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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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이란 헤브라이어의 베엘제버브(Ba'alzevuv: 희랍어의 Beelzebub)를 번역한 말로 직역하면 <곤충의 왕>이란 뜻이다. <악마>를 암시하는 신랄하고 암시적인 말인 것이다.

쥘 베르느의 『15소년 표류기』정도의 소설을 상상하고 책을 펼친 나에게 『파리대왕』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15소년 표류기』가 어른의 눈으로 본 아이들만의 이상향 건설에 관한 이야기라면 『파리대왕』은 인간 본성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간 이야기랄까. 이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아이다움을 드러내는 한 요소는 숫자를 셀 수 있는 나이의 누구도 외딴섬에 표류하게 된 자신들의 일행이 몇 명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15소년"이라는 규칙의 세계와 이 얼마나 완벽한 대조인가.

작가는 아직 '규칙'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는 10대 초중반과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을 '규칙부재'의 무인도에 던져 넣음으로써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고 있다.

인간이란 본래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순자는 인간은 본래 악한 존재이며, 그 악한 본성을 억누르기 위해 법률이 필요하고, 끊임없는 공부와 수도로 악한 본성을 순화시켜 나가야한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순자의 그러한 주장이 유감없이 진리로 드러난다.

고전의 아름다움은 하나의 작품이 수없이 많은 의미의 텍스트로 변주해 가며 읽힌다는 데 있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파리대왕은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로 읽을 수도 있고 풍부한 상징을 통한 정치학 교과서로 읽을 수도 있다. 또한 소년들의 성장소설로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이 여타의 가벼운 소설들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그 완벽하고도 풍부한 상징성이라 할 수 있다.

본디, 지나치게 상징적인 소설은 재미없고 촌스럽다. 풍자나 패러디를 보자는 것도 아니고, 온갖 조잡한 상징을 이리저리 가져다 기워놓은 작품은 읽기조차 역겨워진다. 하지만 월리엄 골딩은 그러한 함정을 완벽하게 피해 가는 것으로 이 작품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 놓는다.

이야기의 중심 축을 형성하는 인물은 셋 정도다.

규칙과 문명을 상징하는 랠프는 처음 아이들에 의해 지도자로 선출된다. 키가 크고 몸집이 단단한 금발머리인 랠프는 외면적 아름다움과 우연히 손에 쥐게 된 소라로 처음으로 아이들을 집결시키는-그것은 물론 돼지(끝까지 본명이 나오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에도)의 생각에 랠프가 따른 것에 불과하지만- 것으로 아이들의 신뢰를 획득한다.

두 번째 폭력과 야만을 상징하는 잭. 그가 문명의 세계에서는 누구보다 규율에 복종하고, 규율 그 자체로 아이들을 지휘했던 성가대의 통솔자였다는 사실은 인간 본성에 대한 놀라운 역설을 제공한다. 또한 그는 힘을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세 번째 지성과 이성을 상징하는 돼지. 그는 누구보다 똑똑하지만 천식과 보기 흉한 외모로 지도자의 브레인 트러스트 역할만을 맡을 뿐이다.(그나마 지도자는 그를 별로 위해주지도 않는다.)

나머지, 작품 전체를 통털어 가장 잔인한 인물로 등장하는 잭의 오른팔 로저-그는 현대에도 어디에나 존재하는 암살자의 존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규칙과 문명을 사랑하고 그에 감정적으로 동조하지만 폭력과 야만의 위협과 고기의 달콤한 유혹에 그쪽으로 돌아서고 마는 약한 존재인 쌍둥이 샘과 에릭. 예언자 사이먼.

등장인물 하나하나는 현대의 사회에서 투쟁하고 있는 세력 하나하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이 소설은 완벽하고도 훌륭한 정치학 교과서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는 "파리대왕"이 폭력과 야만을 상징하는 '잭'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읽어내려 갈수록 '파리대왕'이란 어느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무지와 공포 그 자체를 일컫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아주 어린아이들에 의해 말해지는 두려움. 조금 큰-랠프 또래의- 아이들은 겉으로는 콧웃음을 치지만 역시 똑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그 두려움은 아이들을 분열시키고, 좁은 섬은 문명과 폭력의 세계 양쪽으로 갈라서게 되는 것이다. 그 두려움에 대한 의도적 외면과 축제의 격앙된 상태에서 우발적 살인을 저지르는 아이들은 그로 인하여 더욱 야만의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우발적(과연 우발적이었을까?) 살인과 달리, 아이들은 이제 의도적 살인을 계획하고 사람 사냥에 나선다. 돼지(지성, 이성)이 죽고 난 뒤, 혼자 남게되는 랠프(문명)은 폭력에 의해 잔인하게 사냥되어지기(이런 이상한 피동태를 쓰는 것은 싫지만.) 시작한다. 로저는 "창의 양끝을 뾰족하게 만들고" 랠프를 찾아다닌다. 창의 양끝을 뾰족하게 만든다는 것은 랠프의 목을 잘라 창의 한쪽에 끼우고 다른 한쪽을 바닥에 꽂아 신에게 제물로 바치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야말로 "의도적 살인" 인 것이다.

마지막, 위대하고 거대하며 완벽한 권위를 지닌, 아니, 무엇보다 문명으로 가장 된 "힘"을 가진 어른을 만나는 순간 아이들의 야만성은 순식간에 거세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상실해 버린 순진함에 대한 고통으로. (이 장면은 13일의 금요일에서도 자주 보이는 장면이다. 살인마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하나의 청소년이 울음을 터트리는 것.) 결국,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은 그렇게 무섭도록 잔인한 과정을 거치고서야 가능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소설은 또한 성장소설로서의 위치도 획득하게 된다.

고전은, 참으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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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09-12-0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네요. 저 이거 영화로 보고 완전 충격받았었어요. 그런 상징의 틀로까지 이해는 못하고 그저 경악스럽다는 감정으로만 받아들였던 기억이 나네요. 영화는 아무래도 깊이있는 감상이 안되는 것 같아요. 책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아시마 2009-12-03 09:36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의 충격은 컸어요. 영화는 아무래도 이런 성찰을 담기는 힘들죠. 매체의 차이랄까. 영화는 영화대로 좋았고, 소설은 소설대로 좋더라구요.
이렇게 많은 메타포를 담은 소설은 아무래도 좀 재미는 없어질때가 많은데, 이 소설은 재미라는 부분에서도 정말 압권의 성과를 거둬요. 어떤 깊이나 가치의 문제와는 별개로, 진짜진짜진짜 재미있는 소설이니 꼭 읽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