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3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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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새로운 작가를 소개받는(이 표현이 적당한가?) 것은 서너가지의 정해진 루트를 통해 이루어진다. 첫째는 누구나 그렇듯 '베스트셀러'의 작가인 경우, 일단 한번쯤은 손이 가서 한 권쯤은 구입하게 된다. 둘째, 내가 좋아하는 작가 또는 비평가가 어떤 지면에서 새로운 작가의 이름을 들어 칭찬하는 경우. 셋째, 문학상 수상 작가. 김훈이 여기에 해당한다. 넷째, 보통 한 달에 두 번 2주일 치를 몰아서 하는 신문 스크랩을 하면서 읽게 되는 신문 기사들을 통해. 다섯째, 다른 사람의 독서 목록에서 보고.

음, 이사벨 아옌데, 라는 이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녀가 73년 피노체트에 의해 정권을 찬탈(또는 전복)당한 칠레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딸이라는 기사를 보고서 였으니 네 번째 경우에 해당하겠다. 

작가의 출신 지역이나 나라를 알고 그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은 작가와 작품의 이해에 도움을 준다. 특히 처음 접하는 작가일수록. 한편으로 생각하면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는 단점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어느 정도의 사전정보는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그러나 칠레에 대한 정보는 전무한 상태. 전 세계에서 가장 길다란 나라, 남미의 왼쪽 바다 접경 사면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뱀 같은 형상의 나라, 이런 정보가 도대체 작가 이해와 작품 해석에 무슨 도움을 준다는 거지? 겨우겨우, 아옌데 전 칠레 대통령의 조카딸이라더라,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책에 접근.

이야기는 칠레의 발파라이소에 이주한 영국인의 집안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당시(1884년경) 칠레는 정치적 형식으로는 독립국가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영국에 예속된 상태의 국가였다. 그런 상황에서 '칠레에 정착한 영국인 집안'의 위치와 권위쯤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소머스 집안은 <대영제국 수출입 회사>에 다니고 있는 장남 제레미 소머스, 선장이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둘째 존 소머스, 막내딸 로즈 소머스가 모두 미혼인 채로 살고 있다. 이 집안에 엘리사가 비누상자에 담겨 이 집안의 현관 앞에 놓인 것은 물에 고인 듯 조용하고 교양넘치는 생활을 하던 이들 가족에게 큰 활력소가 되어 준다.

로즈 소머스는 엄마와 같은 관심과 극단적인 이기적 무관심 사이를 오고가며 엘리사를 "인형같이" 꾸미기도 하고 "칠레 원주민 아이 같이" 더럽고 헐벗은 모습으로 뛰어놀게 내버려 두기도 하며 엘리사를 키운다. 로즈의 이 극단적인 양극에 닿아있는 양육방법은 엘리사의 성격 역시 얌전하면서도 저돌적인 양극단을 달리게 된다.  

이 소설은 조금쯤 산만하다. 처음부터 이야기의 종결을 알고 시작하는 작가의 시점은 중간중간에 뒤의 이야기를 미리 툭툭 던져버림으로써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고, 중간에 느닷없이 삽입되는 타오 치엔의 중국 이야기는 그야말로 겉돈다는 느낌이랄까. 영국적 분위기의 칠레 상류사회에서 미국의 골드러시로 따라 가는 것만도 소설의 스케일이 커진다는 느낌인데 거기에 중국의 이야기가 갑자기 뛰어드는 것은 아무래도 과하다 싶고, 지나치게 다양한 이력과 직업을 가진 인물들의 이야기 하나하나에 모두 카메라를 들이대려 하다 보니 정장 중심줄기는 힘을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재미있다. 특히 위장과 변질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오고가는 인물들은 인간의 본성을 한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매력을 지닌다.

평탄한 삶을 팽개치고 뛰어나온 엘리사는 중국인 종이(뛰어난 의사라는 뜻 정도?)의 도움을 받아 호아킨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다. 여기서 엘리사는 변질이 아니라, 위장이다. 본래의 성정이 바뀌지는 않으니. 자존심 강하고 똑똑했던 칠레 남자 호아킨은 사랑하는 여자 엘리사와의 사랑을 완성시키려는 욕심으로 돈을 벌기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골드러시에 한몫 볼 욕심으로 회사의 돈을 훔쳐서. 여기까지만 해도 그 역시 위장이다. 그의 본성은 여전히 순결하고 부드럽다.

이들에 비해 영국에서 성경을 팔기 위해 칠레로 넘어온 제이컵 토드는 위장이 아니라 변질이다. 그의 본성은 본다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였고, 사기가 들통나 칠레의 상류사회에서 쫓겨나 미국의 신문기자가 되어서도 그는 여전히 거짓에 거짓을 거듭한다.

여기서 말하는 "변질"이란 인간 본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진실된 알맹이, 가치있는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들을 이 글에서는 변질된 인간으로 칭하기로 한다면, 호아킨 역시 변질되고 만다. 순박했던 청년은 미국 서부의 무법 천지 속에서 최악의 범죄자가 되어 가고, 제이컵 토드는 변질된 속에서 나오는 거짓과 거짓으로 삶을 영위한다.

그 속에서 의지적이고 순결한 인간들 엘리사와 타이 치엔은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

정해진 수순에 따라 타이 치엔과 엘리사는 결합하게 되고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난다.

산만하고 정신없는 이야기 구조속에서 가치를 가지는 것은 풍속사의 자세한 묘사다. 칠레로 이주한 영국 상류사회의 풍속사, 골드러시가 막 시작되었을 때의 미국 서부의 풍속, 막 개방되기 시작하던 중국의 풍속(펄벅의 대지에 비해 그야말로 겉핥기 식이지만.)등등이 여성 작가 특유의 필치로 세밀하게 묘사됨에 따라 소설은 인물들의 상투성, 식상함 속에서도 발바닥을 땅에 단단히 붙이고 있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페미니즘 소설이다, 라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에서 들리던데. 글쎄. 말만 갖다 붙이면 죄다 페미니즘이냐? 글의 어디에서도 엘리사의 자아 실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엘리사는 고집 세고, 19세기의 기준으로는 제법 독립적인 사고를 하는 여성일 뿐 그것을 페미니즘 적 요소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19세기라는 사회적 배경 속에 엘리사의 20세기 여성에 가까운 사고는 외려 겉도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그야말로 19세기에 뛰어든 20세기의 여성이 좌충우돌하는 이야기 비슷하게 읽힌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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