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요컨대, 이 이야기는 무엇이 진실인가, 혹은 무엇이 사실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진실이라고 기억하는가, 무엇을 진실이라고 이야기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처음엔 심드렁했다. 때때로 의표를 찌르는 표현들이 있었지만, 통찰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위트처럼 느껴졌다. 1부가 다 지나가도록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세와 속좁음으로 점철된 어느 비호감 사내의 반생애를 따라가는 이야기였으니까. 정말이지, 무슨 주인공이 이렇게 비호감인가 싶을 정도였다. 특히 그 상당히 찌질한 연애담을 보라지. 뭐, 어느 누구 하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만은, 나는 그가 '이런 얘기가 설교조에, 자기변명조의 허섭스레기로 들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베로니카에게 한 행동이 치기어린 남자의 전형이며, 내가 내린 모든 '판단'의 화살이 내게로 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81) 라고 변명을 했을 때, 정말 그가 싫어졌다.

소설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고, 문학 속의 감정처럼 살고 싶다고 꿈꿨던 청춘이 아니었던가. 오롯이 자기 생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에이드리언을 동경하지 않았던가. 그가 삶에 전혀 저항하지 않고 너무 빨리 안주해 버렸다고 책망할 마음은 없다. 나도 그렇게 도전하지 않고 안주해 버린 인생을 '현실에 만족한 인생'이라고 포장하며 살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나도 그처럼 뭔가 인생에서 아쉬운 게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래도 좀 안이하다고 생각했다. 역사란 무엇인가 라고 물었던 조 헌트 영감의 질문에 청춘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33) 오랜 시간이 지나서 생이 저물어 갈 무렵의 그는 이렇게 대답을 바꾸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101) 쳇, 조 헌트 영감의 말을 기억하라구! '그게 또한  패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나?'(33) 응? 기억하고 있나? 토니?

 

그러나, 문제는 하필 이 때 발생했다. 생이 저물갈 무렵의 그 앞에 말이다. 그가 기억하지 못했던 (아니, 기억하지 않았던) 진실이 이제서야 갑자기 나타났다. 그것도 줄줄이. 그가 보낸 적이 없던 편지가 나타났고, 춤춘 적이 없던 그녀가 춤을 추었다. 베로니카의 이메일을 하나씩 열어 볼 때마다 세번 강의 파도가 넘실대며 육박해 오는 것처럼, 인생의 각 장면들이 다시 눈 앞에 들이쳤다. 사실들을 기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사실을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때문에 참담했다. 기억하지 못하고, 다르게 기억하는 사이에 진실은 저만치에서 멋대로 굴러 가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회한이 몰려왔다. 결국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만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165)

그리하여 그의 남은 인생은 '짧은 굴욕의 역사의 번외편'(247)이 되어 버렸다. 묘비명은 '토니 웹스터, 전혀 감을 잡지 못하다'(247) 이고.

그런데, 이 때부터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니게 되었다. 내가 기억에서 뒤틀었던, 내가 기억에서 지워 버렸던 수많은 나의 진실들이 무더운 바닷가 해파리들처럼 내 다리에 휘감겨 올까봐. 내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게 가슴을 쓸어내릴만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 나 그냥 감 잡지 못한 인생으로 끝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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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찌어찌 기회가 되서 역사글을 쓰고 있다. 가르치는 것과 쓰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란 걸 절감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두 일이 굉장히 닮은 부분도 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34)이라고.

가르치는 일은 그 '확신'을 주는 일이고, 쓰는 일은 '확신'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련의 작업들은 정확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기억들의 부정확을 인정하고, 충분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문서들의 불충분을 통감하는 일이 바탕이 된다. 나는 지금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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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08-18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바쁘시겠어요!!
저도 이 책 처음엔 정말 힘들었어요.
꼴값에 더구나 원서로 읽는다고 더 그랬지요,ㅎㅎㅎㅎ
하지만 제 느낌을 가장 잘 느끼게 된 리뷰에요!!^^
암튼 곧 가을이 오겠죠???
루나군와 벨라양은 이 무더위를 잘 넘기고 있나요?
벨라양의 첫 여름인데 너무 더워서 놀랐겠어요.ㅠㅠ
그래도 뒤집기를 해 낸 기특한 벨라양!~~~^^

애쉬 2012-08-19 00:05   좋아요 0 | URL
쉬엄쉬엄하는 거라 많이 바쁘진 않아요~
올 여름은 정말 덥죠? 대전은 경기도보다 왠지 더 더울 거 같은데, 괜찮나요?
저희는 아기 핑계로 얼마전에 에어컨도 샀어요.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ㅋ
그래도 벨라은 여전히 목에 땀띠가 남아 있지만요. 그거야 뭐, 살이 많아 접히는 거라서...
이 더위에도 여기저기 아이들과 다니시는 거 보면 존경스러워요^^
앞으로도 제법 덥다는데, 나비님도 더위 조심하세요~ 참, 허리도 조심하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