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계획에 없던 책을 대출해 오는 경우가 있다. 내가 찾던 책이 꽂혀있던 칸에 새 책이 보일 때다. 나는 새 책의 빳빳한 질감을 좋아하기 때문에 장르가 나랑 너무 안맞는 책만 아니면 빌려오게 된다. 이 책은 그렇게 만났다.

작가는 NHK아나운서 출신으로 일본의 작가, 평론가, 수필가라고 한다. 출생년도를 보니 울엄마랑 동갑. 올해 팔순이시네. <사는게 뭐라고>를 이어 또다시 일본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구나.

작가는 가족들과 별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권위적이지만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아버지, 평생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식에게만 집착하는 삶을 살았던 어머니와 일찌감치 아버지와 대립각을 세우고 집을 나가 할머니 댁에서 살았던 오빠가 그녀의 가족이다. 그녀 역시 가족과는 심정적으로도 거리를 두고 살았고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다. 그런 저자가 점점 가족에게만 집착하는 일본의 현실을 보며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하면서 현대에 가족의 의미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에세이 형식의 글이다.

그리 새삼스럽지 않고 너무 당연한 말들의 연속이다. 이미 이런 담론은 꽤 있어온 것 같아서 비밀독서단의 신기주작가가 한 이야기를 인용하여 표현하자면 이런게 ˝쌀로 밥짓는 이야기˝다. (쌀로 밥을 짓는다는데 뭐가 놀라운가? 모래가 밥이 된다면 몰라도 ㅎㅎ)


자식을 품에서 일찍 떠나보내야 한다, 교육이란 부모가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세계에서 갈고 닦으며 쟁취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기대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마음껏 기대하라, 언제까지나 옛날의 가족개념이 이어질 수는 없다, 진정한 가족은 핏줄로 이어진 가족을 뛰어넘는 곳에 존재한다, 가족을 안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다 등등.
살아오면서 가족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전혀 없었던 저자는 가족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에 대해 반감을 느끼면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돌아보자고 하는데 틀린 말은 하나도 없지만 그렇게 새로운 담론도 아니라는 말. 그래서 끝까지 읽다보면 그리 길지도 않은 책임데 좀 지루하다.


한국의 수능 풍속을 이야기 하는 대목이 있어서 소개해보자면

# 이웃나라 한국에는 수능이라는 제도가 있다는데 수험생이 시험 시간에 늦을 것 같으면 경찰차가 출동한다고 하고, 합격하면 가족과 이웃, 친구들이 헹가레까지 친다고 한다. 상황이 이런데 과연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 학생이 있을까.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짊어지니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마음의 평안을 제일로 쳐야 할 가족이 오히려 나서서 야단들이다. 입시에 무사히 성공해 곧장 엘리트 코스로 들어서기보다는, 한 번 두 번 실패를 겪어봐야 타인을 배려할 줄 알고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어른으로 성장할 텐데 말이다. (46쪽)

부모의 과도한 기대, 가족의 압박이 개인에게 얼마나 스트레스가 되는지를 말하는 글에서 인용된 예이다. 물론 너무나 당연하고 맞는 말이다. 화목한 가정이라는 환상에 빠지지 말고 개개인의 인격을 세우라는 얘기. 그러면 꼭 핏줄로 이어진 가족에만 집착하지 않고 가까이 있는 이웃과 친구들까지 가족의 개념으로 묶을 수 있다. 가족의 문제가 발생하면 나를 돌아보라. 나를 알고 내 가족을 알면 불화가 생겨도 조율할 수 있고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각 가정마다 문제 없는 가정이 없고, 가정 폭력이나 아동 학대같은 가족에게서 야기 되는 문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의 가족이란 이유가 그 사람의 삶을 족쇄처럼 묶어놓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족이라는 병이 그저 나를 돌아보고 화목한 가정이라는 환상을 깨라는 조언이나 한다면 곤란할 듯하다. 그 이상의 대안이 있어야 할텐데 이 책엔 그런 대안은 없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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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0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0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0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5-12-20 16: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찜해놓은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 읽지는 못하고 있는 책이랍니다.
`가족`이 병에 대한 치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오던 막연한 생각을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부수고 있으니까요. 읽기도 전에 저도 공감하는데 도대체 가족이 병이 되는 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좀 더 듣고 싶어서요.
가족은 나의 자존심이자 상처라는, 다른 저자의 어떤 책도 생각나네요.

살리미 2015-12-20 16:52   좋아요 3 | URL
저자가 일단 가족에 대해 상처가 있는 사람이다보니 `가족`에 매여서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냐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가족의 기대가 내게 스트레스가 되는 것도 사실이고, 내 맘에 안드는 가족 구성원일지라도 평생 끌어안고 가야 하는 짐이 될 수도 있긴 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다보면 결국 가족이라는 게 환상이 아니라 현대인의에게 꼭 필요한 기본 가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물론 `가족`의 정의가 현대에는 많이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저자도 혈연으로 묶인 가족들에게만 집착하는 경우를 경고한 것이고요.)남들이 보기에 건강한 가족을 만들려고 환상에 빠져 현실을 왜곡하거나 집착하는 건 잘못이지만 그래도 결국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내게 위안을 주는건 혈연이든 아니든간에 어떤 형태로든 내 곁에 있는 `가족`이니까요.

해피북 2015-12-20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다가 좀 의외스런 글을 읽게 되었어요. 마스다 미리가 도쿄에서 살아보기 위해서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늘 자신을 응원해주는 아버지가 이번에도 잘 다녀오라고 쿨하게 이야기해주시니까 마스다 미리가 이렇게 생각하는거예요. `아버지라는 좋은 이미지를 위해서 저렇게 말씀하시는거`라고요. 저는 사실 그 부분을 읽으며 좀 충격 받았어요. 부모라는 입장에서 또 아버지라는 입장에서 큰 딸에게 거는 기대를 강요하기 보다도 늘 괜찮다. 잘하고 있다 응원해주는데도 어떤 이미지일것 이라 생각하는. 그러니까 아버지의 마음은 저렇지 않은데 일부러 저런 모습을 보이는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아서 충격스럽더라고요. 왜 부모님의 마음을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사노요코가 말한 것처럼 한국 사람들은 너무 `인정`에 약하다는 말에 답이 있는걸까요?

살리미 2015-12-20 20:21   좋아요 1 | URL
글쎄요. 자세한 건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일본인의 특성이 반영된 생각이 아닐까요? 사실 일본인들은 자기의 본심을 가족들간에도 잘 털어놓지 않고 사회적인 이미지에 맞게 살아가려는 면이 강하잖아요. 그러면서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고요.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이야기가 일본에서는 충격적일지 몰라도 우리는 그닥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우린 사실 참다 참다 터지는 일본인들보다는 속마음을 그때 그때 많이 털어놓고 사는 편이잖아요. 일본인이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이유도 거기 있는듯 하고요. 마스다 미리도 아버지가 본심은 섭섭하시면서 자식앞에서 내색하지 못하고, 잘 다녀오라고 `멋진 아버지`강박처럼 표현한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해피북님 이야기 듣고보니 저도 이 책 저자의 마음이 더 이해가 가네요.
아! 그리고 이 책 읽으며 저도 마스다 미리가 생각난 부분이 있었는데요~ 일본에선 남편을 주인이라고 표현한다는 걸 마스다 미리 책을 보다가 알았거든요. 이 책의 저자도 자기 남편을 꼭 `반려`라고 얘기하는데 인터뷰 같은데서 자기들이 알아서 `주인`으로 바꿔 놓으면 화를 내면서 다시 `반려`라고 해달라고 한다는 대목이 있었어요. 일본 사람들 아직도 별생각없이 주인이란 말을 쓰는걸 보면 여권신장은 우리가 한 수 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해피북 2015-12-20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맞아요 오로라님^^ `본심은 섭섭하시면서 자식앞에서 내색하지 못하고, 잘 다녀오라고 `멋진 아버지`강박처럼 표현한건` 이라는 말씀처럼 그런 표현이 있었어요. 저는 일본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 못해서 일본인 특성을 몰랐는데 오로라님 덕분에 그런면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문화와 정서가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참에 다른 면들도 알게 되었네요 ㅎㅎ 그리고 저는 남편을 `주인`이라 표현한다는 걸 노하라 히로코의 책 `이혼해도 될까요?를 읽으며 알게 되었는데요. 아마도 제가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쯤 말로써 많은걸 꼬집고 다니느라 정신없었을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으흐흐흐흐~ ㅋㅋ

살리미 2015-12-20 20:40   좋아요 0 | URL
네 ㅎㅎ 해피북님이 절대 가만계시지 않았을거에요.
저는 그새 또 마스다 미리의 책 찾아보고 있었어요. 제가 감동했던 부분이요. ㅋㅋ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마지막 그림에 옆집 아줌마가 날아간 빨래를 주워주시면서 ˝이 옷, 그집 주인양반 거 아니우?˝ 하자 미나코가 ˝아, 맞아요. 우리집, 우리집 남편거예요.˝ 하는 부분이요! ㅎㅎ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라 생각이 났어요.

해피북 2015-12-20 20:49   좋아요 1 | URL
으흐흐~ 저도 방금 책을 들춰보고 왔어요. 덕분에 잊혀졌던 미나코의 고민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도 했고요. 역시 집에 책이 있다는건.. 장소도 많이 차지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요 이렇게 생각날때 바로 꺼내 펼치며 넘기는 이 맛이 최고인거 같아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즐거운 주말 저녁 보내시고 꿀밤 되세요 오호호호 ㅋㅋ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참 기분좋은 일이다. 게다가 취향까지 비슷하다면!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으면서 나는 시종 '어머,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쩜, 나도 이 책 참 좋았는데' '우왕~ 나도 이 영화 너무 좋았어^^'를 남발하며 마치 곁에 있던 좋은 친구를 이제서야 알아 본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었다.  손석희 앵커의 추천사처럼 " 문유석 판사 생각의 대부분과 그의 성향의 상당 부분이 나와 겹친다는 데에 경이로움까지 느끼면서" 이 책을 읽었는데, 아니 그렇다면, 우린(손석희 앵커까지 포함해서 내맘대로 ㅋ) 취향공동체였어? 역시 뭔가 끌리는게 있더라니!!

손석희 앵커가 그랬듯이 이렇게 취향이나 생각이 비슷하다면 "훗날 내게 기회가 오더라도 이런 책은 쓸 필요가 없게 된다"......는 무슨, 이렇게 내 생각을 정리해서 훌륭한 글솜씨로 잘 다듬어준 그가 고맙기는 하지만 왜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는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였다. 알기 쉽고 깔끔하게 자기 생각을 적어내려간 그의 글에서는 개인주의자이지만 타인을 끌어안을 줄 아는 따뜻한 면모가 돋보였다. 이런 사람들은 의외로 세상에 많을텐데, 그렇다면 세상은 그리 비관적인 곳만은 아닐텐데, 좀더 낙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야겠다는  여유로움이 생기기도 한다. 대한민국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연말에 읽기에 아주 훈훈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돌아보게 된 책과 영화들을 정리해본다.

 

   # 1. 영화 <위플래시>를 보고 쓴 글에서 그는 자기계발의 함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도 그 영화를 보고 엄청난 전율을 느꼈지만 그 영화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서 '아직 내 노력이 부족하다. 미친듯이 노력을 해야만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식의 멘트에는 소름이 돋았는데 그가 꼭 그 지점을 지적해 준 것이다. 우리는 한 개인이 성공을 위해 바친 노력과 열정을 칭찬할 수는 있지만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광기로 치닫는 것을 보며 그렇게 해야만 성공이 오는 것이라고 치장할 필요는 없다. 훌륭한 점과 비판받아야 할 점은 냉정하게 분리해야 하는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대체로 성공에는 재능과 노력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금수저 물고 태어나 과분한 기회를 누리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는 영화 <폭스캐쳐>를 예로 드는데 이 영화도 올해 내가 열광했던 작품 중 하나다. 엄청난 재벌이지만 부모로부터 상속된 부와 명예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는 열등감과 오만함으로 비뚤어진 병든 인간일 뿐이고 그런 인간에게 주어진 과도한 권력은 결국 비극을 낳는 것이다.

 

 

 

   # 2.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도 자주 소개되는데 선물 받아서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행복을 가장 자주 느끼는 원천은 바로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것, 즉 큰 행복 한 방보다 소소한 기쁨이 끊임없이 이어지는것이 유리하다는 것이 아주 맘에 든다. 실제로 책 소개를 읽어보니 아주 재밌을 것 같아서 더이상 책장에 묵혀두지 말고 빨리 읽어봐야겠다.

 

 

 

 

 

 

 

 

 

 

   # 3. 조국 교수의 이 책을 얘기하며 시작한 [88학번]이라는 글은 나의 대학시절을 떠올리며 마치 응답하라를 보고 있는 것같은 즐거움을 주었다. 저자는 82학번인 조국 교수를 서클 세미나 자리에서 딱 한번 보았는데 '왠 홍콩 영화배우가 서울법대에 와 있는 걸까'하는 시공간의 왜곡현상을 느꼈다고 한다. ㅎㅎ

지금 돌아보면 내가 대학을 다니던 그 시기는 정말 거대한 사회변화의 시기였다. 당연히 피끓는 청춘이 강의실에 앉아만 있을 수는 없는 시대였고, 80년 광주와 박노해의 노동시들을 읽으면서 교과서에 나오는 세상과 현실 세상과의 괴리를 뼈저리게 느끼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학가를 지배하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개인주의자적 성향이 강해서 나는 한 발은 동아리에 담가서 소위 '학습'을 열심히 하기도 했고 민중가요를 부르며 시위를 주동하는 문선대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몰래몰래 자본에 충실한 부르주아적 삶(나이트 클럽에 열심히 다녔다는 말 ㅋㅋ)을 즐기기도 해서 선배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었다. 이 글은 그런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다는 걸 느끼게 해 주었고 어쩌면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살았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 4. 저자가 언급한 이 책은 나에게도 무서운 책이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고 처음  요즘 젊은이들의 대학 문화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문유석은 장예찬의 [그들은 20대의 정치화에 관심이 없다]라는 글과 일본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책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함께 소개했는데 나는 비로소 완전히 요즘 젊은이들을 이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과도한 입시경쟁, 취업경쟁에 내몰려야 했던 젊은이들은 노력의 결과가 정당한 평가를 받기를 바란다. 그러다보니 배타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성적 소수자 인권, 이주 노동자 인권, 환경 보호, 사회적 기업 등 다양한 공익적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도 많다는 것이다. 저성장시대에 맞춰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현실에 만족하는 젊은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나는 현실이 이런데 늘 즐겁기만한 내 아들을 보면서 걱정스런 맘이 들곤 했었는데 이 글을 읽으며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결국 지난 시대의 기준으로 들이댄 '세대론'으로 현재를 완벽하게 설명하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이십대를 괴물로 보는 것도 , 모든 것에 달관한 세대로 보는 것도 성급한 것이라는 거다. 변한 건 세대가 아니라 시대다! 인간은 누구나 주어진 여건하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적응해가는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지금도 불행하고 비참한 처지에 있는 젊은이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문유석이 말하는 개인주의자의 태도다.

 

 

 

  # 5. 저자는 이 영화도 빠트리지 않았다. 영화 <카트>! 노동의 대가로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다. 얼마전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이 체포되는 뉴스를 보면서 아직도 노동조합이라면 불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드라마 <송곳>을 그렇게 감동하며 보았는데도, 노동개악의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 당장 자기의 문제가 될 수 있음에도 말이다.  이 영화에는 청소년 알바문제도 나오는데 사실 이 영화를 보고나서야 애들에게 물어보니 알바하는 친구들이 의외로 많다고 했다. 그 아이들 대부분이 제대로된 노동자의 권리를 모르고 있어서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는데 정작 학교에서는 노동권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 스스로가 팀프로젝트로 [청소년 알바와 노동권]에 대해 공부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아이들에게 좋은 사회교육 교재가 되었다.

 

 

 

 

 

 

 

 # 6. 엄청난 두께로 베고 누우면 딱 좋을 듯한 이 책은  사놓고 아직 못읽고 있었는데  이 책에 인용되어서 읽어봐야겠다 하는 다짐을 또 해본다. 인간이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왔는지를 밝히며 요약하자면 인류의 역사는 원래 내내 끔찍하고 폭력적이었으므로 현재가 그나마 가장 비폭력적이고 평화로운 시기라는 것이다.

핑커는 세계적으로 폭력을 감소시킨 결정적인 힘은 홉스가 말한 리바이어던, 즉 근대국가라고 한다. 이성의 힘, 인류가 밟아온 문명화 과정이 폭력을 감소시킨 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인간사회의 끔찍한 면만 본다면 비관에 빠질 수 있지만 사실 오랜 역사를 관찰해보면 이산은 스스로 자신의 폭력성을 제어하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향해 놀랍게 진보해왔다. 여기서 문유석은 지금이 가장 폭력적인 시대라고 분노하는 건 착각이라고 지적한 핑커의 논지에 동의하면서도 오히려 그 착각이 인류의 폭력성을 감소시켜온 원동력일 것이라고 한다. 지금이 과거보다는 낫다 하면서 현재에 아무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느 시대에나 타자의 고통에 가장 예민한 이들, 가장 호들갑스럽게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현실문제들이 개선되어 나갔다는 그의 시선에 동의한다.

 

 

# 7. 이 영화를 봤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전 아무 정보없이 보았다가 이게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에 놀랐고 결국은 엄청난 구역질을 해댔던 영화!

인도네시아의 1965년 대량학살 사건을 다룬 영화인데, 당시 정권을 잡은 세력은 공산당을 박멸하기 위해 불법 우익단체 '프레만 free man'과 '판차실라 청년단'에게 무기를 쥐여주며 백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더 놀라운 것은 역사청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이 영화를 찍을 당시에도  학살의 주역들이 미국인 감독앞에서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업적을 증언하고 어떻게 사람들은 효과적으로 죽였는지 재연한다는 것이다. 공산당 섬멸을 위해서라면 기존 윤리나 문명따위는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사인이 떨어지자 이 동네 양아치들은 순식간에 학살자로 변한다. 오랜 시간 힘들여 구축한 문명이라는 구속을 벗겨놓으면 인간이 얼마나 야만적으로 돌변하는지, 학살의 주동자 안와르 콩고와 그 패거리들은 사이코패스라서 무서운 게 아니라 백지 상태의 야수라서 더 무섭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현재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자기 행동의 의미를 성찰할 줄 모르는 무지야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고 이 야수를 탄생시킨 것은 바로 그들의 힘을 이용하려는 정치 권력이라는 것! 

 

 

이 밖에도 많은 책과 영화들이 소개되는데 다 내가 관심있어서 읽어보았거나 읽어보려고 사놓은 책들이었고 그가 봤던 영화들도 나도 재밌게 본 것들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옆집 어딘가에서 아이들에게 줄 떡볶이 봉지를 들고 툭 튀어나올 것 같은 친숙함을 느끼게 해준 문유석 판사. 그와 같은 개인주의자들이 많은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 것이라고 믿는다.

 

 

 #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발전하고 있고, 어떻게 보면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무엇에 주목하느냐의 문제라면 나는 이왕이면 발전하는 모습에 주목하고 싶다. 냉소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110쪽) 

 

 

 

 

 

 

 

# 한 개인이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업 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이가 다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지키기 위해. 그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 그렇기에 얼마나 귀한 일인가.

우리 하나하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지킬 수 있을만큼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어야 한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279쪽)

 

 

이런 그의 생각에 나도 한 수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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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12-16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엇보다 [위플래시]를 보고 난 후의 감상에 공감했던 것 같아요. 그 영화를 보고 역시 엄한 선생이 필요하다 라든가 노력이 부족하다라든가 하는 반응들이 너무 싫었거든요. 그렇게까지 사람을 망가뜨리면서 위로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제 생각은 그다지 설득력있게 들리진 않는 것 같고요. 그런데 문유석 판사가 그 점을 언급해줘서 저도 참 좋았어요.

살리미 2015-12-16 12:18   좋아요 0 | URL
네, 전에 다락방님의 리뷰에서도 읽은 기억이 나네요. 저는 위플래시 보면서 그 선생님의 광기에 가까운 채찍질에 소름이 끼쳤는데(물론 연기력도 소름끼쳤지만요) 주변에서 반응들이 대부분 천재는 그렇게 해야 탄생되는 것이다, 역시 노력을 이기는 건 없다는 식이어서 놀랐거든요. 아, 받아들이는게 다 다르구나 하고요.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 같아야 한다는건 아니지만 이렇게 취향이 비슷하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는 건 역시 즐거운 일이에요^^

해피북 2015-12-16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로라님의 글을 읽으며 생각해봤는데요. 오로라님은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으시며 친근함을 느끼셨다는데,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오! 아~ 하는 탄성을 지르며 열심히 읽어야할 또 봐야할 책과 영화 정보를 기록하느라 바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ㅎ 그리고 어서 빨리 읽어봐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문유석 판사님의 책을 읽게 되면 다시 이 서재 글로 찾아와 읽어봐야 할 글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ㅎㅎ

살리미 2015-12-16 22:26   좋아요 0 | URL
문유석 판사랑 나이도 비슷하고 해서 그런지 (저보다 한살 많으심 ㅋㅋ) 진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아이들 교육문제라던가 사회문제를 보는 시선 같은것도 그렇고 특히 대학 생활도요 ㅋㅋ 책과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요 ㅎㅎ 건강한 사고를 가지신 분이라 해피북님도 읽어보시면 좋아하실거예요. 아마 바빠지실 겁니다 ㅎㅎ

지금행복하자 2015-12-16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엄청 공감하면서 사이다같다고 생각했었어요. ㅎㅎ 위플래시류의 영화를 좋아해서 보지 않았는데... 역시나 였었고요... ㅎㅎ

변혁의 시대를 스쳐지나온 세대로 쁘띠브루조아라고 지탄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녔던 세대로 저런 선배가 있어야했어 ㅋㅋ
하면서 하룻밤사이에 후딱 읽은 책이었어요~~ ㅎ

살리미 2015-12-16 22:29   좋아요 0 | URL
과방에서 팝송 부를때 ˝적성국가 노래가 들려서 타격하러 왔습니다˝ 하고 후배가 개그 아닌 개그를 했다는 부분에서 저 완전 빵터졋어요 ㅎㅎ 제가 그런 소리 듣고 살았거든요 ㅋㅋ 역시 세대가 비슷하니 추억이랑 감성이 비슷한가봐요. 저도 너무 재밌어서 하룻밤 사이 후딱~^^

AgalmA 2015-12-16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것˝, 현대에서는 더 절실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셜 네트워크도 바로 그런 연장선이라고 봅니다. 그런 소통과 연대 없는 개인주의는 고립밖에 안된다 생각하고요. 핑커와 문유석 판사도 이런 취지라고 생각합니다

살리미 2015-12-16 22:33   좋아요 0 | URL
맞아요.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 저도 매우 공감했어요. 문유석 판사가 주장하는 개인주의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회적 책임도 전제되어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yureka01 2015-12-16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그리고 연대감..참 멋진 덕목이죠..^^..

살리미 2015-12-16 22:37   좋아요 0 | URL
네, 현대에는 점점 공감이나 연대감이 없으면 고립되어버리기 쉽잖아요. 이 책을 읽으며 예전처럼 하나로 똘똘 뭉쳐서 집단의 이익을 쟁취해내던 시절이 지났다고 개탄할 것만이 아니라 개인의 사생활이 보장되면서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하는 건강한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인디언밥 2015-12-16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핰핰! 법조계의 자이언티 문유석 판사님ㅋㅋㅋ 팟캐스트로 첨 뵙지만, 아니 저는 남잔데 말예요. 김두식샘도 그렇고 왜이렇게 아저씨들이 좋은가 모르겠어요... 방송 들으면서 꼭 사야지 했던 책인데 여기서 또만나니 반갑네요 흐!

살리미 2015-12-16 23:3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법조계의 자이언티! 라디오 책다방 들으셨군요 ㅎㅎ 이 책 너무 인기가 많아서 도서관에 예약 걸어두고 한달 넘게 기다렸다 받았답니다. 마침 라디오책다방에 출연도 하시고 해서 저도 무척 반가웠지요 ㅎㅎ

고양이라디오 2015-12-16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로라^^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덕분에 읽고 싶은 책이 많이 늘었네요ㅠㅋ
저는 이런 책이야기, 영화이야기 하는 책을 무척 좋아하지만, 한편으로는 보고싶은 책, 영화가 늘어나는게 두렵습니다ㅠㅋㅋ

그래도 공감가는 이야기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건 무척이나 흐뭇한 일인 것 같아요^^

살리미 2015-12-16 23:57   좋아요 1 | URL
ㅎㅎ 고양이라디오님도 책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시니까 분명 좋아하실겁니다^^ 저도 한편으론 위시리스트가 너무 많이 쌓이는건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요. 나름 독서계획이 있는데 자꾸 틀어지거든요 ㅋ 늘 읽어야할 책과 봐야 할 영화에 치이며 살고 있네요 ㅎㅎ 물론 자발적인 괴로움이지만요.

서니데이 2015-12-17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위플래시 안 봤어요. 저 영화 처음에 포스터 보고 무서운 영화같아서.^^;;;
나중에 기회되면 한 번 소개라도 읽어봐야겠어요.
오로라님, 편안한 저녁 되세요.^^

살리미 2015-12-20 09:15   좋아요 0 | URL
ㅎㅎ 무서운 영화는 아니고요~ 상황이 쫌 무섭긴해요. 엄청 학생을 몰아붙이는 무서운 선생님이 나오거든요. 잘하고 싶은 욕망에 점점 미쳐가는 학생도요. 사실 음악영화라 볼 수 있는데 시종일관 멋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좋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보시라고 강추해요^^
 
당신 - 꽃잎보다 붉던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품절


박범신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다. 내가 소설에 관심이 없던 시절이 길어서 그의 소설을 읽어보지는 못했다. 몇해전 <은교>라는 영화를 보고도 원작을 한번 읽어봐야지 했을 뿐 읽지는 못했다.

그는 계속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했고 <소금>이 나왔을땐 평도 너무 좋아서 꼭 한번 읽어봐야지 했는데 결국은 이 작품에 먼저 닿았다. 사랑을 믿지 않는 메마른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많이.......촉촉해졌다.

첫페이지에 작가의 말을 대신한 듯한 작가의 글이 있다. 사실 처음엔 있는 줄도 모르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난 뒤 조금은 멍해진 마음으로 다시 첫 장을 넘겨보니 아마도 부인에게 쓴 글인 듯도 하고 오랫동안 작가를 사랑해 온 팬에게 쓴 글인 듯도 한 작가의 글이 있었다.

# 사랑에서, 주호백과 닮은 당신, 나는 그러나 정염과 슬픔 사이의 골짜기를 낮은 포복으로 갈팡질팡 여기까지 왔네. 사랑의 끝엔 무엇이 있느냐고 누가 물었을 때 ˝그야 당연히 사랑이 있지!˝ 당신은 담담하게 대답했어. 내가 한없이 비루하게 느껴졌던 그 순간, 나는 이 소설의 작은 뼈 하나를 얻었다네. 사랑의 지속을 믿지 않는 남자 곁에서 그것의 영원성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살아온 오랜 당신, 독자들에게 진솔하게 허락을 구하면서, 나이 일흔에 쓴 이 소설을 부끄럽지만 나의 `당신`에게 주느니, 부디 순하고 기쁘게 받아주길!
2015년 10월 내 생일 저녁에


이야기는 한 할머니(윤희옥)가 죽은 남편(주호백)의 시신을 닦아주고 마당 매화나무 아래에 묻어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정성이 어찌나 지극한지 장례식도 없이 혼자서 마당에 묻겠다는 의식이 별로 의아하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나서 할아버지가 남긴 일기장을 읽어보는데 거기엔 조금 충격적인 이야기가 있다. 2005년 할머니의 생일날,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한 할아버지의 계획을 마다하고 신촌의 라면집에서 조촐한 생일 파티를 한 날, 왜 구태여 당신이 그 곳을 찾아갔는지 다 알고 있노라고, 당신의 모든 추억은 기실 당신보다 내가 더 샅샅이 기억하고 있다고, 당신만을 평생 보고 산 나와 달리, 당신은 평생 동안 한사코 나를 보지 않았다고, 당신은 가인 형만을 품고 살았다고, 내가 당신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비밀을 당신에게 들키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앞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당신을 죽이지는 않고 당신의 뇌만 꺼내어 바꿔놓고 싶다고.
평생을 할머니만 바라보며 복종의 삶을 살았던 남편인데 일기장에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조심스럽게 꺼내놓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할아버지는 뇌출혈과 치매를 앓고 있었고 그 병간호를 하는 할머니에게 문득 문득 모진 말을 해대곤 하였다. 그 평생의 억울함이 터져나온 것 같은 마음을 보듬으며 할머니는 비로소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간절해진다. 그동안 너무나 불공평했던 사랑을 이제 수평으로 맞추고 싶어져서 자기 자신도 파킨스 병에 걸렸다는 걸 알면서도 병간호에 최선을 다한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욕을 하고 막 대할수록 할아버지 앞에서 몸을 낮추고 빌고 또 빌면서 그제서야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자신을 원망한다. 그렇게 생의 마지막 순간에 뜨겁게 사랑하고 너무나 보내기 싫은 남편을 떠나 보내는 나만의 의식을 치르고 나서 할아버지의 일기장을 보게 된 할머니.
일주일 후, 할머니는 파출소에 가서 `실종` 신고를 한다.

# 죽은게 아니다. 영원한 실종이다. 갚아야 할 죄가 있다면 남은 인생에서 다 덜어내어 살아 있을 때 그와 수평을 이루고 싶다. 남은 꿈은 그것뿐이다. 내게 남겨진 시간은 그러므로 당연히 실종된 그를 찾아 헤매는 고단한 과정에 바쳐질 터이다. 발바닥엔 물집이 생기고, 입술은 부르트고, 삭은 관절들은 걸음걸음마다 내려앉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관없다. 굽잇길마다 비바람이 불고 물길마다 그 법이 깊을망정. 죄를 벗어 기워 사랑의 값을 완성하고자 하는 길일진대. 그 굽잇길 그 물길이라 할지라도 왜 더러 꽃인들 피어 있지 않겠는가. (30쪽)

주호백은 윤희옥보다 세살이 어렸다.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는 늘 약자였다. 평생을 함께 살면서도 `누나`라고 불렀는데 그가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기 시작하자 가끔 `당신`이라고 부른다.

`당신`

# 당신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나는 눈물겨웠다. 그와 나의 관계에서 우리가 절실하게 가닿고 싶었던 수평적 관계가 완성되는 느낌이 그 호칭에 깃들어 있었다. 발작이 심해질 때 분노에 차서 이년! 저년! 하고 나를 부른 적도 물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내재된 분노를 푸는 데 일조했다. 나는 그러므로 그 호칭 역시 싫지 않았다. 그의 분노를 쇠약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훨씬 더 참혹한 욕도 기쁘게 들을 마음의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그리고 차츰 그는 나를 희옥누나 혹은 누나라고 불렀다. 그의 기억이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올라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와의 관계를 수평적이라고 느낀 건 당신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였다. 눈물겹고 따뜻하고 또 공평한 낱말이었다.(349쪽)

소설에서 나는 주호백의 한결같은 사랑에 감동했고, 윤희옥의 아련하고도 슬픈 첫사랑에 울었고, 세상과 타협할 줄 몰랐던 김가인의 짧은 생에 마음 아팠다. 그리고 결국은 공평하고 진정한 사랑으로 완성되어 가던 주호백과 윤희옥의 삶을 보면서 사랑이란 것은 퇴색되기 마련이라고 믿으며 더이상 어떤 노력도 해보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 당신, 이란 말이 왜 이리 슬플까. 함께 견뎌온 삶의 물집들이 세월과 함께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눈물겨운 낱말이다. 그늘과 양지, 한숨과 정염, 미움과 감미가 더께로 얹혀 곰삭으면 그렇다, 그것이 당신일 것이다. (267쪽)


지금보다도 더 나이가 들어서 `당신`이란 말을 듣는다면 바로 그런 기분일 것 같다. 사실 나에게 `당신`이란 말은 평소에 서로의 호칭으로 자주 쓰는 말은 아니다. 남편도 평소엔 당신이란 말을 쓰지는 않는데 가끔 편지를 쓸 때면 당신이라고 부른다. 그 때의 느낌이, 편지를 받았다는 기쁨과는 또 다른 어떤 미묘한 감정이 들곤 했는데 그게 `당신`이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걸 이 소설을 읽다가 문득 깨달았다. 세월과 함께 삶의 물집들이 쌓이고 쌓여 온갖 감정들이 곰삭은 말, 눈물겹고 따뜻하고 공평한 말 `당신`
소설을 읽다보면 그 의미가 새삼 와 닿을 것이다.

처음엔 너무 평범한 제목이 아닌가 싶었는데 작가가 역시 괜히 한국 문학의 거장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일상의 말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작가의 힘을 느낀다. 그것만이 아니라 책을 읽으며 내가 미처 몰랐던 우리말들을 많이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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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12-1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로라님 덕분에 `박범신`작가도 알게 되었어요.ㅎ 그러고보니 저도 한국 소설을 무척 무지 읽지 않은거 같아 반성스런 마음도 듭니다. 이 소설에서 부부사이에서 혹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당신`이라는 의미는 `너`라는 의미를 넘은 그 무엇. 애뜻한 그 무엇이 포함된 단어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실종신고` 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살리미 2015-12-14 22:19   좋아요 0 | URL
처음부터 죽은 남편을 마당에 묻는 다거나 그러고나서 실종 신고를 한다거나 하는 설정 자체가 워낙 독특하기도 했고 그들의 사연이 또 기구하기도 해서 무척 재밌게 읽었답니다. 이 소설에서 주호백은 일생을 윤희옥만 바라보며 그녀의 아이를 키우고 온갖 희생을 다하는 인물인데 비해 젊은 날의 윤희옥은 주호백이 안중에도 없었던 사람이었어요. 애초에 너무 기우는 사랑이었죠. 그러다 칠십이 훨씬 넘은 나이에 깨닫게 되는 사랑과 그 사랑의 공평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들이 참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이 소설에서 `당신`이란 단어의 특별함이 문득 떠오르더라고요.
글솜씨가 없어서 제대로 전달하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읽고 나서 오래 여운이 남는 소설이 참 좋은 것 같아요.
 
장자 강의 - 혼돈의 시대에 장자를 읽다
전호근 지음 / 동녘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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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내편중 제 3편 양생주(養生主)와 제 4편 인간세(人間世) 정리.

 

  장자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삶, 생명이다. 무조건 오래 살아 천수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삶에 집착하지 않고 죽음에 초월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을 잘 가꾸어가는 것이  장자가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인 듯 하다.

그러다보니 이 대목은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수양'을 목표로 하는 유학에서는 때로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며 삶과 올바름을 함께 지킬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올바름을 택해야 한다고 하기때문이다.

 

  주희도 <양생주설>에서 '노장의 학술은 의리의 당부는 따지지 않고 단지 그 사이에 의지하여 자기 몸을 온전히 보전하고 재앙을 피할 생각만 한다'며 장자의 인생관을 격렬히 비판한다. 분명 장자의 사적인 생존을 도모하는 태도는 주희가 보기에는 현실에 무기력한 지식인의 태도로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주희가 장자를 무조건 비판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전반적으로는 높이 평가했다. "후세의 불교에 나오는 좋은 말은 모두 장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장자는 도체(道體)를 알았던 사람이라고 제자들에게 평가하기도 했다.

 

  양생주편에서 장자는 소잡는 백정 포정의 이야기와 권력자에 의해 다리가 잘린 우사, 노자를 조문하는 진일이라는 인물을 빌어 양생을 이야기한다.  양생은 태어날 때가 되면 태어나고 죽을 때가 되면 죽는 생사의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이지 장생불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삶에 집착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장자에게 삶을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피해야 할 대상이다. 권력을 추구하거나 지식을 쌓는 것도 그 목적이 전도되어 양생을 방해한다면 악인 것이다.

 

  <인간세>편에서 장자는 나도 살고 남도 사는 법을 이야기한다. 어찌보면 얄팍한 처세술 같아서 비판 받을 수도 있지만 공맹처럼 천하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거대담론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 대한 통찰을 통해 자신을 보존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이 점이 현대에 장자가 환영받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예를 들어 장자는 충신 관용봉이나 비간이 명예를 따르다가 죽음을 당했고 백이와 숙제가 지조를 지키다가 굶어 죽은 것도 비판을 하는데 장자의 입장에서 보면 삶을 해친 것이기 때문이다. 유학자들은 기회주의라고 비판 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장자는 그런 사람을 내세워 생명을 경시하는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구조적 기만성을 폭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민중총궐기때 물대포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백남기 농민의 경우 장자가 볼 때 양생을 못한 경우다. 즉 장자가  만약 '백남기는 삶을 해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나가지 말아야했다'라는 의미로 말한다는 것은 장자식의 돌려차기 기법으로 '공권력을 사용해서라도, 소수의 희생을 가져오더라도 질서를 바로잡겠다'라고 말하는 생명경시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개인의 생명이 존중되지 못하고 개인보다 국가라는 개념을 더 강조하여 모두가 하나처럼 움직이길 원하는 이 정권에서 장자를 읽으며 가장 가슴아픈 부분이기도 하다. 명말 청초의 사상가 왕부지가 "이 편은 난세를 넘어 스스로를 보존하고 남을 보전하는 묘술을 추구한 것이니 군자가 깊이 취할 점이 있다"고 한 말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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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12-14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배운 가장 최고의 독서법은 옛글에 빗대어 오늘날에 적용하며 익히고 배우는 것이라고 했는데요. 오로라님은 무척 잘 읽고 이해하고 계신거 같아 부럽기도 합니다 ^~^

살리미 2015-12-14 22:11   좋아요 0 | URL
ㅎㅎ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해보는 것일뿐입니다. 어쩌면 오독일지도 모르지만요^^ 고전을 오늘날 다시 읽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려고 애쓰는 중인거죠^^
 
반짝이는 박수 소리
이길보라 감독, 이상국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시종일관 밝고 사랑스러운 가족! 장애가 있으니 분명 뭔가 슬픈 사연이 있을 거란 내 선입견을 부숴버리고, 이 부부는 정말 행복해보이며 그들과 세상의 소통을 담당한 딸과 아들도 `부모가 장애가 있으니 넌 이렇게 살아야 해` 하는 세상의 기대에 묻혀버리지 않고 자신의 꿈을 꾸며 당당하게 살아간다.
물론 그들이 가꾼 행복 속에는 청각장애를 가지고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의 힘든 순간도 있었고 매순간 부모를 대변해야만 해서 너무 일찍 철들어야만 했던 사정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 가족의 매력에 푹 빠질 정도로 그들은 사랑하고 사랑의 힘으로 삶을 반짝이게 만든다. 그들이 세상과 말하는 방법 `수어`로는 박수소리를 손을 반짝반짝 하는 것으로 표현하는데 그 반짝임을 보는 순간 나도 또 한번 용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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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2-09 2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기대라는 것이 결국은 우리가 가진 편견일 수 있겠네요. 오로라님의 글을 읽으면서 결말이 좋은 영화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로라님, 오늘도 좋은 밤 되세요.^^

살리미 2015-12-10 07:56   좋아요 0 | URL
네. 행복이라는 것이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보게 되는 영화였어요. 제 댓글이 너무 늦어버렸네요^^ 서니데이님, 좋은 하루 시작하세요^^

해피북 2015-12-10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서니데이님 글에 공감합니다. ˝ 이렇게 사는게 행복이지 `라는 틀을 만들어 틀에 기대어 바라보며 판단하는 일은 늘 생각해봐야할 부분 같아요 ㅎ 저도 이영화 리스트에 담아봅니다^~^

살리미 2015-12-10 21:19   좋아요 0 | URL
요즘 본 두 영화가 우연히 비슷했어요. 이건 다큐고 미라클 벨리에는 실화에 바탕을 둔 극영화지만요. 둘 다 장애를 가진 부모와 장애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가족에 대해 가족 구성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점이 밝고 건강하다는 것이었고요. 눈물짜는게 아니라 시종일관 웃음이 나요^^

cyrus 2015-12-10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식이 장애가 있으니 부모는 이렇게 살아야 해`, 이런 편견이 장애 자녀를 둔 부모를 힘들게 하는 말입니다.

살리미 2015-12-10 21:26   좋아요 0 | URL
저 영화에서는 감독이 청각장애를 가진 자기 부모의 삶을 찍는거에요. 어려서부터 청각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교육을 받은 감독은 ˝부끄러움의 의미보다 부끄러워하면 안된다는 것을 먼저 배웠다˝고 하죠. 부모와 세상의 소통을 담당하는 역할을 해야하기 때문에 일찍 철들고, 넌 부모가 장애인이니 더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시선 때문에 무엇이든 열심히, 악착같이 했다고 해요. 그러다 문득 자기 길을 가고 싶다고 학교도 그만두고 인도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세상의 편견에 마음 상한 적이 왜 없었겠어요. 그걸 이겨내고 더욱 단단해진 가족들에 참 보기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