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과 거짓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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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김윤식 샌님이 박완서 샌님의 글에 대해 "천의무봉"이라 극찬한 일이 있는데, 이 글을 읽으며 문득 그 표현이 생각났다. 천의 무봉이라 칭할만큼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라, 조각조각 나뉘어진 이야기들을 엮어 이어나간 이어진 이음매자리가 놀랍도록 매끈하다.

워낙에 은희경을 좋아하긴 하지만 말이다. 탄탄한 구성, 신랄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아프지 않은 문체 등등에 많은 점수를 주었었는데, 이 소설은 그간 은희경이 가지고 있던 매력들을 아우르면서도 새로운 아우라를 발산해 낸다.

이 소설은 꽤나 집중을 요하는 소설이다. 까닥 흐름을 놓쳤다간 '산만하다'라는 평을 하기 딱 좋다. 소설의 이야기들은 흐트러져 있는듯, 따로 따로 흘러가며, 그 이야기들을 묶어주고 있는 것은 아주 가느다란 줄이다. 일종의 거미줄 같은. 그래서 쉽게 보이지 않는다. 한권의 소설 안에서 주인공 3대조의 이야기가 모두 나오게 되며, 그 3대조의 이야기가 생기게 되는 근본 원인은 그 3대조의 다시 3대조 위의 할아버지 부터의 이야기다. 게다가 이야기의 중심을 잡고있는 것 또한 사람이 아닌 K읍이라는 지방의 한 소도시고, 때문에 이런 류의 이야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황하게 된다. 사람이 아닌 도시가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라니 황당하지 않은가.

거미줄은 얼핏, 불규칙한 구도로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거미줄도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한 규칙성을 가지고 있다. 힘받이 줄도 따로이 존재한다.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은 불규칙한 그물일지라도 그 그물을 존재하게 만들어주는 중심 줄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이 소설이 가지는 거미줄같은 구성에서 그같은 힘받이 줄은, 서너개다. 하나는, K읍의 역사, 두번째는 K읍에 전해져 내려오는 4형제 전설, 또 하나는 주인공 영준이 제작하는 영화. 특히 영준이 제작하고 있는 영화 《비밀과 거짓말》은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핵심에 맞닿아 있으면서 주인공인 K읍이 하고자 하는 말을 효과적으로 언어화 한다. 은희경, 똑똑하다니까, 확실히. 흐트러져 있던 이야기를 묶어 하나의 주제로 엮어 내는데 액자의 구성을 하는 이 영화의 역할은 압도적이다. 이 영화가 없었다면 이 소설의 주제의식은 절반 이하로 약화되었으리라 싶을만큼.

재미있었다. 난 김별아의 『미실』보단 이 소설이 훨씬 낫더라구. 근데 왜 김별아가 1억을 받았을까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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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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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보듯, 사람을 본다, 라고 김훈이 발문에 써 놓기는 했던데.

문득, 내가 왜 이렇게 미친듯이, 음식으로 치자면 폭식을 하듯 책을 읽어제끼나, 라는 생각을 이 책을 닫으면서 했다. 친구 누구는 한달에 한권 읽는 것이 목표라 하고, 누구는 일년에 열권 읽는 것이 목표라하고, 책 좀 많이 읽는다는 친구래야, 한달에 열권이 목표라는데, 나는 돈이 생기는 족족 책을 사들이고, 시간만 된다면 하루에 두권이고 세권이고 되는대로 읽어 제낀다. 아직까지는 머리가 녹슬지 않아 다행한 건지 그나마 내용이 뒤섞이는 일은 없지만, 누군가의 말로는 그러더라, 이런 총기도 멀잖았다고.

나는, 북홀릭, 활자중독, 돈 키호테 같은 신서증信書症 환자.

그래, 나의 증세는 알겠는데, 나의 증세가 생긴 이유는 뭘까.

정신분석이란, 모든 언행의 이유를 밝히는 학문이라 한다. 자신을 객체화시켜 분석하는. 내가 이토록 책에 집착하고 탐닉하는 이유는 뭘까.

나는, 나를 이해해 보고 싶고,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이해해 보고 싶다. 누군가의 말을 이해해 보고 싶고,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도 이해해 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다. 내가 한 행동, 내가 한 말이 내가 읽은 책의 어느 구석에서 튀어나왔을 때, 그제야 나는 나를 이해할 수가 있다. 그 책의 구절에 의지하여. 끝끝내 나는 신서증 환자.

권여선의 책 『푸르른 틈새』에서 나는, 내가 했던 행동들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경악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면서, 그제야 나의 행동과 나의 심리가 이해되었으니까.

내가 책을 읽는 건, 어쩌면 자가 심리분석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으니까.

나에대한 자잘한 해석을 넓혀, 내가 야하고 뻔뻔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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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정원에서 - 죄악과 매혹으로 가득 찬 금기 음식의 역사
스튜어트 리 앨런 지음, 정미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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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이 그랬다지.
"아담은 사과가 탐이 난 것이 아니라 단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탐을 낸 것이다." 라고. 그게 무엇이건 간에 금지된 것은 매력을 가진다. 본질을 알고 나면 더할나위없이 시시껍절할 지라도 본질을 알기 전까지 금지된 그 무엇은 이세상 그 무엇보다 매력있는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 단지 금기라는 이유만으로도.

이 책은 숱한 금기들 중 음식 금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기운차게 출발 한다. 어떤 음식이 왜, 어떤 이유로 금기 음식이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 그것도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7대 죄악에 맞추어, 어떤 음식이 금기시 된 이유에 관해 설명하겠다고 시작을 하지만, 웬걸. 읽다보면 음식 금기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과거 엽기적인 식문화에 관련된 나열이다. 특히, 기독교 지식이 전무한 사람들이 읽기에는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점이 많다. 읽는이가 어느정도는 기독교에 관련된 지식을 가지고 있으리라 전재하고 시작하니까. 물론 번역자 (정미나 : 『호박속의 잠자리』번역가^^)가 독자의 이런 고충을 미리 짐작했음인지 여러가지로 역자주를 달아주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게다가 단테의 <신곡>의 7대 죄악에 맞추어 음식에 대한 금기(그게 아니면 엽기적인 조리법이라 할 지라도)를 나누어 놓았지만 그 경계가 불분명하여 이야기들 사이의 체계가 잡히지 않는다. 차라리 시대별 분류법을 따르든가.

쵸콜렛이 금기식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옥수수나 토마토가 그랬다는 건 신선한 일이었고, 당시의 화려한 만찬장면에 대한 묘사나 의외의 음식에 대한 설명등이 나름 재미있었다. 미시적 사회사를 보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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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현감 귀신체포기 1
김탁환 지음, 백범영 그림 / 이가서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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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고마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책을 많이 읽어줬다는 점이다. 동생과 나를 양 옆에 뉘고, 엄마는 목이 쉬도록 동화책을 읽어 주었다. 엄마의 목소리 속에서 나는 전우치가 되고, 도토리가 되고, 엄지공주가 되어 하늘을 날았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홍길동보다는 전우치가 매력적이다.

김탁환은 그다지 뛰어난 소설가가 아니다, 확실히. 역사와 그 실존인물에게서 이야기의 모티프를 가져와 소설을 꾸며낸다는 점에서 그의 소설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과 공통점을 가지지만, 이인화 반의 반만큼도 재미가 없다. 역사 소설의 제 1 가치는 아무래도 재미라는 점에서, 김탁환의 매력은 떨어진다. 소재를 빌어와 그 소재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하기는 아무래도 더 쉬웠을 텐데. 이인화가 66년생, 김탁환이 68년생, 이인화는 대구출신, 김탁환은 진해출신, 둘다 서울대 국문학과와 동대학원 출신의 소설가이자 교수. 비슷비슷한 프로필의 비슷한 이력을 걸어온 두 남자가 비슷한 곳에서 소재를 빌어와 소설을 쓴다.
헌데 이인화가 훨씬 탁월하다.

김탁환의 소설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섬세함이다. 묘사의 섬세함도, 사건의 섬세함도 모두 떨어진다. 이인화가 『영원한 제국』에서 그러하였듯, 김탁환도 몇몇 소설에서 추리소설의 기법을 차용하고 있지만 섬세함도 떨어지고 박진감도 떨어진다.

그대신 김탁환은 당시의 풍속을 잘 그려낸다. 마치 자신이 그 시대에 살다 나온 사람마냥 당시 사람들의 심리를 매우 설득력있는 필치로 그려낸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방각본 살인사건』. 또 사람들에게서 사라진, 하지만 당시엔 분명 존재했던 것들을 그려낸다. 김탁환의 소설에서 우리 역사의 변방에 존재했던 인물들은 생명을 얻고 소생한다.

뭐, 김탁환에 관해서는 그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독특한 면도 분명 있고, 좋은 면도 분명 있지만 대단한 다작의 작가라서 그럴까, 섬세함이 떨어진다고. 이야기의 힘도 떨어진다고. 한번에 쭈욱, 읽어내리게 만드는 집약력이 없다고.

그러다 이 소설을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전우치가 부주인공(조연이란 말로도, 주인공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이다.)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라는 말에 끌려 읽었는데, 오호! 김탁환이 가진 소설의 힘이란 이런 곳에 있었구나 싶다.

김탁환의 전생인 '아진'의 모험기인 이 이야기는, 모두 10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고, 요재지이에서나 등장할 법한 인물과 사건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하여, 매우, 재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전우치를 제외한 인물들의 매력도나 흡인력이 떨어지는 것은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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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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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샤의 <측천무후>와 더블 리뷰 

언젠가, 강선생님이 프랑스어의 표현력에 관해 이야기 하신 적이 있었다. 영어, 불어, 일어, 한국어, 4개국어를 완벽하게 하는 데다 국문학을 전공으로 불문학을 부전공으로 하신 분이시니까 아마 설득력이 있는 말일테다. 문학을 하기에 가장 좋은 언어는 프랑스어와 한국어라고. 일본어와 영어의 표현력은 한국어와 프랑스어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래서일까? 프랑스인이 아니면서 프랑스어로 창작을 하는 작가들이 꽤 있다. 벨기에 출신의 아멜리 노통이나 중국인 산샤등.

『측천무후』는 산샤가 프랑스어로 쓴 중국 황실의 이야기다. 중국의 역사에 그다지 해박하지 못한 나는 지금까지 당나라의 측천무후와 청나라의 서태후를 혼동하고 있었다. (창피하다.) 그 삶이 비슷해서일까. 아니면 중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혼동되어 버렸을까.

이국적인 것은 에로틱하다는 말이 있다. 이 글은 상당히, 에로틱하다. 에로틱한 장면들이 많이 연출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글 자체가 에로틱하다. 묘사나 사건들에서 관능이 넘친다.

권력의 극에 달하면 색을 탐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인간의 공통적인 특성이 아닌가 싶다. 남자건 여자건 간에. 측천무후의 결말도, 미실의 결말도 그 끝은 색에 닿아 있다.

진본이다 아니다, 상상이다 아니다 논란이 분분한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 바탕으로 쓰여진 김별아의 『미실』역시 에로틱하다. 엄격한 유교 윤리에 길들여 진 눈으로 보았을 때 미실은 확실히 파격적인 인물이다.

주인공의 이름을 책의 제목으로 쓰게 되는 것은 몇가지 장점을 가지게 된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삶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 주인공의 행적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삶,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측천무후와 미실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다. 당나라에서 측천무후가 황태후로서 권력을 누리고 있을 때, 신라에서는 미실이 왕의 애첩으로서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두 여인의 삶은 비슷한 양상을 띄고 진행된다. 비록 측천무후는 눈에 띄게 아름다운 여자가 아닌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였고 미실은 신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지만. 두 사람 모두 유명무실한 남편의 존재를 두고 권력을 한 손에 쥐고 휘두른다.

김별아는 『미실』이라는 작품을 쓰며 작가가 통제할 수 없는 인물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는 말을 했는데 소설에 그 말은 딱 어울린다. 미실은 작가의 통제와 상상을 벗어난 인물이다. 읽으면서 불편해 질 정돈데 쓰는 사람은 얼마나 더 불편했을까.

여자 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권력으로 남자 이상의 권세를 누렸던 동시대 두명의 여 황제. 글 곳곳에 느껴지는 관능적인 분위기가 매력의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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