에 따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의 작용 속에서 사고된다. 이 경우 문학의 역할은 두 가지로 집약된다. 우선, 화해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에 대해 허구적인 통일성을 부여하여 이데올로기적으로 “상연mise en scène”함으로써, 이데올로기들을 이데올로기들로 지각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일이다. 둘째, 더 나아가 문학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기본 권리인 사상의 자유라는 이데올로기적 형식에 따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재생산하는 효과를 낳는다(Macherey & Balibar 1974 및 Macherey 1976 참조)

󰡔문학 생산󰡕과 「이데올로기 형식」 사이에는 강조점이나 이론적 엄밀성의 측면에서 다소의 차이가 존재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마슈레 후기 문학론의 시작을 알리는 󰡔문학 사고󰡕는 여러 측면에서 이전의 작업들과 차이를 보여준다. 오랜 침묵을 깨고 마슈레가 근 25년만에 발표한 이 책은 문학이론계의 새로운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이 책에는 이전의 저작들에서 다루었던 문제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오히려 문학적인 철학la philosophie littéraire이라는 새로운 주제가 전면에 등장한다. 문학적인 철학이라는 주제는 문학에 관한 마슈레의 이전 저술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당혹감을 안겨주었다[이 책에 대한 몇 편의 서평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Berk 1995; Pecora 1998 참조.].

따라서 󰡔문학 사고󰡕에서 전면에 등장하는 문학적인 철학이라는 주제는 후기 마슈레의 문학론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마슈레의 문학론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도 좀더 정확히 해명될 필요가 있는 주제다. 그동안 마슈레의 문학론은 국내에서도 얼마간 주목을 받았지만, 논의는 주로 1960-70년대의 작업에 국한되었다.[홍성호 1995a 4장; 홍성호 1995b; 조영철 2000 참조.] 사실 외국의 논의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마슈레의 초기 작업에 주로 관심이 한정되는 것은, 그만큼 마슈레의 초기 작업이 혁신적이었다는 점을 입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후기 작업이 갖는 독창성이나 의미가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영미권에서 마슈레의 최근 작업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은, 영미권에서 항상 마슈레와 함께 평가되고 때로는 마슈레를 대체하기도 하는 테리 이글턴이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전반적인 퇴조와 더불어 자신의 초기 작업과 단절하여 근대의 인간주의로 회귀했다는 사실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글턴의 작업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는 Sprinker 1987 및 Montag 2003 “Introduction” 참조.] 따라서 이 글에서 우리는 후기 마슈레의 문학론을 집약하고 있는 문학적인 철학 개념이 무엇인지, 그것이 함축하는 철학과 문학의 관계는 무엇인지(2절), 그리고 그것은 실제 비평에서는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3절), 문학적인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재생산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담고 있는지(4절)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마슈레 문학론의 전체적인 면모가 좀더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란다. 

II. 문학적인 철학이란 무엇인가?

1. 하나의 단절?

문학에 관한 성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마슈레에게 1980년대는 오랜 침묵과 암중모색의 시기라 부를 수 있다. 문학 생산 이론 및 이데올로기 형식으로서 문학에 관한 야심적인 작업으로 국제적인 이론가로 등장한 만큼, 그리고 그의 작업이 특히 영미권에서 활발한 토론과 비판의 대상이 된 만큼 좀더 본격적으로 문학에 관한 이론을 전개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마슈레는 80년대 내내 철학사 연구에만 몰두했을 뿐 문학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사실은 󰡔문학 사고󰡕의 2장(스탈 부인), 4장(레몽 크노), 5장(빅토르 위고), 8장(루이 페르디낭 셀린)은 80년대에 문학잡지나 논문집의 일부로 발표된 것들이다.]

그런데 마침내 이러한 오랜 침묵 다음에 1990년 출간된 󰡔문학 사고󰡕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난 저작이었다. 마슈레는 󰡔문학 사고󰡕에서 ‘문학적인 철학’이라는 새로운 화두, 이전의 작업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할 뿐, 책 어느 곳에서도 ‘문학 생산’이나 ‘이데올로기 형식’, ‘리얼리즘’이나 ‘반영’ 등에 관해 논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 책은 그의 문학론에 관심을 가진 모든 독자들, 적어도 󰡔문학 생산󰡕이나 「이데올로기 형식」에 친숙한 독자들을 놀라게 했으며, 때로는 실망감을 낳기도 했다.[Balibar 1993, 382-84쪽에서 이 책이 불러일으킨 반향의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일부 마슈레 연구자들은 문학 생산에 관한 초기의 작업과 󰡔문학 사고󰡕 사이에는 근본적인 단절이 존재한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가령 Goldstein 2004 참조.] 이런 이유로 인해 󰡔문학 사고󰡕에서 시작된 후기 마슈레의 문학론에 관한 이해와 평가는 그것이 그가 이전에 전개했던 작업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라는 질문과 분리될 수 없다. 마슈레는 󰡔문학 사고󰡕에서 일종의 전회를 시도한 것인가? 만약 어떤 식으로든 전회가 이루어졌다면, 이러한 전회가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또 그것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 마슈레는 무엇에서 무엇으로 전회를 한 셈인가?

마슈레가 󰡔문학 사고󰡕에서 탐구하는 주제는 문학적인 철학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문학적인 철학이라는 개념은 문학을 대상으로 삼는 철학(가령 이러저러한 작가들에 대한 철학자들의 작업)이나 문학적인 성향을 지닌 철학(오해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가령 니체나 후기 하이데거 또는 데리다의 철학 같은 경우)을 가리키는 흔한 명칭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상당히 엄밀한 규정을 지닌 개념이며, 마슈레는 여러 차례에 걸쳐 문학적인 철학의 외연과 내포를 좀더 명확하게 규정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특히 Macherey 1990의 11장; Macherey 1992a; 2000; 2003; 2004a; 2004b를 각각 참조.]

2. 문학: 철학의 ‘서푼짜리 오페라’

1) 대상으로서의 문학

문학적인 철학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이 무엇과 다른지, 그것이 어떤 것이 아닌지 살펴보는 것이 좋다. 문학적인 철학이라는 개념을 제창하면서 마슈레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문학을 대상으로 삼는 철학과의 혼동이다. 문학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문학을 철학적인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소재나 사례로 활용하는 것, 따라서 문학을 철학의 사법권 아래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문학에 관심을 보인 현대의 여러 철학자들에서 이러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Badiou 1998)나 필립 사보Philippe Sabot(Sabot 2002)의 논의가 도움이 된다. 이들은 각각 자신의 저작에서 문학과 관계를 맺는 몇 가지 철학적 유형을 제시한 적이 있다. 이들의 분류법을 따른다면, 문학을 대상으로 삼는 철학이 채택하는 도식은 “교훈적 도식”이다. 교훈적 도식은, 이름이 가리키듯이, 문학 작품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철학의 진리의 사례를 발견하려는 태도, 또는 문학 작품을 자신의 철학을 시험하고 적용하기 위한 하나의 사례로 간주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 같은 작품이 이러한 교훈적 도식을 채택하는 대표적 사례인데, 들뢰즈가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발견하는 “프루스트의 문제”는 문학적인 문제, 곧 소설의 구성이나 서사 장치들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프루스트의 세계관”, “프루스트 작품의 “철학적” 함의”들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기호와 의미, 본질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반면 마슈레(Macherey 2004b)와 필립 사보(Sabot 2002, pp. 80 이하)는 벵상 데콩브Vincent Descombes의 프루스트론(Proust. Philosophie du roman. Minuit, 1987)에서 들뢰즈와 달리, 프루스트의 문학적 질서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소설 그 자체가 갖는 철학적 고유성을 추구하려는 태도의 전범을 발견한다.]

이와는 반대로, 역시 바디우와 사보의 용어법에 따른다면, “해석학적 도식” 내지 “낭만주의적 도식”은 교훈적 도식과 달리 문학을 진리의 계시의 본질적인 장소로 간주한다. “예술만이 진리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철학이 단지 지시할 수밖에 없는 것을 성취한다.”(Badiou 1998, p. 12―강조는 바디우) 이렇게 본다면 이러한 도식은 예술의 자율성, 문학의 고유성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2) 진리로서의 문학

하지만 마슈레가 제창하는 문학적 철학은, 문학을 철학의 진리로 간주하는 관점, 곧 문학을 포함한 미학이야말로 로고스를 관장하는 철학의 사법권에 의해 통제되고 억압된 진리, 감성적 진리이자 개별적인 것들의 진리를 드러내고 복권시켜주는 탁월한 장소라고 주장하는 관점과도 거리를 둔다.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실추와 더불어 20세기 후반에 철학 및 인문학 분야에서 정치의 자리를 대체한 각종의 미학적 담론들(곧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통칭되는)이 후자의 관점의 뚜렷한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마슈레는 문학에 대한 철학의 우위를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에 대한 문학의 우위나 이성에 대한 감성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 역시 사실은 진부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근대성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이성의 영역과 감성의 영역, 지식의 영역과 취미의 영역을 분리하고 철학과 문학/미학이 지닌 각각의 자율성을 구별하는 데 있다(Macherey 1990 1장 참조). 그런데 위의 두 가지 주장은 철학이나 문학 각자의 우위를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대립적이지만, 철학과 문학의 분리 및 외재적 대립을 전제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며, 따라서 200여년 전에 설립된 역사적 기준을 교조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한 걸음 더 나아가 마슈레는 미학이라는 범주 자체를 불신하고 있다. 이는 “미학의 지평에서는 항상 ... 종교, 절대적인 가치들에 대한 환기”(Macherey 1992a 참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가끔 장-뤽 낭시와 필립 라쿠-라바르트가 펴낸 󰡔문학적 절대L'Absolu littéraire󰡕(Seuil, 1978)를 언급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여기서 마슈레가 종교로서, 절대적 가치로서 미학에 관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바로 독일 낭만주의다.] 이런 의미에서 해석학적 도식이나 낭만주의적 도식은 교훈적 도식과 거울 유희에 빠져 있을 뿐, 문학과 철학의 관계를 파악하는 새로운 관점이라고 보기 어렵다.

3) 문학과 철학의 뒤섞임으로서 문학적인 철학

이에 반해 문학적인 철학은 “문학과 철학의 뒤섞임”을 추구한다. 곧 문학적인 철학은 진리와 지식의 영역의 우위를 주장하지도 않고 감성과 취미의 영역의 우위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문학적인 철학은, 문학은 문학에 고유한 스타일, 다시 말해 허구적인 이야기와 인물들의 설정, 이미지와 문채, 상징들의 구사 등을 통해 철학이 실천하지 못하는 사변적인 인식 활동을 수행하며, 문학에 고유한 이러한 사변적인 역량은 철학에게 새로운 자극과 통찰, 동력을 제공해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처럼 그가 문학에서 주목하는 것이 문학의 사변적인 활동, 사변적인 역량이라면, 이는 다시 문학을 철학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닌가? 마슈레는 이러한 의문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우선 문학이 수행하는 사변적인 인식은, 철학처럼 개념과 논증을 동원한 합리적인 논변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고유한 장치들, 곧 이야기나 이미지, 상징들을 통해 전개되며, 이러한 장치와 분리되어 실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이 자신의 고유한 이야기, 은유 및 이미지들을 통해 드러내는 사변적 진리는 문학적 형식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잠재적인 내용이 아니며, 문학적 글쓰기의 고유한 효과인 것이다.[이는 문학적인 철학에 관한 마슈레의 관점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부분적으로 준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문학적 철학을 문학적 형식 내에서 찾아야지, 이러한 형식이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배후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 따라서 [문학이 산출하는―인용자] 이러한 사고는, 마치 분리된 언표들의 체계의 매개를 통해 재구성될 수 있는 이질적인 사물인 것처럼, 문학 형식으로부터 추출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Macherey 1990, p. 197)

더 나아가 문학은 이러한 사변적 역량을 통해 철학 자신이 철학의 영역 내에서 수행할 수 없는 활동을 수행한다는 점에서도 철학에 종속되지 않으며 오히려 철학에게 새로운 전망을 열어준다. 어떤 활동이 문제인가? 그것은 바로 “모든 사상 체계를 내파하는”(Macherey 1990, p. 198) 문학의 진정한 철학적 효과로서 문학의 활동이다. 문학은 엄밀하게 질서화된 연역적인 논증 구조에 따라 전개되지 않고 “이미지들과 서사 및 언표행위 도식들의 자유로운 유통”을 통해 유희하듯이 자유롭게 진행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자족적인 폐쇄된 사상의 체계” 내에 내적인 거리를 도입하게 된다. 곧 문학은 사상의 체계, 철학의 체계에 대해 일종의 “소격 효과”(Macherey 1990, p. 199)를 생산한다. 문학이 이처럼 철학에 대해 소격 효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은 모든 문학 텍스트가 자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언어에 대한 언어의 비결속”, 곧 “우리가 말하는 것을, 우리가 그것[우리가 말하는 것―인용자]에 대해 말하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바로부터 끊임없이 분할하는 간극”(Macherey 1990, p. 199)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문학적 철학의 이론과 마슈레 초기 문학론 사이의 공통점 및 차이점을 이해할 수 있다. 초기 작업부터 마슈레는 줄곧 문학 텍스트 안에 존재하는 공백 내지 간극을 강조해왔다. 문학 생산 이론의 문제설정에서는 이러한 공백 내지 간극이야말로 문학 텍스트에게 사회적 현실로 환원될 수 없는 자율성 내지 물질성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문학 텍스트가 폐쇄된 총체인 문학 작품과 달리 사회적 현실을 (“깨어진 거울”로서) 반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특히 󰡔문학 생산󰡕 19장 참조). 하지만 이러한 문학 텍스트의 자율성은 사회적 현실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있는 과학이나 철학에 대해 종속적인 활동이었으며, 따라서 문학 텍스트의 자율성의 물질적 징표인 공백이나 간극 역시 부차적인 의미만 지니고 있었다. 이에 반해 󰡔문학 사고󰡕는 “모든 문학 텍스트”가 대상으로 삼는 이러한 간극은 “모든 사변이 기초를 두고 있는”(Macherey 1990, p. 199)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문학 사고󰡕에서는 더 이상 문학이 과학이나 철학에 비해 부차적이거나 종속적인 지위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철학의 맹목점을 철학 자신에게 드러내주는 역할을 맡고 있음을 뜻한다.[이 점과 관련하여 필립 사보의 주장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앞서 본 것처럼 사보는 “해석학적 도식”의 대표자로 데리다를 지적하고 있다. Sabot 2002, p. 20 이하. 그가 보기에 데리다는 문학을 진리가 발현되는 근원적인 장소로 간주하고 그리하여 철학을 문학으로 환원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런 류의 주장은 특히 하버마스나 분석철학자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데리다 비판과 성격상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데리다가 마슈레와 마찬가지로 문학을 진리가 드러나는 특권적인 장소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학 자신에게 철학의 맹목(그것도 필연적인)을 드러내는 것으로 본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블랑쇼의 문학론을 부르디외의 문학사회학보다 훨씬 더 문학적인 철학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하는 마슈레의 논의는 좀더 유연하고 섬세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Macherey 2003 참조.] 다음과 같은 마슈레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문학은 말하자면 철학의 󰡔서푼짜리 오페라󰡕다.”(Macherey 1990, p. 199)

III. 문학의 고유한 사고 역량: 푸코의 루셀론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문학 사고󰡕에서 가장 표본적인 장은 바로 레몽 루셀에 관한 푸코의 저작을 다루는 10장이다. 스탈 부인이든 조르주 상드든, 아니면 빅토르 위고나 바타이유, 사드든 간에, 이 책에서 다루는 모든 작가들이 문학과 철학의 조우를 경험했고 그 경험에 대해 남긴 기록이 바로 그들의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푸코는 더 나아가 자신의 저작 전체에 걸쳐 문학과 함께 철학적인 사고를 했으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문학적인 철학을 가장 표본적으로 보여주는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1. 왜 루셀인가?

푸코의 여러 저작들 가운데서도 루셀에 관한 저작, 매우 주변적이고 부차적인 작품처럼 보이는 저작이 특별한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루셀의 작품은 언어의 유희 실험을 통해 언어의 재현성의 한계를 드러내면서도 이를 문학에 외재적인 철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문학 고유의 장 속에서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만 문학은 철학적 진리를 예시하기 위한 수단이나 사례의 지위로 격하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사변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푸코의 루셀론은 이를 빼어나게 보여준다.

둘째, 루셀에 관한 푸코의 논의는 푸코 자신의 철학적 여정에서 하나의 단절 내지 새로운 지향을 제시해주었기 때문이다.[Macherey 1990, p. 180; Macherey 1992b, p. 11 이하 참조.] 푸코의 루셀론은 1963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시기는 󰡔광기의 역사󰡕가 발표된지 2년 뒤이며 󰡔말과 사물󰡕이 출간되기 3년 전이다. 전자가 “무엇이 정신 질환의 제도화에 대해 형식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는가?”(Macherey 1990, p. 180)라는 질문을 화두로 삼고 이를 (비)이성의 역사와 연결하여 다루고 있다면, 후자는 “이성의 사실을 그 자체로 고찰하면서, 그것을 그 역사적 가능성의 조건들과 관련짓고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후자의 핵심 질문이 나온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이성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바라보도록 인도해왔는가?””(같은 책, 같은 곳) 이런 관점에서 보면 루셀이라는 광인의 언어유희에 관한 고찰은 우리의 이성 안에 거주하는 비합리적이고 기괴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비이성의 역사에서 이성의 역사로 이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2. 루셀의 세 가지 모습

마슈레는 푸코의 책에서 세 가지의 루셀의 모습을 구별한다. 우선 루셀의 의사였던 정신의학자 피에르 자네Pierre Janet가 본 루셀의 모습이 있다. 그에게 루셀은 “가련한 어린 환자pauvre petit malade”(Foucault 1992, p. 195)에 불과했으며, 루셀이 쓴 작품들은 억제된 성적 욕망이 변장된 형식으로 표출된 것, 곧 나중에 정신분석에서 “승화”라는 개념으로 이론화되는 것들로 간주된다. 푸코식으로 말하면, 자네의 평가는, 광인에게는 작업 또는 작품이 존재할 수 없으며, 광기는 곧 “작품의 부재”와 다르지 않다고 간주하는 근대 이성의 전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푸코의 루셀론은 󰡔광기의 역사󰡕의 속편이자 문학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초현실주의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앙드레 브르통의 독해가 있다. 그는 루셀을 “마법사enchanteur”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 루셀은 언어의 연금술사로서 그의 작품은 비밀스러운 교파의 일원만이 풀어낼 수 있는 비밀과 암호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입문initiation”의 과정이 요구된다. 이러한 입문은 합리적인 언어의 법칙들 속에 가려져 있는 언어의 비밀스러운 세계로의 입문이며, 루셀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드러내 보여준다. 하지만 푸코는 이러한 브르통 식의 독해는 루셀의 작품을 어떤 비밀을 품고 있는 신비의 경전으로 간주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는 결국 그것을 또 다른 형태로 단순화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브르통은 또 하나의 “주석가”에 불과한 셈이다.

이들에 비하면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는 개인적으로만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에 대해서도 루셀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는 레리스 자신이 루셀과 유사한 작업을 전개했던 한 명의 작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레리스가 보기에 루셀의 글쓰기는 일상의 언어를 새로운 현실로 전환시키는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으며, 그의 글쓰기 자체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놀이의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나 의미, 현실 자체 같은) 다른 외재적 준거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레리스에게는 브르통 식의 비의적인 관점이나 아니면 숨은 의미나 진리를 찾으려는 해석학적 관점[그는 푸코 역시 이 범주에 귀속시킨다. Macherey 1992b, p. XX 주 23)에 인용된 레리스의 대담 참조.]은 모두 루셀의 참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는 단어들을 가지고 유희했던 “순진무구한innocent” 작가였으며, 따라서 푸코의 해석 역시 루셀의 이런 모습을 제대로 표현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푸코가 보기에 레리스의 관점, 레리스 자신의 글쓰기의 경험은 루셀의 경험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대립하면서 동시에 근접한”(Foucault 1992, p. 28) 것, 곧 “다른 규칙을 지닌 같은 놀이”였다. 다시 말해 레리스가 언어들의 유희를 통해 “절대적인 기억”을 추구하려고 했던 한 사람의 “작가”였다면, 루셀은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절대적인 기억, “진리의 유동적인 충만함”에서 자신을 망각하려 하고, 자신을 사라지게 하려고 했던 사람, 거기에서 “회복 불가능한 공백, 엄격한 존재의 부재”를 발견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다(같은 책, p. 29). 레리스가 작가의 고독 속에서 작가로서 “자기 자신을 재인지”하고 재발견했다면, 루셀은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의 삶을 유희한 셈이다. 팔레르모의 호텔에서의 자살은 그러한 유희의 정점이다.

3. 루셀의 독창성

루셀의 저작 중 가장 잘 알려진 책은 󰡔나는 내 책들 중 몇 권을 어떻게 썼나Comment j'ai écrit certain de mes livres󰡕(1935)라는 유고작이다. 그는 여기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장난들로 간주된 그의 다른 저술에 담긴 언어 유희의 수수께끼를 해명하고 있다. 가령 다음 두 개의 프랑스어 구문을 보자.

1. Les lettres du blanc sur les bandes du vieux billard

2. Les lettres du blanc sur les bandes du vieux pillard

이 두 개의 구문은 발음상으로 구별되지 않으며 기표상으로도 단 한 개의 알파벳에서만 차이가 있다. 곧 첫 번째 구문의 맨 마지막 단어인 “billard”의 “b”가 두 번째 구문에서는 “pillard”의 “p”로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처럼 사소한 알파벳 하나의 변화는 전혀 다른 의미를 산출한다. 첫 번째 구문은 “낡은 당구대의 쿠션 위에 있는 흰 색 글자들”을 뜻하는 반면, 두 번째 구문은 “어떤 백인이 늙은 도적떼에 관해 쓴 편지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루셀의 작품은 이처럼 사소하고 우연적인 기표들의 변화에서 생겨난 간극(위의 경우에는 첫 번째 구문과 두 번째 구문 사이의 의미상의 차이)의 틈을 서사의 공간으로 활용한다. 곧 그는 첫 번째 구문에서 시작해서 두 번째 구문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런 식으로 해서 단어들의 우발적인 사건들[곧 “billard”에서 “pillard”로의 변화―인용자]은 결국 상세한 실제 이야기와 배경, 인물들을 생산한다. 요컨대 단어들의 우발적인 사건들은, 우리가 “이야기”라고 부르는 것, 곧 단어들이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공간을 생산한다.”(Macherey 1990, p. 181)

루셀의 작업은 언어에 대한 우리의 자생적 관점을 전도시킨다. 언어 사용자로서 우리는 암묵적으로, 우리가 말하고 기록하는 언어는 현실을 재생산하고 재현함으로써 현실을 표현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의 밑바탕에는 언어를 이루는 단어들의 관계와 현실을 이루는 사물들의 관계 사이에는, 또는 언어의 질서와 현실의 질서 사이에는 모종의 상응 관계가 존재한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반면 루셀은 언어유희를 통해 기표의 질서와 기의의 질서 사이에는 자연적인 일치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언어와 사물 사이에도 역시 자연적인 상응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이미 루셀 이전에 다른 사상가들의 작업에서도 볼 수 있으며(가령 농담에 관한 프로이트의 작업이나 소쉬르의 구조언어학 등이 한 사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를 발견하기 위해 굳이 루셀의 텍스트에 의지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루셀의 작업, 그의 언어유희의 진정한 독창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루셀의 노력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사실이 항상 이렇다면 어쩔 것인가? 우리가 항상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말하기 위해 이야기를 한다면 어쩔 것인가? 또는 오히려 ‘무언가를 말하기’는 현실 속에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의미의 재생산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작용이라면 어쩔 것인가? 우리가 자발적으로 믿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가 말하는 사물들이 단지 사물들이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물들이 [...] 재현되어야 할 대상들과 다른 어떤 것이라면, 실재의 요소들 내지는 실존의 형상들―이것들을 지시할 때 언어의 기호들이 항대 항으로 적용되어야 하는―과 다른 어떤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Macherey 1990, p. 183)

마슈레가 보기에 루셀의 작업과 초현실주의의 관점, 예컨대 앙드레 브르통의 관점을 구별시켜주는 것은 두 가지 점이다. 첫째, 브르통과 달리 루셀의 작업은 정상적인 언어 작용에 의해 은폐되고 억압되어 있는 어떤 숨겨진 내용 또는 비합리적인 상상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루셀은 모든 의미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도달하려고 하며, 따라서 “의미의 매개와 독립하여 사물들과 단어들이 소통하는 지점에 도달하려고”(Macherey 1990, p. 186) 한다. 둘째, 브르통이 자동기술을 통해, 의식적인 이성이 언어에 부과한 통제 규칙들에 의해 억압된 무의식적인 사고를 드러내려고 하는 데 반해, 루셀은 오히려 언어의 작동을 지배하는 제약들을 강화함으로써 언어가 “내용이나 의미와 맺고 있는 원초적인 관계의 말소에 기초를 둔 새로운 규칙들을 개발”(같은 책, p. 186)하려고 한다. 요컨대 브르통을 비롯한 초현실주의자들(아마도 이들은 문학에서 사변적 진리를 발견하려는 철학자들에 대한 환유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이 일상적이고 합리적인 언어 작용에 의해 억압된 무의식적인 진리 내용을 드러내려고 했다면, 루셀은 언어에 본래적인 공백, 언어에 유령처럼 깃들어 있는 무의미를 그 자체로 보여주려고 한 셈이다.

그렇다면 루셀의 언어유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결국 언어의 질서, 언어가 구축하는 의미의 세계, 또 더 나아가 언어가 재현하고 재생산한다고 가정되어 있는 세계의 질서 그 자체가 순수히 우연적인 사건들의 차원에 기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언어 이전에는 의미의 부재라는 이 무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만약 말하기 이전에는 이러한 무만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아마도 언어가 그것이 응답하는 ‘무rien’와 다른 ‘아무것rien’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Macherey 1990, p. 187) 이를 빼어나게 표현해주고 있는 푸코의 다음 대목은 충분히 인용해볼 가치가 있다. “우연 속에서 본질적인 것은 단어들을 통해서 말하지 않으며, 구불구불한 단어들의 굴곡 속에서 간파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언어의 분출, 언어의 갑작스러운 현존이다. 그것은 단어들이 돌발하는 저장고이며, 언어 자신에 대한 언어의 절대적인 물러섬이고 언어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는 그것이다. 그것은 별이 빛나는 밤도, 불빛 속에서의 수면도, 졸음에 겨운 밤샘veille도 아니다. 그것은 깨어 있음éveil의 환원 불가능한 경계다. 그것은, 말하는 순간에 단어들은 이미 거기에 존재하지만, 말하기 이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깨어 있음의 이면에는 밤샘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이 틀 무렵 밤은 우리 앞에 있으며, 우리가 헤쳐 나가면서 하루를 시작해야 할 끈질긴 파편들로 이미 부서진 채 우리 앞에 있다.”(Foucault 1992, p. 54)

4. 언어와 죽음

그렇다면 푸코 루셀론의 궁극적인 전언은 결국 의미론적ㆍ존재론적인 것인가? 마슈레는 오히려 여기서 윤리적인 관점을 발견한다. 만약 루셀의 문학이 언어 속에 도입하는 자유로운 언어유희를 통해, 언어는 이미 존재하는 견고한 세계의 질서를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빈틈없이 조밀하게 짜여 있는 합리적인 의미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면, 요컨대 언어의 기원에는 무가 존재할 뿐이라는 점이 밝혀진다면,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무, 이러한 공백이 상대적인 것인지 아니면 절대적인지 결정하는 일이다. 이러한 공백은 단지 “언어에 대한 사물들의 공백”일 뿐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물들의 공백”인가? 당연한 일이겠지만 푸코는 루셀의 작품들에서 절대적인 공백을 발견하는데, 이때 절대적인 공백이란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한다. “언어는 자신의 공허함을 감추기 위해 이러한 공백을 메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루셀과 같이 우리가 이러한 운동을 전도시키면, 우리는 언어는 오직 이러한 공백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언어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사물들, 곧 존재하지 않는 그대로의 사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Macherey 1990, p. 188)

이러한 발견이 궁극적으로 윤리적인 의미를 지닌다면, 그것은 여기서 언어가 죽음과 맺는 본질적인 관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푸코에 따르면 “루셀은 언어 유희들을 발명했는데, 이 언어유희들은 언어유희의 과정 바깥에서는 모든 언어가 죽음과 맺고 있는 가시적이고 심원한 관계, 모든 언어가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다시 관계를 맺게 되고, 무한정하게 이를 되풀이하게 되는 그러한 관계와 다른 어떤 비밀도 간직하고 있지 않다.”(Foucault 1992, p. 45; Macherey 1990, p. 188-189에서 재인용) 그리고 루셀 자신은 언어가 죽음과 맺고 있는 이 본질적인 관계 자체를 자신의 삶으로 살았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루셀의 자살은 문학적인 행위였으며, 그가 개인적으로 언어와 맺고 있는 연계고리와 분리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IV. 재생산으로서의 문학

잘 알려져 있다시피 초기 마슈레의 문학론은 ‘생산으로서의 문학’이라는 표어로 집약될 수 있다. 반면 문학적인 철학의 문제설정에서는 오히려 재생산으로서의 문학이라는 화두가 전면에 등장한다. 문학을 생산으로 보는 것과 재생산으로 간주하는 것 사이의 차이점은 정확히 어떤 것인가? 양자 사이에는 단절이라고 간주할 만한 근원적인 차이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상이한 스타일과 강조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에는 심원한 연속성과 더불어 문제의식의 확장이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답하려면 우선 마슈레의 초기 작업과 후기 작업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관해 살펴보는 것이 좋다. 초기 문학론과 후기 문학론 사이의 차이점에 관한 마슈레의 자기 평가는 두 가지 논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문학을 과학적 인식의 대상으로 보는 것과 주체성으로 보는 것의 차이이며, 또 하나는 문학을 생산으로 간주하는 것과 재생산으로 간주하는 것 사이의 차이다.

1. 대상으로서의 문학 대 주체성으로서의 문학

󰡔문학 사고󰡕가 출간된 다음에 이루어진 한 대담에서 마슈레는 이 책을 저술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문학에 대한 상이한 과학적 연구들과 짝을 이루는 문학의 철학의 도움을 받아, 철학이 문학을 좀더 잘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철학은 문학을 다른 여러 대상들 중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대신, 자신의 인식의 기획을 공통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문학과 함께 여정의 끝까지 나아가려고 시도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학을 인식하기보다는 문학과 함께 인식하기 위해서 말입니다.”(Macherey 1992a)

문학 인식하는 것과 문학과 함께 인식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전자는 문학을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함을 의미하며, 따라서 문학이론이라는 관념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다시 문학을 그것에 외재적인 어떤 담론의 질서에 포섭하거나 종속시키는 것을 함축한다. 마슈레는 󰡔문학 생산󰡕에서 종래의 비평과 구별되는 유물론적 비평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비평을 이미 작품 속에 존재하는 작품의 “잠재적 의미”, 또는 작품의 진리를 발견하고 해석해내는 “기예art”라고 믿는 전통 비평가들과 달리 마슈레는 비평은 기예가 아니라 “특정한 형태의 지식”이며, 이는 다른 모든 지식과 마찬가지로 “대상”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비평은 작품 안에 차이를 만들어내고, 작품을 그것 자신과 다른 것으로 나타나게 만든다.”(󰡔문학 생산󰡕 p. 15―강조는 마슈레) 따라서 문학을 인식하기란 마슈레가 󰡔문학 생산󰡕에서 강조하고 또 추구했던 과학으로서의 문학비평의 태도임을 알 수 있다.

반면 문학과 함께 인식하기란, 문학에 대해 다른 어떤 것의 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또한 다른 담론들에 포섭거나 종속될 수 없는 독자성을 긍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마슈레는 문학의 고유한 독자성을 사람들이 보통 철학이나 과학과 구분되는 문학의 특징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문학의 감성적 측면이나 허구성에서 찾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문학을 인식의 형식들로 간주한다. 문학의 고유성은 철학의 사변적 인식이나 과학의 객관적 인식과 구별되는 문학이 지닌 종별적인 인식 형식들에 존재하는 것이다. 마슈레는 더 나아가 이를 문학에 고유한 주체성이라고 부른다. 대담 내용을 좀더 인용해보자.  

클로드 아메: 선생님이 사유에 대해 말할 때 이는 주체를 감추었던 지난 수십년 간의 동향과 관련하여 볼 때 주체의 복권을 낳게 되는 건가요?

피에르 마슈레: 주체보다는 주체성이라고 말합시다. 주체는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 속에서 정립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체 없는 주체성, 어쨌든 어떤 것(법, 언어, 가치들, 사유 등)의 주체로서 자신을 긍정하는 주체라는 의미에서의 어떤 주체가 없는 주체성 역시 존재합니다. 사유는 주체 없는 것, 어떤 주체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사유를 주체성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체성은 한계들의 경험이며, 이는 완전히 익명적일 수 있습니다. 주체성은 우리의 모든 행위 및 우리의 모든 작업을 작동시키는 공백들, 균열들, 비어 있는 것들 속에 거주하며 우리의 행위 및 작업이 결정적으로 사회화되는 것을 금합니다.(Macherey 1992a)  

마슈레 자신이 강조하듯이 문학에 대해 “공백들, 균열들, 비어 있는 것들”을 주장하는 것은 초기 마슈레의 문학론과 부합하는 것이다. {문학 생산}에서 마슈레의 기본 주장 가운데 하나는 문학은 깨어진 거울 속에 이데올로기를 투영함으로써 이데올로기의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리얼리즘의 주장과 달리 문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또는 전형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재현성 내에 공백을 만들어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문학 생산}에서와 달리 마슈레는 이러한 균열과 공백 등을 문학 작품의 주체성의 거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문학 작품, 문학에 대해 주체성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자칫 {문학 생산} 이전의 전통적인 비평으로 회귀하는 듯한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성은 문학 텍스트를 관류하는 익명적인 힘, 역량이다. 어떤 정해진 기준이나 모델에 따라 확정된 동일성을 지닌 문학 텍스트들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확고부동한 동일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 내에서 공백과 균열을 드러내고, 그리하여 그것이 지닌 총체성을 해체하는 힘이다. 따라서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이 전통 비평으로의 회귀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며, 문학 작품을 어떤 주체의 창조물로 인식하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해체와 균열, 예견 불가능한 변용의 힘이다.  

   

2. 생산으로서의 문학 대 재생산으로서의 문학 
 

하지만 그 렇다 해도 그러한 힘을 “주체성”이라고 부를 이유가 있을까? 그것은 불필요한 개념의 남용이 아닌가? 바로 여기에 문학을 재생산으로 간주하는 마슈레의 핵심 논점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 마슈레는 대담의 한 대목에서 󰡔문학 생산󰡕과 󰡔문학 사고󰡕 사이의 차이를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차이로 규정하고 있다.
 

클로드 아메: 여기서 문제가 되는 해석학에 관하여 우리는 하이데거의 노선을 따르는 가다머 식의 해석학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해석학은 진리의 핵심을 발견하기 위해서 텍스트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강제하지 않은 가운데 텍스트가 스스로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 텍스트의 경험을 만들어내려고 하지요.

피에르 마슈레: 하지만 텍스트가 스스로 말하도록 하기는 어떤 작업, 곧 텍스트를 다시 쓰기를 댓가로 해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아마도 순수한 수용일 최초의 순결한 독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읽는 것은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환하는transformer 것입니다. 저는 제가 첫 번째 책을 다시 쓰게 된다면 󰡔문학재생산의 이론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붙였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텍스트 자체는 그 연속적인 재생산을 통해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최초의 독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최초의 글쓰기 역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텍스트는 그 자체로 작동하고 있는 한에서만 실재성을 지닐 뿐이며, 이는 그것이 다른 텍스트들과 맺는 관계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또한 이 때문에 문학 생산도 존재하는 것인데, 이는 현실 그 자체의 생산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질적인 문제는 텍스트와 함께 또는 텍스트 속에 주어져 있는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텍스트가 산출할 수 있는 극단에 이르기까지 의미가 자기 자신을 배가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과정의 문제입니다.(Macherey 1992a) 

이 대목은 문학적인 철학에 대한, 문학적인 것에 대한 마슈레의 생각에 관해 매우 풍부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마슈레의 초기 작업에서 문학이 하나의 이데올로기 형식으로 간주되었을 때 재생산은 사회적 현실, 특히 그 물질적 하부구조의 재생산을 의미했으며, 다른 이데올로기 형식들과 마찬가지로 문학은 이러한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Macherey & Balibar 1974 참조). 반면 이 대담에서 문학적인 것은 다른 어떤 것의 재생산을 위한 수단 내지 형식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재생산으로, 그 활동 자체, 그 생산 자체가 본원적으로 재생산인 것으로 나타나며, 또 바로 이 점에서 문학적인 것은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자신의 고유성을 지니는 것으로 드러난다.

문학의 생산 자체가 본원적으로 재생산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그것은 불변적인 진리와 의미의 원천인 작품을 수용하는 최초의 독서, 다른 이질적인 관점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독서란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 이유는 마슈레가 지적하듯 독서는 “전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독서는 스스로 아무런 적극적 활동을 하지 않는 순수한 수동적인 작용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적극적인 활동, 이런저런 효과들을 산출하는 활동이다. 이러한 효과들을 통해 독서는 독서 주체만이 아니라 작품 자체 역시 변용하고 전환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올바른 독서와 그릇된 독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올바른 독서와 그릇된 독서는 지나치게 경직되고 위계적인 구분법이다. 독서는 유일한 진리에 대한 추구, 진리에 대한 단 하나의 인식의 추구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독서가 확정적이고 결정적인 진리에 대한 추구라면, 그리고 유일하게 참된 독서는 바로 이러한 진리의 발견에 있다면, 정의상 독서는 유한한 것이자 종말론적인 것이며, 진리를 발견하는 참된 독서는 독서의 중단, 독서의 소멸과 다르지 않다. 독서의 목표로서 진리가 발견된 이상 더 이상 독서는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참된 독서는 독서의 부정인 셈이다. 이 때문에 마슈레는 오히려 독서를 음악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또는 희곡 작품의 상연과 비교한다.[그렇다면 아무 독서나 다 성립한다는 뜻일까? 모든 독서는 다 좋은 독서, 참된 독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독서는 “참된 독서lecture vrai”라기보다는 “진짜 독서vrai lecture”, 곧 텍스트와 독자 자신에게 어떤 효과를 산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독서가 텍스트 및 독자들에게 똑같은 정도의 효과를 산출하지는 않으며, 똑같은 강도와 똑같은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보여주었듯이 어떤 독서들은 텍스트 자체의 해체를 낳는다(또는 텍스트의 자기 해체를 드러내주기도 한다).]

둘째, 따라서 문학 작품 자체는 그 해석이나 수용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산출한 효과들, 영향들을 통해서만, 곧 그 재생산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 작품이 그 재생산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이전에 재생산되는 어떤 것, 재생산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서의 문학 작품이 먼저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닐까? 따라서 문학 작품의 생산은 그것의 재생산 이전에 독자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문학 작품이 재생산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좀더 강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문학 작품은 자신이 산출하는 효과들과 변용들 이전에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문학 작품은 효과들 및 변용들의 생산을 통해서만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문학 작품 또는 텍스트 일반―심지어 사물 일반, 존재자 일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은 자기 내부에 원초적인 간극, 자기 자신과의 근원적인 괴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간극과 괴리야말로 텍스트가 생산되고 재생산될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다.

󰡔광기의 역사󰡕 재판에 붙인 푸코의 짧은 「서문」은 이러한 생각을 매우 탁월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매우 사소한 사건이고 다루기 쉬운 하찮은 대상으로 책이 한 권 나온 것일 뿐이다. 이 책도 끊임없는 반복의 궤도 속에 놓이기 마련이다. 책 주위에서, 그리고 책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책의 분신들이 득실거리기 시작한다. 책이 읽혀질 때마다 만져지지 않는 독특한 신체가 한 순간 책에 부여된다. 책 자체에 관한 단장들이 떠돌아다닌다. 서문이라는, 책 자체의 이 첫 번째 모사물, 앞으로 책으로 인해 형성될지 모르는 모든 모사물의 기준이 되기를 바라는 이 모사물로 인해 책이 둘로 분열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토록 많은 대상-사건들 사이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이 대상-사건이 다시 베껴지고 파편화되고 되풀이되고 모사되고 분열되다가, 이 대상-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결코 이 대상-사건의 주인일 권리, 자신이 말하고자 한 것을 강요할 권리, 이 대상-사건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에 대해 말할 권리를 요구할 수 없는 가운데, 마침내 사라지기를 바란다.(Foucault 2004, 36-37쪽―번역은 다소 수정) 

푸코에게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은 유일무이한 것, 그 사건의 이전과 이후 사이에 분명한 단절을 이루는 것, 어떤 주체의 창조적 작업의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끊임없는 반복의 궤도”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다시 베껴지고 파편화되고 되풀이되고 모사되고 분열”되는 과정을 거쳐 사라지게 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사건은, 사건으로서의 책은 반복, 되풀이(“만져지지 않는 독특한 신체”를 한 순간 책에 부여하는 독서)의 결과이며, 대상-사건으로서의 책은 스스로 반복과 되풀이를 통해 분열되다가 마침내 사라져가는 것이지 불변적인 동일성을 획득한 불멸의 원본이 아니다. 그렇다면 되풀이의 결과인 대상-사건으로서의 책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되풀이, 반복의 행위로서 사건이야말로 엄밀한 의미에서 원본, 텍스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대상-사건들은 이러한 원본 텍스트의 무수히 많은 모사물simulacre이며, 역으로 원본 텍스트는 이러한 모사물들의 생산 및 그 효과들의 전체와 다르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대상-사건으로서의 문학 작품, 문학 텍스트는, 무한한 되풀이의 행위, 재생산 행위, 곧 차이화의 작용으로서 사건을 자신의 내부에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문학 텍스트를 원초적으로 내부에서 분할한다.[이런 의미에서 이는 데리다가 되풀이 (불)가능성iterabilité이라는 개념으로 지시하려고 했던 사태와 같은 것이 아닌지 물어볼 수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데리다의 정의를 고려해볼 때 그렇다. “되풀이의 구조는 ... 동일성차이를 동시에 함축한다. 가장 ‘순수한’ 되풀이―하지만 이는 결코 순수하지 않다―는 그 자체 안에 자신을 되풀이로 구성하는 어떤 차이의 간극을 포함한다. 어떤 요소의 되풀이 (불)가능성은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선험적으로 분할한다. 심지어 이 동일성이 다른 요소들에 대한 차이화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규정하거나 한정할 수 있다는 점, 따라서 이는 이러한 차이의 표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다.”(Derrida 1990, p. 105-강조는 데리다)] “사건은, 아마도 이 사건의 저자일 어떤 주체의 행위가 아니며, 사건은, 포괄적인 동일성의 관계가 아닌 감지할 수 없는 차이의 관계 속에서, 이 사건의 반복에 불과한 작품에 선행한다. 그리하여 작품 및 그것에 결부된 의미의 효과들은 정확히 말해 생산이 아니라 재생산의 귀결이며, 재생산은 그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담론의 우발적 사건에 의지하고 있다.”(Macherey 1994)

셋째, 따라서 문학의 생산이 그 자체로 재생산이라는 것은 현실 역시 하나의 재생산 과정이라는 것을 뜻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문학적 재생산과 현실의 재생산은 동일한 하나의 재생산의 상이한 표현들일 뿐이다. 아니,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일한 재생산 과정에 대한 이 상이한 표현들의 전체, 결코 종결되지 않을 무한한 전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이것이 우리가 앞서 인용한 대담에 나오는 마슈레의 다음과 같은 말의 존재론적 함의일 것이다. “한 텍스트는 그 자체로 작동하고 있는 한에서만 실재성을 지닐 뿐이며, 이는 그것이 다른 텍스트들과 맺는 관계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또한 이 때문에 문학 생산도 존재하는 것인데, 이는 현실 그 자체의 생산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는 󰡔윤리학󰡕 2부 정리 7 및 주석에서 전개되는, 스피노자의 저 유명한 평행론 명제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이자 변용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평으로는 진태원 2006 2장 4절 참조. 마슈레는 문학의 재생산에 관해 논의하면서 스피노자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스피노자는 일종의 부재하는 중심으로서 그의 문학 이론에 편재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마슈레를 비롯한 현대 문학이론에서 스피노자의 현존과 부재, 부재하는 현존의 의미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논문이 필요할 것이다.]

V. 문학적인 것―숭고와 비루함 사이

결론을 내린다면, 󰡔문학 생산󰡕으로 대표되는 초기 문학론과 󰡔문학 사고󰡕를 비롯한 후기 저술에서 전개된 후기 문학론 사이의 차이점은 세 가지 측면으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마슈레는 후기 작업에서 문학 텍스트에 대해 좀더 광범위한 자율성을 부여한다. 더 나아가 󰡔문학 사고󰡕를 비롯한 후기 저술들에서 문학 또는 문학적인 것은 더 이상 과학이나 철학과 같은 외재적인 담론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 대신 문학적인 것은 오히려 철학 자신에게 철학의 맹목을 드러내주는 것으로, 곧 모든 주어진 동일성 체계의 한계들을 드러내고 해체하는 익명적인 사유의 역량으로 나타난다. 이는 궁극적으로 문학 텍스트들은 재생산의 무한한 되풀이 과정에 기입되어 있는, 동일하면서 다양한 분신들의 상호 연관성의 그물망이기 때문이다. 문학 텍스트가 독자적인 생산의 역량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그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들과의 연관망 속에서 이미 재생산되었고 또 재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마슈레에게 문학적 사물la chose littéraire은 숭고와 비루함의 사이에 있는 것으로, 숭고하면서 비루하고 비루함으로써 숭고한 것으로 나타난다. 문학적 사물의 숭고성은 그것이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독자적인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생겨난다. 다른 한편으로 문학적인 것은 그 숭고성 때문에 동시에 아주 비루한 것이기도 하다. 문학적인 것의 독자성은 주어진 본질을 스스로 해체함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고, 확정된 동일성의 아래쪽을 굽이쳐 흐르며 경계들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익명적인―동일성 아래쪽에 있기 때문에―재생산의 역량으로서 구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오규원의 시 「손」에서 “언어”라는 단어를 “문학적인 것”이라는 단어로 바꿔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개울가에서 한 여자가 피 묻은/ 자식의 옷을 헹구고 있다 물살에/ 더운 바람이 겹겹 낀다 옷을/ 다 헹구고 난 여자가/ 이번에는 두 손으로 물을 가르며/ 달의 물때를 벗긴다/ 몸을 씻긴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그 손으로/ 돼지 죽을 쑤고 장독 뚜껑을/ 연다 손가락을 쪽쪽 빨며 장맛을 보고/ 이불 밑으로 들어가서는/ 사내의 그것을 만진다 그 손은/ 그렇다―언어이리라.”(오규원 1991)] 그것은 비루한 것들, 가장 낮은 것들 속에서 구현되는 숭고함이다. 스탕달, 네르발, 보들레르, 플로베르 등을 샤를르 드 베르나르Charles de Bernard, 마담 드 베르들렝Mme de Verdelin, 세낙 드 메이양Sénac de Meilhan 등과 같은 보잘것없는 19세기의 군소 작가들과 뒤섞는 생트 뵈브를 비난하는 프루스트에 맞서 마슈레가 생트 뵈브를 옹호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회색빛의 단조로운 또는 군소 문학이야말로 문학 생산의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직조, 문단의 영웅들에 대한 떠들썩한 숭배로 인해 들리지 않는, 저 밑바닥의 웅성거리는 소음이 생겨나는 그러한 직조를 이루는 것 아닌가?”(Macherey 2003)

그 웅성거리는 소음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그러므로 아마도 마슈레의 후기 문학론은 일종의 음성학으로의 발전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랑시에르가 말했듯이, 사회의 부분이면서도 몫이 없는 이들의, 사회에 현존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유령들의, 말할 줄 알면서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지닌 이들의 그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회적 음성학을.  


참고 문헌

 

1. 마슈레의 저작

 

Macherey, Pierre(1966). Pour une théorie de la production littéraire, François Maspero.

& Balibar, Etienne(1974). “Présentation”, in Renée Balibar & Geneviève Merlin, Les Français fictifs: le rapport des styles littéraires au Français national, Hachette; 「이데올로기 형식으로서 문학」, 이성훈 옮김, 󰡔유물론, 반영론, 리얼리즘󰡕, 백의, 1995.

(1976). “The Problem of Reflection”, in Literature, Society and the Sociology of Literature-Proceedings of the Conference Held at the University of Essex, July; 「반영의 문제」, 이성훈 옮김, 󰡔유물론, 반영론, 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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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a). “Connaître la littérature, connaître avec la littérature: Une entretien avec Pierre Macherey”, Future antérieur, Juin 1992.

http://multitudes.samizdat.net/Connaitre-la-litterature-connaitre.html

(1992b). “Présentation”, in Michel Foucault, Raymond Roussel, Gallimard.

(1994). “Pour une théorie de la reproduction littéraire”, in Michel Picard ed., Comment la littérature agit-elle?, Klincksieck.

http://stl.recherche.univ-lille3.fr/textesenligne/textesenlignecadreprincipal.html

(2000). “Science, philosophie, littérature”, in Textuel n° 37, Revue de l’UFR de Lettres de l’Université Paris-VII.

http://stl.recherche.univ-lille3.fr/textesenligne/textesenlignecadreprincipal.html

(2003). “La chose littéraire”, au colloque organisé à Lyon (14/16 mai 2003) par l’UMR “Lire” du CNRS sur le thème “La production de l’immatériel”

http://stl.recherche.univ-lille3.fr/textesenligne/textesenlignecadreprincipal.html

(2004a). “Y a-t-il une Philosophie littéraire?”, Bulletin de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 98-3.

(2004b). “À propos de l'ouvrage de Vincent Descombes, Proust. Philosophie du roman”, La philosophie au sens large, l'année 2003-2004.

http://stl.recherche.univ-lille3.fr/seminaires/philosophie/macherey/Macherey20032004/Macherey19052004.html

 

2. 일반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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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철(2000). 「발자크의 “농민들” 연구 -마슈레의 “농민들” 해석을 중심으로」, 󰡔프랑스 어문교육󰡕 제 10집.

진태원(2006).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서울대학교 철학박사학위 논문).

홍성호(1995a). 󰡔문학사회학, 골드만과 그 이후󰡕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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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피에르 마슈레와 뤼시앙 골드만의 문학비평과 매개 문제」 󰡔불어불문학연구󰡕 제 33집.

Badiou, Alain(1998). Petit Manuel d'inesthétique, Seuil.

Balibar, Etienne(1993). 「송기형과의 대담」,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윤소영 옮김, 이론.

Berk, Matthew(1995). “Review of the Object of Literature”, MLN 110.4.

Blanchot, Maurice(1955). L'éspace littéraire, Gallimard; 󰡔문학의 공간󰡕 박혜영 옮김, 책세상, 1990.

Derrida, Jacques(1990). Limited Inc., Galilé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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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Marxism and Literary Criticism, Methuen & Co.; 이경덕 옮김, 󰡔문학비평: 반영이론과 생산이론󰡕, 까치,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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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cault, Michel(1972). 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 Gallimard(19611); 󰡔광기의 역사󰡕 이규현 옮김, 나남사, 2004.

(1992). Raymond Roussel, Gallimard.

Goldstein, Philip(2004). “Between Althusserian Science and Foucauldian Materialism: the Later Work of Pierre Macherey”, Rethinking Marxism 16.3.

Jameson, Fredric(1981). The Political Unconscious, Routledge.

Montag, Warren(2003). Louis Althusser, Palgrave.

Pecora, Vincent P.(1998). “Review of the Object of Literature”, Modern Philology 9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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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bot, Philippe(2002). Philosophie et littérature, PUF.

Sprinker, Michael(1987). The Imaginary Relations: Aesthetics and Ideology in the Theory of Historical Materialism, Ver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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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Ⅰ마슈레 문학론의 근본 물음-문학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from 텅 빈 세상에 2009-01-19 22:31 
    진태원, 「피에르 마슈레와 문학적인 철학」 Ⅰ마슈레 문학론의 근본 물음-문학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마슈레의 작업 전체를 조망할 때 그의 작업의 본질적인 의미는 ‘문학적인 것’에 대한 탐구다.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로서 초기 마슈레의 작업은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이데올로기 형식으로서 문학」,「반영의 문제」등이다.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한 1960년대의 문학론은 “생산이라는 개념에 기초를 두고, 예술
 
 
릴케 현상 2008-12-05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겔 또는 스피노자}^^ 5년쯤 전에 발마스님의 독려를 받으며 읽다가 다운 된 기억이=3=3=3

balmas 2008-12-05 03:00   좋아요 0 | URL
ㅋㅋㅋ 그런 아픈 기억이 ... ^^;;;

사량 2008-12-05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 사고]의 국역본이 동문선에서 나온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맞죠? 역시 번역상태가 문제여서 국역본을 따로 언급하시지 않은 건가요? ㅜㅜ 읽으면 재밌을 것 같은데ㅜㅜ

balmas 2008-12-05 23:49   좋아요 0 | URL
예, 맞습니다. 번역이 안좋아요. ㅠ.ㅠ 그리고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백의)도 번역이 안좋답니다.-_-;;;;;;;;;;;

람혼 2008-12-06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논문의 주제와 소재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신나는(!) 마음으로 열독했습니다.^^ 언제나 좋은 글, 사유를 새롭게 환기시켜주는 글에 감사드립니다. 덧붙여 푸코의 루셀론에 관한 논의들을 마슈레 자신의 바타이유론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쩌면 같은 논리가 유물론에 관한 논의와 결합하여 한층 증폭하고 있는 부분은 오히려 『문학 사고』 내에서도 특히 바타이유에 관한 장이 아닐까 합니다. 곧 '문학적 철학'에 관한 논의를 이루는 많은 중요한 요소들이 바타이유 안에서, 그리고 그에 관한 마슈레의 논의 안에서 역시나 가장 집약적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balmas 2008-12-06 23:34   좋아요 0 | URL
열심히 읽었다니 오히려 제가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바타이유에 관한 마슈레의 논의도 여러 모로 흥미가 있는 글이 아닌가 싶어요. 아마 람혼님이 훨씬 더 좋은 글을 써서 문학적인 철학의 진면모를 더 잘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마슈레의 '문학적인 철학'이나 '문학적인 것'에 관한 글들은 한 권의 책으로 묶어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ㅎ

2008-12-18 0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8-12-19 02:26   좋아요 0 | URL
응, 그래 반갑다.^^
한 학기동안 같이 공부해서 반갑고 즐거웠어. :-)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같이 공부해보자.
이제 대충 다른 수업도 다 끝났지?
즐거운 연말 보내고 새해에는 보람 있는 일들이 많기를 ... ^^

콩세알 2009-01-07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현상학을 붙들고 끙끙거리면서 이렇게 이해가 어려운 것은 자신의 이해력뿐만이 아니라 번역에도 책임이 있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던 중 참고가 될까 해서 '헤겔 또는 스피노자'를 조금 읽어보다가 그만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몇달을 붙들고 있는 헤겔도, 게다가 에크리 몇장밖에는 읽어본 적이 없는 스피노자까지 이렇게 쉽고(? 상대적으로 ^^;;) 재밌게 느껴지는 걸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저자인 마슈레 뿐만이 아니라 발마스님의 번역에도 책임(^^)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새로운 책이 나온다길래 무척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balmas 2009-01-08 01:19   좋아요 0 | URL
ㅎㅎ 책을 잘 읽으셨다니 반갑습니다. 역자나 저자에게 가장 듣기 좋은 말이 그 말인 것 같아요.^^
앞으로 종종 들르시기 바랍니다.

2009-01-19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9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24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19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9-03-21 04:06   좋아요 0 | URL
헉, 속삭이신 님,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깜빡 잊고 있었네요. 내일 밤에 답장 드릴게요. 죄송.(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