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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걸 - 에드거 앨런 포 상 수상작, ㅣ 블랙 캣(Black Cat) 9
T. 제퍼슨 파커 지음, 나선숙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글의 힘이란 건, 분명히 존재한다. 평면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활자들이 머리 속을 꽉 채우면 어느샌가 낯선 오렌지 카운티의 공기가 나를 감싸고, 오렌지 카운티 사람들의 인생이 내 옆에서 숨을 쉰다. 오싹하면서도 머리가 들뜨는 경험.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이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후덥지근한 사막의 바람. 오렌지 향이 뭍어 있는 휑한 공장, 그리고 상처받은 눈의 아름다운 소녀. 캘러포니아 걸, 자넬을 둘러싼 사건을 풀어가는 길은 그 더운 오렌지 카운티의 길을 걸으며, 삶의 의미를 찾아 더운 바람에도 땀을 닦아내는 일.
범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반을 넘어가며 이미 알고 있었고, 그들 모두 마음 한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를. 그러나 캘리포니아의 오렌지 같던 소녀의 죽음을 밝히는 동안, 그들은 고군분투하며 달리고, 기도하며, 사랑하고, 헤어졌다. 사막의 바람이 피를 뜨겁게 달구는 동안도 전쟁은 계속되며, 마약을 계속 만들어지고, 누군가는 죽어가고, 누군가는 치료받는 것이다. 삶이 계속되는 것이다.
전쟁과 마약으로 얼룩진, 자유와 두려움으로 얼룩졌던 60년대 미국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게는 아련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나에겐 먼 이국땅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저 거기서 살고 있는 형제들의 이야기일 뿐. 그들의 삶이 이어지고 있을 뿐.
책을 읽는 내내 눈두덩이 뜨거웠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노곤한 삶이 서로 보듬어 위안을 얻을 때마다, 나 역시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36년만에 밝혀지는 사건의 진실은 이미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36년 동안 죽거나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더욱 의미있었다. 가끔은 데이비드와 닉과 앤디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싶을 때도 있었다. 너무 힘들어 하지 말라고, 어깨의 짐을 조금을 내려 놓아도 된다고.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그 소녀의 눈빛을 잠시 잊으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36년이 지난 지금, 한 소녀의 죽음을 둘러싼 그들의 삶, 그들의 모든 상처와 잘못들이 치유되었기를, 라구나 해변의 파도를 타고 멀리멀리 사라지기를.

왜 이 그림이 생각난 걸까. 모르겠다.
Abram Arkhipov [Washer wo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