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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소녀시대 ㅣ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평점 :
격동의 혁명 속에서도,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잔혹한 독재의 그늘에서도 아이들은 자란다. 시기와 질투, 잦은 웃음과 온갖 것들에 두근거리던 소녀들도, 그 소녀다움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언제 깨져 버릴지 알 수 없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하루하루이기 때문에 더욱더 소녀다움이 간절할지도 모른다. 절박한 소녀다움이라고 해야 할까. 성숙해져버린 소녀다움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시대를 관통해 온 네 소녀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한 소녀는 조국을 등진 아버지를 따라 고국의 푸른 하늘을 그리워하며 자랐다. 이념적 고향을 잃은 후엔 마치 보트피플처럼 이 나라 저 나라를 기웃거리며 살았고, 오랜 세월이 지나 돌아간 고국은 그리던 고국의 모습이 아니었다.
두번째 소녀는 순결한 루마니아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늘 조국에 빚진 마음으로 살았다. 더 큰 목소리로 애국심을 충성심을 보여야 살아 남을 수 있다고 여겼던 소녀는 끝까지 조국의 현실과 진실을 들여다 보지 못했다.
세번째 소녀는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에서 치이고, 편협한 민족주의와 종교에 치이다 결국 전쟁의 한가운데에 떨어져 버렸다. 공기가 되고 싶다던 어른소녀의 머리 위로 오늘도 폭격이 이어지고 있다.
마지막 소녀는 이상을 꿈꾸며 살아온 아버지를 무한히 존경했고, 그 이상을 소녀시대에 두고 왔다. 십대를 보냈던 체코의 소비에트 학교를 잊을 수 없던 소녀는, 그 소녀시절의 언어로 세상을 누비는 통역사가 되었다.
이 책은 소녀 시절의 친구를 찾아가는 다큐멘터리이자, 60년대부터 시작된 동유럽과 소련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역사서이기도 하고, 역사 앞의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역사 속에서 아이가 어떻게 어른이 되어 가는지를 묻는 인문학서이기도 하다.
특히, 차우셰스쿠 이후의 루마니아나 유고 연방의 해체와 뒤따른 전쟁들에 대한 설명은 관련된 어떤 역사서보다도 통찰력있고 인간적이다. 역사의 변화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어떻게 달라지게 만드는지, 그들의 사고를 얼마나 기울어지게 만드는지, 각기 다른 곳에서 30년을 보낸 세 소녀가 대답하고 있다. 그래서 30년만에 세 친구들 만난 요네하라 마리는 기쁘지만 또한 슬프기도 했다. 아니, 안타깝고 속상하고 애잔했을 것이다. 만만치않게 굴곡많은 역사를 살아온 대한민국의 그 시절 소녀들을 보는 우리의 마음처럼.
또한 미안하기도 했겠지.
"확실히, 사회의 변동에 제 운명이 놀아나는 일은 없었어요.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른다면 행복은 저처럼 사물에 통찰이 얕은, 남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인간을 만들기 쉬운가 봐요."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상을 그녀들이 보냈다는 것에 대해서. 혼자서 행복했다는 것에 대해서.
대학을 다닐 때 과 신문에 이런저런 글쪼가리를 실었던 때가 있었다. 언제인가 한 선배가 말했다. 글이 무뎌졌구나, 너.
그랬다. 어느 틈엔가부터 세상의 첨예한 각이 보이지 않았고 눈여겨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은 자잘한 가시들이, 그 가시투성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성의껏, 세삼하게 들여다 봐야 하는 일들이 귀찮아진 것이지. 제법 편안한 삶을 살다 보니. 통찰력이고 상상력이고 다 스스로 내려놓고 말았다.
스스로에게 아킬레스건이 되어 버린 이야기가 요네하라 마리의 이 말 때문에 다시 생각났다. 이 말이 뒤통수를 쪼아대는 것 같아 좌불안석. 아, 이래서 사적인 책읽기는 늘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