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도 예배도 드리지 않는 시댁에서 명절을 준비하는 건 기껏해야 반나절 정도이다.
오전 동안 전 조금 부치고 나물들 볶고 무치고 하면서 점심 때를 보내고 나면, 오후는 늘 나른하고 졸립다. 그 때 보려고 가져간 책이 이 책이다. <핑거스미스>
명절의 그 기름냄새와 19세기 런던의 음침한 뒷골목이라니, 캬,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리뷰들을 읽어보니, 이 작품을 한 마디로 레즈비언 역사 스릴러 라고 구분해 두었다. 레즈비언 역사 스릴러 라니, 짜증나는 명명이다. '레즈비언'이라고 붙여 놓으니, 그래 편하긴 하다. 속도 빤히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절대 레즈비언 역사 소설이 아니다. 레즈비언들의 사랑이 주제도 아니고, 레즈비언들의 생활상이나 의식을 보여주려는 목적의 책도 아니다. 아 물론, 여자들의 사랑 얘기 나온다. 그러나 그게 여자끼리라고 다르고 여자남자 라고 다른 것도 아닌데, 굳이 레즈비언이라고 붙여놓은 의도가 기분 나쁘다. 이런저런 말을 붙여가며 장르를 구분하는 건 작품의 분위기와 내용, 플롯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려는 거 아닌가. 그러려면 그냥 역사 스릴러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한 거 같은데. 아님, 빅토리아 시대 라는 말을 더 넣던가.

아, 괜히 흥분했다.
여하튼 이 소설에 있어서 '빅토리아 시대' 라는 말은 굉장한 키워드이다. 지저분하고 음침한 안개 도시 런던의 뒷골목, 난롯가에서 위조 주화를 문지르는 좀도둑들, 무성한 풀들이 정리되지 않은 대저택, 음산한 서재에서 낡은 펜을 움직이고 있는 늙은 남자. 이런 풍경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영문학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이거 이거 여러 사람 마음을 녹이겠구나 생각할만큼 묘사가 충실하다. BBC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는데, 내가 제작자라도 당장 만들고 싶겠다. 눈 앞에서 생생하게 돌아다니는 이 인물들과 이 풍경들을 어떻게 현실로 만들지 않고 배길까 싶다.
내용에 관해서는... 말 안할란다. 혹시 이 책 보기 전에 리뷰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그만 둘것. 아무 것도 모르고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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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9-28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빅토리아레즈비언미스테리..라고 했었네요. ^^ 기회 되시면, BBC영화도 한번 찾아보심이. 이거랑, 티핑더 벨벳( 이건 좀 야해요- ) 영화로도 재미있게 봤거든요.

애쉬 2007-10-01 10:38   좋아요 0 | URL
영화도 보고 싶어요. 그 거리와 마을이 어떻게 재연되었을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