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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실텐데, 이렇게까지 긴 글을 써주시고, 게다가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의 notion의 용례를 전부 열거해주시기까지 하니 참 한 편으로 감사하고 선배님의 열정이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저는 열정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아는 것도 얼마 없는 처지라서 선배님처럼 긴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 죄송하군요. 한가지 시작하기 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서관모 선생의 말씀에 관련된 부분은 제가 뭐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점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먼저 발리바르의 논문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에 나온 문제의 그 구절에서 d'autant plus que ... davantage 관용구의 번역은 선배님의 번역이 맞습니다. 제가 조금 부주의했군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여기 저기 읽으면서 오역이 있는 것들을 모으고 있는데, 그 구절도 정오표에 포함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잘못 지적해주신 것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이런 오역이 있는 것을 지적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나저나 전에 이메일을 선배님께 보냈는데(엠파스 쪽) 받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아직 책을 손에 받질 못했지만, 받게되면 한 권 보내드릴까 생각하고 있는데, 벌써 주문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주문하지 않으셨으면 말씀해주십시요.^^

어쨌든 관용구 번역은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진선배님께서 그 구절에서 notion과 common notion을 각각 '통념'과 '공통통념'으로 옮긴 것이 저에게는 적절하다고 여겨지지는 않는군요. 제 판단으로 그 구절에서 common은 여러사람에게 공통되다는 뜻으로 발리바르가 쓴 것이 확실합니다. 선배님께서 발리바르의 말이 얼마간 모호하다고 말씀하신 것과 반대로 저는 발리바르의 말이 거기서 매우 정확하다고 생각하고, 발리바르의 말을 모호하게 여기시는 것이야말로 선배님이 notion을 통념으로 옮기기 때문에, 그리고 common notion의 common을 너무 일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도 두 가지 정도를 간단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진선배님은 notion이란 명확히 1종의 인식에 속하는 것이고 common이 그 앞에 붙어 줌으로써 2종의 인식이 되므로, 합리성의 원인은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공통성을 가리키는 common에서 주어져야 한다. notion은 그 자체로는 여러사람들에게 두루두루 통용되는 것으로 거기서 통용된다는 측면은 common notion의 common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윤리학}과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조금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진선배님도 잘 아실 것입니다. {윤리학}은 {지성개선론}보다는 덜 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이론(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반면 {신학-정치론}은 좀 더 실천(주의)적인 태도를 보이지요. 최근 '보편의 외양 하에서'라는 글에서도 발리바르가 이 문제를 잠시 다루지요.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반오웰..."의 한 각주에서 이러한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제 번역에서 가져옵니다.

"{지성개선론}과 {윤리학} 사이에 있는 단절에 관하여, 들뢰즈의 논증은 {윤리학}에서 “공통의념들”을 제시하는 두 가지 양식(논리적 양식과 실천적 양식)을 잘 절합하게 해 주고, 그리하여 주지주의적 독해에 종지부를 찍게 해 준다. 그러나 p. 270의 주석 6번[국역본, 393쪽 주석 6번]은 {신학-정치론}이 (인식의) “종류들을 혼합”하고 있다는 데에서, 많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느끼는 당혹감을 보여준다."

여기서 발리바르는 {신학-정치론}이 인식의 종류를 "혼합"하는 듯이 보이고 이 때문에 많은 이론가들이 당혹감을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윤리학}에서 common notion은 분명 2종의 인식으로 제시되지만, {신학-정치론}에서는 1종의 인식에 속하면서도 어떤 실천적 합리성을 갖는 것으로 논의됩니다. 그리고 더욱이 이는 대중들이 공유하는 '언어'로부터 그러한 합리성의 토대를 발견합니다. 이어서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로서는[발리바르 자신으로서는], 스피노자의 이중성이라는, 또는 그의 상대자인 기독교인들의 편견에 대한 이른바 영합이라는 나태한 논증을 배제하고, 󰡔신학-정치론󰡕의 이러한 비순수성에서 (네그리가 말하는) 체계의 “두 번째 정초(定礎, fondation)”의 원동력만이 아니라, 󰡔윤리학󰡕의 인식론과 부분적으로 모순되는, 그리고 이 인식론의 아포리아들을 비판할 수 있게 해 주는 가능한 또 다른 정초의 실마리를 보고 싶다. 이러한 비순수성은 언어(또는 기호)의 정의를 상상의 일반적 개념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상을 물질적 교통, 제도적 이야기(récit), 그리고 역사적 언설(parole)의 요소 안에서 완전히 다시 사고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신학-정치론}에서는 적어도 common notion의 common은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된다는 의미를 분명히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그것이 '실천적인 합리적 인식'이 되는 것이지요. 물론 이 맥락에서의 합리성이란 이론적인 합리성을, 즉 개념의 수준에 도달한 2종의 인식의 합리성을 정확히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윤리학}에서 2종의 인식에 이미 속하는 것으로서의 common notion이라면 그것은 말하자면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 개념concept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개념'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배님의 입장에서도 2종의 인식을 '통념'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확실히 어색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common notion이 그렇게 일관되게 이론주의적인 방식으로 사고될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즉 common notion 자체가 통념과 개념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는 것이 정확히 문제입니다. notion 자체도 통념과 개념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지요. universal notion의 다른 두 가지와 common notion이 모두 notion인 것도 이런 진동의 폭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스피노자가 notion을 단순히 오류에 가득 찬 무지한 자들의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common notion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예 concept 또는 다른 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혼란을 유발할만한 notion이라는 말을 구태여 쓸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어쨌든,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notion이 {윤리학}에서  상상적인 것,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사용될 뿐 아니라 무지자들의 잘못된 관념들로서의 상상적 관념으로 정의되는 예가 있다는 것이 저로 하여금 그 말을 '통념'으로 단순히 번역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신학-정치론}에 더욱 잘 나타나듯이 notion은 명확히 언어의 사용과 관련되어 있으며, 의미들의 교통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최소한의 '실천적 합리성'을 갖는 것이며(그러고보니 '뜻 의'를 써서 '의념'이라 한 것이 더욱 돋보이는 군요), {윤리학}이 보여주듯이 모종의 인식론적 단절에 의해 '개념'의 수준으로까지, 즉 notion으로서의 최대의 합리성으로까지 격상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notion에도 이를테면 역량의 최대값과 최소값이 존재한다고나 할까요?

 

둘째, 진선배님은 universal notion에 대한 설명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더욱이 스피노자에서 notio는 항상 보편적입니다. 개별적인 notio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편적인 notio를 형성하는 상이한 방식, 각자의 기질과 습관에 따라 달라지는 상이한 방식이 존재할 뿐입니다."

 

저는 여기서 스피노자의 universal notion이라는 말을 진선배님이 이해하는 방식이 조금 의문스럽습니다. 제가 선배님의 의도를 맞게 읽은 건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여기서 universal을 선배님은 '다수 또는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notion은 그러한 의미에서 universal 하기 때문에 notion을 통념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universal은 개체들의 독특성에 대비되는 의미에서 보편적이라는 의미로, 즉 singular에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universal하다는 의미로 이해하지 많은 사람에게 공통되다는 뜻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스피노자가 universal notion에 대해서 주는 사례들이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사람, 말, 개" ...이것들은 모두 개체들의 독특성의 추상들의 결과로서의 보편적인 notion이지요. "개라는 관념은 짖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도 여기서 함께 떠올리면 더욱 좋겠지요. 즉 저러한 notion들은 개체들의 독특성을 추상함으로써(혼동을 대가로 치루고) 얻어지는 관념이라는 점에서 universal하다는 의미이지, 모든 사람들이 같은 관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universal하다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notion들이 개개인마다 상이한 방식으로 형성된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사람, 말, 개'와 같은 것에서 모든 사람들(또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말' 또는 '기호'일 것입니다. 같은 말을 가지고 상이한 관념들을 형성하는 것이지요.

이제, 발리바르가 스피노자의 경우 '나는 사고한다'고 말하지 않고 '인간은 사고한다'고 말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notion이 common notion이 될 수록 더 많이 사고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호함 없이 이해될 수 있지 않나 합니다. 저는 스피노자의 common notion이란 단순히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어떤 부분의 일치에 대한 인식을 의미할 뿐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해서는 스피노자를 '경험주의자'로 만들기 쉽지요. 스피노자에게는 다른 테제들이 있으며 이를 통해서 그 구절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은 처음부터 교통 속에서만 사고하며, 말을 가지고 사고하고, 말 속에서, 또는 말을 가지고 형성하는 관념들 속에서, 이를테면 '인식론적 단절'을 만들어 냄으로써 사고하는데, 이러한 맥락 안에서만 대상인 개체와의 공통성이라는 것이 이른바 '단절'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겠지요. 또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notion들을 공통된 것으로 점점 더 일치시켜 나아가고, 이를 통해 더욱 더 인식할 능력들을 배가시킬 수 있게도 되는 것일테고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많은 것을 인식하기 위한 투쟁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요? 

어쨌든 이렇게 notion이 그 자체로 다양한 수준의 의미층에 걸쳐있거나 또는 그 사이에서 진동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단순히 통념으로, 또는 단순히 개념으로 옮길 수 없으며 '의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역능에 대해서는 좀 더 간단하게 답변드리고 싶은데, 역능 대신 문맥 따라 여러가지로 옮기자는 입장도 가능할 수 있고, 좀 더 통일성을 부여해서 역능이라고 옮기자는 것도 가능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puissance 같이 논란이 되는 단어는 될 수 있으면 통일성을 부여하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몇몇 용어를 번역어로 사용해도 최대한 갯수를 줄이는 것이 좋다고 보고요. 역능이 어떻게 권력을 표현할 수 있는가는 사실 반복적인 사용이 정당화시켜준다고 말씀드릴 수밖에는 없네요. 이는 그 말이 아직 (알튀세르적인 의미에서의) 어떤 '공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겠지요.

그리고 역능은 들뢰즈주의나 네그리주의에서만 사용되어오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윤소영 교수나 서관모 교수가 오래동안 지속적으로 사용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사용법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능동성을 강조해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알튀세르주의자들은 역량과 권력을 그렇게 외재적으로 대립시키지 않는다면, 반드시 역량에 해당하는 역능으로 능동성만 강조하기 위해 사용해오진 않았을테고요.

감사합니다.

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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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 형이 좋은 답변을 해줘서 논의가 좀더 내실 있게 진행될 수 있을 듯합니다. 서관모 선생의 경우는 아마도 이런 논의에 나서기가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한 세대 아래의 후배들과 공개적으로 이런 문제에 관해 논의하기는 좀 어려울 수도 있겠죠. 물론 답변을 해주신다면 좋겠지만, 그거야 뭐 서관모 선생이 알아서 하실 일이고, 어쨌든 최원 형이 적극적으로 답변을 해줘서 논의가 좀더 진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notion에 관해서 본다면, 최원 형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될 수 있을 듯합니다.

(1) notion을 “통념”으로 번역하기 어려운 이유

(2) notion에 대하여 “의념”이라는 번역어를 제시한 이유

(1)에 대해서도 두 가지 내용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1) 공통 통념이라는 번역어는 중복적이지 않느냐 하는 점

(1-2) notion을 “통념”으로 이해한다면, common notion이 가진 “합리성”의 측면이 잘 살아나지 않는다는 점

(2)의 경우는, notion이 갖는 의미를 지정하기 위해 새로운 기표를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고 이런 뜻에서 “의념”이라는 신조어를 제안한다는 주장으로 집약되는 것 같군요.

최원 형의 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발리바르 인용문 번역에 대하여

우선 최원 형이 제시한 발리바르 인용문을 한번 검토해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스피노자 반오웰]에 나오는 한 구절인데, 흥미 있는 것은 제 번역과 최원 형의 번역의 내용이 꽤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최원 형이 처음에 큰 따옴표로 제시한 것은 이번 번역본에 수록된 최원 형 자신의 번역인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의 원문과 함께 두 가지 번역을 한 번 비교해보겠습니다.

원문 

“On comprend pourquoi l'Ethique ne postulait pas que "je pense", mais que "l'homme pense", avant de montrer qu'il pense d'atant plus que ses notions sont davantage des notions communes.”(E. Balibar, La crainte des masses, Galilée, 1997, p. 93)

최원 형의 번역

"우리는 왜 {윤리학}이 “나는 사고한다”[cogito―데카르트]가 아니라 “인간은 사고한다”라고 공리화하고 나서, 인간은 자신의 의념들이 공통의념들로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점을 보여주는지 이해한다."

제 번역

“우리는 왜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인간의 통념들이 공통 통념들일수록 인간은 더 많이 사고한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앞서, “나는 사고한다”고 말하지 않고 “인간은 사고한다”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세부적인 차이점들은 무시한다면 최원 형의 번역과 제 번역의 주요 차이점은 밑줄 친 부분으로 집약되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러한 차이점은 notion 및 common notion의 의미에 대한 이해의 차이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두 가지 번역의 차이점은 일단 불어에서 “d'autant plus A que ... avantage(plus) B”라는 숙어와 관련이 있는데, 제가 알기로 이 숙어는 “B일수록 더 A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불어 사전에 나오는 예문을 하나 든다면 이런 게 있습니다. “잘못이 크면 클수록 더 크게 후회하기 마련이다Le regret est d'autant plus vif que la faute est plus grave.” 다시 말해 이 숙어는 B가 커질수록 A도 커진다는, 양적인 증가(또는 moins이라는 부사가 쓰일 경우에는 양적인 감소)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밑줄 친 부분은 “인간의 notions이 common notions일수록 인간은 더 많이 사고한다”고 번역할 수 있겠죠. 제 번역은 이런 관점에서 나온 번역입니다.

반면 최원 형은 이 숙어를 “B가 A의 (배타적인) 원인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하시는 듯합니다. “인간”은 “notions이 common notions이 되는 만큼만”(B) “사고한다”(A)는 번역문이 이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숙어를 “B하는 만큼만 A한다”는 뜻으로 이해한 셈인데, 제가 보기에 이건 이 숙어의 의미를 좀 잘못 이해하신 듯합니다.

그런데 이 번역은 단지 문법상의 문제이기에 앞서 내용상으로도 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최원 형의 번역대로 한다면 사람들은 notions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전혀 사고하지 않는 셈이 됩니다. 최원 형이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notions을 “개별적인 것”, “어떤 개인이 혼자서만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2. 스피노자에서 notio와 notio communis의 의미

따라서 내용의 측면에서 이 점을 좀더 해명하려면 스피노자가 쓰는 notion과 common notion의 용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원 형은 답변을 쓰면서 제가 번역한 {스피노자와 정치} 말미에 수록된 “용어 해설”의 “notion” 항목을 참조하신 듯한데, 용어 해설의 그 항목보다는 제가 지난 번 글에 링크해놓은 “스피노자에서 공통통념 개념 I”이라는 제 논문을 참조해주셨으면 좋겠군요(http://blog.aladin.co.kr/balmas/1059302)). 별로 보잘 것 없긴 합니다만, 어쨌든 그 논문이 이 문제에 관한 제 생각을 제일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은 것인 만큼, 좀 더 정확한 논의를 위해서는 이 논문에 준거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우선 스피노자에서 notio의 용례를 보면, {윤리학}에서 이 단어는 총 24번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래의 목록이 {윤리학}에서 이 단어가 등장하는 곳들입니다. (괄호 안의 숫자는 빈도수를 가리킵니다)

1부 정리 8의 주석 2 (1)

부록 (5)    notio만 단독으로 사용

2부 정리 38의 따름정리 (1)

2부 정리 40의 주석 1 (6)

2부 정리 40의 주석 2 (2)

2부 정리 44의 따름정리 2의 증명 (1)

2부 정리 47의 주석 (1)

2부 정리 48의 주석 (1)

3부 정리 56의 주석 (1)  notio만 단독으로 사용

4부 서문 (3)   notio만 단독으로 사용

4부 정리 37의 주석 2 (1)   notio만 단독으로 사용

4부 정리 64의 따름정리 (1)   notio만 단독으로 사용

이 중에서도 notio communis나 notio universalis 같이 특정한 규정과 더불어 사용되지 않고, notio이라는 용어만 따로 사용되는 곳은 표시해놓은 것처럼 11군데입니다. 우선 이렇게 notio만 따로 쓰이고 있는 곳에서 이 단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기로 하죠.

먼저 1부 [부록]에 나온 용법과 4부 [서문]에 나온 용법을 한 번 보지요. 4부 [서문]의 용법은 사실 1부 [부록]에 준거하고 있기 때문에 한데 묶어서 보는 게 좋습니다.

1부 [부록]에 나온 notio에 대한 용례는 이렇습니다. 라틴어 원문과 더불어, 다른 분들의 참조의 편의를 위해 영어 번역을 첨부하겠습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나온 Elwes의 이 번역은 문제가 적지 않기 때문에, 군데군데 조금 수정을 했습니다(특히 원문의 notio를 어떤 경우는 “abstract notion”으로 어떤 경우에는 “explanation”으로, 어떤 경우에는 “abstraction”으로, 또는 “category”로 번역하고 있어서 수정이 불가피했습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인터넷 상에서는 더 나은 최신 번역본을 구하기는 어렵더군요.

(I) 

“Postquam homines sibi persuaserunt omnia quæ fiunt propter ipsos fieri, id in unaquaque re præcipuum judicare debuerunt quod ipsis utilissimum et illa omnia præstantissima æstimare a quibus optime afficiebantur. Unde has formare debuerunt notiones quibus rerum naturas explicarent scilicet bonum, malum, ordinem, confusionem, calidum, frigidum, pulchritudinem et deformitatem et quia se liberos existimant, inde hæ notiones ortæ sunt scilicet laus et vituperium, peccatum et meritum sed has infra postquam de natura humana egero, illas autem hic breviter explicabo.”

“After men persuaded themselves, that everything which is created is created for their sake, they were bound to consider as the chief quality in everything that which is most useful to themselves, and to account those things the best of all which have the most beneficial effect on mankind. Further, they were bound to form notions for the explanation of the nature of things, such as goodness, badness, order, confusion, warmth, cold, beauty, deformity, and so on; and from the belief that they are free agents arose the further notions praise and blame, sin and merit. I will speak of these latter hereafter[이게 나중에 4부 서문에 나올 내용입니다], when I treat of human nature; the former I will briefly explain here.”

(II) 

Cæteræ deinde notiones etiam præter imaginandi modos quibus imaginatio diversimode afficitur, nihil sunt et tamen ab ignaris tanquam præcipua rerum attributa considerantur quia ut jam diximus, res omnes propter ipsos factas esse credunt.”

The other notions are nothing but modes of imagining, in which the imagination is differently affected, though they are considered by the ignorant as the chief attributes of things, inasmuch as they believe that everything was created for the sake of themselves.”

(III)

Videmus itaque omnes notiones quibus vulgus solet naturam explicare, modos esse tantummodo imaginandi nec ullius rei naturam sed tantum imaginationis constitutionem indicare et quia nomina habent, quasi essent entium extra imaginationem existentium, eadem entia non rationis sed imaginationis voco atque adeo omnia argumenta quæ contra nos ex similibus notionibus petuntur, facile propulsari possunt.”

We have now perceived, that all the notions commonly given of nature are mere modes of imagining, and do not indicate the true nature of anything, but only the constitution of the imagination; and, although they have names, as though they were entities, existing externally to the imagination, I call them entities imaginary rather than real; and, therefore, all arguments against us drawn from such notions are easily rebutted.”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스피노자는 notio는 "목적론에 빠진 사람들"(I) 내지 "무지한 이들ignari"(II)이 “사물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로 드는 것들은 “선, 악, 질서, 혼란, 따뜻함, 차가움, 미, 추, 칭찬과 벌, 죄와 공적”(I) 등이 있죠. 그리고 또 그는 이러한 notiones는 “상상의 양태들”에 불과하며(II, III), 전혀 “사물의 참된 본성”을 말해주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III)

다음으로 4부 서문에 나오는 용례를 좀더 보기로 하죠.

(I)

“Perfectio igitur et imperfectio revera modi solummodo cogitandi sunt nempe notiones quas fingere solemus ex eo quod ejusdem speciei aut generis individua ad invicem comparamus.”

“Perfection and imperfection, then, are in reality merely modes of thinking, or notions which we form from a comparison among one another of individuals of the same species.” 

(II) 

“solemus enim omnia Naturæ individua ad unum genus quod generalissimum appellatur, revocare nempe ad notionem entis quæ ad omnia absolute Naturæ individua pertinet.”

“For we are wont to refer all the individual things in nature to one genus, which is called the highest genus, namely, to the notion of Being, whereto absolutely all individuals in nature belong.”

(III)

“Bonum et malum quod attinet, nihil etiam positivum in rebus in se scilicet consideratis indicant nec aliud sunt præter cogitandi modos seu notiones quas formamus ex eo quod res ad invicem comparamus.”

“As for the terms good and bad, they indicate no positive quality in things regarded in themselves, but are merely modes of thinking, or notions which we form from the comparison of things one with another.”

보다시피 4부 [서문]에 나오는 notio의 용법은 1부 [부록]과 유사합니다. 두 경우 모두 notio는 “단지 상상의 양태”이거나 “단지 사고의 양태”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4부 [서문]에서는 이러한 notio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관한 흥미로운 언급들이 있다는 점인데, 스피노자는 이러한 notiones는 사물들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형성된다고 말하고 있죠. 이러한 차이는 2부에서 notiones에 대해 발생적인 원인에 의한 설명이 제시되었다는 데서 생겨나는 차이점입니다.

따라서 notio 및 notio communis에 관한 스피노자의 좀 더 핵심적인 주장을 보기 위해서는 2부의 논의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우선 스피노자가 notio communis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보고서, 그 다음 2부 정리 40의 주석 1과 주석 2를 살펴보기로 하죠. 그런데 주석 1은 상당히 길기 때문에, 인용하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내용만 간추려서 보겠습니다. 전부 다 살펴보고 싶은 분들은 각자 해당 주석을 찾아보시면 되겠죠.

우선 2부 정리 38의 따름정리 1에서 notio communis가 다음과 같이 규정됩니다.

“Hinc sequitur dari quasdam ideas sive notiones omnibus hominibus communes. Nam (per lemma 2) omnia corpora in quibusdam conveniunt, quæ (per propositionem præcedentem) ab omnibus debent adæquate sive clare et distincte percipi.”

“Hence it follows that there are certain ideas or notions common to all men; for (by Lemma ii.) all bodies agree in certain respects, which (by the foregoing Prop.) must be adequately or clearly and distinctly perceived by all.”

이러한 규정은 2부 정리 37과 38에서 증명된 것, 곧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과 부분 및 전체 안에서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은 어떤 독특한 사물의 본질도 구성하지 않는다”(정리 37)와 “모든 것에 공통적이고 부분 및 전체 안에서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들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데서 따라 나오는 규정입니다.

따라서 notio communis에서 “공통적”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모든 물체들 또는 몇몇 물체들이 공통으로 지니는 것을 표현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요컨대 실재적인 기초(사물들 또는 물체들에 공통적인 것)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기초를 적합하게 인식하는, 표현하는 notio가 notio communis인 셈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notio communis와 일반적인 notio, 곧 실재적인 기초를 갖지 않는 상상의 양태나 사고의 양태로서 notio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notio는 “개별적인” 것이고, notio communis는 “공통적” 또는 “보편적인” 것일까요? 2부 정리 40의 주석 2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부 정리 40의 주석 2

“Ex omnibus supra dictis clare apparet nos multa percipere et notiones universales formare I° ex singularibus nobis per sensus mutilate, confuse et sine ordine ad intellectum repræsentatis (vide corollarium propositionis 29 hujus) et ideo tales perceptiones cognitionem ab experientia vaga vocare consuevi. II° ex signis exempli gratia ex eo quod auditis aut lectis quibusdam verbis rerum recordemur et earum quasdam ideas formemus similes iis per quas res imaginamur (vide scholium propositionis 18 hujus). Utrumque hunc res contemplandi modum cognitionem primi generis, opinionem vel imaginationem in posterum vocabo. III° denique ex eo quod notiones communes rerumque proprietatum ideas adæquatas habemus (vide corollarium propositionis 38 et propositionem 39 cum ejus corollario et propositionem 40 hujus) atque hunc rationem et secundi generis cognitionem vocabo.”

“From all that has been said above it is clear, that we, in many cases, perceive and form our universal notions:--(1.) From particular things represented to our intellect fragmentarily, confusedly, and without order through our senses (II. xxix. Coroll.); I have settled to call such perceptions by the name of knowledge from the mere suggestions of experience. (2.) From symbols, e.g., from the fact of having read or heard certain words we remember things and form certain ideas concerning them, similar to those through which we imagine things (II. xviii. note). I shall call both these ways of regarding things knowledge of the first kind, opinion, or imagination. (3.) From the fact that we have notions common to all men, and adequate ideas of the properties of things (II. xxxviii. Coroll., xxxix. and Coroll. and xl.); this I call reason and knowledge of the second kind. ”

이 부분을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많은 것을 지각하여 notiones universales[보편 통념들]을 형성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보편 통념들은] (I) 감각들을 통해 우리에게 단편적이고 혼동된 방식으로, 그리고 지성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질서 없이 표상되는 독특한 실재들로부터 [형성된다](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를 보라). 이 때문에 나는 보통 이러한 지각들을 막연한 경험에 의한 인식이라 부른다. (II) [보편 통념들은] 기호들로부터 [형성된다]. 예컨대 어떤 단어들을 듣거나 읽음으로써 우리는 실재들을 다시 떠올리고, 이 실재들에 관해, 우리가 실재들을 상상하는 수단들과 유사한 어떤 관념들을 형성함으로써 [보편 통념들이 형성된다](2부 정리 18의 주석을 보라). 전자와 후자처럼 실재들을 고찰하는 방식을 나는 다음부터 첫 번째 종류의 인식, 억견 또는 상상이라 부를 것이다. (III) 마지막으로 우리가 실재의 특성들에 대해 notiones communes[공통 통념들] 및 적합한 관념들을 갖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보편 통념들이 형성된다](2부 정리 38의 따름정리, 정리 39와 그 따름정리, 정리 40을 보라).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나는 이성 및 두 번째 종류의 인식이라고 부를 것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notiones는 “universales”하며, 이것들이 형성되는 데는 3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 두 가지는 1종의 인식을 이루며, 마지막 3번째는 2종의 인식을 이루죠. 따라서 스피노자에 따르면 보편적인 인식이냐 아니면 독특한 인식이냐는 1종의 인식과 2종의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1-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 사이의 차이입니다(3종의 인식에 관한 내용은 인용문 뒤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최원 형이 인용한 발리바르의 문장도 약간의 모호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문장 전후의 맥락을 보면 발리바르는 notion은 개별적인 것이고 notion commune은 공통적인 것, 교통을 함축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그렇지 않죠. 모든 notio가 “보편적인 것”이고, 이러한 보편적인 notio를 형성하는 두 가지 방식, 하나는 부적합하고 상상적인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적합하고 합리적인 방식인 두 방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보편자를 구성하는 또는 인식하는 두 가지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본다면 1부 [부록]이나 4부 [서문]에 나오는 notio에 관한 용법은 아주 일관된 셈입니다. 

제가 볼 때 notio나 notio communis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이 진정으로 혁신적인 점은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 역시 notio communis에 대한 논의에서 이전까지의 논의와 단절된 면모를 보여주지만, 결코 notio에 대한 발생적인 설명을 제시하지는 못했으며, 더 나아가 notio를 보편자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두 가지 상이한 인간학적, 심지어 정치적인 방식의 문제로 보지는 못했죠.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텐데, notio를 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의 문제는 윤리적, 정치적 개체화의 상이한 양식에 관한 쟁점이기도 합니다.

스피노자가 notio, 특히 1종의 인식에 속하는 notio를 어떻게 발생적으로 설명하는가 하는 것은 2부 정리 40의 주석 1(그리고 그 이전에 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 및 주석)에 잘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나온 스피노자의 설명에 따르면 notio에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이라 불리며, 우리의 추론의 기초를 이루는quae communes vocantur, quaeque ratiocini nostri fundamenta sunt” notio, 곧 notio communis가 있고, 그 이외에 “또 다른 notiones”도 존재하죠. 그는 그 예로 “이차적이라 불리는 것들[곧 notiones]quas secundas vocant”이나 사람, 말, 고양이 등과 같이 “보편적이라 불리는 notiones”를 제시하죠. 그 다음 스피노자는 “초월적 용어들termini transcendentales”이라고 불리는 것, 곧 존재자ens, 실재res, 어떤 것aliquid 같은 것들과, 사람, 말, 개 등과 같은 “notiones universales”에 대한 발생적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에 따르면 초월적 용어들은 “인간 신체가 동시에 일정한 숫자의 이미지들만을 판명하게/구분되게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곧 만약 이미지들이 이 숫자 이상으로 나타나게 되면, “이미지들은 혼동되기 시작할 것이며, 만약 신체가 동시에 그 자체로 판명하게/구분되게 형성할 수 있는 이미지의 숫자가 훨씬 더longe excedatur 초과되면 이것들은 서로 완전히inter se plane 혼동되어 버릴 것이다.”(G II 120-21) 다시 말해 만약 신체에서 이미지들이 동시에 판명하게/구분되게 형성된다면 정신도 이 이미지들을 판명하게 상상할 수 있지만, 신체에서 이 이미지들이 완전히 혼동되어 버리면 정신은 아무런 구분 없이 모든 물체들을 혼동되게 상상해서, 이 물체들이 “마치 하나의 속성 아래quasi sub uno attributo, 예컨대 존재자, 실재 등과 같은 속성 아래 포괄되는 것처럼 상상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이 용어들은 “최고로 혼동된 관념들summo gradu confusas”을 의미한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설명입니다.

  반면 notiones universales는 전자와 비슷한 원인을 갖고 있지만, 전자와는 달리 “완전히” 혼동될 만큼 많은 이미지들이 신체에서 형성될 경우에 생기는 게 아니라 “정신이 (각각의 사람의 피부색이나 키 등과 같이) 개개의 [사람들의] 적은 차이들을 상상하지 못하고 그들의 숫자도 상상하지 못하며, 단지 이 차이들이 신체를 변용하는 한에서 모두 합치하는 것만을 판명하게 상상하게 될 정도만큼 상상의 힘을 능가”할 때 생깁니다. 따라서 notiones universales는 초월적 용어들만큼 혼동된 것은 아니지만, 개개의 이미지들 사이의 차이와 실질적인 일치점 또는 대립점들을 지각하지 못하는 신체와 정신의 무능력에서 유래한다는 점에서는 초월적 용어들과 공통적이죠.

한 가지 지적하자면 스피노자는 여기서 termini transcendentales(존재자ens, 실재res, 어떤 것aliquid)와 notiones universales(사람, 말, 개)를 구별하고 있지만, 위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4부 [서문]에서는 "존재자ens"를 “notio”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양자 사이에는 엄밀한 질적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이러한 notiones universales는 모든 사람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상이하게 형성된다고 지적합니다. 곧 “각자는 자신의 신체의 성향에 따라pro dispositione sui corporis” notiones universales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사람의 직립 자세를 경탄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직립 동물로 이해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사람을 웃을 수 있는 동물로, 털 없는 두발 달린 동물로, 이성적 동물로 생각하게 된다는 거죠. 이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인간을 정의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스피노자의 비판이 얼마나 급진적인 것인지 알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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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스피노자에서 notio는 상상의 양태이거나 사고의 양태입니다. 더욱이 이는 목적론에 빠져 있거나 1종의 삶을 영위하는 무지한 이들이 사물의 본성을 가리킨다고 착각하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스피노자에서 notio는 항상 보편적입니다. 개별적인 notio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편적인 notio를 형성하는 상이한 방식, 각자의 기질과 습관에 따라 달라지는 상이한 방식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러한 보편 notio의 한 종류로 스피노자는 notio communis를 제시합니다. notio communis는 다른 notio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이지만, 다른 notio와 달리 모든 물체들 또는 몇몇 물체들이 서로 공유하는 특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실재적인 기초를 갖고 있으며, 적합한 인식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저는 notion에 대한 번역어로는 “통념”이 적합하다고 봅니다. 우리말에서 “통념”이라는 말은 보편적이라는 의미를 지닐뿐더러, 엄밀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관념이라는 뜻까지 포함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스피노자와 관련해서 본다면 “통념”이라는 말이 notio에 대한 번역어로는 상당히 적합하지 않은가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공통 통념"이라는 말이 중복적이라는 것이 최원 형의 지적이었는데,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그건 최원 형이 (1) 스피노자에서는 notio 자체가 보편적이라는 것 (2) 스피노자가 말하는 “common”은 단지 “공통적”인 게 아니라 “실재적인 기초를 가짐” 따라서 “적합함”, “참됨”이라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라는 점을 얼마간 간과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컨대 common notion이 참된 인식, 적합한 인식이라면, 그것은 이러한 “common”이 “모든 물체들이 공유하는” 또는 몇몇 물체들이 공유하는 특성을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발리바르 번역문과 관련해서 제 결론을 내리자면, 최원 형의 번역은 문법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내용상의 측면에서도 좀 문제가 있지 않나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도 notio communis를 가질 때에만 사람들이 사고한다고 볼 수는 없겠죠. 만약 그렇다면 1종의 인식,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되겠죠.


3. 의념이라는 번역어에 대하여

제가 보기에는 “의념”이라는 번역어 선택에 대한 최원 형이나 서관모 선생의 해명은 얼마간 차이가 있고, 어떤 점에서는 상반되는 듯합니다. 우선 “용어 해설” 12쪽에서 볼 수 있듯이 서관모 선생은 이 용어가 신조어가 아니라 “기공 수련과 관련된 용어”로 쓰이고 있다는 점을 시인하고 있는데, 최원 형은 이 단어가 신조어인 것처럼 말하고 있군요.

더 나아가 서관모 선생은 이 역어를 채택한 이유가 notion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국한된 관념을 가리키기 때문에 “통념”이나 “총념”은 적합하지 않고 대신 “의념”이 낫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용어의 난점 중 하나는 이 용어가 “인지의 의미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역어일 수는 없다”(11쪽)고 덧붙이고 있지요. 그런데 최원 형은 오히려 common notion이 지닌 실천적인 “합리성”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이 역어를 채택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두 가지 설명은 어떤 점에서는 전혀 상반된 것이어서, 좀 혼란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특히 스피노자와 관련하여 notion이라는 개념에 대해 새로운 기표를 만들고 싶다면, 이런 점이 우선 정리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어쨌든 저로서는 notion이라는 번역어에 대해 “의념”이라는 새로운 기표가 “통념”이라는 역어보다 어떤 점에서 장점을 지니고 있는지 잘 이해하기 어려운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4. puissance에 대하여

이미 길어졌기 때문에, puissance에 대해서는 간단히 한두 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최원 형은 “맑스는 자본의 역능이(한계 없어 보이는 그것의 파괴성뿐 아니라 항상 증가하는 그것의 생산성이) 그것 자체가 야기하는 저항의 규모를 먹고 자랄 뿐이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는 발리바르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평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puissance를 역량으로 번역하면, 너무 중립적이거나 너무 긍정적인 뉘앙스로 읽힙니다. 즉 '권력'이라는 뜻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스피노자적 맥락과 다른 맥락을 상대적으로 구별해야하는 것은, 스피노자적 맥락에서는 potentia와 potestas가 명확히 구분될 수 있지만, 다른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선 puissance를 “역능”이라고 하면 과연 “권력”이라는 의미가 포함될까 하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아마 들뢰즈나 네그리를 공부하는 분들은 깜짝 놀라지 않겠습니까? 네그리는 권력과 대비되는 “창발적인 힘” 내지 ”활력”을 표현하기 위해 puissance라는 용어를 발전시키고 있고, 또 그 때문에 국내의 연구자들은 “역능”이라는 용어를 써온 걸로 아는데, puissance에 권력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를 “역능”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하면, 이건 사실은 “역능”이라는 말에 대한 거의 상반된 두 가지 이해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그냥 다음과 같이 말해 두겠습니다.

불어에서 puissance라는 단어는 사실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인용했던 불어 사전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http://atilf.atilf.fr/dendien/scripts/tlfiv4/showps.exe?p=combi.htm;java=no;

1. “어떤 결과를 생산하는 능력. 이러한 능력에서 생겨나는 힘이나 특성Faculté de produire un effet, capacité; la force ou le caractère qui en résulte.”

2. 철학에서 쓰이는 몇 가지 용법

“형이상학(특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이거나 스콜라철학적인). (현실태와 대립하는) 잠재태 MÉTAPHYS. (notamment aristotélicienne ou scolastique). [P. oppos. à acte2] Virtualité.”

“능동적인 능력. 어떤 존재의 형태로 진입할 수 있는 현행적인 능력Puissance active. Capacité ou faculté actuelles d'accéder à une certaine forme d'être`` (FOULQ.-ST-JEAN 1962).

수동적인 능력. 자기 자신이 아니라 어떤 외부의 작인(作因)에 의해 자신이 아닌 것이 되는 단순한 가능성Puissance passive. ,,Simple possibilité de devenir ce qu'on n'est pas (...), non par soi-même, mais grâce à l'intervention d'un agent extérieur`` (FOULQ.-ST-JEAN 1962). Synon. possibilité (ibid.).”

“잠재적으로Virtuellement”

3. “수학. 곱. À la puissance n. Un nombre à la puissance n est le produit de n nombres égaux à lui-même”

4.  “(물리학 용어로) 힘이나 작용력. 특히 단위 시간에 생산되고 소비되는 또는 전달되는 일이나 에너지의 양으로, 이는 보통 와트로 표현된다Force, pouvoir d'action (d'un appareil, d'un mécanisme); en partic., quantité de travail ou d'énergie produite, consommée ou transférée par unité de temps et s'exprimant généralement en watts.”

이 밖에도 뭐 사회과학 분야나 시사 분야에서 “힘”과 등가의 의미로 쓰이는 다양한 사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grands puissances”라고 하면 “열강”이라고 번역할 수 있고 “puissance absolu du roi”라고 하면 “왕의 절대권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최원 형이 염두에 두는 것이 바로 이런 용법이겠지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다른 단어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puissance라는 단어에도 말하자면 “notion”의 차원이 있고 또 “concept”의 차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통 일상생활에서 이 단어를 쓰는 것을 “notion”의 차원이라고 한다면 철학자들이 엄밀한 규정을 붙여서 쓰는 경우는 “concept”의 차원이 되겠지요.

그런데 notion의 차원에서 본다면 puissance라는 단어가 지닌 저 다양한 의미를 모두 충족시켜 줄 만한 우리말은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잠재적인”이라는 뜻으로 번역해야 옳을 때가 있고 어떤 때는 “힘”이나 “~력”(또는 “n 제곱”)으로 번역하는 게 좋을 때가 있으며 또 어떤 때는 그냥 “능력”으로 번역하는 게 무난한 경우도 있죠. 물론 “권력”이나 “열강” 같은 식으로 번역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notion의 차원이라면 puissance에 굳이 한 가지 번역어를 고정해서 쓸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것은 “notion”이라는 단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notion”이라는 단어에도 notion의 차원과 concept의 차원이 있겠죠. notion도 어떤 맥락에서는 “용어”로, 어떤 맥락에서는 그냥 “관념”이나 “개념”으로 번역하는 게 무난하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최원 형이 인용한 발리바르 문장에서도 puissance는 notional한 차원에서 쓰인 거라고 봅니다. 그런 경우는 그냥 “자본의 권력”이라고 하면 훨씬 더 자연스럽게 읽히겠죠. 저는 “역량”이라고 써도 괜찮다고 보는 생각이긴 합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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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관모 선생이 아마 답변을 해주실 것 같습니다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저는 간단하게 몇 가지 생각해 볼만한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notion에 대해서, 진선배님이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설명한 것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전에 읽을 때에도 그랬는데, 그 용어해설 항목의 제목은 common notion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notion에 대한 설명은 적고 common notion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설명을 읽어나가다 보면, 마치 common notion이 "모든 사람(또는 다수의 사람)이 공유하고 있고 따라서 서로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합리적인 인식"이라면, 즉 common notion이 일반인들에게 어느정도 공통된 관념이라면, notion도 '통념'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는 식으로 읽혀집니다. 그러나 common이라는 말이 따로 붙어 있는 common notion에는 저러한 설명이 적절할 수 있으나 common이라는 수식이 없는 notion을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조금 논의의 여지가 있지 않나 합니다. 

왜 진선배님의 설명에서 이 두 가지가, 즉 common notion과 notion의 설명이 뒤섞이고 있을까요? 저는 그 이유가 notion을 진선배님이 '통념'으로 옮기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뒤섞임은 common notion의 번역 자체에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notion을 '통념'으로 번역할 경우, common notion은 '공통의 통념' 내지 '공통통념'이 되는데, 이는 마치 '역전앞'과 같이 동어반복적인 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통'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선배님 말처럼 common notion이 어떤 맥락에서 실천적인 측면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여전히 실천적인 "합리적인 인식"이라는 점을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즉 common notion은 단순한 통념이 아니며 또 그렇다고 개념도 아니지만(특히 {신학-정치론}의 맥락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된 "합리적 인식"이라고 여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common notion은 "공통의념"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참조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윤리학}이 “나는 사고한다”[cogito―데카르트]가 아니라 “인간은 사고한다”라고 공리화하고 나서, 인간은 자신의 의념들이 공통의념들로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점을 보여주는지 이해한다."

 

여기서 notion을 통념으로 옮기면 이상한 말이 됩니다. "인간의 통념이 공통통념일수록 인간은 더 많이 사고한다"(진선배님 번역, 198쪽)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이 경우 통념은 이미 공통된 관념이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면, 공통된 관념이 공통된 관념이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저는 notion이 갖는 가치를 지시해줄 수 있는 '기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국어에는 이런 기표가 없기 때문에 '의념'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해보자는 것은 괜찮은 시도일 수 있다고 봅니다.

서관모 선생이 notion을 과거에 '상념'으로 옮겼었는데, 제가 그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왜냐하면 동음이의어가 되고 원래 사용되는 상념의 뜻과 자신을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추측이지만, 과거에도 서관모 선생이 '항상 상'자를 선택
한 것을 보면, 아마 notion이란 어떤 의미의 안정성을 확보한 것이라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뜻 의'자를 써서 의념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한결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역량에 대해서는 전에 말씀드린 것 이상을 말씀드리기는 어렵군요. 단 용례를 보자면,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맑스는 자본의 역능이(한계 없어 보이는 그것의 파괴성뿐 아니라 항상 증가하는 그것의 생산성이) 그것 자체가 야기하는 저항의 규모를 먹고 자랄 뿐이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여기서 puissance를 역량으로 번역하면, 너무 중립적이거나 너무 긍정적인 뉘앙스로 읽힙니다. 즉 '권력'이라는 뜻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스피노자적 맥락과 다른 맥락을 상대적으로 구별해야하는 것은, 스피노자적 맥락에서는 potentia(역량)와 potestas(권력)가 명확히 구분될 수 있지만, 다른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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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x 2007-09-21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본의 역능..', '자본의 역량'이라는 번역 만큼이나 많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번역이군요. potentia-puissance가 어떤 활성으로 행위를 유발케하는 잠재력을 의미하고, potestas-pouvoir가 이미 유발된 힘이 작동하는 행위로서의 현존하는 힘(권력)을 의미한다면, potentia를 '역능'이나 '역량'보다는 '추동력'(계속적으로 행위를 가능케하는 것으로 '잠재력'이라는 번역으로는 불충분한 어감를 보충해주기에)이라고 번역하고, potestas는 '권력'으로, force는 그냥 '힘'으로, dynamique은 '동력'(힘(force)들의 연대하는 작동)으로 번역하는 게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구나 요즘 신문의 정치난을 보자면 그냥 '능력'이라고 해도될 것을 너도나도 굳이 '역량'이라는 말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그것이 몹시 불편하고 그때마다 왠지모르게 얼굴도 모르는 이곳의 주인장이 생각나더군요. 철학용어의 속화는 역설적이게도 대중이 철학적 언술을 오독하게하는 부정적 효과로 귀결되지는 않을런지... 그렇다고 서관모 선생처럼 있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힘든 용어를 힘써 만들어내는 것은 더 부정적인 효과를 낳겠지요. 15년전 '이론'지 처음 나올 때 그의 글들은 내용은 백번 쫓고픈데 읽어내기에 심히 짜증나는 것으로, 사람들이 다가가다 도망가게 만드는 역능이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군요. -사족-]

upx 2007-09-21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notion은 '의념'도 '통념'도 아닌 그냥 약한 의미의 '개념'으로 저는 이해하고 표현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balibar 인용문에서 "자신의 개념이 공통개념이 되도록..."이라고 번역을 한다해서 여기서의 개념이 concept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문맥상 충분히 이해 못할 바가 아니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즉, notion은 약한'개념'(엄밀한 철학적 함의가 없는 그냥 '--이라는 말(혹은 개념)')으로, concept는 강한'개념'(엄밀히 철학적으로 정의되는)으로, 모두 '개념'으로 번역하고 그 차이는 문맥 속에서 독자가 판단하기에 지난한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물론 꼭 필요한 경우에는 역자가 주석을 달아주면되고요). 또한 우리는 '개념'이라는 말을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지만('개념없는 놈'등등), 이 경우의 '개념'이 꼭 concept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짱꿀라 2007-09-2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곳에 오면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글들이 참 가치가 있는 것들이 많아서 좋아요. 배우는 기분으로 글들을 잘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원 2007-09-21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upx 님/ "자신의 개념이 공통개념이 되도록"에서 그 "개념"은 concept와 문맥상에서 구분이 안됩니다. 자신의 concept가 공통된 concept가 되도록...이라고 충분히 읽을 수 있지요. 그것이 구분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이미 upx님이 공통의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식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능'이라는 말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미 많이 대중화가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느껴지기로는, upx님의 포텐샤, 포테스타스 구분은 너무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보입니다. 즉 잠재성(potentiality, dynamis), 행위(action, activity, energeia)로요. 그리고 이건 뭐 저의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저는 서관모 선생의 글들이 항상 유사한 내용을 다루는 다른 사람들의 글에 비해서 수월하게 읽히고 비교적 의미전달이 잘 되는 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론지가 나올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워낙 다루는 내용이 낯선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들이 있겠지요. 그래도 이렇게 진태원 선배와 같이 용어들과 번역들을 대중들이 사용하기 좋고 의사소통하기 쉬운 것으로 바꾸려는 노력들이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사정은 점점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저도 일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번 {대중들의 공포}가 인터넷의 어떤 사람의 말처럼 '철학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를 자극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upx 2007-09-21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자신의개념'이나 '공통개념'에서의 개념이 concept로 이해된다는 것은 저로서는 전혀 불가능한('충분히 읽을 수'가 아니라)일인 것 같습니다. 개념이란 당연히 어떤 대상에 대해 (특정 철학자 마다 달리 규정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특정인에게는) 카테고리적으로 정의된 규정이고(concept de nature, concept d'homme, etc.), '나의개념'이나 '공통개념'이라고 말할 때에는 내가 (혹은 공통으로) 갖는 무엇에 대한 의미,기준,인식,등을 나타내는 약한 규정이므로 당연히 notion 이상으로는 읽히지 않는다고 저는 봅니다. 여기서 notion이란 개념이라고 명명은 되더라도 의미는 전혀 concept가 아니라 직관적이고 불확정적인 준거, 즉 '무엇 무엇이라는 말' 혹은 '어떤 것' 정도가 되리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만...
2. '포텐시아'나 '포테스타스'가 '너무 아리스토테레스적으로' 이해돼서는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오히려 그것을 일반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스피노자 등 후세인들이 달리 특수하게 사용했다면 (저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아주 많이 특수하게 사용했다고도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이 특수한 경우를 예외적으로 고려하고 설명하는 것이 옳지않을까 싶군요.
3. 철학이 전혀 대중에게 공포가 아니라 친숙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니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그걸 핑계로 말과 논리를 혼란스럽게 다룬다면 그 또한 철학이 아니겠지요. 근데 저는 그동안 남한의 철학자들 특히 진보계열 철학자들의 글에서 전자가 아니라 후자를 더 많이 느꼈고 그래서 그곳으로부터(계열이 아니라 땅에서) 도망쳤습니다. (최원님이나 진태원님은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 역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최근 몇몇 글에서 충분히 느꼈고 응원을 보내는 것이 제 입장이니 오해는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최원 2007-09-22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upx님/notion de nature, notion d'homme라는 말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말입니다. nature나 homme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concept만 되고 다른 것들은 notion이 되고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두 번째 논점에서는 포텐샤/포테스타스가 스피노자에게서는 뜻이 조금 다르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dynamis가 능동/행동에 대립된다는 의미에서의 잠재성의 뜻을 갖지만, 스피노자에게서는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이고 현대 일반 불어 용법에서 puissance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으로도, 또 스피노자의 그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일괄적으로 '역량'으로 옮기거나, 또는 일괄적으로 '추동력'이라고 옮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 다 권력이라는 측면을 포착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여러가지 말들로 마구 옮기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무슨말이 무슨말을 가리키는지가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에, 역능이라는 말을 활용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철학이 신조어를 남발해서는 안되지만, notion, puissance 등은 그 동안 논란이 매우 오래동안 있어왔고, 그래서 신조어에 대한 요구도 있는만큼, 만들어질 경우 수용력도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글을 올리는 김에 하나 더 올립니다. 곧 출간된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수록될 용어 해설 중

하나입니다. 보통은 "현전의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개념인데, 굳이 "현전"이라는 낯선 단어를 쓸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현존의 형이상학"이라고 바꿔 표현했습니다. 이 개념은 복합적인 쟁점들이

얽혀 있어서 전문적으로 다루려면 상당히 많은 논의가 필요한 개념인데, 개략적으로는

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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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의 형이상학 métaphysique de la présence




현존의 형이상학 또는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은 데리다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사용되는 대표적인 개념 중 하나다. 이 개념은 서양의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체” 작업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변형시키려는 데리다의 초기 작업을 집약적으로 표현해준다.

  따라서 현존의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는데, 간략히 다음과 같이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보통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와 시간}(1927)으로 대표되는 초기의 작업과 이른바 “전회Kehre” 이후(대략 니체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진 1930년대 후반 이후)에 전개되는 후기의 작업으로 구별된다. 초기 하이데거의 작업은 현존재Dasein의 분석으로서 기초 존재론을 확립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이러저러한 측면이나 영역들을 이론적으로 확립하려는 작업으로서 모든 학문은 인간 현존재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기 주위의 존재자들과 맺고 있는 실천적인 관계(후설이나 하버마스가 말하는 “생활세계”로 이해할 수도 있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특수한 존재자의 영역이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 자체를 해명하려는 존재론으로서의 철학은 이러한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실존”)를 이해하는 방식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데, 하이데거는 이를 바로 기초 존재론이라고 부른다.

  반면 전회 이후에 하이데거는 더 이상 인간 현존재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여 존재의 의미를 해명하려 하지 않고 대신 존재 자체의 사태에서 출발하려고 시도한다. 이를 위해 그는 서양의 철학이 형이상학화되기 이전의 사상, 곧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의 단편에 나타난 존재 이해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본문에서 논의되는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 역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는 이들의 단편에서 존재가 “현존présence”(독일어로는 Anwesen)으로서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곧 이들에게는 존재가, 현존하는 것을 현존하게 해주는 운동 내지 사건으로서 나타난다(또는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탈은폐된다”). 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벌써 존재의 망각이 일어나서 존재는 더 이상 이러한 현존하게 해줌의 사건으로서 이해되지 않고, 어떤 항구적인 실체로, 곧 “현존자présent”(das Anwesende) 내지 “현존성”(Anwesenheit)으로 간주된다(하이데거에 따르면 우시아ousia, 수브스탄시아substantia, 코기토cogito 등과 같은 서양 철학사의 근간 개념들은 이러한 존재 망각의 표현들이다). 따라서 서양의 형이상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상가들에서 탈은폐되었던 존재(곧 현존하는 것들을 현존하게 해주는 선사의 사건으로서 존재)가 점차로 망각되어온 역사이며, 이는 니체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의 형이상학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현존의 형이상학이라는 명칭 자체는 하이데거가 아니라 데리다가 붙인 것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논의를 따라 서양의 형이상학을 포괄적으로 “현존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하이데거와 달리 전 소크라테스 철학자들의 단편에서 존재가 원초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고 보지 않으며, 철학사에 속한 철학자들의 저작 속에서만 서양 형이상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하이데거 자신도 여전히 현존의 형이상학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고 본다. 


  데리다에서 현존의 형이상학은 일차적으로 기의와 기표, 또는 음성과 기록의 문제로 나타난다. 곧 그에 따르면 서양의 형이상학은 의미나 진리의 생생한 현존으로서 로고스를 추구해왔으며, 이러한 로고스는 음성을 통해서 생생하게, 현존 그대로 드러난다고 간주해왔다. 이는 플라톤이나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오래된 철학자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루소나 헤겔 또는 후설이나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 그리고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20세기의 인문과학자들의 작업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 데리다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 로고스가 생생하게 구현되는 자연적인 매체로 음성을 특권화하고 대신 문자나 기록 일반은 이러한 음성을 보조하는 데 불과한(심지어 배반하기도 하는) 부차적인 도구로 간주하는 이론에서는 어디서든 현존의 형이상학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에게 현존의 형이상학은 로고스중심주의이자 음성중심주의를 뜻하며(나중에는 특히 라캉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이는 팔루스중심주의로 확장된다), 이것이 로고스의 자연적인 발현 장소로서 음성을 특권화하는 한에서 이는 또한 기술에 대한 폄훼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데리다는 서양의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체 작업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존재의 부름l'appel de l'être”이나 “존재의 목소리voix de l'être” 같이 음성 중심주의를 함축하는 모호한 은유에 의존하고, 또 존재의 의미는 기호들, 기록들의 연관망에서 벗어나 있다고 간주하는 한에서는 여전히 서양 형이상학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고 본다.

  로고스중심주의, 음성중심주의로서 현존의 형이상학이라는 주제는 초기 데리다의 저작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지만, 80년대 이후의 후기 작업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반면 초기 저작에서는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해체”(또는 “극복Überwindung”)의 주요 개념인 “es gibt”(보통 사용되는 의미로 한다면 “~이 있다”)나 “Ereignis”(보통은 “사건”을 의미하지만, 하이데거는 이 단어에 함축된 “고유한eigen”이라는 어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또는 “장래Zukunft” 등에 대한 논의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법의 힘}이나 {시간의 선사Donner le temps}(1992), {마르크스의 유령들} 또는 {아포리아}(1996) 등에서는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또 변용되고 있다(“장래avenir”와 “도래à-venir”, “도착하는 이arrivant”, “선사don”, “임박함imminence”, “사건”, “전유”, “비전유”, “탈전유” 등이 그 사례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의 서양 형이상학 해체는 데리다 철학의 주요 원천이면서 또 가장 중요한 대결의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가 하이데거를 자신의 유령이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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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이 좀 늦었습니다. 서관모 선생이 무언가 답변을 주실까 했더니,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할 듯하군요. 그래서 먼저 최원 형 댓글에 답변을 하면서 약간의 논의를 더 보충해보겠습니다. 

우선 civilité의 번역어는 정말 “시민인륜성”이 아니라 “시민인륜”이더군요. 헤겔의 Sittlichkeit가 대개 “인륜성”으로 번역되기에 무심결에 “시민인륜성”으로 봤는데, 제가 좀 부주의했네요. 어쨌든 “시민인륜”이라는 번역어에 대한 제 견해는 지난 번과 같습니다.

그 다음 puissance의 번역어인 “역능”과 notion의 번역어인 “의념”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세밀하게 검토하자면 상당히 오랜 논의가 될 듯해서 오늘은 다음과 같은 정도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선 제가 주소를 달아놓은 프랑스 사전에 나온 notion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사전에서는 notion이라는 단어에 세 가지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A. “어떤 사물에 대한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인식”이라는 의미지요.

B. 두 번째는 “정신의 구성물, 표상”이라는 뜻으로, 관념과 동의어라고 하고 있습니다.

C. 마지막으로 철학에서 쓰이는 특수한 어법에서는 “대상의 본질적인 성격을 함축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개념과 동의어로 쓰인다고 덧붙이고 있고요.


그리고 각각의 항목에 대해 몇 가지 사례들이 나와 있고, 또 각각의 항목에서 약간의 변이형도 보여주고 있지요.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듯이 사전에 나오는 정의는 엄밀한 정의라기보다는 이런저런 용례들에 대한 규정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이러한 정의들은 불어에서 쓰이는 notion에 대한 용법들을 상당히 다양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전의 정의에 대해 제 나름대로 몇 가지 논평을 해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notion에 관한 불어의 용법에서는 일상적인 의미로 쓰이는 notion과 철학에서 전문적으로 쓰이는 notion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독일어에서 notion이라는 단어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영어의 용법은 불어와 크게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불어의 용법에 비해, 모호함, 확실한 증거 없이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신뢰를 보내는 관념 같은 의미가 좀더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사전들을 참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http://www.hydroponicsearch.com/spelling/simplesearch/query_term-notion/database-!/strategy-exact; http://dict.die.net/notion/)

일상적인 용법으로 본다면 notion은 사실 별도의 번역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단어가 쓰이는 상황에 따라, “관념”이라든가 “개념”, “용어”라든가, 또는 그냥 “말”이라고 번역해주면 무난하겠지요. 가령 “la notion d'espace”나 “la notion de cause” 같은 것들은 “공간 개념”이나 “원인 개념”으로 번역해도 좋고 아니면 “공간이라는 관념”이나 “원인이라는 관념” 또는 “공간이라는 용어”나 “원인이라는 용어” 같은 식으로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로 번역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 그런 게 자연스럽기도 하죠.

이 경우 각각의 경우에 “의념”이라는 단어를 대체한다면, 사실 매우 어색하게 들리지 않겠습니까? 반면 “통념”이라는 단어를 대체해본다면, 적어도 “의념”이라는 단어보다는 훨씬 덜 어색하게 들리리라고 봅니다. 그건 그만큼 통념이라는 말이 훨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이고, 이 경우에 notion이라는 불어 단어가 불어권에서 쓰이는 용어법과 좀더 가까운 용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뒤에서 더 생각해보기로 하지요.  

철학적인 용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 사전의 정의는 상당히 불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전에서는 notion을 “대상의 본질적인 성격을 함축하는 것”으로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관념”이라고 규정하면서 개념과 동의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사실 굳이 notion에 대한 다른 용어를 고려할 필요가 없겠죠. 그냥 “개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충분합니다. 

이 사전은 철학 사전이 아니므로, 사실 어떤 점에서는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좀 아쉬운 것은 불어 사전임에도 불구하고 바슐라르 이래 프랑스 과학철학의 전통, 다시 말해서 알튀세르나 푸코, 또는 바디우 같은 사람들의 저작에서 상당히 널리 통용되고 있는 “concept”와 “notion”의 구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알튀세르나 초기 바디우(특히 “Le concept de modèle” 같은 저작)에서 notion은 전과학적ㆍ이데올로기적인 표상들, 관념들을 가리키는 반면, concept는 과학적 개념, 인식을 나타내는 용어들을 뜻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바슐라르가 창시하고 알튀세리엥들이 개조한 “절단coupure” 및 “단절rupture”의 인식론에 의거하고 있는 용어법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발리바르, [바슐라르에서 알튀세르로: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 {이론} 95년 겨울호를 참고할 수 있겠죠.

지나치는 김에 지적하자면,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발리바르의 원래 논문 제목은 “coupure épistémologique”인데, 서관모 선생은 번역본에서 이를 “인식론적 절단”이 아니라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번역했다는 점입니다. 서관모 선생은 162쪽에 붙인 역주에서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 개념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바슐라르의 rupture를 coupure로 개명하여 사용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알튀세르 자신도 80년대에는 별도로 coupure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rupture라는 용어를 쓴다”고 지적하면서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단절”이라고 번역하고 있지요. 그 대신 양자를 구별하기 위해 원어를 병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좀 사실과 어긋납니다. 알튀세르는 단순히 rupture를 coupure로 대체한 게 아니라, 두 개념을 구별해서 함께 쓰고 있습니다(Éci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I에 수록된, “Sur la philosophie”라는 장을 보십시오. 특히 pp. 318 이하). 이건 발리바르도 마찬가지지요(Lieux et noms de la vérité, Aube, 1994 중에서 3장 “coupure et refont” 참조). 물론 두 사람이 이 두 가지 개념을 가공하는 방식에는 얼마간의 차이점이 존재하긴 합니다.  

따라서 “coupure”와 “rupture”는 서로 구별되는 용어로 번역하는 게 옳을 것 같더군요. “coupure”라는 단어가 “자르다”는 뜻을 지닌 “couper” 동사에서 나온 말이므로, “절단”이라는 번역어가 괜찮다고 봅니다. 언젠가 Gregory Elliott의 글을 보니까 “coupure épistémologique”를 “epistemological cut”이라고 옮기던데, 상당히 정확한 번역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이 번역문에서 서관모 선생은 notion을 “상념(常念)”이라고 옮기고 있는데, 왜 “상념”이라는 번역어가 “의념”이라는 새로운 번역어로 대체되었는지 그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서 선생은 이때부터 계속 notion의 번역어에 대해 관심을 가져오신 듯합니다.

다시 원래 논점으로 돌아가자면,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concept와 notion의 의미상의 차이는 서 선생이 “용어 해설”에서 인용하는 두 개의 사전에서 좀더 잘 드러난다고 봅니다. 곧 concept는 엄밀하고 정확한 이론적인 구성물에 해당하는 반면, notion은 이러한 엄밀성을 결여한 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어떤 관념이나 생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서관모 선생은 두 개의 사전을 인용하면서, notion의 또 다른 의미에 주목합니다. 곧 서 선생은 notion은 제한된 집단이나 개인들에게만 한정되어 사용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은 주장은 서 선생의 이런 생각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통념”이라는 역어는 notion에 “通”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總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통념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일반 사람들에게 공통된 생각”, “일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생각”인데, notion 일반은 “일반 사람들에게 공통된다”는 한정/특정과 무관하다.”(11쪽)

그런데 왜 서 선생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서 선생이 인용하는 사전에 나오는 다음 밑줄 친 구절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일상적인 프랑스어에서 concept는 과학, 철학, 이론의 엄밀하고 정확한 구성물에만 사용되고, 일반적으로는 조직화되고 통제된 지식 활동에 사용된다. ... notion은 개별적인 conception 또는 한 사회 집단에 의해 수용된 conception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사용되나, 엄밀하거나 정확한 정의를 전제로 [p. 10] 사용하지는 않는다.”(Alain Rey, La terminologie, PUF, 2001)”(9쪽)

따라서 서관모 선생이 “통념”이라는 번역어 대신 “의념”이라는 번역어를 제안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notion은 결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conception 또는 한 사회 집단에 의해 수용된 conception>을 의미한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 선생이 <용어 해설> 마지막에서 “[의념은] “총념”이나 “통념”에 비해 훨씬 덜 한정된 “념”이기에 notion의 역어로 상대적으로 무난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하면 중국에서 이 단어가 최근 notion의 번역어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부가적인 논거인 듯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는 좀 설득력이 부족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Alain Rey가 notion에 대해 저런 식의 정의를 제시할 때 염두에 두는 notion이 과연 어떤 용례로 사용된 것인지는 인용된 부분만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 구절 하나에 의거해서 notion이 제한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게만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 서관모 선생이 인용하는 첫 번째 사전에서는 notion이 ““정신이 획득한 일반적인 관념, 이미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제공하지만 그러나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 그러한 관념이다.”(La notion philosophique 2, PUF, 1990, p. 1771)”(9쪽)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서관모 선생은 첫 번째 사전을 인용하기 전에 “현대 프랑스어에서 notion의 사전적 정의는”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정확히 지금 인용된 이 내용은 현대 불어의 용법이 아니라 스토아학파에서 notion 또는 notio가 가리키는 의미를 뜻합니다. 이 인용문은 La notion philosophique 2에 나오는 “notion” 항목의 첫 번째 대목을 옮긴 것인데, 이 항목에서는 스토아학파에서 칸트에 이르는 notion의 내용을 역사적으로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고, 이 대목은 스토아학파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서관모 선생이 “통념”이라는 역어 대신 “의념”을 제안하기 위해 제시하는 논거는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서 선생의 주장과는 반대로 notion은 오히려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념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단 이 때 “받아들인다”는 말은 엄밀하게 학문적인 논증을 거쳐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식적으로”,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에 대해 말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을 개념적으로, 예컨대 아인슈타인이 부여하는 개념적인 의미에서 이해하고 또 사용하고 있을까요? 물리학자들의 전문적인 학술회의나 대화에서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말을 쓸 때는 그야말로 “통념적”으로 쓰는 거지요. 곧 사람들 각자가 시간과 공간에 대해 이해하는 어떤 관념, 어떤 통념에 따라 그 말을 쓰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이해는 대개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대개의 사람들은 시간은 1초, 2초, 3초, 1분, 2분, 3분, 1시간, 2시간 등등과 같이 정해진 단위에 따라 선형적으로 진행하는 흐름으로, 공간은 어떤 물리적인 실재들이 들어 있는 텅 비어 있는 틀로 이해합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화한 시간과 공간 개념에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식의 철학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갈릴레이가 상대성 개념을 도입해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과 단절한지 대략 400여년의 시간이 흘렀고, 아인슈타인이 다시 이를 엄밀한 물리학적 개념으로 개조한지는 100여년이 흘렀지만, 보통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여전히 “통념적인” 상태, “notionnel”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알튀세르가 concept와 notion을 구별할 때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 바로 이런 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푸코에서도 이와 비슷한 용법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물론 푸코는 알튀세르와 상당히 다른 경우이기는 하지만, 가령 [정신착란의 초월성transcendance du délire]라는 제목이 붙은(국역본에는 [정신착란의 선험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광기의 역사} 2부 2장(및 3-4장)을 보면, “notion”에 관한 상당히 체계적인 용법이 나옵니다. 여기서 푸코가 notions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전주의 시기에 의사나 철학자들이 광기를 분류하고 치료법을 제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비과학적인 명칭들(과학으로서 정신의학은 19세기에 형성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을 가리킵니다. 푸코는 이러한 명칭들을 가리키기 위해 아주 체계적으로 no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요. 예컨대 다음 구절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 notions은 의학적 사유의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기능보다는 오히려 의학적 사유의 실제적 작용에 더 가깝다. 윌리스의 노력에서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notionsdlsep, 그는 조광증과 우울증의 순환주기에 관한 커다란 원칙을 그 notions에 입각하여 세울 수 있게 된다. ... 그것들은 엄격한 개념정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상적 응집성에 의해 안정된 형상을 강요하면서 의학의 작업과 일체가 되었으며 ...”({광기의 역사} 이규현 옮김, 나남사, 2003, 340-41쪽)

지나가는 김에 지적한다면,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의 역자는 notion을 전부 “선험적 개념”이라고 번역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역자는 특별히 역주를 하나 붙여서 여기서 notion은 “칸트의 비판 철학에서 말하는 ‘오성의 산물’”(340-41쪽)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것은 전혀 그릇된 설명이지요. 칸트에서 notion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는 하지만, 칸트의 용법은 매우 특수할뿐더러 푸코가 사용하는 notion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역자의 그릇된 설명 때문에 국내 독자들이 {광기의 역사} 2부 2-4장에 나오는 푸코의 논의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지고 있을 뿐입니다. 아울러 이 책의 번역 상태는 전반적으로 괜찮은 편이지만, 주요한 철학적 논의가 나오는 대목에서는 꽤 많은 오역들이 있어서, 이 번역본을 기초로 학문적인 논의를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하루빨리 상당한 수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푸코의 용법은, 바슐라르 이래 프랑스 철학자들, 특히 구조주의-과학철학 노선에 속하는 철학자들에게 concept와 notion의 구별은 나름대로 상당히 일반화된 용법이었다는 점을 예시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notion에 대한 번역어로는 “통념”이 적합하며, 굳이 “의념” 같은 단어를 도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저는 “의념”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단학을 하는 분들이 사용하는 용어더군요. 그 분들은 이 단어에 “간절히 바라는 마음”, “마음을 어떤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더군요. 그래서 서 선생이 이런 의미를 아시고 “의념”이라는 단어를 제안하신 것인지, 또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더군요.

puissance에 관해 보자면, 저는 인터넷 서점에 나온 간략한 소개글에 “역능”이라는 단어가 보이길래 puissance를 이 단어로 번역했나보다 생각했는데, 스피노자의 맥락에서는 “역량”으로, 보통의 맥락에서는 “역능”으로 번역했나 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스피노자 때문에 puissance를 “역능”으로 번역해서 쓰는데, 최원 형이나 서 선생의 경우는 반대군요. ㅎㅎ

어쨌든 간에 저는 puissance나 potentia의 번역어로 “역능”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적합지 않다고 봅니다. 스피노자가 이 개념에 대해 얼마간 새로운 내용을 부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에게만 고유한 번역어를 따로 쓴다든지, 스피노자 때문에 “역능”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잠재태나 가능태와 다른 의미에서 puissance라는 개념은 상당히 오랜 전통을 지닌 개념이고, 스피노자를 포함해서 이 전통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얼마간의 차이는 있지만, dynamis/potentia/puissance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 전통과는 구별되는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대해서만 별도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가령 스토아학파나 플로티누스, 또는 브루노나 니체 등에 대해서도 각각 상이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요. 그렇게 될 경우 dynamis/potentia/puissance가 갖는 개념적인 통일성을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게 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최원 형은 “역능”이라는 단어가 일부 국어사전에 나온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 단어는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 아닙니까?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이 단어는 주로 네그리나 들뢰즈 철학에 관심 있는 분들만 사용하는 용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어떻게 일부 국어사전에 수록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어떤 학문 분야에서 모종의 필요상 이런 단어를 만들어서 쓴 것이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을 듯합니다(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정서심리학에서 capacity를 “역능”이라고 번역해서 쓰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네그리나 들뢰즈 철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제외하고 이 단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그 용어가 실질적인 “용어”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요컨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역량”이라는 용어가 “역능”이라는 번역어보다 더 나은 점은 이 말이 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말이기 때문에 이 말을 쓸 경우 어색함이라든가 거부감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론을 하는 분들은 이 점을 상당히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번역어라는 것이 널리 쓰이기 위해서 만든 용어라면 이런 화용론적인 측면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실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이 번역어나 철학 개념으로 채택되면,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 용어는 몇몇 전공 학자들의 테두리를 결코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일례로 칸트 철학은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도입된 철학이지만, 칸트 전공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들만의 용어로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예취”라든가 “통각” 또는 “오성” 같은 것들이 그렇죠. 현상학에서 사용하는 “충전성(充全性)”이나 “현전”, “현성(現成)”, “시숙(時熟)” 같은 용어들도 그런 예가 되겠죠. 좀 나쁘게 말한다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용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의념”이나 “역능”이라는 단어도 이와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이 용어들이 사용된다 해도 그것은 일부의 들뢰즈, 네그리 전공자들, 또 발리바르 연구자들의 테두리를 넘어서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최원 형은 마지막에서 “관개체성”, 곧 “transindividualité”라는 개념을 언급했는데, 이 개념은 puissance나 notion이라는 개념과는 처지가 좀 다르죠. “transindividualité”는 “trans-”라는 접두어를 추가해서 만든 신조어인 반면, puissance나 notion은 흔히 쓰이는 일상적인 단어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신조어도 가능한 한 일상 생황에서 쓰이는, 좀더 자연스럽고 편한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원칙이겠지요.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부득이 새로운 말로 표현해야겠지만 ...

notion이나 puissance에 관해서는 좀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 벌써 상당히 이야기가 길어졌으니까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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