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ㅎㅎ 최원 형의 답변을 잘 읽었습니다. 최원 형으로서는 “의념”이라는 번역어에 상당히 애착이 가는가 봅니다. 번역자로서는 당연히 그렇겠죠. :-) 이야기를 계속 해나갔으면 좋겠는데, 이번 답변으로 이 문제에 관한 논의는 일단락 짓는 게 좋겠군요. 이 정도 했으면 최원 형이나 내 생각은 충분히 표현된 거 같고, 사실 더 한다고 해서 얼마나 더 생산적인 이야기가 나올지도 약간 의문이 듭니다. 이쯤에서 논의를 끝내고 사람들이 각자 판단하도록 맡겨두기로 하죠.

그런데 최원 형의 답변에는 제 글에 대한 몇 가지의 오해가 엿보이는 듯해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의미에서 그것만 몇 가지 바로 잡아보기로 하죠. puissance에 관한 이야기는 그 정도 했으면 됐다고 봅니다. 

우선 common notion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지적은 좀 놀랍더군요. 

“진선배님은 notion이란 명확히 1종의 인식에 속하는 것이고 common이 그 앞에 붙어 줌으로써 2종의 인식이 되므로, 합리성의 원인은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공통성을 가리키는 common에서 주어져야 한다.(1-1) notion은 그 자체로는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통용되는 것으로 거기서 통용된다는 측면은 common notion의 common과는 상관이 없다고(1-2)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

좀 아랫부분에도 다음과 같은 지적이 나오죠.

“저는 스피노자의 common notion이란 단순히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어떤 부분의 일치에 대한 인식을 의미할 뿐(2-1)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우선 최원 형이 {윤리학} 2부에 나오는 common notion의 의미를 (1-1)이나 (2-1)처럼 해석하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학정치론}을 제외한다면) {윤리학}에 나오는 common notion의 의미가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공통성을 가리키는”, “단순히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어떤 부분의 일치에 대한 인식을 의미할 뿐”인 건지요? 저는 지난 번 제 답변이나 제 논문 어디에서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이런 표현을 쓰는 걸 보면 최원 형 자신이 {윤리학}에 나오는 common notion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 같은데, 정말 그런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해 방식인데, 최원 형은 그것을 제 견해라고 말씀하시니 좀 당황스럽더군요.

또 다른 이유는 저는 지난 답변에서 {윤리학}만을 문제 삼았고 {신학정치론}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는데, 최원 형은 제가 {신학정치론}의  common notion의 용법을 간과한 가운데, common이 “공통적”이라는 사실을 못보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2). 제가 지난 답변에서 {윤리학}만을 다룬 것은 그 이전에 최원 형이 지난 번 글에서 notion의 번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참조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윤리학}이 “나는 사고한다”[cogito―데카르트]가 아니라 “인간은 사고한다”라고 공리화하고 나서, 인간은 자신의 의념들이 공통의념들로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점을 보여주는지 이해한다."

여기서 notion을 통념으로 옮기면 이상한 말이 됩니다. "인간의 통념이 공통통념일수록 인간은 더 많이 사고한다"(진 선배님 번역, 198쪽)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이 경우 통념은 이미 공통된 관념이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면, 공통된 관념이 공통된 관념이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곧 최원 형은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notion 자체는 개별적이거나 사적인 것이라고 이해하는 듯해서, {윤리학}에 나오는 notion의 용례를 살펴보면서 그 용례에 비추어보면 notion은 결코 개별적이거나 사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거나 집단이 공유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common notion과 universal notion이 어떻게 다른지 해명하는 차원에서 {윤리학}에서 볼 때 common notions의 “common”은 일반적인 notions과 달리 실재적인 기초를 가진다, 곧 모든 물체들 또는 몇몇 물체들에 공통적인 특성들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참되거나 적합하다고 말한 거지요.

제가 볼 때 최원 형 생각의 난점은 notion은 사적이거나 개별적이고 common notion만이 공통적이다라고 간주한다는 데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사고한다Homo cogitat”는 {윤리학} 2부의 공리는 common notion을 가진 사람에게만 적용되지, notion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전혀 적용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곧 스피노자가 이 공리에서 데카르트의 “ego cogito” 대신 유적인 인간을 주어로 하는 "인간은 사고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고는 항상 이미 공동적이다, 사고는 항상 이미 소통을 함축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고, 이 점에는 최원 형도 동의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 최원 형이 생각하듯이 notion을 가진 사람은 사적이고 개별적으로 사고하고 common notion을 갖는 사람들만 공통적이고 소통을 한다면, notion만을 가진 사람들은 일종의 인식의 자연 상태 안에서 혼자 고립된 채로 사고하는 원자론적 cogito가 아니겠습니까? 그럴 경우 “인간은 사고한다”는 공리는 공리가 아니게 되겠죠. 더욱이 어떻게 자연 상태 안에 고립된 채 존재하는 개별적인 cogito들이, 말하자면 사회상태, 국가를 설립해서 common notion을 가지게 되는지도 더 의문스럽지 않겠습니까?  

이 점과 관련하여 최원 형은 지난 번 제 글의 핵심 논점은 간과한 듯한데, 다음 구절이 제 글의 핵심 논점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최원 형이 인용한 발리바르의 문장도 약간의 모호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문장 전후의 맥락을 보면 발리바르는 notion은 개별적인 것이고 notion commune은 공통적인 것, 교통을 함축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그렇지 않죠. 모든 notio가 “보편적인 것”이고, 이러한 보편적인 notio를 형성하는 두 가지 방식, 하나는 부적합하고 상상적인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적합하고 합리적인 방식인 두 방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보편자를 구성하는 또는 인식하는 두 가지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본다면 1부 [부록]이나 4부 [서문]에 나오는 notio에 관한 용법은 아주 일관된 셈입니다. 

제가 볼 때 notio나 notio communis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이 진정으로 혁신적인 점은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 역시 notio communis에 대한 논의에서 이전까지의 논의와 단절된 면모를 보여주지만, 결코 notio에 대한 발생적인 설명을 제시하지는 못했으며, 더 나아가 notio를 보편자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두 가지 상이한 인간학적, 심지어 정치적인 방식의 문제로 보지는 못했죠.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텐데, notio를 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의 문제는 윤리적, 정치적 개체화의 상이한 양식에 관한 쟁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제가 발리바르의 주장이 모호한 인상을 준다고 말한 것은, 최원 형이 이 말을 ‘notion은 개별적이고 common notion만이 공통적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notion으로 사고하는 것보다 common notion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더 많이 사고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 최원 형이 (번역하고) 해석하는 식의 말을 하지는 않지요. 따라서 발리바르의 진의를 정확히 해명하려면, 곧 그의 말에서 모호함의 인상을 제거하려면, “더 많이 사고한다”는 말을 잘 이해하는 게 중요하겠죠.

그런데 최원 형은 답 글의 첫머리에서 “제 판단으로 그 구절에서 common은 여러 사람에게 공통되다는 뜻으로 발리바르가 쓴 것이 확실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최원 형의 이 말은, 위에서 말했듯이 제가 common notion에서 “common”을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공통성을 가리키는” 것이거나 “단순히 대상인 개체와 인식하는 개체 사이의 어떤 부분의 일치에 대한 인식을 의미할 뿐”인 것으로 이해한다고 전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제 말 뜻이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은 제가 바로 다음에 덧붙인 구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모든 notio가 “보편적인 것”이고, 이러한 보편적인 notio를 형성하는 두 가지 방식, 하나는 부적합하고 상상적인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적합하고 합리적인 방식인 두 방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보편자를 구성하는 또는 인식하는 두 가지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다시 말해 제 말은 universal notion을 형성하는 것과 common notion을 형성하는 것은 보편자를 구성하거나 인식하는 상이한 두 가지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편자를 구성하거나 인식하는 것은 개인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죠. 그것은 항상 어떤 집단적인 사고 양식 그리고 더 나아가 삶의 양식과 결부된 문제입니다. 스피노자가 {윤리학} 1부에서 목적론적인 편견에 빠진 사람들, 따라서 예속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그들이 자연을 설명하는 방식을 해명하기 위해 notions에 관해 논의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닙니다. 곧 notions 또는 universal notions은 예속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및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의 집단적인 사고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지,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최원 형이 강조하는 common notions의 “이론(주의)적” 측면과 “실천(주의)적” 측면도 해명이 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는 common notions의 용법과 관련하여 이론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반면, {신학정치론}에서 그 실천적인 측면을 시사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합니다. {윤리학}에서 스피노자는 부적합한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 더 나아가 수동적인 삶의 양식에서 능동적인 삶의 양식으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죠. 이런 목표를 염두에 둔다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1종의 인식의 상태에서 벗어나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을 획득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1종의 인식과, 2-3종의 인식 사이에는 일종의 단절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1종의 인식이 부적합한 인식이고 “오류의 유일한 원천”인 반면, 2-3종의 인식은 적합한 인식이라고 말하는 데서 이를 알 수 있겠죠. 요컨대 양자 사이에는 이행의 관계가 존재합니다. common notions은 이러한 이행을 달성하기 위한 기반이자 동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1종의 인식, 곧 상상이나 의견, 또는 universal notions은 거짓과 오류, 기만으로 특징지어집니다. 다시 말해 배제하고 제거하고 떠나야 할 영역으로 간주되지요. 따라서 여기서는 예속 상태에 놓여 있는 무지자, 우중과 자유, 해방, 구원 등을 달성한 현자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존재하고, 무지의 상태, 예속과 기만의 상태에서 벗어나 적합한 인식과 자유, 구원을 향해 전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결국 현자도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수동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우중들과 더불어, 그들과 상상과 언어를 공유한다는 것이죠. {윤리학} 5부 마지막에 가서 “우중vulgus”이라는 용어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죠. 따라서 {윤리학}의 핵심 주제는 오류와 가상의 원천인 1종의 인식에서 벗어나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으로 나아가는 전진적인 과정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1종의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 상상과 언어의 사용을 그만 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신학정치론}이 정치학적으로만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학정치론}의 주요 주제가 현자와 대중의 공통적인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 또는 좀 더 나아가 상이한 notions을 갖고, 상이한 종교, 상이한 세계관, 가치관 등을 갖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점이었기 때문이겠죠(발리바르가 Sub spicies universalis라는 논문에서 {신학정치론}에 나타나는 “실천적 보편성”의 문제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점이겠죠). 곧 {윤리학} 5부 마지막에서 홀연히 등장하는 우중과 현자의 관계라는 문제를 재조명해볼 수 있는 근거를 {신학정치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고, 이 때문에 common notions의 문제도 새롭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볼 경우 common notions의 실천적인 문제는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우중들의 지니는 notions을 개조하는 것, {윤리학}에서처럼 완전히 notions을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예속 상태에, 곧 신학권력의 지배 아래 있는 우중들의 notions을 개조하는 것이 주요한 문제가 됩니다. 여러 집단들이 각자 자신들의 notions(스피노자에게는 특히 상이한 종교적 notions이 문제일 텐데요)을 고집하는 상태에서는 첨예한 갈등과 폭력,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점과 관련하여 스피노자의 테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진정한 종교의 기초로서 “Credo minimum”이라는 게 있지요. 다시 말해 신에 대한 복종과 경배를 정의 및 박애와 등치시키는 실천적인 교리가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common notions의 한 가지가 됩니다. 둘째는 자유로운 공화국을 위한 부정적인 기초(다시 말해 왜 개인적인 의견과 사고, 발언, 종교 등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는가에 관한 논거)로서 언어의 공통성(또는 사고의 조건으로서 소통 및 그 물질적인 토대로서 언어)이라는 것이 있겠죠. 사실 {윤리학}에서 언어는 상상에, 1종의 인식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데 비해, 여기서는 모든 사람들(따라서 우중만이 아니라 지식인까지도)이 공유하는 것이라는 점이 더 부각되죠. (물론 과연 {윤리학}에서 언어가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만 간주되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최근 여러 주석가들이 보여준 것처럼 {윤리학}에서도 기호 및 언어의 자연성, 물질성에 관한 논의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언어나 기호 또는 notions 일반의 문제에서 {윤리학}과 {신학정치론}을 지나치게 대립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우리는 왜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인간의 notions이 common notions일수록 인간은 더 많이 사고한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앞서, “나는 사고한다”고 말하지 않고 “인간은 사고한다”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때, <<더 많이 사고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1) 여기서 “더 많이 사고한다”는 것은 최원 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공유한다”는 의미로만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서로 공유한다”는 것은 notions 일반의 특징이지, common notions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2) “더 많이 사고한다”는 것은 <<더 참되게, 더 적합하게 사고한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더 참되게, 더 적합하게 사고한다는 것을 가리키죠. 그리고 이 때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참되게 사고한다는 것은, 기존에 존재하는 인식의 양식과 삶의 양식, 곧 1종의 인식 및 미신적이고 예속적인 삶의 양식에 대한 개조의 투쟁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이미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부적합한 인식과 미신적인 삶의 양식에 대한 개조가 없이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참되게 사고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그런데 notions 일반 속에 이미 “여러 사람들이 서로 공유한다”는 특징이 들어 있지 않다면, 이런 투쟁의 쟁점, 이런 개조의 쟁점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3) 따라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common”을 최원 형처럼 “서로 공유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common의 의미를 평면화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적이고 개별적으로 사고하던 개인들이 어떤 계기로 인해(그러나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공동으로 사고하게 된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4) 요컨대, notions 자체 안에 이미 “여러 사람이 공유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으며, common notions은 notions과 다른 어떤 지평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적인 notions 내부에서, 그것들을 개조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더 많은 것을 사고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해준다고 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common notions이 그런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단지 “공통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들에 공통적인 특성”을 표현하는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 번에 {윤리학}에서 common notions은 notions과 달리 “실재적인 기반을 지닌다”고 말할 때 의미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5) ㅎㅎㅎ 그래서 결국 제 생각으로는, 적어도 스피노자에서 notion은 “통념”이라고 번역하는 게 좋겠다고 봅니다.

어쨌든 최원 형이 적극적으로 토론에 임해줘서, 서관모 선생이나 최원 형의 의도를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된 듯합니다. 아마 다른 분들에게도 도움이 많이 됐을 거라고 믿습니다. 저로서는 웬만큼 이야기를 한 셈이니까, 특별한 쟁점이 새로 제기되지 않는다면, 다음 번 최원 형의 답글로 이 문제에 관한 토론은 마칠까 합니다.

타향에서 추석 잘 보내시고, 알라딘 주인장 여러분도 즐거운 한가위 맞으시기 바랍니다.

아, 그리고 번역본을 한 부 보내주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직 책은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제가 11월 초에

한국에 한 번 들어갈 예정이어서, 들어가서 살 생각이었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다른 책을 읽을 여유가 없기도

하고요. 그래서 책을 보내시려면 이곳으로 부치지 마시고 장진범 형에게 맡겨두면, 제가 한국에 들어가서

만나서 받으면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힘들게 번역한 책을 당연히 사서 봐야 하는데 그냥 덥석 받자니 염치가

없기는 하지만, 고맙게 받아서 열심히 읽겠습니다. 서관모 선생에게나 최원 형에게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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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avinsky 2007-09-23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고 모르겠다. 빙빙@.@ ~~~

balmas 2007-09-24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Mravinsky님, 앞으로 스피노자 공부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