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환이에게
네가 지적한 부분을 검토해보니까, 누락됐다고 말한 것들은, 101쪽 영어 단어에 관한 것만 빼고는 네가 지적한 게 맞더구나. 101쪽 셰익스피어 인용문은, 원문을 찾아보니까 “not”이 없는 게 맞더라. 사실 그래야 말이 되고.
어쨌든 단어나 구절이 누락된 걸 찾으려면 하나하나 대조해보지 않으면 안 되는데, 네 덕분에 큰 짐 덜었다.
14쪽에서 “한 가지”와 “하나의” 사이에 그런 뉘앙스 차이가 있나? ^^ 나는 별 생각 없이 “한 가지”라고 했는데, 좀더 생각해보고 “하나의”라고 하는 게 낫다면 고치도록 할게.
15쪽의 경우도 “정확히/정당하게”로 고치는 게 나을 것 같다.
36쪽은 영역본의 실수인 것 같아. 데리다 원문이나 셰익스피어 원문 모두 4막 3장이 맞는 것 같다.
37쪽 두 번째 단락의 경우에도 “환영에 대해”보다는 “환영에게”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구나.
44쪽의 경우는 조금 해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이 구절의 원문은 이렇게 돼 있어. “(fin de l'Histoire, fin de l'Homme, fin de la Philosophie, Hegel, Marx, Nietzsche, Heidegger, avec leur codicille kojevien et les codicilles de Kojève lui-même).” 원문의 내용은 정확히 말하면 이런 뜻이지.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는 각자 나름대로 역사, 인간, 철학의 종말/죽음을 선언했고, 이 때문에 이들은 종말의 고전가, 곧 사망한 역사와 인간, 철학에 대한 유언을 남긴 사람들이지. 그런데 데리다는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라고 쓴 다음에 “codicile kojevien et les codiciles de Kojève lui-même”라고 적고 있지. 이건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아. 알다시피 코제브는 1947년에 Introduction à la lecture de Hegel이라는 제목이 붙은 유명한 헤겔 정신현상학에 대한 강의록(1933년에서 39년까지 강의했던)을 펴내지. 이 책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다루는 책이기는 하지만, 그 관점에는 마르크스와 니체, 하이데거의 철학이 포함돼 있지. 그런데 마르크스의 유령들 152쪽에 데리다 자신이 인용하고 있듯이, 코제브는 1959년에 (곧 위의 인용문 앞에서 데리다가 말하듯이 데리다 세대의 사람들에게 일용 양식과 같았던 종말에 관한 담론이 넘쳐나던 시기) 자신의 책에 각주를 하나 붙이지. 일종의 “부록”으로 말이야. 그 각주의 내용은 정확히, 미국과 소비에트, 일본에서 코제브가 경험한 역사의 종말 이후 인류가 체험하게 될 삶의 양식에 관한 것이지. 따라서 “codicile kojevien”이 뜻하는 것은, 코제브가 이 각주 및 후기를 덧붙임으로써 역사의 종말에 관한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의 “유언을 변경했다”(codicile의 원래가 의미가 이것이지)는 거야. 더욱이 1989년 이후에는 코제브의 영향을 받은 후쿠야마라는 젊은이를 비롯한 자유주의의 예찬자들이 다시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고 있는데, 이는 말하자면 “les codiciles de Kojève lui-même”, 곧 후쿠야마 자신의 변경했던 유언이 후쿠야마 등에 의해 다시 변경됐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codicile”은 “유언 변경”이라고 번역하는 게 옳을 텐데, 나는 2장에 나오는 코제브가 추가한 각주나 후기와 연결해서 부지불식간에 “부록”이라는 의미에 더 비중을 두었던 것 같아. 어쨌든 좋은 지적이다.
그리고 44쪽 두 번째 단락에서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것”의 원문은 “ne se dissimulaient plus”야. 146쪽에서 볼 수 있듯이 “se dissimuler”는 “감추다”는 뜻과 더불어 “인정하지 않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어. 내가 보기에는 “감추다”는 뜻보다는 “인정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아.
그런데 네가 지적하고서 보니까 여기는 “오래전부터 더 이상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고치는 게 옳을 것 같다. 다시 말해 “se dissimuler”가 "인정하지 않다"는 뜻이니까 부정문 형태인 “ne se dissimulaient plus”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해하는 게 옳겠지. 그리고 그렇게 해야 내용이 더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 것 같다.
45쪽의 경우 “이는 시사적인 질문이다”의 원문은 “Question d'actualité”야. 만약 이게 “Question d'aujourd'hui”였다면, 네가 제안한 것처럼 “이는 오늘/오늘날의 질문이다”라고 해야겠지만, “Question d'actualité”를 그렇게 번역해야 할지는 좀 망설여지는구나. 좀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이것과 관련해서 108쪽에 나오는 “그리고 이는 오늘날, 아마 내일도, 우리의 문제가 될 것이다”의 경우는 원문이 “Et c'est aujourd'hui, ce sera peut-être demain notre problème”이니까 네 제안이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말은 반드시 강연이 이틀에 걸쳐 진행될 것이라는 것만을 함축하는 것 같지는 않고 좀더 일반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것 같은데, 어쨌든 “오늘, 아마 내일도”라고 하면 중의적인 뜻을 모두 전달할 수 있으니까 그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49쪽의 내용에 관한 제안은 그렇게 고치는 게 맞을 것 같다.
52쪽의 원문은 이거야. “L'oeuvre animée devient cette chose, la Chose qui s'ingénie à habiter sans proprement habiter, soit à hanter, tel un insaisissable spectre, et la mémoire et la traduction.”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지. “정신을 부여받은 저작은 이 사물, 고유한 의미에서 거주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거주를 만들어 내는s'ingénier, 곧 귀신처럼 달라붙어 있는 사물Chose이 되고, 포착 불가능한 유령이 되며, 기억과 번역이 된다.” 내 생각에는 원문에서 “spectre, et la mémoire et la traduction”이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으니까, 이걸 “기억과 번역의 포착 불가능한 유령이 된다”고 하는 건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elles”이라는 대명사가 “말들”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요구들”을 가리키는지는 문법적으로는 결정할 수가 없는데, 맥락상으로는 “말들”을 받는 걸로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요구들이 분배된다”는 것은 맥락상 좀 어색한 것 같아.
그리고 “부패하고 있는”은 원문에 “whither”라고 나와서 그냥 옮긴 건데, 좀 표시를 해둬야 할 것 같다.
57쪽에 관한 지적을 보자. 사실 네가 지적한 문장들은 이 책에서 제일 심오하고 중요한 문장들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깊이도 있고 또 난해하고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들이야. 이 부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Il n'y a de tragédie, il n'y a d'essence du tragique qu'à la condition de cette originarité, plus précisément de cette antériorité pré-originaire et proprement spectrale du crime. Du crime de l'autre, un forfait dont l'événement et la réalité, et la vérité, ne peuvent jamais se présenter en chair et en os, seulement se laisser présumer, reconstruire, fantasmer. On n'en continue pas moins, dès la naissance, de porter une responsabilité, ne serait-ce que pour avoir à réparer un mal au moment même où personne ne saurait l'avouer, sauf à se confesser en confessant l'autre comme si cela revenait au même.”
그리고 내 번역은 이렇게 돼 있어.
“이러한 범죄의 원초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1)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처럼 범죄가 기원에 앞서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범죄의 고유한 유령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1-1) 비극이, 비극적인 것의 본질이 존재한다. 이러한 타인의 범죄,(2) 타인의 중죄는 결코 그 사건과 실재성, 진리가 생생하게 현재화될 수 없고, 단지 추정되고 재구성되고 환상 속에서 드러날 뿐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는 탄생에서부터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책임이, 누구도 시인할 수 없는 순간에, 타인[이 범죄자라는 것―옮긴이]을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책임을―옮긴이] 고백하는 것(3)―마치 이러한 두 가지 고백이 똑같은 것으로 귀착된다는 듯이―말고는 달리 누구도 이러한 책임을 시인할 수 없는 순간에, 어떤 악을 바로 잡아야 하는 책임일 뿐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네 지적은 우선 (2)를 (1) 다음에 넣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인데, 글쎄 앞 문장 어딘가에 첨가를 해야 한다면 아마 (1-1)에 넣는 게 좋겠지. “범죄의, 타인의 범죄의 고유한 유령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 이런 식으로 말이야. 내가 번역하면서 그걸 넣지 않은 이유는 “범죄의 원초성”이나 “범죄의 고유한 유령성”이라는 말에 사실 그 내용이 이미 함축되어 있고, 바로 다음 문장에서 함축된 내용이 명시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야. 사실 데리다의 원문 자체가 그런 구조로 되어 있고.
그 다음 네가 두 번째로 지적한 것은 (3)의 번역이 잘못된 것 같다는 것이지. 그 대신 너는 “누구도 시인할 수 없는 순간에, 타인을 고백하는 자기-고백 속에서”라는 번역을 제안하고 있고. 그런데, 이런 번역을 제안하면서 너는 “오히려 반대로, 햄릿이 뒤틀린 세월을 ‘바로 잡으려는’ 자기 고백을 통해서, 그 고백 속에서, 타자를 고백하는 것이므로, 자기-고백 속에 타자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고백이 우선이겠지요”라고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나는 네 제안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를 못하겠다. 네가 제시한 이유를 좀더 명시적으로 밝혀주면 아마 더 재미있는 토론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용을 좀더 분명히 제시해볼래?
그리고 61쪽의 “배려”의 원어는 “souci”인데, 가령 알다시피 푸코가 자기에의 배려Souci e soi라고 할 때 쓴 게 이 단어고, 독일어로는 하이데거가 사용한 Sorge라는 개념과도 연결될 수 있겠지. 그래서 무심히 “배려”라고 옮겼는데, “souci”의 뜻이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을 쏟고 하는 것이니까, 네가 제안한 것처럼 “관심”이라고 옮기는 게 오히려 의미를 좀더 잘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104쪽의 경우는 “spectropoétique”의 중의적인 뜻을 고려해서 일부러 의역을 한 건데, 네 말을 듣고 보니까 “미화”라는 말에 원어 transfigurante를 병기해두는 게 좋을 것 같구나.
105쪽의 경우는 네 말처럼 “순교자”라고 번역하는 게 옳을 것 같고, 107쪽의 번역은 좀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111쪽의 제안에 관해서는 좀 다른 생각이야. 데리다가 “마르크스나 다른 사람들의 동일성론, 좀더 정확히 말하면 매우 타자론적인 동일성-존재론une tauto-ontologie assez hétérologique과 마찬가지라는 점이다”라고 말했을 때 말하려는 바는, 마르크스나 다른 사람들이 동일성 존재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나름대로 매우 타자론적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결국 동일성-존재론으로 타자론을 포섭하는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야. 그러니까 “매우 타자론적인”이라는 말은 “타자를 동일자로 포섭하려는”이라는 뜻보다는 “타자를 존중하려고 매우 노력하지만”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뜻이지. 요컨대 데리다가 “assez”라는 단어를 써서 강조하려는 것은 “결과”(결국 동일성-존재론으로 포섭되고 마는)보다는 “의도”(타자론적이려고 노력하는, 하지만)가 아닐까 생각했다는 거야.
지금까지 간략하게 네 제안에 대해 답변을 해봤는데, 107쪽에 관한 제안이나 특히 57쪽에 관한 제안은 좀더 논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아.
어쨌든 아주 꼼꼼하게 읽어줘서, 내가 수고를 덜게 됐고, 다른 분들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좀더 정확히 읽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아주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이구나. :-)
오늘은 이만 줄이고 다음에 좀더 이야기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