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엔 발리바르의 대작 {대중들의 공포}가 마침내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오랫동안 이 책이 출간되기를 기다려온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발리바르의 이 책은 지난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약 15년 동안 발표한 논문들을 모은 책이다. 하지만 내용상으로 본다면 이 책은 단순한 논문모음집이라기보다는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아포리아와 모순들을 해명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라는 관점에서 이러한 아포리아와 모순들을 개조하고 전위하려는 발리바르의 이론적인 작업을 체계적이고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놀라운 이론적 엄밀함, 현실 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감수성, 풍부하고 창의적인 문제설정들을 고루 갖춘 이 책은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최후의 걸작 중 하나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 하나하나는 웬만한 책 한 권 이상의 깊이와 집약적인 논점들을 포함하고 있을 만큼 가치 있는 작업들이다. 따라서 오늘날 좌파의 이론적, 정치적 향방에 관해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중요한 시사점들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대목들이 많겠지만, 되풀이해서 읽고 토론하고 학습한다면 그만큼 값진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철학 일반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해도 이 책은 지난 1990년대 프랑스 철학계가 배출한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한 권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나 장-뤽 낭시의 {세계의 의미Sens du monde}, 베르나르 스티글러의 {기술과 시간Le temps et la technique}, 자크 랑시에르의 {불화La mésentente} (및 몇몇 철학사 저작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만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 책을 번역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서관모 교수와 최원 씨 두 역자의 노고 덕분에 이 책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됐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두 사람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아직 번역본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번역의 상태에 대해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발리바르의 사상을 잘 이해하고 있고 오랫동안 그의 사상을 연구해온 역자들이기 때문에, 번역이 꼼꼼하게 잘 됐을 것으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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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출간을 환영하는 글을 쓴 김에, 이 책에 나오는 몇몇 용어들의 번역에 관해 한두 가지 의문점을 적어보고 싶다.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다소 성급할지도 모르겠지만, 알라딘에서 제공되는 책 내용 보기 서비스를 통해 읽어본 바로는 이 책에서는 civilité라는 발리바르의 개념을 <시민인륜성>으로 번역하고 있고, notion이라는 단어는 <의념(意念)>으로, puissance는 <역능>으로 옮기고 있는 것 같다.
<시민인륜성>이라는 번역어의 경우는, 선뜻 완전히 찬동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대안으로 충분히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civilité라는 개념은 번역하기 매우 까다로워서 그동안 국내에서는 <예의바름>이나 <예절>(일상적인 의미로 본다면 이 용어들이 적절할 것이다) 또는 <시민성>이나 <시민윤리> <시민문명>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 바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음만 따와서 <시빌리테>라고 사용되기도 했다(사실 썩 마음에 드는 번역어가 없는 상황에서는 이런 방법도 한 가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시민인륜성>이라는 번역어의 특징은 헤겔의 개념인 Sittlichkeit의 번역어로 널리 쓰이는 <인륜성>이라는 말에 <시민>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데 있다. 이는 Sittlichkeit와 civilité의 연관성을 고려하면서도 civilité가 지닌 정치적인 함의를 좀더 강조해보려는 의도인 것 같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번역어로서는 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든다. 원어인 civilité는 일상적으로 널리 쓰이는 단어인 데 비해 이 번역어는 국내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 합성어라는 데서 이러한 어색함이 생겨나는 것 같다. 번역어는 무엇보다도 쉽게 쓰일 수 있는 용어이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시민인륜성>이라는 번역어가 지닌 어색함은 적지 않은 문제점일 수 있다.
더욱이 헤겔의 Sittlichkeit 개념이 이미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 개념인 데 비해, <인륜성>이라는 번역어는 이런 함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이 번역어는 얼마간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시민인륜성>이라고 번역했을 때, <인륜성>이라는 말이 지닌 비역사적이거나 비정치적인 함의가 civilité에 그대로 따라다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 염려가 된다.
그러나 마땅히 다른 대안이 없는 현재로서는 역자들의 제안을 그냥 물리칠 이유도 없는 것 같다. 이 용어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가 있어야 하겠지만, 당분간은 번역어로 써볼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의념>이나 <역능>이라는 번역어는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notion(또는 라틴어로는 notio)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 관해 {스피노자와 정치}에 수록된 “용어해설”이나 한 편의 논문으로(http://blog.aladin.co.kr/balmas/1059302) 내 의견을 밝힌 적이 있고, 또 조만간 서관모 선생이 제안한 이 번역어에 대해 몇 가지 반대의 논거를 제시해보고 싶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히 다음과 같은 점만 지적해두고 싶다.
우선 서관모 선생이 notion을 <의념>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하는 논거가 그리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의 제안은 프랑스의 두 개의 사전에 나오는 간략한 설명과, 중국의 몇몇 학자들이 최근 notion을 이 용어로 번역하고 있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먼저 사전은 어떤 용어나 개념에 대한 충분한 정의를 제시하는 책이 아니라 그 용어의 용례들을 모아놓은 책일 뿐이라는 존 오스틴의 주장을 상기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사전은 그 용어가 어떤 용례로 쓰이는 보여주는 참고자료일 뿐이며, 좋은 사전은 그 용례를 좀더 많이, 풍부하게 보여주는 사전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서 선생이 전거로 제시한 사전들은 그리 좋은 사전이라고 보기 어렵다. notion 개념이 불어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좀더 풍부한 용례를 보려면 오히려 다음 사전을 참조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http://atilf.atilf.fr/dendien/scripts/tlfiv5/advanced.exe?8;s=1169875485;)
확인을 해봤더니 이 주소에서는 화면이 뜨지 않는데, 아래 주소로 가서 위쪽에 있는
검색창에 notion을 입력하면 해당 내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http://atilf.atilf.fr/dendien/scripts/tlfiv4/showps.exe?p=combi.htm;java=no;
더 나아가 notion이라는 용어, 특히 철학 개념으로서 notion에 대한 번역어를 고려하기 위해서는 철학자들의 저작에서 어떻게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고, 또 그 개념적 의미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좀더 엄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더욱이 notion이라는 용어는 바슐라르에서 알튀세르, 푸코에 이르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전통에서 상당히 체계적인 개념으로 쓰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서 선생의 “용어 해설”은 문제를 좀 너무 간단하게 생각한 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일본이나 중국 학자가 notion을 어떤 용어로 번역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참고할 만한 것이기는 해도 그대로 우리말 번역어로 채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말에 “총념”이나 “의념” 같은 말이 존재하며, 또 과거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이 한자문화권이기는 하지만, 각 나라의 문화적 전통이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다른데, 이런저런 용어를 굳이 가져다 쓸 이유는 없다고 본다.
적어도 그것이 좀더 우리 사회, 우리 문화에 맞는 이론 작업을 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언어, 특히 단어들은 대중과 지식인이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식인이 외국의 용어나 개념들에 대한 번역어를 정하기 위해 이런저런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것은 문제가 있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소수의 지식인들끼리의 말잔치로 끝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늘 듣는 말 중 하나가 철학은 너무 어렵다는 것이고, 이런저런 개념들의 뜻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하소연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번역해서 쓰는 서양의 철학 개념들 중 상당수가 우리나라 대중들이 일상에서 쓰지 않는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언젠가 독일 유학생 중 하나가 우스개 소리로 한 이야기 중에 이런 게 있다. 어느 날 그가 집에 있을 때 창 밖에서 “Aufheben!”이라는 소리가 여러 차례 들렸다고 한다. 이 단어는 알다시피 헤겔 철학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Aufhebung, 곧 “지양”이라는 개념의 동사형이다. 헤겔을 전공하던 이 사람은 깜짝 놀라 혹시 철학자 모임이 있나 해서 창밖을 내다봤더니, 청소차가 다니면서 내는 소리였다고 한다. “쓰레기 수거!”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프랑스에서도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 중에 “a priori”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철학 용어로서 “선험적”이라는 말이나 “아프리오리”라는 말로 번역돼서 쓰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이를 “우선”, “먼저”라는 뜻으로 무시로 사용한다.
따라서 서양의 철학자들이나 대중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상 언어의 용법과 철학 개념 사이의 연관성이 우리에게는 좀처럼 파악되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형편에 굳이 일상생활에서 쓰이지도 않는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어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이유가 있을까? 간혹 도가 지나쳐서 모든 철학 용어들을 한자가 아닌 순 우리말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런 지나친 순혈주의는 논외로 한다고 해도 불필요하게 신조어를 남발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puissance나 potentia의 번역어로 일부에서 쓰이고 있는 <역능>이라는 용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로서는 {스피노자와 정치}에 수록된 “용어해설”이나 몇몇 논문에서 <역량>이라는 번역어를 제시한 적이 있지만, 굳이 이 용어를 고집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더 적절하게 puissance나 potentia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번역어가 있다면, 기꺼이 그것을 채택할 용의가 있다.
하지만 <역능>처럼 일상생활에서는 아무도 쓰지 않는 단어를 만들어내서 번역어로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더욱이 왜 굳이 이 용어를 puissance나 potentia의 번역어로 쓰는지, 어떤 점에서 이 용어가 이 철학 개념을 적절하게 옮겨주는 것인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용어를 쓰는 사람들 중 누구도 자신이 왜 이런 용어를 쓰는지 그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스피노자의 potentia가 <능동적인> 힘을 뜻하기 때문에 <역능>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한다고 말하기는 한다. 하지만 과연 potentia 또는 희랍어로는 dynamis라는 개념을 <능동적인> 힘의 의미로(곧 잠재태나 가능태가 아닌 의미로) 쓴 것이 스피노자 혼자뿐인지, 또 스피노자가 과연 그 최초의 인물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사실 이는 스토아학파에서 플로티누스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의 브루노에 이르는 장구한 전통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독특성이라면 오히려 이를 <내재적>으로 또는 <관계론적>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능력>을 거꾸로 뒤집어서 <역능>이라고 번역하면, 이 단어가 그대로 능동적인 힘이라는 뜻을 내포하게 되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조금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notion이나 puissance 같은 개념들은 앞으로 국내에서 오랫동안, 또 널리 쓰이게 될 용어인 만큼 용어 번역에는 좀더 신중한 검토와 논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생각에는 먼저 puissance나 potentia를 <역능>이라는 번역어로 옮기는 사람들이 그렇게 옮기는 좀더 정확하고 명료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나도 <의념>이라는 말이 notion에 대한 번역어로 왜 부적합한지 조만간 글을 하나 써볼 생각이다.
아무튼 이런 의문점들 때문에 이 책을 번역한 두 역자들의 값진 노고가 훼손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쉽지 않은, 하지만 국내 좌파의 이론적, 정치적 논의를 위해서는 정말 꼭 필요한 이 책을 번역하느라고 애쓴 역자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린다. 이 책에 좀더 많은 독자들의 손때가 묻게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