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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은 21개월 무렵에 통글자들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읽은 글씨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옆의 소화전에 있던 "소" 라는 글자. 

걷기도 늦었고, 말문도 빨리 트인 편이 아니어서 기대도 안했는데, 따로 가르친적도 없는 "소"를 읽은 것이다.  하긴, 돌이 좀 지나고부터 책 제목을 말하면 책등만 보고 뽑아오긴 했었다.

그러더니 27개월 무렵엔 웬만한 통글자는 거의 다 읽었고, 

33개월에는 한글을 뗐다고 말을 해도 좋을 정도에 이르렀다. 36개월인 지금은, 웹서핑을 하는 내 옆에서 내가 뭘 보는지 읽는다. 내가 읽고 있는 책도 읽고.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 알라딘~" "아주 특별한 요리 이야기, 존 란체스터."뭐 이런 식으로. 헐헐. 가끔은 뜨끔할때도 있다.  민망한 제목의 책을 읽고 있을땐.

 다인책은 전집보단 단행본이 훨씬 많은데, 대충 헤아려보면 한 7-800권 되는 것 같다. 전집 단행본 다 포함해서. 이제 한글을 자유롭게 읽으니까 책 제목을 읽는 것 쯤이야 일도 아니다 싶긴 한데, 그래도 오늘 놀라운 일을 하나 했다. 

 다인이 한동안 케빈 헹크스의 <내사랑 뿌뿌>라는 책을 많이 봤었다. 뭐 그래도 특별히 좋아하는 책이라고까지 말을 할 건 없지만 자주 손이 가는 책이기는 한듯 해서, 오늘 케빈 헹크스의 또다른 책 <우리 선생님이 최고야>를 사서 책장에 꽂아 줬다. 새로 산 책들은 한동안 새로 산 책들끼리 모아서 꽂아 줬다가 나중에 같은 작가별로 모아서 꽂아주는 편이라, 두권의 책은 각각의 장소에 꽂혀 있었는데, 

자기전에 책을 읽어주겠다고 했더니, 새로산 책 중 <우리 선생님이 최고야>를 뽑고는 망설이지도 않고 서슴없이 <내사랑 뿌뿌>를 꽂아둔 곳으로 가서는 그 책을 또 뽑아서 두권을 함께 들고왔다. 음하하하하하하... 작가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도 놀랍고, 책 꽂아 둔 장소를 외고 있다는 것도 놀랍다.  

난 아마, 천재를 낳았나보다.  

초정 김상옥 선생님이 첫손자를 낳은 장녀 훈정씨에게 "네가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 이라고 했다는데,  

아마 내가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도 다인을 낳은 일 같다. 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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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특별히 좋아하는 취향의 책이 있게 마련인데, 나의 경우는 음식과 관련된 책이 그렇다. 

요리책 그 자체만도 좋아하지만(집에 요리책만 한 스무권 된다.) 요리사가 주인공인 책이나, 음식을 조리하는 장면이 나오는 책들, 음식에 대한 추억을 다룬 책들을 환장하게 좋아한다. 

우선 박완서 선생님의 <그 남자네 집>  

어라, 그런데 이 책, 표지가 바뀌어서 나왔구나. 흠. 예전 표지가 나은데.

어쨌든. 박완서 선생님의 묘사력은 정말 발군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중에서도 이 책에서는 주인공 <나>의 시댁(정확히는 시어머니와 남편)의 식문화가 다루어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철이 해먹는 계절음식에 관한 묘사는 웬만한 우리 음식문화 소개서보다 낫다. 

결혼을 하고 친정어머니가 마련해준 이바지인 고기를 들고 시댁에 가던날로부터 이집의 "내 생전에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시집의 식도락"(p.136)은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부엌에서 양념 다지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하게 나는지, 식칼 밑에서 도마의 톱밥이 튀는 게 보이는 듯 했다."(p. 117) 라니. 이 맛깔진 묘사는 박완서가 아니면 도저히 안된다.  

물론 이 책은 음식에 관한 책만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이, 주인공 시집의 식도락이, 주인공은 도저히 못견뎌하는 그 식도락이 엄청난 즐거움을 준 것만은 사실.   

자, 이번에도 역시 박완서 선생님이 먼저 나온다.  

이 책은 유명 문인들이 쓴, 자신들의 기억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음식에 관한 글이다. 음식 그 자체에 관한 글도 있고, 음식에 관련된 추억에 관한 글도 있고. 

특별한 음식에 관한 건 박완서 선생님의 <메밀 칼싹둑이>나 <참게젓>에 관한 글이 되겠고, 평범한 음식에 얽힌 자신의 삶의 내력에 관한 이야기라면 공선옥이나 이오덕 선생님의 말 그대로 흰 쌀밥 한그릇에 대한 이야기겠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그 음식을 먹는 사람들과, 그 음식에 관련된 이야기이지 음식 그 자체는 아닌것이다.  

이번엔 말 그대로 맛 산문집인 윤대녕의 어머니의 수저다. 

어머니의 수저라는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새로운 음식, 특별한 음식을 소개하기 보다는 음식을 매개로 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글이다.  

이 책과 비슷한 책으로  

이 책, 성석제의 음식에 관련된 산문집 소풍이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성석제를 딱히 좋아하진 않는데(성석제의 글 스타일은 나와는 뭔가 맞지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아, 난 왜 이 거창한 부사어를 이리도 주구장창 쓰게 되는 것일까.) 이사람, 글 참 잘 쓴다.  

글 잘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그 글을 좋아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성석제의 그 포즈랄까, 유머랄까, 그런게 뭔가 거슬린다. 아주 많이.  

어쨌든 이 책에서 인상적인 건, 냉면에 관한 부분이다. 

 "내 주변에는 냉면광들이 많다. (중략) 내가 아는 한 어떤 음식도 냉면처럼 열렬한 신도를 거느리고 있지 못하다. 비빔밥, 육개장, 찰떡 뒤에 '광'자를 붙였다 떼보면 냉면의 위대성을 쉽게 알 수 있다.
음식 이름 뒤에 '광'을 붙일 만한 것은 그 음식이 그만큼 중독성이 있어서일 것이다.도대체 냉면에 무슨 맛이 있기에 사람을 중독 시키는가.
(중략)
간단한 듯하면서 이토록 까다로운 음식이 없고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이 많은 음식도 따로 없다."
(p. 149-150) 

나도 냉면광이다. 비빔냉면은 명동 <함흥냉면>이 최고다. 

 이번엔, 별로 많이 알려지지는 않은 시인 박형진의 "꼴까닥 침 넘어가는 고향 이야기" 되시겠다.  

이 책에 나오는 음식들은 요즘은 거의 보지 못하는 음식이다. 박형진의 어린시절에 먹었던 고향음식이거나, 시골음식이니까. 요즘이야 직접 청국장을 띄워먹는 집이 적어도 도시에서는 없으니까.  

신기한건, 남자가 어떻게 이렇게 음식 조리법을 잘 알고 있을까 하는 거다. 그렇다고해서 고춧가루 몇숟갈 이렇게 계량된 조리 레시피가 나오는 건 아니고, 음식을 만드는 절차나 재료들이 상당히 자세히 묘사된다. 읽다보면 정말로 침이 꼴딱 넘어간다.  

 

 

이번엔 김훈이다.  

이 책은 여행기다. 우리나라 국토를 자전거로 여행하며 쓴 정말 무시무시하게 잘 쓴 기행 산문집이다. (이 책처럼 잘 씌어진 여행기를 또 발견하긴 힘들듯.) 

그런데, 이 책에서도 내 눈을 잡아 끄는 건 음식에 관한 부분들이다. 봄날 남해안을 여행하며 먹는 봄나물 된장국에 관한 이야기. 

"냄새 만으로도 냉이국이란 걸 알아 맞혔다. 아내는 기뻐했다. 국 한 모금이 몸과 마음속에 새로운 천지를 열어 주었다. 기쁨과 눈물이 없이는 넘길 수가 없는 국물이었다. 국물 속에 눈물이 섞여 있는 맛이었다. 겨울 동안의 추위와 노동과 폭음으로 꼬였던 창자가 기지개를 켰다. 몸 속으로 봄의 흙냄새가 자욱이 퍼지고 혈관을 따라가면서 마음의 응달에도 봄풀이 돋는 것 같았다."
(p. 35-36)  

"쑥 된장국의 냄새는 그것을 먹는 인간에게 괜찮다, 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침내 돌아가야 할 곳의 정갈함을 일깨우기도 한다. 그 풀은 풀의 비애로써 인간의 비애를 헐겁게 한다."
 (p.39)

새 봄에 먹는, 봄나물을 넣어 끓인 된장국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김훈 밖에 없다. 봄이 되어 봄나물을 넣은 국물을 떠먹을때면 자동반사처럼 이 구절이 떠오른다.  

재첩국에 대한 묘사는 또 어떻고. 

"하동 재첩국은 순결한 원형의 국물이다. 여기에는 잡것이 전혀 섞여있지 않다. 이 국물이 갖는 위안의 기능은 봄의 쑥국과 거의 맞먹는다. 이것은 하나의 완연한 세계를 갖는 국물이다. 이런 국물은 흔치 않다. 재첩은 손톱 크기만한 민물 조개다. 재첩국은 이 조개에 소금만 넣고 끓인 국물이다. 다 끓었을 때 부추를 잘게 썰어넣으면 끝이다.
그 맛은 무릇 모든 맛의 맨 밑바닥 기초의 맛이다. 맺히고 끊기는 데가 전혀 없이 풀어진 맛이다. 부추가 그 풀어진 맛에 긴장을 준다. 오장을 부드럽게하고 기갈을 달래준다.옛 의학서에서는 재첩이 삶에 기진맥진한 사람들의 식은땀을 멈추게 해준다고 적혀 있다.푸른 부추가 뽀얀 국물에 우러나서 그 국물의 빛깔은 새벽의 푸른 안개와도 같다."
(p.99-100) 

하동과는 제법 거리가 있는데도 친정동네에는 재첩 철 무렵이 되면 새벽녘에 재첩국을 파는 차가 온다. 엄마는 가끔 그 국을 사다가 아침에 주곤 했다. 먹어보면 안다. 재첩국은 김훈과 같이 묘사할 수 밖에 없는 맛이란 걸.  김훈의 글을 읽다보면 서정적 묘사란 이런 것이구나 싶다.  

이 재첩국에 대한 묘사는 훗날 김훈의 또다른 소설 <현의 노래>에서 변주되어 나온다.  

"재첩국 국물은 그 어둠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국물을 넘길 때, 왕의 목울대가 흔들렸다. 국물은 왕의 마른 창자에 스몄다. 엷고도 아득한 국물이었다. 아득한 국물은 창자 굽이굽이와 실핏줄 속으로 깊이 스몄다. 국물은 연기처럼 퍼졌다."
김훈, <현의 노래>, 생각의 나무, 2004, p.40 

 

 

이제 10개월, 세상 태어나 첫 감기를 앓고 있는 작은놈의 숨소리가 고되다. 

글 그만쓰고 들어가 애를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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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5소년 표류기나 로빈슨 크루소 류의 모험담을 좋아한다. 

뭔가 자연과 인간이 문명의 개입없이 1:1로 대치하게 되는 상황을 즐긴다고 해야하나. 그러고보면 내 핏속엔 여지없이 농경민족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인지도... 쿨럭. 

 

여하간 각설하고. 

이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남편이 옆에 와서 물었다. 내가 하도 재미있게 읽고 있으니 무슨 책이냐고.  

그때가...음. 다인은 낳았고 해인은 생기기도 전이고... 언제쯤이었더라(아아, 나는 사소한 날짜며 시간 장소 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흠. 책을 가져와 확인해보니 2006년 10월 22일이란다. (난 책을 읽고나면 책속 간지에 책을 읽은 날자를 적어놓는다.) 

여하간. 남편이 무슨 책이냐 묻길래, 뭔가 간단하고 압축적으로 설명할 말을 찾다가, 

속으로 무릎을 치며 대꾸해 줬다. 

 "15소년 표류기 알지? 그 소설의 성인버전 쯤 돼." 

이 얼마나 완벽하고 압축적인 설명이란 말인가. 남편은, 나의 남편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책을 안 읽는다. 서재에 저 많은 책들을 두고서도 어떻게 책을 읽지 않을수 있는지 나로서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책, 안 읽는다. 뭐. 세상에 다 나같은 인간만이 있을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같은 인간으로서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아. 뭐,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쨌든 책을 안읽는 남편이라도 15소년 표류기 정도는 알거 아닌가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도 15소년 표류기를 알기는 아는 모양이다. 그런데 15소년 표류기의 성인 버전쯤 된다는 말에 나온 남편의 대답이 걸작이다.  

 

"여자가 나와?" 

 

;;;;;;;;;;;;;;;;;;;;;;;;;;;;;;;;;;;; 

내가 성인 버전이라고 그랬지, 언제 성인물이라고 그랬냐고, 이 남편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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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0-15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그렇지만 성인물이라니 저도 성인 버전으로 생각이 쏠리는걸요.

아시마님 홈페이지 없어져서 아쉬워 하고 있었는데 이제 알라딘에서 활동하실 건가요?

아시마 2009-10-16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참을 수 없는 기록의 욕구가.. ^^;;; 한동안 너무 기록 자체를 안했죠. 글을 쓰고 안쓰고는 둘째 문제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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