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을 만든다는 작업과 음반을 만드는 작업은 별개의 일이다.
한곡 한곡의 음악에도 기승전결이 있고 완결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그러한 결정체들을 조합하고 재구성하는 음반 작업은 단순한 곡들의 합 이상의 울림을 가진다.
mp3 음악들이 보편화된 이후 듣는 이도 잊고 있고 만드는 이도 잊고 있는 작업이
바로 이것이다. 음반으로서의 흐름.
슬로우쥰의 새 앨범을 들었을 때의 그 잔잔한 감동은 여기에서 오는 것이었다.
이 잔잔한 감동은 천천히 내 맘에 몇번이고 부딪쳐 애드벌룬처럼 부풀어올랐다.
바쁜 아침 일을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아서 슬로우쥰을 듣는데,
더 이상 커질 수 없을만큼 커져버린 감흥이 나를 둥실둥실 뜨게 만든다.
가을산을 가 본적 있는가. 완만한 오르막을 가진 가을산.
숨이 가쁘지 않을 정도의 걸음으로 조금씩 오르면
노란빛과 붉은 빛으로 가득해 절로 말이 멈춰지는 가을산.
바닥에 하나가득 떨어진 낙엽을 밟으로 가는 길 옆으로 작은 내의 소리가 정적을 깨고,
얼마나 올랐을까 하고 고개를 돌리면 멀리 산새가 푸드득 날아가는.
그런 산을 하나 올랐다가 내려가는 기분.
모두 단풍든 나무들이지만, 들여다보면 무수히 많은 노랑과 무수히 많은 빨강들이 다 저마다 다른 빛을 내고 있고.
오르막을 오르다 갈림길도 나오고, 내리막도 만나는 길.
번개같은 희열은 없으나 어느새 소리없이 온몸이 젖어있는 산행.
그런 느낌을 한 음반에서 느낄 수 있다면. 정말이지 행복한 경험이지 않는가.
서두르지 않고 눈치보지 않으며 온전히 하고 싶은 것을 천천히 풀어낸 느낌.
음반으로 5집 정도는 되어야 나올까말까한 완숙한 느낌, 넘치지 않는 연주.
브로콜리 너마저의 첫 음반과 함께 들었는데, 그 음반이 넘치는 열정과 순진무구한 소망이 스피커를 뚫고 나와 절로 미소가 나왔던 음반이었다면,
이 쪽은 오롯이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들으면 딱인 음반.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음반이다.
그래서 한곡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한 곡 따로 듣는 것은 너무나 잃는 게 많다.
마지못해 고른 곡이 이곡이다. 야트마한 가을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의 곡.
여기를 찍고 다시 내려간다. 단풍진 오솔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