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박경리 다시 읽기 박경리가 박경리인 이유 파시by 박경리

 

다시 읽은 날 : 2026.2.14.

 

벌여놓은 일의 마무리에 약한 것은 나의 오래된 나쁜 습관이다. 마무리가 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고 그다지 많은 시간을 요구하지 않을수록, ‘금방 끝낼 수 있어.’ 라는 심리는 오히려 그 마무리를 더 경시하게 만든다. 202410월에 나홀로 시작한 이 박경리 다시 읽기프로젝트도 그 나쁜 습관을 비켜가지 못했다. 네달 동안 열심히 열권을 읽었고, 남아있는 책은 이제 네 다섯권 남짓, 그 남은 책 안에 파시시장과 전장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어려울 게 하나도 없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무려 1년을 그냥 묵혀둔 거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핑계는 있다. 새로 시작한 일이 나의 처음 예상보다 많은 심력(心力)을 요구해서 진득하게 뭘 잡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 물론, 핑계다. 심각한 수준의 활자중독자인 나는 그 기간동안 그 어느때보다 많은 업무와 상관없는활자를 읽었다. 심력을 요구하는 그 일들에서 도망치는 기분으로. 그러나 그런 마음과 정신으로는 무언가를 진득하게 잡고 그 세계안에 빠져드는 일은 불가능했다.

 

일을 그만뒀고, 갑자기 주어진 물리적 자유시간에 허둥대며 일주일을 보내고 나서 슬그머니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때 눈에 띈 거다. 나남 김형국 사장님이 쓴 박경리 이야기(나남, 2022). (맞다, 나 이 책 결국 샀다.) 당장 밀도 높은 소설을 읽을 자신은 없고, 이 책을 읽으며 슬슬 시동이나 걸어볼까 책을 펼쳤는데,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턱에 걸렸다.

 

대하소설 토지가 완간 된 후, 김형국 사장은 작가의 생애사 연구를 해 글을 쓰기 위해 박경리 선생을 찾는다.

 

……당신 일대를 돌아보는 자술을 마음 닿는 대로 적어주면, 거기에 담길 당신의 개인사 또는 미시사는 일제 식민지배, 국토 분단, 6.25 전쟁 등 현대 한국의 격동적인 사회사와도 맞닿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대답은 당신의 장편소설 시장과 전장(1964)을 들먹였다. 주인공 남지영이 자신의 분신이었고, 그만큼 책 서사가 당신 내력이라 했다.

김형국, 박경리 이야기, 나남, 2022, p.7

 

얌전히 김형국의 책을 덮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시장과 전장을 먼저 읽어야 겠다는, 그래야 이 책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들었기 때문이고(시장과 전장은 읽었다는 기억만은 명확한데 그 내용이 정말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는 어쩌면 안 읽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책을 읽을 물리적인 시간이 주어졌으니 1년째 팽개쳐 둔 프로젝트를 완성해야겠다는 의무감도 들었기 때문이다.

 

연대상 시장과 전장의 앞에 이 작품 파시가 놓여 있으니, 실은 이 책을 읽은 건 시장과 전장을 읽기 위해서였다.(사실 파시는 동아일보에서 1964713일부터 연재되기 시작해, 1965531일에 완결된다. 단행본으로 묶여 나오기는 1968년의 일이고, 파시가 한창 연재되고 있던 중인 1964시장과 전장이 현암사에서 전작 장편으로 출간되었으니, 사실 순서만 가지고 따지면 시장과 전장을 먼저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1951-2년 경, 한반도에 아직도 전쟁이 진행형이던 시기 남도땅 통영을 배경으로 한다. 낙동강 방어선이 지켜진 덕에 통영은 피란수도 부산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포화를 입지는 않았다. 사람과 정부만 피란을 온 게 아니라 학교까지 피란을 와서 그 혼란의 시기에도 대학생은 군대를 가지 않았다.(서울대 국문과 52학번인 이어령은 부산에서 입학했다.) 그 엉망진창인 전란 속에서도 인간의 급이 명확하게 갈리는 거다.

 

북쪽 출신인 수옥은 전란을 피해 남하하는 과정에서 부모와 자신을 아껴주던 세 오빠와 이별하게 된다. 부모님과 오빠들의 생사도 알 길이 없이 홀로 피란민에 휩쓸려 거제까지 내려갔다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부산으로 가게 되었고, 명화의 아버지 조만섭씨의 처제 영자씨의 집에 아마도 식모 쯤으로 기거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수옥은 영자의 남편에게 강간을 당했고, 남편이 바람 피우는 것을 못견딘 영자가 형부인 조만섭에게 부탁해 남편 몰래 수옥을 조만섭에게 딸려 보낸다. 남편의 눈 앞에서 치워버리는 것이다.

 

소설의 첫장면은 조만섭씨가 수옥을 데리고 부산에서 통영으로 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소설에는 전쟁에 휩쓸린 네 여성이 나온다. 처음 등장하는 수옥은 가세가 꽤 넉넉했던 과수원집 고명딸로 여학교까지 나온데다 뛰어난 미모를 지녔지만, 전쟁은 그녀의 모든 보호막을 빼앗아 간다. 그 상황에서 수옥의 미모는 생존에 오히려 치명적인 해악이 된다.

수옥을 구해주려 노력했던 조만섭씨의 딸 명화는 전쟁 그 자체에 망가지지는 않는다. 그녀는 전쟁통에도 여전히 대학을 다니고 있고 그녀의 아버지 조만섭씨는 큰 부자는 아니어도 딸을 대학 공부 시킬만큼의 여유는 지니고 있다. 다만, 그녀의 어머니는 정신과 질환(아마도 정신분열쯤?)에 시달리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전쟁을 피해(또는 공산주의를 피해 해방직후 월남... 정도로 이야기 해야 말이 맞다. 앞에서 박의사는 통영의 시골 의사짓을 이십년 동안했다고 하고, 학자네 집안이 부유했을 때 왕진가방을 들고 학자네 집에 왕진을 다니던 의사나부랭이였다고 학자로부터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또 학자, 학수, 명화, 응주는 모두 어릴때부터의 소꿉친구였다는 서술도 있다. 그런데 뒤에가면 전쟁을 피해 통영으로 왔다는 서술이 나오니 서술의 앞 뒤가 맞지 않다.) 북에서 남하해 온 박의사 집안의 역시나 의대생 박응주와 연인이 된 것은 그녀에게 별로 좋지 못한 일이었다. ‘의사라는 직업은 정신 질환의 유전적 소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라, 박의사는 아들과 명화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기 때문이다.

명화보다 한 살 어린 학자는 전쟁 전 명화와 함께 여학교를 다니던 통영 유지 집안의 딸이다. 통영에서 가장 부자에 가장 집안이 좋던 학자의 집은 전쟁과 함께 완전히 몰락하고 학자는 학업을 그만 두어야 할 정도로 가난해 진다. 드센 성격의 학자는 수옥과 달리 자신의 몰락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명화, 응주, 학자, 학자의 오빠 학수 넷이 소꿉친구로 지내던 시절 학자는 자신은 응주와 명화는 학수와 결혼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이 가져온 몰락으로 학자와 명화, 응주의 사회 계층은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자괴감으로 자학에 가까운 몸부림을 치던 학자는 결국 아래로 아래로 전락한다.

선애는 경북 봉화 지역의 조촐한 농민의 딸이었다. 전쟁통에 부모 형제를 다 잃고 혼잣몸이 되었지만 어쩌다 조만섭씨의 계실이 된 서울댁의 남동생 문성재를 만나 봉화에서 결혼식까지 올리고 나름대로 자신은 삼서육례를 다 갖춘 본처라는 자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성재는 처음부터 선애와 평생을 해로할 생각은 없었던 듯 어느날 자취를 감추고, 선애는 남편이라 생각하는 문성재를 찾아 통영까지 온다.

 

사회제도가 만들어 둔 안전망이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망가져버린 세상에서, 가족이라는 최소한의 안전망마저 분실해버린 이 네 여자는 (명화의 가족 안전망은 모친의 정신병력으로 이미 제기능을 상실했다) 각자의 방법으로 그 상황을 살아나간다.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저 떠밀려 살아나가는 것이다.

이 네 명의 여성에 전적으로 대비되는 존재가 죽희다. 의대교수이자 의사인 윤교수의 외동딸로 오빠는 미국에 유학을 가 있고, 죽희는 E여대를 다니고 있다. 윤교수는 본디 서울에 살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남하했지만, 부산의 본가는 팔지 않고 그냥 뒀고, 의사이자 교수라는 직업은 전쟁통에 더욱 안전하고 튼튼한 보호막이 되어준다. 사회와 가족의 안전망 안에서 죽희는 천진난만하고 해맑다. 전쟁이라는 참극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수옥, 학자, 선애가 그랬을.

 

전쟁은 전투에 직접 투입되는 남자에게는 생명과 관여되는 문제다. 그 전쟁에 직접 투입되지 않는 여자에게는 생존의 문제가 된다. 법과 제도의 보호가 무의미해진 혼란한 사회상 안에서 젊은 여자는 가장 연약한 먹이가 된다. 가족의 보호가 없고, 신분(직업, 학벌)의 보호가 없다면 더욱. 어찌해도 살아갈 방법이 없는 것이다. 결국 수옥을 구원해 주는 것은 학수의 사랑이고, 명화가 끝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응주의 사랑이 옅기 때문이다. (사랑의 옅음을 타박하는 것이 아니다.)

 

박경리의 서술은 박력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박경리는 서사 앞에 머뭇거리거나 움츠리지 않는다. 장면장면의 묘사가 얼마나 핍진하고 명확한지 읽다가 그 밀도에 지레 질려 소름이 돋을 정도다. 박경리가 박경리일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기에 하나 더 첨언하자면.

 

요즘 아이들은 사투리를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매스컴의 영향이다. 언어가 전체적으로 표준화 되어간다. 이윤기 선생은 사투리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사람은 1970년대 즈음에 해외로 이민을 간 사람들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민을 간 사람들의 한국어 언어(단어)는 자신이 살던 그 시절에 딱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처럼 매스컴이 발달하지도 않았던 시대인지라 사투리가 표준어로 순화(아니, 변형) 될 기회가 없었던 거다.

 

나는 경상도 사투리로부터 30년 전에 유리 되었다. 억양은 어쩔수 없이 남아있을지언정, 어느샌가 나도 경상도 사투리 단어들을 별로 쓰지 않고 들을 일이 별로 없다. 어느새 나의 일상어는 서울말을 가장한 표준어가 되었다. 그러다 경상도 출신 남자와 살면서 느낀 건 나의 언어를 찾았다는 일종의 해방감, 귀향감이었다. 내가 잊고 살던 그 경상도 사투리가 이 책 파시에는 유난히도 선명하게 등장한다. 박경리가 진주-통영 출신임에도 다른 소설들은 진주-통영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거나, 토지의 경우 주인공들(서희, 길상, 윤국, 환국 등등등)은 모두 서울말, 최소 표준어를 쓴다. 배경도 대부분 만주, 서울 등지다. 서희가 경상도 말을 쓰지 않는 것은 어머니 별당아씨가 서울 출신이라는 설정이 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별당아씨는 다섯 살에 서희와 이별했고, 평생 경상도에 살았던 최치수도 표준어를 쓴다. 윤씨부인도 마찬가지다. 평사리 농민들의 그 질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상전들의 입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박경리가 통영을 배경으로 쓴 첫 번째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도 주인공 용빈은 서울말을 쓴다.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 파시에서도 주인공 명화와 응주, 학자는 서울말(최소 표준어)를 쓴다. , 박경리 선생의 이 언어 사대주의라니. 하하하.

명화는 그러해도, 이 소설의 나머지 인물들은 완벽하게 경상도, 특히 진주-통영 지방의 서부경남 사투리를 쓴다. 이제는 잊혀지고 더 이상은 실사용 되지 않을법한 단어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엄마에게서 배운 그 단어들이 이 소설에서는 선명하게 재현되어 있다. , 이런 말도 있었지. 하고 새삼 느낄정도로. 남편과 처음 경상도 말로 자유롭게 대화를 할 때에 느끼던 그 해방감과 기묘한 귀향의 희열이 이 책에 있다.

 

하나의 단어는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표준어로는 도저히 그 뉘앙스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특유의 단어들이 분명히 있다. 경상도 말 여럽다는 정확히 1:1 대치되는 표준어가 없다. 부추-정구지(전구지)의 대치와는 다르다. ‘여럽다는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린척을 한다는 뜻으로 대충 설명할 수 있는데 단순히 그 설명만으로는 그 여럽다는 단어에 들어 있는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다. 경상도 사투리 여럽다가 사라지면 여럽다로 설명되던 어떤 감각, 감정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하는 존재라.

 

그래서 작가의 존재가 소중해 진다. 현재는 쓰지 않는 단어라고 해도 사라지지 않게 해 그 의미영역을 보존해 주는 거니까. 사투리는 한국어를 풍성하게 해 준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박경리는 일가를 이룬다.

 

송장 뻗얼트려놓고(p.250), 부둑티렸다(p.434 / 내가 엄마에게 배운 말은 부딜티렸다’) 등의 단어들. 아마도 경상도 출신이 아닌 사람에게는 해독이 필요한 암호같을 이 이 단어들. 이게 박경리가 박경리인 이유다.

 

다음 소설 시장과 전장은 배경이 배경인지라, 이런 절묘한 경상도 사투리가 나오지 않을 거다, 아마도.

 

2026.2.15. by ashima


ps. 마로니에 사장님, 이 책에는 오탈자가 없을 거 같죠? 132, “가질 것을 가져야만 그게 통하는 거다라는 문장이 2번 반복됩니다... , 재판을 찍으실 일은 없으실테지만 알아나 두시라구요. 우리 이러지 맙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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