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3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통, 새로운 작가를 소개받는(이 표현이 적당한가?) 것은 서너가지의 정해진 루트를 통해 이루어진다. 첫째는 누구나 그렇듯 '베스트셀러'의 작가인 경우, 일단 한번쯤은 손이 가서 한 권쯤은 구입하게 된다. 둘째, 내가 좋아하는 작가 또는 비평가가 어떤 지면에서 새로운 작가의 이름을 들어 칭찬하는 경우. 셋째, 문학상 수상 작가. 김훈이 여기에 해당한다. 넷째, 보통 한 달에 두 번 2주일 치를 몰아서 하는 신문 스크랩을 하면서 읽게 되는 신문 기사들을 통해. 다섯째, 다른 사람의 독서 목록에서 보고.

음, 이사벨 아옌데, 라는 이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녀가 73년 피노체트에 의해 정권을 찬탈(또는 전복)당한 칠레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딸이라는 기사를 보고서 였으니 네 번째 경우에 해당하겠다. 

작가의 출신 지역이나 나라를 알고 그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은 작가와 작품의 이해에 도움을 준다. 특히 처음 접하는 작가일수록. 한편으로 생각하면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는 단점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어느 정도의 사전정보는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그러나 칠레에 대한 정보는 전무한 상태. 전 세계에서 가장 길다란 나라, 남미의 왼쪽 바다 접경 사면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뱀 같은 형상의 나라, 이런 정보가 도대체 작가 이해와 작품 해석에 무슨 도움을 준다는 거지? 겨우겨우, 아옌데 전 칠레 대통령의 조카딸이라더라,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책에 접근.

이야기는 칠레의 발파라이소에 이주한 영국인의 집안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당시(1884년경) 칠레는 정치적 형식으로는 독립국가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영국에 예속된 상태의 국가였다. 그런 상황에서 '칠레에 정착한 영국인 집안'의 위치와 권위쯤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소머스 집안은 <대영제국 수출입 회사>에 다니고 있는 장남 제레미 소머스, 선장이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둘째 존 소머스, 막내딸 로즈 소머스가 모두 미혼인 채로 살고 있다. 이 집안에 엘리사가 비누상자에 담겨 이 집안의 현관 앞에 놓인 것은 물에 고인 듯 조용하고 교양넘치는 생활을 하던 이들 가족에게 큰 활력소가 되어 준다.

로즈 소머스는 엄마와 같은 관심과 극단적인 이기적 무관심 사이를 오고가며 엘리사를 "인형같이" 꾸미기도 하고 "칠레 원주민 아이 같이" 더럽고 헐벗은 모습으로 뛰어놀게 내버려 두기도 하며 엘리사를 키운다. 로즈의 이 극단적인 양극에 닿아있는 양육방법은 엘리사의 성격 역시 얌전하면서도 저돌적인 양극단을 달리게 된다.  

이 소설은 조금쯤 산만하다. 처음부터 이야기의 종결을 알고 시작하는 작가의 시점은 중간중간에 뒤의 이야기를 미리 툭툭 던져버림으로써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고, 중간에 느닷없이 삽입되는 타오 치엔의 중국 이야기는 그야말로 겉돈다는 느낌이랄까. 영국적 분위기의 칠레 상류사회에서 미국의 골드러시로 따라 가는 것만도 소설의 스케일이 커진다는 느낌인데 거기에 중국의 이야기가 갑자기 뛰어드는 것은 아무래도 과하다 싶고, 지나치게 다양한 이력과 직업을 가진 인물들의 이야기 하나하나에 모두 카메라를 들이대려 하다 보니 정장 중심줄기는 힘을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재미있다. 특히 위장과 변질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오고가는 인물들은 인간의 본성을 한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매력을 지닌다.

평탄한 삶을 팽개치고 뛰어나온 엘리사는 중국인 종이(뛰어난 의사라는 뜻 정도?)의 도움을 받아 호아킨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다. 여기서 엘리사는 변질이 아니라, 위장이다. 본래의 성정이 바뀌지는 않으니. 자존심 강하고 똑똑했던 칠레 남자 호아킨은 사랑하는 여자 엘리사와의 사랑을 완성시키려는 욕심으로 돈을 벌기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골드러시에 한몫 볼 욕심으로 회사의 돈을 훔쳐서. 여기까지만 해도 그 역시 위장이다. 그의 본성은 여전히 순결하고 부드럽다.

이들에 비해 영국에서 성경을 팔기 위해 칠레로 넘어온 제이컵 토드는 위장이 아니라 변질이다. 그의 본성은 본다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였고, 사기가 들통나 칠레의 상류사회에서 쫓겨나 미국의 신문기자가 되어서도 그는 여전히 거짓에 거짓을 거듭한다.

여기서 말하는 "변질"이란 인간 본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진실된 알맹이, 가치있는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들을 이 글에서는 변질된 인간으로 칭하기로 한다면, 호아킨 역시 변질되고 만다. 순박했던 청년은 미국 서부의 무법 천지 속에서 최악의 범죄자가 되어 가고, 제이컵 토드는 변질된 속에서 나오는 거짓과 거짓으로 삶을 영위한다.

그 속에서 의지적이고 순결한 인간들 엘리사와 타이 치엔은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

정해진 수순에 따라 타이 치엔과 엘리사는 결합하게 되고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난다.

산만하고 정신없는 이야기 구조속에서 가치를 가지는 것은 풍속사의 자세한 묘사다. 칠레로 이주한 영국 상류사회의 풍속사, 골드러시가 막 시작되었을 때의 미국 서부의 풍속, 막 개방되기 시작하던 중국의 풍속(펄벅의 대지에 비해 그야말로 겉핥기 식이지만.)등등이 여성 작가 특유의 필치로 세밀하게 묘사됨에 따라 소설은 인물들의 상투성, 식상함 속에서도 발바닥을 땅에 단단히 붙이고 있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페미니즘 소설이다, 라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에서 들리던데. 글쎄. 말만 갖다 붙이면 죄다 페미니즘이냐? 글의 어디에서도 엘리사의 자아 실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엘리사는 고집 세고, 19세기의 기준으로는 제법 독립적인 사고를 하는 여성일 뿐 그것을 페미니즘 적 요소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19세기라는 사회적 배경 속에 엘리사의 20세기 여성에 가까운 사고는 외려 겉도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그야말로 19세기에 뛰어든 20세기의 여성이 좌충우돌하는 이야기 비슷하게 읽힌달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파리대왕'이란 헤브라이어의 베엘제버브(Ba'alzevuv: 희랍어의 Beelzebub)를 번역한 말로 직역하면 <곤충의 왕>이란 뜻이다. <악마>를 암시하는 신랄하고 암시적인 말인 것이다.

쥘 베르느의 『15소년 표류기』정도의 소설을 상상하고 책을 펼친 나에게 『파리대왕』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15소년 표류기』가 어른의 눈으로 본 아이들만의 이상향 건설에 관한 이야기라면 『파리대왕』은 인간 본성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간 이야기랄까. 이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아이다움을 드러내는 한 요소는 숫자를 셀 수 있는 나이의 누구도 외딴섬에 표류하게 된 자신들의 일행이 몇 명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15소년"이라는 규칙의 세계와 이 얼마나 완벽한 대조인가.

작가는 아직 '규칙'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는 10대 초중반과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을 '규칙부재'의 무인도에 던져 넣음으로써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고 있다.

인간이란 본래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순자는 인간은 본래 악한 존재이며, 그 악한 본성을 억누르기 위해 법률이 필요하고, 끊임없는 공부와 수도로 악한 본성을 순화시켜 나가야한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순자의 그러한 주장이 유감없이 진리로 드러난다.

고전의 아름다움은 하나의 작품이 수없이 많은 의미의 텍스트로 변주해 가며 읽힌다는 데 있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파리대왕은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로 읽을 수도 있고 풍부한 상징을 통한 정치학 교과서로 읽을 수도 있다. 또한 소년들의 성장소설로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이 여타의 가벼운 소설들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그 완벽하고도 풍부한 상징성이라 할 수 있다.

본디, 지나치게 상징적인 소설은 재미없고 촌스럽다. 풍자나 패러디를 보자는 것도 아니고, 온갖 조잡한 상징을 이리저리 가져다 기워놓은 작품은 읽기조차 역겨워진다. 하지만 월리엄 골딩은 그러한 함정을 완벽하게 피해 가는 것으로 이 작품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 놓는다.

이야기의 중심 축을 형성하는 인물은 셋 정도다.

규칙과 문명을 상징하는 랠프는 처음 아이들에 의해 지도자로 선출된다. 키가 크고 몸집이 단단한 금발머리인 랠프는 외면적 아름다움과 우연히 손에 쥐게 된 소라로 처음으로 아이들을 집결시키는-그것은 물론 돼지(끝까지 본명이 나오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에도)의 생각에 랠프가 따른 것에 불과하지만- 것으로 아이들의 신뢰를 획득한다.

두 번째 폭력과 야만을 상징하는 잭. 그가 문명의 세계에서는 누구보다 규율에 복종하고, 규율 그 자체로 아이들을 지휘했던 성가대의 통솔자였다는 사실은 인간 본성에 대한 놀라운 역설을 제공한다. 또한 그는 힘을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세 번째 지성과 이성을 상징하는 돼지. 그는 누구보다 똑똑하지만 천식과 보기 흉한 외모로 지도자의 브레인 트러스트 역할만을 맡을 뿐이다.(그나마 지도자는 그를 별로 위해주지도 않는다.)

나머지, 작품 전체를 통털어 가장 잔인한 인물로 등장하는 잭의 오른팔 로저-그는 현대에도 어디에나 존재하는 암살자의 존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규칙과 문명을 사랑하고 그에 감정적으로 동조하지만 폭력과 야만의 위협과 고기의 달콤한 유혹에 그쪽으로 돌아서고 마는 약한 존재인 쌍둥이 샘과 에릭. 예언자 사이먼.

등장인물 하나하나는 현대의 사회에서 투쟁하고 있는 세력 하나하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이 소설은 완벽하고도 훌륭한 정치학 교과서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는 "파리대왕"이 폭력과 야만을 상징하는 '잭'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읽어내려 갈수록 '파리대왕'이란 어느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무지와 공포 그 자체를 일컫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아주 어린아이들에 의해 말해지는 두려움. 조금 큰-랠프 또래의- 아이들은 겉으로는 콧웃음을 치지만 역시 똑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그 두려움은 아이들을 분열시키고, 좁은 섬은 문명과 폭력의 세계 양쪽으로 갈라서게 되는 것이다. 그 두려움에 대한 의도적 외면과 축제의 격앙된 상태에서 우발적 살인을 저지르는 아이들은 그로 인하여 더욱 야만의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우발적(과연 우발적이었을까?) 살인과 달리, 아이들은 이제 의도적 살인을 계획하고 사람 사냥에 나선다. 돼지(지성, 이성)이 죽고 난 뒤, 혼자 남게되는 랠프(문명)은 폭력에 의해 잔인하게 사냥되어지기(이런 이상한 피동태를 쓰는 것은 싫지만.) 시작한다. 로저는 "창의 양끝을 뾰족하게 만들고" 랠프를 찾아다닌다. 창의 양끝을 뾰족하게 만든다는 것은 랠프의 목을 잘라 창의 한쪽에 끼우고 다른 한쪽을 바닥에 꽂아 신에게 제물로 바치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야말로 "의도적 살인" 인 것이다.

마지막, 위대하고 거대하며 완벽한 권위를 지닌, 아니, 무엇보다 문명으로 가장 된 "힘"을 가진 어른을 만나는 순간 아이들의 야만성은 순식간에 거세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상실해 버린 순진함에 대한 고통으로. (이 장면은 13일의 금요일에서도 자주 보이는 장면이다. 살인마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하나의 청소년이 울음을 터트리는 것.) 결국,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은 그렇게 무섭도록 잔인한 과정을 거치고서야 가능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소설은 또한 성장소설로서의 위치도 획득하게 된다.

고전은, 참으로 아름답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09-12-0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네요. 저 이거 영화로 보고 완전 충격받았었어요. 그런 상징의 틀로까지 이해는 못하고 그저 경악스럽다는 감정으로만 받아들였던 기억이 나네요. 영화는 아무래도 깊이있는 감상이 안되는 것 같아요. 책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아시마 2009-12-03 09:36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의 충격은 컸어요. 영화는 아무래도 이런 성찰을 담기는 힘들죠. 매체의 차이랄까. 영화는 영화대로 좋았고, 소설은 소설대로 좋더라구요.
이렇게 많은 메타포를 담은 소설은 아무래도 좀 재미는 없어질때가 많은데, 이 소설은 재미라는 부분에서도 정말 압권의 성과를 거둬요. 어떤 깊이나 가치의 문제와는 별개로, 진짜진짜진짜 재미있는 소설이니 꼭 읽어보세요. ^^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굳이 아인슈타인을 들먹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모두가 시간의 상대성을 알고 있다. 어디서 본 글인지, 10대 때는 아무리해도 시간이 가지 않아 괴롭고, 20대에는 하루 잠깐 지난 것 같은데 1년이 가 있고 30대 때는 돌아서면 10년이 가 있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것에 대한 그리움 탓일까, 사람들은 그 지겹던 10대를 가장 아련하게 그리워한다. 10대의 무엇이 사람을 그렇게 끌어당기는 걸까.

가끔, 도저히 그 책에 관한 평가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소설이 한편씩 있는데, 그런 소설의 서평을 쓰기는 참 난감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하자니 모두 해야 할 것 같고 줄이자니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

호밀밭의 파수꾼은 성장통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 겪는 성장통, 날개가 부러지는 아픔. 그런 것에 관한 이야기다.

어른이 되고, 대학에 들어가면 어떤 곳에라도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샐리에게 홀든은 「대학을 가고 난 다음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할 거」(p. 178)라는 이야기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 사회에 편입된다는 것은 결국, 하고 싶은 것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는 하고 싶은 것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홀든이다.

성인의 사회를 상징하는 도시, 규칙이 있는 학교 펜시를 홀든은 그래서 끔찍해 한다. 그에게 무엇이 될 것이냐, 물으면 그는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는 호밀밭에 지켜서서 그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도록 지키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한다. 순수와 자연에 대한갈망, 타락하고 싶지 않아 하는 그의 열망은 그의 꿈에 드러난다.

그러나,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다른 곳으로 떠나려 했던 홀든은 피비의 연극을 보기 위해 돌아오고, 결국은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어른들은 그에게,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공부를 잘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그는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다. 사랑하던 동생이 죽은 것을 제외하면, 가정은 유복하고 화목하며, 이해심 있고 똑똑한 형 D.B와 귀염성 있고 사랑하는 동생 피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도 불행하고 괴롭다. 사춘기를 지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지옥 같은 일이다. 그 사춘기를 앓는 아이들의 영원한 연인이 될 홀든.

이 소설은 그 사춘기의 성장통에 관한 이야기다.

아아, 역시나, 고전은, 아름답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09-12-0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정말이지 홀든이 아이들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게 돌보아 주고 싶다는 말을 할 때, 바로 그때, 도대체 이 소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감탄했어요. 저는 이 책을 두번 읽었는데 앞으로도 또 읽고 싶어요. 정말 이 책 아주 좋아해요!!

아시마 2009-12-03 09:39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한 세번 읽었는데요,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훨씬 더 강해요. 읽을때마다 느낌이 달라진달까. 이 책 참 재미있고, 샐린저도 글을 재미있게 쓰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어려워서 샐린저 소설은 덤빌려면 심호흡이 필요해요, 저는. ^^;;;
근데 꼭, 완전히 소화해서 내것으로 만들고 싶은 소설중에 하나예요. 아직까지는 소화가 덜됐어요.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設, 첫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김훈의 글은 상쾌하다. 읽고 있으면 가려운 곳을 골라서 살살 긁어주는 듯한 쾌감이 인다. 신문기자로서의 오랜 동안의 삶이 그의 글을 깔끔하고 단정하게 가꾸어 주었고 오랫동안의 사유는 그의 글을 가치 있게 만든다. 그의 글은 거침없다. 자신의 삶에 충실했던 사람다운 자신감이 그의 글을 거침없이 만든다. 그는 세상을 향한 일갈을 내뱉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그 일갈들이 매번 통쾌하다. 예를들면, 이런 식이다.

「……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묻는다면 나는 우습고 꼴같지 않아서 대답하지 못한다.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지성이다. 제발 이러지들 말라. …… '자유'와 '정의'를 앞장세운 이 절망적인 개수작들은 당장 집어치워라.」

그는 언론자유와 조세정의를 가지고 싸움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개수작'이라고 일갈한다. 나의 생각도 그러하다. 하하, 그건 개수작일 뿐이다.

그는 '언어'와 '언론'으로 평생을 벌어먹고 산 사람이다. 그가 '존엄하다'라고 말하는 밥과 돈을 그는 평생 '언어'와 '언론'을 통하여 벌어들였다. 때문에 그의 산문에는 여기저기 언어와 언론에 대한 통찰이 드러난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언론'을 통해 다듬어 지고, '언론'은 언어를 통해 가치를 획득한다. 그는 사실 (팩트 fact)만을 통한 신문기사 쓰기를 꿈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불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객관적 사실 전달이란 처음부터 모순적이다. 그 사실을 보는 자의 주관이 처음부터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냉철한 이성으로 주변을 살핀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차갑지 않다. 다만 냉정하게 사실을 파헤치고 있을 뿐, 그것이 그의 인간 됨이 차갑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다른 누구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주변을 본다.

그는 버려진 마을에 동정을 가지고 있고, 밥을 굶는 어린 아이들을 걱정하며, 고통을 전담할 수밖에 없는 이 나라의 선량한 백성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낸다. 그가 삼엄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그들에게 고통을 전담시키는 무능하고 후안무치한 정부에게 일뿐.

이렇게도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가 이렇게 서정적인 문장을 써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역설 같다. 그의 문장 전체가 역설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삶 자체가 역설이기 때문인지도. 그는 적극적 보수주의자이면서 한편으로 몹시 페미닌한 감성을 가지고 있다. 적극적 보수는 아름답다. 어째서 이 사회에서는 보수를 악으로만 보는가. 보수는 어차피 이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지속적인 힘이다. 진보는 사회를 개혁하지만 보수는 그 사회를 지탱해 나간다. 그런데도 이 나라에서는 자신이 보수임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해야만 한다. 보수는 곧 악의 상징과 동일하게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김훈은 당당하게 말한다. 나는 보수주의자이고, 나는 여성의 능력은 신뢰하지 않고, 나는 뚱뚱한 여자를 여자로서 싫어한다, 고.

그의 당당함은 스스로의 삶에 충실한 것으로 보상을 받는다. 그는 "여성의 능력은 신뢰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대신 아들에게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능력을 불신하는 여성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으려는 그의 언행일치. 그것으로 그의 보수는 정당하다.

우리도 이제, 냉정한 이성을 아름다운 문체로 표현할 수 있는 작가 한 사람쯤, 가질 때가 되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김훈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키친 민음사 모던 클래식 5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서사성 강한 소설을 좋아한다. 선이 굵고, 스토리 라인이 확실하고. 그래서 박완서를 좋아한다. 박완서의 그 튼튼한 서사성은 그야말로 소설의 본령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박경리역시 마찬가지. 튼튼한 서사성 위에 질박한(?) 묘사는 완벽한 소설의 첫 번째 조건 아닐까. 박완서의 묘사는 허공을 짚지 않는다. 플로베르가 누님~ 하고 울고 갈 판의 완벽한 일물일어다. 그래서 박완서는 대가다.(박경리조차도, 박완서의 그 일물일어에는 닿지 못했다, 싶다.)

『키친』에 실려있는 세 편의 단편은 서사성은 약하다. 그렇다고 묘사가 질박하게 땅에 붙은 일물일어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동화를 쓰듯 애매한 이미지들을 차용하여 꿈결의 이야기를 늘어놓듯 늘어놓을 뿐이다. 묘사가 아니라, 감각만이 남아있다. 모양이 어떠하다, 라는 시각은 사라지고 따뜻하다, 포근하다, 하는 촉감, 향긋하다 하는 후각, 등만이 생생하게 전해진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소설에서 나에게 가장 강하게 전달된 것은 이러한 것들이 아니다.

소설 전체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이질감.

나는 이것이 일본적 정서라고 파악했고, 한국적 정서에서 자란 내가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는 이질감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든다면 그런 것이다. 남자 주인공 유이치의 집안에 대한 설명.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것에 나는 늘 동의하는데, 그런 면에서 이들의 관계는 나의 사고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상상치도 못한 이야기인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면 그것은 엽기다. 성전환 수술을 해서 엄마로 살아가는 아버지, 라니, 한국적 정서에 길들여진 "보수적인" 나로서는 상상 밖의 영역이다. 이해하지 못한다, 라는 것이 아니라 시초부터가 상상 이외의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질감은 시작된다. "성전환"수술이 상상 밖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가 상상 밖이라는 이야기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유이치는 문제아가 되어 있어야 맞는 거 아닐까.

그 다음으로 말하자면, 사건 자체의 이질성이다. 살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동안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의 집에 덥석 들어가 살 수 있다는 것, 이것 역시 한국에서 가능한 사고는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런 이유로 해서 요시모토 바나나는 동화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또 있다. 사물을 묘사하는 방식. 그것이 요시모토 바나나의 개인적인 특성이라 하더라도, 한 인간을 형성하는 것은 그 사회와 문화인 법이니까, 그녀의 글 전체에 배어있는 일본적 사고랄까, 그런 것이 내게는 확실히 기묘한 이질감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기묘한 이질감이 오히려 『키친』의 매력을 배가시키고 말았다. 기묘하고 동화적인 이야기에 기묘한 이질감이 더해져 버림으로써, 매력이 가중된 결과라고 할까. 또, 그 기묘함의 덮개로 덮어놓은, 소설의 기저에 흐르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의 흐름(그 역시 내가 사고하기에는 벅찬 것이기는 하지만)이 묘하게 매력적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다름"에서 오는 호기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식으로 사고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이랄까.

여튼,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요시모토 바나나를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다른 소설집 두권을 구입해 쌓아놓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