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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환이에게 

네가 지적한 부분을 검토해보니까, 누락됐다고 말한 것들은, 101쪽 영어 단어에 관한 것만 빼고는 네가 지적한 게 맞더구나. 101쪽 셰익스피어 인용문은, 원문을 찾아보니까 “not”이 없는 게 맞더라. 사실 그래야 말이 되고.

어쨌든 단어나 구절이 누락된 걸 찾으려면 하나하나 대조해보지 않으면 안 되는데, 네 덕분에 큰 짐 덜었다.

14쪽에서 “한 가지”와 “하나의” 사이에 그런 뉘앙스 차이가 있나? ^^ 나는 별 생각 없이 “한 가지”라고 했는데, 좀더 생각해보고 “하나의”라고 하는 게 낫다면 고치도록 할게.

15쪽의 경우도 “정확히/정당하게”로 고치는 게 나을 것 같다.

36쪽은 영역본의 실수인 것 같아. 데리다 원문이나 셰익스피어 원문 모두 4막 3장이 맞는 것 같다.

37쪽 두 번째 단락의 경우에도 “환영에 대해”보다는 “환영에게”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구나.


44쪽의 경우는 조금 해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이 구절의 원문은 이렇게 돼 있어. “(fin de l'Histoire, fin de l'Homme, fin de la Philosophie, Hegel, Marx, Nietzsche, Heidegger, avec leur codicille kojevien et les codicilles de Kojève lui-même).” 원문의 내용은 정확히 말하면 이런 뜻이지.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는 각자 나름대로 역사, 인간, 철학의 종말/죽음을 선언했고, 이 때문에 이들은 종말의 고전가, 곧 사망한 역사와 인간, 철학에 대한 유언을 남긴 사람들이지. 그런데 데리다는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라고 쓴 다음에 “codicile kojevien et les codiciles de Kojève lui-même”라고 적고 있지. 이건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아. 알다시피 코제브는 1947년에 Introduction à la lecture de Hegel이라는 제목이 붙은 유명한 헤겔 󰡔정신현상학󰡕에 대한 강의록(1933년에서 39년까지 강의했던)을 펴내지. 이 책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다루는 책이기는 하지만, 그 관점에는 마르크스와 니체, 하이데거의 철학이 포함돼 있지. 그런데 󰡔마르크스의 유령들󰡕 152쪽에 데리다 자신이 인용하고 있듯이, 코제브는 1959년에 (곧 위의 인용문 앞에서 데리다가 말하듯이 데리다 세대의 사람들에게 일용 양식과 같았던 종말에 관한 담론이 넘쳐나던 시기) 자신의 책에 각주를 하나 붙이지. 일종의 “부록”으로 말이야. 그 각주의 내용은 정확히, 미국과 소비에트, 일본에서 코제브가 경험한 역사의 종말 이후 인류가 체험하게 될 삶의 양식에 관한 것이지. 따라서 “codicile kojevien”이 뜻하는 것은, 코제브가 이 각주 및 후기를 덧붙임으로써 역사의 종말에 관한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의 “유언을 변경했다”(codicile의 원래가 의미가 이것이지)는 거야. 더욱이 1989년 이후에는 코제브의 영향을 받은 후쿠야마라는 젊은이를 비롯한 자유주의의 예찬자들이 다시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고 있는데, 이는 말하자면 “les codiciles de Kojève lui-même”, 곧 후쿠야마 자신의 변경했던 유언이 후쿠야마 등에 의해 다시 변경됐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codicile”은 “유언 변경”이라고 번역하는 게 옳을 텐데, 나는 2장에 나오는 코제브가 추가한 각주나 후기와 연결해서 부지불식간에 “부록”이라는 의미에 더 비중을 두었던 것 같아. 어쨌든 좋은 지적이다. 

그리고 44쪽 두 번째 단락에서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것”의 원문은 “ne se dissimulaient plus”야. 146쪽에서 볼 수 있듯이 “se dissimuler”는 “감추다”는 뜻과 더불어 “인정하지 않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어. 내가 보기에는 “감추다”는 뜻보다는 “인정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아.

그런데 네가 지적하고서 보니까 여기는 “오래전부터 더 이상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고치는 게 옳을 것 같다. 다시 말해 “se dissimuler”가 "인정하지 않다"는 뜻이니까 부정문 형태인 “ne se dissimulaient plus”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해하는 게 옳겠지. 그리고 그렇게 해야 내용이 더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 것 같다.

45쪽의 경우 “이는 시사적인 질문이다”의 원문은 “Question d'actualité”야. 만약 이게 “Question d'aujourd'hui”였다면, 네가 제안한 것처럼 “이는 오늘/오늘날의 질문이다”라고 해야겠지만, “Question d'actualité”를 그렇게 번역해야 할지는 좀 망설여지는구나. 좀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이것과 관련해서 108쪽에 나오는 “그리고 이는 오늘날, 아마 내일도, 우리의 문제가 될 것이다”의 경우는 원문이 “Et c'est aujourd'hui, ce sera peut-être demain notre problème”이니까 네 제안이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말은 반드시 강연이 이틀에 걸쳐 진행될 것이라는 것만을 함축하는 것 같지는 않고 좀더 일반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것 같은데, 어쨌든 “오늘, 아마 내일도”라고 하면 중의적인 뜻을 모두 전달할 수 있으니까 그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49쪽의 내용에 관한 제안은 그렇게 고치는 게 맞을 것 같다.

52쪽의 원문은 이거야. “L'oeuvre animée devient cette chose, la Chose qui s'ingénie à habiter sans proprement habiter, soit à hanter, tel un insaisissable spectre, et la mémoire et la traduction.”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지. “정신을 부여받은 저작은 이 사물, 고유한 의미에서 거주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거주를 만들어 내는s'ingénier, 곧 귀신처럼 달라붙어 있는 사물Chose이 되고, 포착 불가능한 유령이 되며, 기억과 번역이 된다.” 내 생각에는 원문에서 “spectre, et la mémoire et la traduction”이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으니까, 이걸 “기억과 번역의 포착 불가능한 유령이 된다”고 하는 건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elles”이라는 대명사가 “말들”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요구들”을 가리키는지는 문법적으로는 결정할 수가 없는데, 맥락상으로는 “말들”을 받는 걸로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요구들이 분배된다”는 것은 맥락상 좀 어색한 것 같아.

그리고 “부패하고 있는”은 원문에 “whither”라고 나와서 그냥 옮긴 건데, 좀 표시를 해둬야 할 것 같다.


57쪽에 관한 지적을 보자. 사실 네가 지적한 문장들은 이 책에서 제일 심오하고 중요한 문장들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깊이도 있고 또 난해하고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들이야. 이 부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Il n'y a de tragédie, il n'y a d'essence du tragique qu'à la condition de cette originarité, plus précisément de cette antériorité pré-originaire et proprement spectrale du crime. Du crime de l'autre, un forfait dont l'événement et la réalité, et la vérité, ne peuvent jamais se présenter en chair et en os, seulement se laisser présumer, reconstruire, fantasmer. On n'en continue pas moins, dès la naissance, de porter une responsabilité, ne serait-ce que pour avoir à réparer un mal au moment même où personne ne saurait l'avouer, sauf à se confesser en confessant l'autre comme si cela revenait au même.

그리고 내 번역은 이렇게 돼 있어.

이러한 범죄의 원초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1)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처럼 범죄가 기원에 앞서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범죄의 고유한 유령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1-1) 비극이, 비극적인 것의 본질이 존재한다. 이러한 타인의 범죄,(2) 타인의 중죄는 결코 그 사건과 실재성, 진리가 생생하게 현재화될 수 없고, 단지 추정되고 재구성되고 환상 속에서 드러날 뿐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는 탄생에서부터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책임이, 누구도 시인할 수 없는 순간에, 타인[이 범죄자라는 것―옮긴이]을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책임을―옮긴이] 고백하는 것(3)―마치 이러한 두 가지 고백이 똑같은 것으로 귀착된다는 듯이―말고는 달리 누구도 이러한 책임을 시인할 수 없는 순간에, 어떤 악을 바로 잡아야 하는 책임일 뿐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네 지적은 우선 (2)를 (1) 다음에 넣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인데, 글쎄 앞 문장 어딘가에 첨가를 해야 한다면 아마 (1-1)에 넣는 게 좋겠지. “범죄의, 타인의 범죄의 고유한 유령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 이런 식으로 말이야. 내가 번역하면서 그걸 넣지 않은 이유는 “범죄의 원초성”이나 “범죄의 고유한 유령성”이라는 말에 사실 그 내용이 이미 함축되어 있고, 바로 다음 문장에서 함축된 내용이 명시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야. 사실 데리다의 원문 자체가 그런 구조로 되어 있고. 

그 다음 네가 두 번째로 지적한 것은 (3)의 번역이 잘못된 것 같다는 것이지. 그 대신 너는 “누구도 시인할 수 없는 순간에, 타인을 고백하는 자기-고백 속에서”라는 번역을 제안하고 있고. 그런데, 이런 번역을 제안하면서 너는 “오히려 반대로, 햄릿이 뒤틀린 세월을 ‘바로 잡으려는’ 자기 고백을 통해서, 그 고백 속에서, 타자를 고백하는 것이므로, 자기-고백 속에 타자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고백이 우선이겠지요”라고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나는 네 제안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를 못하겠다. 네가 제시한 이유를 좀더 명시적으로 밝혀주면 아마 더 재미있는 토론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용을 좀더 분명히 제시해볼래?

그리고 61쪽의 “배려”의 원어는 “souci”인데, 가령 알다시피 푸코가 󰡔자기에의 배려Souci e soi󰡕라고 할 때 쓴 게 이 단어고, 독일어로는 하이데거가 사용한 Sorge라는 개념과도 연결될 수 있겠지. 그래서 무심히 “배려”라고 옮겼는데, “souci”의 뜻이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을 쏟고 하는 것이니까, 네가 제안한 것처럼 “관심”이라고 옮기는 게 오히려 의미를 좀더 잘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104쪽의 경우는 “spectropoétique”의 중의적인 뜻을 고려해서 일부러 의역을 한 건데, 네 말을 듣고 보니까 “미화”라는 말에 원어 transfigurante를 병기해두는 게 좋을 것 같구나.

105쪽의 경우는 네 말처럼 “순교자”라고 번역하는 게 옳을 것 같고, 107쪽의 번역은 좀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111쪽의 제안에 관해서는 좀 다른 생각이야. 데리다가 “마르크스나 다른 사람들의 동일성론, 좀더 정확히 말하면 매우 타자론적인 동일성-존재론une tauto-ontologie assez hétérologique과 마찬가지라는 점이다”라고 말했을 때 말하려는 바는, 마르크스나 다른 사람들이 동일성 존재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나름대로 매우 타자론적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결국 동일성-존재론으로 타자론을 포섭하는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야. 그러니까 “매우 타자론적인”이라는 말은 “타자를 동일자로 포섭하려는”이라는 뜻보다는 “타자를 존중하려고 매우 노력하지만”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뜻이지. 요컨대 데리다가 “assez”라는 단어를 써서 강조하려는 것은 “결과”(결국 동일성-존재론으로 포섭되고 마는)보다는 “의도”(타자론적이려고 노력하는, 하지만)가 아닐까 생각했다는 거야.  


지금까지 간략하게 네 제안에 대해 답변을 해봤는데, 107쪽에 관한 제안이나 특히 57쪽에 관한 제안은 좀더 논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아.

어쨌든 아주 꼼꼼하게 읽어줘서, 내가 수고를 덜게 됐고, 다른 분들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좀더 정확히 읽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아주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이구나. :-)

오늘은 이만 줄이고 다음에 좀더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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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환 2007-12-22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일이 확인해주시고, 제가 본 가장 친절한 역자네요^^ 그리고 이런 일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여기다니요, (이제는) 좀 더 '격렬한' 선물을 기대하셔야지요~ 그리고 수고는 형이 던 게 아니라 제가 덜었지요, 번역본 아니었으면 몇 달을 고생할 수도 있었을텐데 몇 일 만에 제법 읽었으니까요. 그리고 여기서 계속 '하드코어' 논리학, 분석철학 책/논문만 읽다가, 형 덕분에 데리다를 읽을 수 있으니 다행한 일이지요.

우선 codicile에 관해서, 처음에 이 단어를 봤을 때 데리다가 왜 이렇게 희한하고 희귀한 단어를 쓰나 했는데, 물론 그의 악취미를 욕하면서, 근데 형의 설명을 듣고 보니 나름대로 복잡한 사연을 가진 단어였군요. 구문적으로도 제가 제안한 것처럼 읽으려면 leur condicile이 복수가 되어야 할 것 같네요.

57쪽에서 제가 ‘타인의 범죄성’을 넣어야 한다고 말한 부분은, 제가 잘못 본 것 같네요. 형이 써 주신 원문을 보나, 영어번역본을 보나 타인의 범죄성은 다음 문장에만 나오네요.

그리고 제가 ‘타인을 고백하는 자기-고백’이 맞지 않을까 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부분은 맥락상 데리다가 햄릿의 저주는 이음매가 어긋난 시간을 향한 것이 아니라, 즉 타자(삼촌)가 지은 범죄 때문에 이음매가 어긋난 시간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탄생과 함께, 그러니까 자신의 탄생의 순간부터 이미 어긋나 있던 그 시간을 바로 잡기 위해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향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데리다는 햄릿이 타인이 지은 죄에 대해서,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태어났다고 자기의 사명mission을 고백함으로써, 타인 혹은 타인의 범죄 때문에 사명에서 벗어난de-mission 시간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구조적으로, 햄릿이 타자를 범죄자로 고발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타인(이 지은 범죄)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고백하는 것이 먼저인 것 같고, 그렇게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렇게 햄릿이 책임을 받아들이는 행위 속에는 타자(의 범죄)에 대한 고백이 들어있기 때문에 자신을 고백하는 것이 타자를 고백하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될 때 자신의 책임을 먼저 고백하는 것이 곧 타자와의 관계의 무한한 비대칭성, 곧 정의를 열어놓게 되는 게 아닐까요? 아무튼 저의 요점은 타자를 먼저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이럴 경우 거의 타자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고발’하는 게 아닐까요), 자신의 책임을 고백하는 것이 타자를 고백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이 구절을 읽은 방식입니다.
그런데 형이 적어 주신 원문을 보니, en confessant l’autre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문장이 진짜 복잡하네요, 한참을 들여다봤습니다^^) 형이 번역하신 것처럼, ‘타인을 고백함으로써’ 혹은 ‘타인을 고백하면서’ 정도로 번역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긴 합니다만, 분사처럼 ‘타인을 고백하는’ 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타자론적인 동일성-존재론’은 ‘assez’가 있으니 형이 말씀하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문단만 염두에 두고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이원론적 존재론을 비판한다고 생각했는데, 전체를 요약하는 말인 것 같네요.


이재환 2007-12-22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쓰는 김에 2장을 읽다가 의문나는 부분 몇 가지도.. 바쁜 데 제가 너무 귀찮게 하네요^^ (저도 이제 놀아야해서 더는 못 읽을 듯ㅋ)

113쪽)'이 정식은 독특하게도 이 시간, "바로 이 시간", 바로 이 시간의 시간, 햄릿에게는...' -> '이 정식은 독특하게도 이 시간, "바로 이 시대", 바로 이 시대의 시간, 햄릿에게는..' 이후에 햄릿의 '시대' 혹은 '시대의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이 어떨지요.
119쪽)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도식들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 다루고, 이로써 그것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이 도식들과 더불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도식들을 가지고 이 문제를 -이론적, 실천적으로- 다루고..' 이 문장에서 우리가 (마르크스의 도식들을 가지고) 다루고 변화시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도식들이 아니라 앞 문장에 나오는 문제들인 것 같습니다.
122쪽)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무엇보다도' ->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그리고 우리고 알든 모르든 간에, 무엇보다도'
124쪽) '니체와 벤야민은 우리가 각자 나름대로' -> '니체와 벤야민은 그들 각자의 방식대로'
129쪽) '하지만 결코 자본 그 자체...유령적인 힘들과 연결되어 있는 자본주의들만이' -> '하지만 결코 단수로서의 자본 그 자체..연결되어 있는 복수적인 자본주의들만이' 영역본은 '단수로서의 자본주의'와 '복수로서의 자본주의들'을 구분하고 있는데 원문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130쪽) '반면 과학의 기획 또는 마르크스주의 비판의 기획' -> '마르크스주의적 학문의 기획 또는..'
134쪽) '국가는 "경제와 인정이라는 두 기능" 위에 세워져야 한다. 이제 괄호를..' -> '국가는 ...세워져야 한다. <<공산당 선언>>의 시대에서처럼 유럽의 동맹은 그것이 배제하고 투쟁하고 혹은 억압하는 것에 의해서 신들여져 있다. 이제 괄호를..'
138쪽) 오랫동안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 '..남게 될 것이다. 왜 영원히가 아니라 오랫동안인가? 우리는 분명히..'
140쪽) '항상 지켜질 수 없는 약속, 왜냐하면 적어도 이 약속 익명적인 독특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요구하기 때문이다.) -> 이 부분은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을 순서를 바꾸는 것이 맥락에 맞을 듯 합니다. '무한한 약속'은 '익명적인 독특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평등에 대한 존중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항상 지켜질 수 없는 약속...'으로요.
143쪽) '선과 악을 평가할 수 있게 해 주는 초역사적 기준들의 본성을..' -> 앞에서는 '자연'으로 번역하신 것 같던데 여기서도 '초역사적 기준들의 자연' 혹은 '초역사적 기준들의 본성/자연'이라고 하는 게 어떨지요.
144쪽) '후설이나 하이데거' -> '후설(침묵 속에서 넘어간다)이나 하이데거..

아, 그리고 데리다의 벤야민에 관한 긴 각주(343쪽)에, 괄호 속에 벤야민이 강조했다고 된 곳에 강조된 단어가 없어요~

balmas 2007-12-25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환아/ 내가 지금 마르크스의 유령들 원서가 없어서 도서관에 가서 살펴봐야 하는데, 며칠 있어야 되겠다.
어쨌든 대조해가며 읽느라고 고생이 많다. :-)
 

형, 잘 지내시죠? (짧은) 방학이라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읽다가, 혹 2쇄나 3쇄에 반영되면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사소한 제안들 몇 가지와 형이 한 번 확인해 주십사하는 몇 구절에 대해서 몇 자 적습니다. (메일 주소를 몰라서, 어디다 적을까 고민하다가 여기에다가 적습니다. 토론하자는 건 아니구요^^ 제가 불어본을 한국에 두고 와서 영어본을 참고했는데, 그래서 저도 긴가민가하는 부분을 적었습니다.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14쪽) ‘질문의 가능성은 아마도 더 이상 한 가지 질문은 아닐 것이며…’ -> 이건 사소한 제안입니다만, ‘한 가지 질문’이라고 하면 ‘한 가지 질문, 두 가지 질문…’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듯 하게 들립니다. 여기서 ‘질문의 가능성’이 현재를 넘어서 미래/타자와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질문’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질문의 가능성은 아마도 더 이상 하나의 질문은 아닐 것이며…’라고 하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15쪽) ‘칸트가 정확히’ -> ‘칸트가 정확히/정당하게’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하신 것 같은데, 특히 이 부분은 칸트의 Wuerdigkeit를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두 가지 뜻을 병기하는 게 어떨지요.

36쪽) ‘4막 3장’ -> 영어본에는 ‘4막 2장’으로 나와있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37쪽) ‘그 자체로, 진실로 유령을 다루는 학자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실재적인 것과 비실재적인 것…’ -> 영어본에 따르면, 여기에 한 문장이 누락된 듯 합니다. ‘그 자체로, 진실로 유령을 다루는 학자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학자는 유령을 믿지 않았고, 유령성의 잠재적 공간/장소라고 불리는 것 역시 믿지 않았다. 실재적인 것과 비실재적인 것…’

    ‘아마도 마셀러스는 고전적인 학자는 환영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할 만한..’ -> ‘아마도 마셀러스는 고전적인 학자는 환영에게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할 만한..’ 불어 전치사 a의 애매성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마셀러스가 학자인 호레이쇼에게, 유령에게 말을 걸어 보라고 말하는 부분이 아래에 나오는 걸 봐서는 ‘환영에게’라고 번역하는 게 맥락에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44쪽) ‘대문자 철학의 종말,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 및 코제브가 덧붙인 부록들, 그리고 또한 코제브 자신에 대한 부록들’ ->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의 코제브적 유언, 그리고 또한 코제브 자신의 유언’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코제브의 사망선고를 헤겔…하이데거의 철학(형이상학)의 종언 선언과 유비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헤겔..하이데거가 한 유언은 코제브적인 유언이고 또 코제브 자신의 유언도 있을 듯 합니다. ‘유언’은 본인들이 죽을 때 남기는 것이므로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데, ‘사망선고’ 정도로 의역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 또는 우리들 중 어떤 이들이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것’ ->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 또는 우리들 중 어떤 이들이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던 것’  영어본이 의역을 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맥락상, 공산주의 국가의 만행을 우리들이 알고 있었고, 그것을 감출 수도 혹은 숨길 수도 없었다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긴 합니다.

45쪽) ‘이는 시사적인 질문이다.’ -> ‘이는 오늘/오늘날의 질문이다.’  아마 ‘역사의 종말에 늦을 수 있는가’는 데리다가 발표하던 그 날의 질문이기도 하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108쪽에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질문이기도 하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나가는 김에, ‘지진아’는 너무 강한 표현인 것 같아서 그냥 ‘지각생’정도면 어떨지.. 막차가 지난 뒤에 막차를 타려고 하는 사람을 ‘지진아’로 부를 것 까지야…

49쪽) ‘어떤 장-래 못지 않게 어떤 과거, 어떤 고유 명사의 과거를 명명한다면’ -> ‘어떤 과거, 어떤 고유 명사의 과거 못지 않게 어떤 장-래를 명명한다면’ ‘depuis Marx’가 과거를 넘어서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므로,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게 자연스러울 듯… 그래야 ‘고유 명사의 고유명사는 항상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 듯 합니다.

52쪽) ‘곧 귀신처럼 달라붙어 있는 사물이 되고, 포착 불가능한 유령이 되며, 기억과 번역이 된다.’ -> ‘…기억과 번역의 포착 불가능한 유령이 된다.’ 영어번역은 유령이 기억과 번역의 유령이기도 한데, 맥락상 이게 말이 되는 듯 합니다. 한 가지 번역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유령이라는 의미에서요. 한 번 확인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이 말들은 여기서 몇 가지 주요 가능성들 주위로..’ -> ‘이 요구들은 여기서 ...’ 저도 자신은 없는데, 여기서 지시대명사가 받는 게 ‘요구들’인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이 부패하고 있는whither’ -> ‘그것이 부패하고 있는wither’  오타네요^^

54쪽) ‘이러한 이중적 기입이야말로 ‘the time is out of joint’라는 햄릿의 말의 수수께끼를 응축하는 것이고’ -> ‘…라는 햄릿의 말의 수수께끼를 정확히/정당하게 응축하는 것이고’  요건 justment이 들어가면 문장이 살 것 같네요.

57쪽) ‘이러한 범죄의 원초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 -> ‘이러한 범죄의 원초성, 즉 타자/타인의 범죄의 원초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 구조상, 관계절을 앞으로 빼신 것 같은데, 뒤의 문장의 주어가 ‘타인/타자의 범죄성’인데다가, 내용상, 범죄 일반의 원초성이 아니라, 타자가 저지른 범죄의 원초성을 말하는 부분이니까 넣어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구도 시인할 수 없는 순간에, 타인[이 범죄자라는 것-옮긴이]을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책임을 –옮긴이] 고백하는 것 – ’ -> ‘누구도 시인할 수 없는 순간에, 타인을 고백하는 자기-고백 속에서’ 우선 타인을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고백하는 것은 내용상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햄릿이 뒤틀린 세월을 ‘바로 잡으려는’ 자기 고백을 통해서, 그 고백 속에서, 타자를 고백하는 것이므로, 자기-고백 속에 타자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고백이 우선이겠지요. 그리고 형이 주를 다신 것처럼 그 자기 고백은 ‘타인이 범죄자’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책임의 고백을 함으로써 ‘타자 자체’를 고백한다고 하는 것이 맥락상 더 맞지 않을까 합니다.

‘마치 그가 자기 자신을 왜곡/잘못을 바로 잡을 사람으로, 법과 마찬가지로…’ -> ‘마치 그가 자기 자신을 왜곡/잘못을 바로 잡을 사람으로, 정확히/정당하게, 법과 마찬가지로..’

58쪽) ‘오히려 유령으로서 깃들어 있는 곳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 ‘오히려 유령으로서 깃들어 있었던 게 될 곳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전미래시제인 것 같네요.

61쪽)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것에 대한 배려가 복수나..’ ->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복수나..’ 영어본은 concern으로 되어 있는데, 앞에서 햄릿의 to be or not to be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존재해야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더 자연스러울 듯 합니다.
68쪽) ‘채무 없고 유죄 없는 이러한 선사’ -> ‘채무 없고 유죄 없는 이러한 선사의 역설’

85쪽) ‘곧 오늘날 어떠한 특수한 과학도 그것을 환원시킬 수 없는’ -> ‘곧 오늘날 어떠한 특수한 과학도, 그것이 인문학이든 아니든, 그것을 환원시킬 수 없는’  요 부분이 누락된 듯...

91쪽) ‘이러한 경계의 실존을 계속 믿었을 것이며’ -> ‘이러한 경계의 실존을 계속 믿었던 게 될 것이며’  전미래시제이긴 한데, ‘계속’이란 말이 있어서 굳이 전미래로 번역 안해도 될 것 같지만. 그냥 지나가는 김에…

97쪽) ‘(이는 보충적인, …이점이다.) 위대한 시인의 천재/정령…’ -> ‘(… 이점이다.) 우리가 살펴보게 되겠지만, 종교는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여러 다른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결코 아니었다. 위대한 시인…’ 한 문장이 누락된 것 같습니다.

101쪽) 셰익스피어 영어 인용문의 단어가 누락된 듯… ‘but perform non’ -> ‘but perform none’ / ‘if thou dost perform’ -> ‘if thou dost not perform’ 근데, ‘not’을 추가하면 번역이, ‘만약 약속을 실행한다면 파멸할 것이다’ -> ‘만약 약속을 실행하지 않으면 파멸할 것이다’가 되어야 할까요?


104쪽) ‘미화하는 이념화의 과정이었다.’ -> ‘변용(變容)하는 이념화의 과정이었다.’ transfiguration은, 형이 옮긴이 주에서도 ‘미화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의 모습이 변화산에서 인간의 모습에서 신의 모습으로 변했던 것을 말하는 단어이고, 여기서는 물질인 화폐가 유령의 모습으로 변화는 이념화의 과정을 의미하므로 ‘미화’보다는 ‘변용’이 이러한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105쪽) ‘구두쇠, 수전노, 투기꾼은 교환가치의 성자가 된다.’ -> ‘...교환가치의 순교자가 된다.’ 영어본에는 ‘성자’ 부분이 martyr로 되어 있는데, 불어본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환가치를 죽임으로써 순수한 교환가치를 얻기 때문에 ‘순교자’가 어떨지요.

107쪽) ‘그는 <<공산당 선언>>이 전쟁을 선언하는 낡은 유럽의 모의자들로서의 환영을 푸닥거리하려고 했던 게 될 것이다/..유럽의 모의자들과 같이 환영을 불러오려고 했던 게 될 것이다.’ -> ‘그는 <<공산당 선언>>이 전쟁을 선언하는 낡은 유럽의 모의자들처럼 환영을 푸닥거리하려고 했던 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은 <<공산당 선언>>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형이 옮긴이 주에서 쓰신 거처럼 1의 b처럼 해석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1의 b 부분은 대부분 셰익스피어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의미상, 92-93쪽에 나오는 것처럼,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그것에 대항에서 전쟁을 선언하는 낡은 유럽의 모의자들이 그 유령을 푸닥거리하기 위해서 모의한 것처럼 마르크스 역시 그들처럼 역설적으로 유령을 푸닥거리한다고 번역하는 게 옳을 듯 합니다. 그러니까 옮긴이 주 87은, 제가 보기엔, 좀 과도한 해석 같습니다. (유럽의 모의자들은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축출하려고 동맹을 결성했지 그 환영을 불러오려고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108쪽) ‘그리고 이는 오늘날, 아마 내일도, 우리의 문제가 될 것이다.’ -> ‘그리고 이는 오늘, 아마 내일도, 우리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 부분은 콜로퀴움이 열리는 이틀 동안, 그러니가 발표하는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네요.

111쪽)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매우 타자론적인 동일성-존재론’ ->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질적인 것을 같게 만드는 존재론’ -> tauto라는 접두사가 다른 것을 같게 만드는 접두사이고,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토톨로지는 죽음 및 타자의 타자성 같은 생명과 이질적인 것을 동일한 것으로 귀착시키는 존재론이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이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 주면 좋을 듯 싶습니다. ‘타자론적인 동일성-존재론’은 왠지 타자 중심적인 동일성 같은 느낌을 주네요.

 p.s. 쓰고 나니, (좀) 사소하네요^^ 아직 1장까지밖에 못 읽었는데, 나머지는 내년 여름방학전에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읽을수록 중요하고 좋은 책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대선날 멀리서 답답한 마음에 (답답하게) 몇 자 적었습니다. 그럼 건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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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7-12-20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환아, 아주 꼼꼼히 읽었구나. ㅎㅎ
내가 좀 읽어보고 내일쯤 답변해줄게. :-)
수고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관한 서평이 몇 개 더 나와서 옮겨놓는다.

지난 번 올린 서평이 일간 신문에 실린 서평들이었다면,

이번에 옮겨놓는 서평들은 주간신문이나 인터넷 웹진에 실린 서평들이다.

 

[교수신문 서평]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4997

 

[대학신문 서평]

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998

 

[컬쳐 뉴스 서평]

http://www.culturenews.net/read.asp?article_num=8754

 

 

 ---------------------------------------------------

서평을 옮겨놓은 김에 한 마디 덧붙이자.

우리나라 인문사회과학 담론의 특징 중 하나는 이런 형태의 주간신문이나 인터넷 웹진이

꽤 발달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인문사회과학적인 지식의 대중적인 소통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이런 류의 매체들이다.

주요 대학에서 내는 학보나 대학원 신문, 교수신문, 담비, 컬쳐 뉴스 등이 그런데,

자주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사실 요즘은 거의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중에는 꽤 고급스런 칼럼이나 서평, 기사도 있어서 교양 대중에게는 자못 매력적인 매체들로

여겨질 듯하다.

 

반면 학계, 특히 인문학계의 경우는 지식의 소통이라는 면에서 너무 소홀하고 안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각 학회가 펴내는 학회지는 물론이거니와 주요 학술지에서도

구색맞추기 식의 서평란을 제외하고는 변변한 서평란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외국 학술지를 한두 번이라도 뒤적여본 사람이라면

서평 및 책 소개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지식의 생산량이 적은 것이 그 이유일 수도 있지만,

번역을 포함하면 (당연히 포함돼야 한다) 사실은 꽤 많은 지식들이 생겨나고 소개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볼 때, 자체 생산량이 적다는 것만으로는 서평 및 책 소개가 빈곤한 이유가 제대로 해명이 되지 않는다.

 

전문 서평지 문제에 대해서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따로 이야기하겠지만,

여하튼 고급의 인문학 지식에 대한 높은 대중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인문학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이유이자 결과 중 하나는

소통에 대한 무관심/무능력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주간 신문이나 각종 웹진들이 활성화된 이유 중 하나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매체들도 나름대로 쓸모있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역시 전문 학자들이 소통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그 결과  전문적인 서평들이 더 활발해져야

좀더 고급스런 지식의 생산과 소비도 촉진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그건 그렇고, 역자로서 한 가지 바램을 말한다면, 

전문 학술지들에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관한, 

말 그대로 전문적인 서평을 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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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2-07 0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쓰신 '역자로서의 바람'은 저 역시나 매우 바라고 있는 바입니다.^^

푸하 2007-12-07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와 긴장하는 그런 서평, 수많은 의미를 생산하는 서평이 곧 나오리란 생각이 드네요.^^

balmas 2007-12-07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님/ ㅎㅎ 람혼님이 한 번 쓰셔도 될 것 같은데, 자리를 한 번 마련해드릴까요? ^^;
푸하님/ 오, 오랜만이세요. 제가 너무 격조했던 탓인가요? ^^;; 정말 그런 서평들이 많이 나와야
관객들도 좋고, 당사자들도 긴장감 있고, 후학들에게 모범이 되고 그럴 텐데 말이죠.

마늘빵 2007-12-07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런 서평은 람혼님이나 윤타님, 로쟈님 같은 분들이 써주셔야하는데... :)

balmas 2007-12-07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
 

아마 진태원 선배 말씀을 제가 좀 거칠게 축약을 해버려서 오해를 했다고 보신 것 같습니다.

진선배의 아래의 구절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2부 정리 37과 38에서 증명된 것, 곧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과 부분 및 전체 안에서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은 어떤 독특한 사물의 본질도 구성하지 않는다”(정리 37)와 “모든 것에 공통적이고 부분 및 전체 안에서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들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데서 따라 나오는 규정입니다.
따라서 notio communis에서 “공통적”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모든 물체들 또는 몇몇 물체들이 공통으로 지니는 것을 표현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요컨대 실재적인 기초(사물들 또는 물체들에 공통적인 것)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기초를 적합하게 인식하는, 표현하는 notio가 notio communis인 셈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notio communis와 일반적인 notio, 곧 실재적인 기초를 갖지 않는 상상의 양태나 사고의 양태로서 notio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얼렁뚱땅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스피노자가 이곳에서 말하는 것은 '모든 사물들에 공통된 것은 그 자신 사물들의 일부인(즉 그 자신도 사물인) 인간에도 있으며 이 공통된 것에 대해서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 지적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저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의 해당부분을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그렇게 읽히는군요. 당연히 인식 대상과 인식하는 자 사이의 공통성이 common notion의 common이 지시하는 것이다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좀 표현이 거칠었긴 하지만 크게 문제로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에서 발리바르가 한 말의 앞에 나오는 말을 조금 더 읽어보기로 하죠. 이미 읽어보셨겠지만 함께 읽어보면 또 다른 맛이 나니 말입니다. 

"실제로 어느 누구도 자신의 견해들을 표명함 없이, 친구들로 이루어진 회합에서라도 그것들을 교통하지 않고, 전적으로 혼자서 사고할 수는 없다. 사고의 장소는 사적 개인이 아니며, 그것의 철학적 실체(hypostase)인 의식[양심]의 은밀성이 아니다. 사고의 장소는, 그 한계 또는 범위가 무엇이든, 교통 그 자체이다(cf. 󰡔신학-정치론󰡕 20장, pp. 328-329). 우리는 왜 󰡔윤리학󰡕이 “나는 사고한다”[cogito―데카르트]가 아니라 “인간은 사고한다”라고 공리화하고 나서, 인간은 자신의 의념들이 공통의념들로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점을 보여주는지 이해한다."

저는 여기서 저 마지막 구절을, 인간은 자신의 "통념"이 말하자면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 실재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에 도달함으로써 "공통통념"이 될 수록 많이 사고한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말로 읽을 도리는 없다고 봅니다. 도저히 맥락과 맞질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꾸 다른 함의를 이 문장에 실으시려고 하시나 하고 궁금해하다가 진선배가 이번에 주신 질문을 보고, 아! 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선배님은, "인간은 사고한다"고 스피노자가 말했는데, common notion없는 사람은 그렇다면 사고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말이냐라는 식의 질문을 주셨지요.

보다 정확히 옮기면, 

"제가 볼 때 최원 형 생각의 난점은 notion은 사적이거나 개별적이고 common notion만이 공통적이다라고 간주한다는 데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사고한다Homo cogitat”는 {윤리학} 2부의 공리는 common notion을 가진 사람에게만 적용되지, notion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전혀 적용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 질문은 제 관점에서는 질문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질문이고 따라서 어폐가 있는 질문인데, 그것이 묘하게 선배님의 생각과 저의 생각의 차이를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사고의 장소는 특정한 개인이 아닙니다. 위에서 발리바르가 말하듯이 그것은 교통 그 자체이지요. 그리고 "인간은 사고한다"는 말도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 개인을 지목하여 이런 사람은 사고를 하냐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개인은 '의식'을 하겠지요. '사고한다'는 것은 '의식한다'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notion은 기본적으로 '의식'에 속할 것입니다. universal notion은 원인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효과/결과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에서 의식에 탁월하게 속하겠지요.)

제가 보기에 진태원 선배의 해석의 난점은 "인간은 사고한다"를 "모든 개개의 인간은 사고한다"(each man thinks or everyman thinks)로 은연중에 바꿔 놓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적 개인을 사고의 장소로 보는 데카르트 입장이지 스피노자의 입장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개개의 개인들로 말하자면, 이들은 모두 항상 이미 교통의 과정 속에 있고 거기에서 관개체적인 사고의 과정은 항상 이미 시작되어 있느니만큼 거기에 참여(?)하는 한에서 어떤 모종의 합리성(이론적인 합리성까지는 아니라도 실천적인 합리성이라면 말입니다)을 항상 이미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 동안 선배님도 토론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장진범님께 책을 맡겨 두는 것은 좀 뭐하군요. 장진범님도 할일도 많을텐데. 나중에 한국에 들어가시면 이메일 한 번 주십시요. 그때 댁으로 보내드리든지 사정이 허락되면 직접 찾아뵙고 드리든지 하겠습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좋은 추석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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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 2007-09-23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올리고 나서 조금 더 추가했습니다.

balmas 2007-09-24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니 최원 형 생각이 뭔지 훨씬 더 분명히 드러나는군요. :-) 그런데 스피노자에 관해서는 더 이야기하는 게 별 의미가 없을 것 같고 역시 이 정도로 끝내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한국에 가서 메일 한 번 드리죠. 수고했습니다. ㅎㅎㅎ
 

 

 

ㅎㅎㅎ 최원 형의 답변을 잘 읽었습니다. 최원 형으로서는 “의념”이라는 번역어에 상당히 애착이 가는가 봅니다. 번역자로서는 당연히 그렇겠죠. :-) 이야기를 계속 해나갔으면 좋겠는데, 이번 답변으로 이 문제에 관한 논의는 일단락 짓는 게 좋겠군요. 이 정도 했으면 최원 형이나 내 생각은 충분히 표현된 거 같고, 사실 더 한다고 해서 얼마나 더 생산적인 이야기가 나올지도 약간 의문이 듭니다. 이쯤에서 논의를 끝내고 사람들이 각자 판단하도록 맡겨두기로 하죠.

그런데 최원 형의 답변에는 제 글에 대한 몇 가지의 오해가 엿보이는 듯해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의미에서 그것만 몇 가지 바로 잡아보기로 하죠. puissance에 관한 이야기는 그 정도 했으면 됐다고 봅니다. 

우선 common notion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지적은 좀 놀랍더군요. 

“진선배님은 notion이란 명확히 1종의 인식에 속하는 것이고 common이 그 앞에 붙어 줌으로써 2종의 인식이 되므로, 합리성의 원인은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공통성을 가리키는 common에서 주어져야 한다.(1-1) notion은 그 자체로는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통용되는 것으로 거기서 통용된다는 측면은 common notion의 common과는 상관이 없다고(1-2)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

좀 아랫부분에도 다음과 같은 지적이 나오죠.

“저는 스피노자의 common notion이란 단순히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어떤 부분의 일치에 대한 인식을 의미할 뿐(2-1)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우선 최원 형이 {윤리학} 2부에 나오는 common notion의 의미를 (1-1)이나 (2-1)처럼 해석하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학정치론}을 제외한다면) {윤리학}에 나오는 common notion의 의미가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공통성을 가리키는”, “단순히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어떤 부분의 일치에 대한 인식을 의미할 뿐”인 건지요? 저는 지난 번 제 답변이나 제 논문 어디에서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이런 표현을 쓰는 걸 보면 최원 형 자신이 {윤리학}에 나오는 common notion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 같은데, 정말 그런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해 방식인데, 최원 형은 그것을 제 견해라고 말씀하시니 좀 당황스럽더군요.

또 다른 이유는 저는 지난 답변에서 {윤리학}만을 문제 삼았고 {신학정치론}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는데, 최원 형은 제가 {신학정치론}의  common notion의 용법을 간과한 가운데, common이 “공통적”이라는 사실을 못보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2). 제가 지난 답변에서 {윤리학}만을 다룬 것은 그 이전에 최원 형이 지난 번 글에서 notion의 번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참조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윤리학}이 “나는 사고한다”[cogito―데카르트]가 아니라 “인간은 사고한다”라고 공리화하고 나서, 인간은 자신의 의념들이 공통의념들로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점을 보여주는지 이해한다."

여기서 notion을 통념으로 옮기면 이상한 말이 됩니다. "인간의 통념이 공통통념일수록 인간은 더 많이 사고한다"(진 선배님 번역, 198쪽)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이 경우 통념은 이미 공통된 관념이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면, 공통된 관념이 공통된 관념이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곧 최원 형은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notion 자체는 개별적이거나 사적인 것이라고 이해하는 듯해서, {윤리학}에 나오는 notion의 용례를 살펴보면서 그 용례에 비추어보면 notion은 결코 개별적이거나 사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거나 집단이 공유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common notion과 universal notion이 어떻게 다른지 해명하는 차원에서 {윤리학}에서 볼 때 common notions의 “common”은 일반적인 notions과 달리 실재적인 기초를 가진다, 곧 모든 물체들 또는 몇몇 물체들에 공통적인 특성들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참되거나 적합하다고 말한 거지요.

제가 볼 때 최원 형 생각의 난점은 notion은 사적이거나 개별적이고 common notion만이 공통적이다라고 간주한다는 데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사고한다Homo cogitat”는 {윤리학} 2부의 공리는 common notion을 가진 사람에게만 적용되지, notion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전혀 적용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곧 스피노자가 이 공리에서 데카르트의 “ego cogito” 대신 유적인 인간을 주어로 하는 "인간은 사고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고는 항상 이미 공동적이다, 사고는 항상 이미 소통을 함축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고, 이 점에는 최원 형도 동의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 최원 형이 생각하듯이 notion을 가진 사람은 사적이고 개별적으로 사고하고 common notion을 갖는 사람들만 공통적이고 소통을 한다면, notion만을 가진 사람들은 일종의 인식의 자연 상태 안에서 혼자 고립된 채로 사고하는 원자론적 cogito가 아니겠습니까? 그럴 경우 “인간은 사고한다”는 공리는 공리가 아니게 되겠죠. 더욱이 어떻게 자연 상태 안에 고립된 채 존재하는 개별적인 cogito들이, 말하자면 사회상태, 국가를 설립해서 common notion을 가지게 되는지도 더 의문스럽지 않겠습니까?  

이 점과 관련하여 최원 형은 지난 번 제 글의 핵심 논점은 간과한 듯한데, 다음 구절이 제 글의 핵심 논점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최원 형이 인용한 발리바르의 문장도 약간의 모호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문장 전후의 맥락을 보면 발리바르는 notion은 개별적인 것이고 notion commune은 공통적인 것, 교통을 함축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그렇지 않죠. 모든 notio가 “보편적인 것”이고, 이러한 보편적인 notio를 형성하는 두 가지 방식, 하나는 부적합하고 상상적인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적합하고 합리적인 방식인 두 방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보편자를 구성하는 또는 인식하는 두 가지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본다면 1부 [부록]이나 4부 [서문]에 나오는 notio에 관한 용법은 아주 일관된 셈입니다. 

제가 볼 때 notio나 notio communis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이 진정으로 혁신적인 점은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 역시 notio communis에 대한 논의에서 이전까지의 논의와 단절된 면모를 보여주지만, 결코 notio에 대한 발생적인 설명을 제시하지는 못했으며, 더 나아가 notio를 보편자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두 가지 상이한 인간학적, 심지어 정치적인 방식의 문제로 보지는 못했죠.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텐데, notio를 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의 문제는 윤리적, 정치적 개체화의 상이한 양식에 관한 쟁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제가 발리바르의 주장이 모호한 인상을 준다고 말한 것은, 최원 형이 이 말을 ‘notion은 개별적이고 common notion만이 공통적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notion으로 사고하는 것보다 common notion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더 많이 사고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 최원 형이 (번역하고) 해석하는 식의 말을 하지는 않지요. 따라서 발리바르의 진의를 정확히 해명하려면, 곧 그의 말에서 모호함의 인상을 제거하려면, “더 많이 사고한다”는 말을 잘 이해하는 게 중요하겠죠.

그런데 최원 형은 답 글의 첫머리에서 “제 판단으로 그 구절에서 common은 여러 사람에게 공통되다는 뜻으로 발리바르가 쓴 것이 확실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최원 형의 이 말은, 위에서 말했듯이 제가 common notion에서 “common”을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공통성을 가리키는” 것이거나 “단순히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어떤 부분의 일치에 대한 인식을 의미할 뿐”인 것으로 이해한다고 전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제 말 뜻이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은 제가 바로 다음에 덧붙인 구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모든 notio가 “보편적인 것”이고, 이러한 보편적인 notio를 형성하는 두 가지 방식, 하나는 부적합하고 상상적인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적합하고 합리적인 방식인 두 방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보편자를 구성하는 또는 인식하는 두 가지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다시 말해 제 말은 universal notion을 형성하는 것과 common notion을 형성하는 것은 보편자를 구성하거나 인식하는 상이한 두 가지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편자를 구성하거나 인식하는 것은 개인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죠. 그것은 항상 어떤 집단적인 사고 양식 그리고 더 나아가 삶의 양식과 결부된 문제입니다. 스피노자가 {윤리학} 1부에서 목적론적인 편견에 빠진 사람들, 따라서 예속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그들이 자연을 설명하는 방식을 해명하기 위해 notions에 관해 논의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닙니다. 곧 notions 또는 universal notions은 예속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및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의 집단적인 사고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지,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최원 형이 강조하는 common notions의 “이론(주의)적” 측면과 “실천(주의)적” 측면도 해명이 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는 common notions의 용법과 관련하여 이론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반면, {신학정치론}에서 그 실천적인 측면을 시사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합니다. {윤리학}에서 스피노자는 부적합한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 더 나아가 수동적인 삶의 양식에서 능동적인 삶의 양식으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죠. 이런 목표를 염두에 둔다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1종의 인식의 상태에서 벗어나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을 획득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1종의 인식과, 2-3종의 인식 사이에는 일종의 단절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1종의 인식이 부적합한 인식이고 “오류의 유일한 원천”인 반면, 2-3종의 인식은 적합한 인식이라고 말하는 데서 이를 알 수 있겠죠. 요컨대 양자 사이에는 이행의 관계가 존재합니다. common notions은 이러한 이행을 달성하기 위한 기반이자 동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1종의 인식, 곧 상상이나 의견, 또는 universal notions은 거짓과 오류, 기만으로 특징지어집니다. 다시 말해 배제하고 제거하고 떠나야 할 영역으로 간주되지요. 따라서 여기서는 예속 상태에 놓여 있는 무지자, 우중과 자유, 해방, 구원 등을 달성한 현자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존재하고, 무지의 상태, 예속과 기만의 상태에서 벗어나 적합한 인식과 자유, 구원을 향해 전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결국 현자도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수동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우중들과 더불어, 그들과 상상과 언어를 공유한다는 것이죠. {윤리학} 5부 마지막에 가서 “우중vulgus”이라는 용어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죠. 따라서 {윤리학}의 핵심 주제는 오류와 가상의 원천인 1종의 인식에서 벗어나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으로 나아가는 전진적인 과정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1종의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 상상과 언어의 사용을 그만 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신학정치론}이 정치학적으로만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학정치론}의 주요 주제가 현자와 대중의 공통적인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 또는 좀 더 나아가 상이한 notions을 갖고, 상이한 종교, 상이한 세계관, 가치관 등을 갖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점이었기 때문이겠죠(발리바르가 Sub spicies universalis라는 논문에서 {신학정치론}에 나타나는 “실천적 보편성”의 문제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점이겠죠). 곧 {윤리학} 5부 마지막에서 홀연히 등장하는 우중과 현자의 관계라는 문제를 재조명해볼 수 있는 근거를 {신학정치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고, 이 때문에 common notions의 문제도 새롭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볼 경우 common notions의 실천적인 문제는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우중들의 지니는 notions을 개조하는 것, {윤리학}에서처럼 완전히 notions을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예속 상태에, 곧 신학권력의 지배 아래 있는 우중들의 notions을 개조하는 것이 주요한 문제가 됩니다. 여러 집단들이 각자 자신들의 notions(스피노자에게는 특히 상이한 종교적 notions이 문제일 텐데요)을 고집하는 상태에서는 첨예한 갈등과 폭력,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점과 관련하여 스피노자의 테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진정한 종교의 기초로서 “Credo minimum”이라는 게 있지요. 다시 말해 신에 대한 복종과 경배를 정의 및 박애와 등치시키는 실천적인 교리가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common notions의 한 가지가 됩니다. 둘째는 자유로운 공화국을 위한 부정적인 기초(다시 말해 왜 개인적인 의견과 사고, 발언, 종교 등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는가에 관한 논거)로서 언어의 공통성(또는 사고의 조건으로서 소통 및 그 물질적인 토대로서 언어)이라는 것이 있겠죠. 사실 {윤리학}에서 언어는 상상에, 1종의 인식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데 비해, 여기서는 모든 사람들(따라서 우중만이 아니라 지식인까지도)이 공유하는 것이라는 점이 더 부각되죠. (물론 과연 {윤리학}에서 언어가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만 간주되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최근 여러 주석가들이 보여준 것처럼 {윤리학}에서도 기호 및 언어의 자연성, 물질성에 관한 논의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언어나 기호 또는 notions 일반의 문제에서 {윤리학}과 {신학정치론}을 지나치게 대립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우리는 왜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인간의 notions이 common notions일수록 인간은 더 많이 사고한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앞서, “나는 사고한다”고 말하지 않고 “인간은 사고한다”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때, <<더 많이 사고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1) 여기서 “더 많이 사고한다”는 것은 최원 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공유한다”는 의미로만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서로 공유한다”는 것은 notions 일반의 특징이지, common notions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2) “더 많이 사고한다”는 것은 <<더 참되게, 더 적합하게 사고한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더 참되게, 더 적합하게 사고한다는 것을 가리키죠. 그리고 이 때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참되게 사고한다는 것은, 기존에 존재하는 인식의 양식과 삶의 양식, 곧 1종의 인식 및 미신적이고 예속적인 삶의 양식에 대한 개조의 투쟁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이미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부적합한 인식과 미신적인 삶의 양식에 대한 개조가 없이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참되게 사고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그런데 notions 일반 속에 이미 “여러 사람들이 서로 공유한다”는 특징이 들어 있지 않다면, 이런 투쟁의 쟁점, 이런 개조의 쟁점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3) 따라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common”을 최원 형처럼 “서로 공유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common의 의미를 평면화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적이고 개별적으로 사고하던 개인들이 어떤 계기로 인해(그러나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공동으로 사고하게 된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4) 요컨대, notions 자체 안에 이미 “여러 사람이 공유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으며, common notions은 notions과 다른 어떤 지평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적인 notions 내부에서, 그것들을 개조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더 많은 것을 사고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해준다고 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common notions이 그런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단지 “공통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들에 공통적인 특성”을 표현하는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 번에 {윤리학}에서 common notions은 notions과 달리 “실재적인 기반을 지닌다”고 말할 때 의미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5) ㅎㅎㅎ 그래서 결국 제 생각으로는, 적어도 스피노자에서 notion은 “통념”이라고 번역하는 게 좋겠다고 봅니다.

어쨌든 최원 형이 적극적으로 토론에 임해줘서, 서관모 선생이나 최원 형의 의도를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된 듯합니다. 아마 다른 분들에게도 도움이 많이 됐을 거라고 믿습니다. 저로서는 웬만큼 이야기를 한 셈이니까, 특별한 쟁점이 새로 제기되지 않는다면, 다음 번 최원 형의 답글로 이 문제에 관한 토론은 마칠까 합니다.

타향에서 추석 잘 보내시고, 알라딘 주인장 여러분도 즐거운 한가위 맞으시기 바랍니다.

아, 그리고 번역본을 한 부 보내주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직 책은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제가 11월 초에

한국에 한 번 들어갈 예정이어서, 들어가서 살 생각이었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다른 책을 읽을 여유가 없기도

하고요. 그래서 책을 보내시려면 이곳으로 부치지 마시고 장진범 형에게 맡겨두면, 제가 한국에 들어가서

만나서 받으면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힘들게 번역한 책을 당연히 사서 봐야 하는데 그냥 덥석 받자니 염치가

없기는 하지만, 고맙게 받아서 열심히 읽겠습니다. 서관모 선생에게나 최원 형에게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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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avinsky 2007-09-23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고 모르겠다. 빙빙@.@ ~~~

balmas 2007-09-24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Mravinsky님, 앞으로 스피노자 공부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