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가족 이야기를 주로 가족의 부재와 상실을 통해 다룬다. <어느 가족> 역시 가족 이야기인데 가족 바깥에서 휴식을 얻는 유사 가족 이야기다. 전반부에서는 각 구성원들이 낮에 뭘 하다가 저녁에 집에 들어와 모이는지를 보여준다. 학교에 있어야할 어린 아이는 아빠로 보이는 어른과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는 기술을 연마하고, 어린 남자 아이의 동생으로 보이는 더 어린 여자 아이는 별 일 없으면 도둑질에 동참할 미래를 가질 것처럼 보인다. 성년인 언니는 핍쇼를 하는 곳에서 일하고, 엄마는 동네 사람들의 수근거림으로 보아서 전직 성매매를 했던 사람이다. 할머니는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겼고, 그 여자의 자식에게 돈을 받곤했다. 이들이 낮에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제외하면 특별히 다른 게 없는 저녁 시간을 보낸다. 함께 밥을 먹고, 이따금씩 서로 하는 일에 대한 기분을 묻기도 하고 답하기도 한다. 이들은 혈육을 두고 어쩌다가 한 집에서 모여 살게 되었나.

영화 후반부에 가족 구성원들이 모이게 된 배경이 드러나는데 처참하다. 아이는 친부모한테 학대를 당해 새옷에 대한 트라우마를 통해 드러낸다. 새옷을 훔치러 가서 아이에게 새옷을 입히자 아이는 묻는다. 이제 맞는 건가요? 아이의 팔뚝에 뜨거운 다리미로 데인 자국을 보면서 엄마인 여자는 자신의 팔을 내민다. 자신도 다리미로 데인 자국이 똑같이 있다면서. 이들은 피가 아니라 과거 고통과 아픔으로 하나가 된다. 삶을 이어가는데는 무지막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밥을 먹기 위해 일을 하고, 일을 하기 위해 밥을 먹고. 단순해 보이는 일상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개인의 에너지를 집중하는 일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통을 껴안고,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산다. 물론 이들은 법 아래서 범죄자가 된다. 학대하는 남편을 죽이고, 생필품을 훔쳐서 살고, 학대받는 아이를 엄마한테서 유괴한 사람이 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대신 도둑질을 가르치고. 할머니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연금을 받고. 배경을 떼어난 행위 자체만으로는 뉴스룸의 특종감이다. 하지만 그 배경을 담담하게 드러내는 영화는 이들의 범죄행위를 비난하는 걸 멈칫하게 만든다.

가족이란 무엇인지...일본은 자연재해가 많아서 그런가, 아주 절망적인 상황도 차분하게 보는데 이 차분한 태도가 그렇게 절망적일 수 없다. 동정 없는 세상에서도 삶은 계속 되고, 계절은 바뀌고, 아이들은 커가고 어른들은 늙어간다. 몹시 슬픈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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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구두
헤닝 만켈 지음, 전은경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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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블로그에서 보고 읽기 시작했는데 폭염을 조금 누그러뜨릴 서늘한 문문장들이 들어있다. 책임을 지기 두려워하는 한 남자는 계속 도망을 친다.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말도 없이 사라지고, 직업적 실수로 멀쩡한 팔을 절단하는 의료사고를 내고는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무인도로 도망쳐 12년 동안 살아간다. 그리고는 무인도에서 무의미한 일기라고 할 수 없는 일지를 쓴다. "나는 감각을 상실한 어떤 삶에 대한 연대기를 쓴다."(21)

살아가는 건 기쁨만이 아니라 고통, 슬픔 등을 느끼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즐거움과 쾌락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것같지만 고독만큼 공허한 삶으로 채워질지 모른다. 남자는 자신의 고립된 고독 속에서 살아있다는 걸 느끼기 위해 얼음 구멍을 만들어놓고 매일 얼음 속에 들어간다. 차가운 물이 살에 닿을 때 살아있는 걸 느끼는 남자. 감각을 상실한 남자가 감각을 찾는 물리적 방법이기도 하다. 세상에 등지고 기록할 것 없는 삶을 살아가는 남자의 삶은 외롭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부족하다. 무중력 상태 자체가 엄청난 고통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남자는 그걸 부인한 채 살아가기로 결심했지만 서서히 과거에 만든 끈이 어느날 그의 섬에 찾아온다.

사랑했던 여인 하리에트가 암에 걸려 곧 세상과 작별을 하기 전에 그에게 묻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온다. 왜 말도 없이 떠났는지...사랑했던 이의 출현으로 그가 세상과 단절을 조금씩 깨기 시작한다. 사랑은 누군가의 삶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을 원래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수정하는 일을 해낸다. 그래서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는 건가? 내가 가던 길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길로 함께 가야하니까.

아무튼 하리에트의 출현은 남자의 삶에서 분기점이 된다. 둘 사이에 생긴 딸의 존재도 알게 되고, 흔한 가족의 형태는 아니지만 세상에 홀홀단신이었다가 갑지가 가족이 생겼다. 그리고 이웃들을 만나게 되고, 젊은 시절 자신의 엄청난 실수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잘 못 수술한 장래가 유망했던 수영선수를 만나서 그녀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렀는지 보게 된다. 단순히 미안하다는 말로는 해결될 수 없는 과거를 마주하면서 남자는 이웃들도 만나게 된다. 고립된 세계에서 나와 한걸음씩 세상으로 내딛는다. 그러면서 얼음 목욕을 하는 횟수가 줄어든다.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얼음 목욕이 주는 강렬함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내용이 없는 일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매일 기억나게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허한 삶을 확인하기 위해 황여새에 대해 썼다."(244)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감정을 그리워했다.
"내가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감정,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잠깐이나마 외로움이 사라졌다."(91)

오랫동안 소설을 안 읽었는데 요즘 소설들을 읽고 있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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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표면적으로 이해나 공감은 가능한 것 처럼 보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의 슬픔, 더구나 그게 사고였다면 어떨까. 영화는 아주 기이한데 아름답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영화를 처음 접한 건 <더 랍스터>를 통해서다. <더 랍스터>역시 아주 특이한 영화였다. 스타일도, 영화를 전개하는 방식도. <킬링 디어>는 판타지가 현실에 결합되어 어디까지가 판타지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지점까지 극을 밀어붙인다. 문득 그런 이런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초현실은 어쩌면 사실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가령, 내 경우를 보자.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염이 심해진다.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아플 때도 있다. 지난 몇 달간 윗배를 칼로 베는 듯한 통증에 시달렸다. 12월에 위내시경을 했기에 다시 하는 걸 참았다. 수면 마취 부작용 때문에 망설이면서 내 위염에 대해 스스로 스트레스일거야, 라고 최면을 걸면서도 혹시 위염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불안에 떨었다. 몇 달을 이런 상태로 지내다가 이번 달에 스트레스 요인이 사라졌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위염 증상이 사라졌다. 물론 나는 만성위염이어서 언제든 증상이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영화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왜 내 위염 이야기를 하냐면, 이 영화가 바로 이런 심리적 스트레스 증상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조건을 가진 한 외과의사가 있다. 병원에서도, 집에서도. 흠 없는 예쁜 아내, 아들, 딸. 식탁에서 벌어지는 풍경에서 어린 아들의 긴머리가 남자는 마음에 안 들지만 결코 강압적으로 자르라고 하지 않는 인품의 소유자이다. 파티에서도 술 한 모금 안 마시고 적절히 사람들과 어울리다 일찍 귀가한다. 집안의 분위기 역시 살균처리 된 것처럼 정돈되고 깔끔하다. 그런데 한 십대 소년과 주기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적 이야기를 나눈다. 남자한테 소년은 친구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지만 물리적 나이와 지위를 떠나 대등한 힘이 느껴진다. 이 대등한 힘의 근원을 찾아나가는 여정이 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남자는 수술하다 자신의 실수로,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 소년의 아버지를 죽였다. 남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수술은 문제없다고 말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지만 무의식까지 속일 수는 없다. 그는 안다. 자신의 실수라는 것을. 소년도 알고. 두 사람의 힘의 역학 관계는 여기서 나오고 소년은 아버지를 잃은 대신 남편이 없는 엄마의 남편을 구해주기로 한다. 엄마가 남자를 좋아하니까. 소년은 아빠로 그를 받아들일 적극적 의지보다는 남자에게 엄마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함으로써 남자에게 벌을 준다. 남자는 완벽한 가정이 있을 뿐 아니라 소년의 엄마는 자신의 실수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니까. 이 사건을 계기로 남자는 소년을 멀리하고 소년을 멀리하자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남자의 어린 아들, 십대 딸의 다리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남자가 속죄하지 않으면 그를 제외한 가족이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받는다. 잘못은 남자가 했는데 왜 벌은 가족이 받나...바로 고통이 벌이다. 남자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을 때, 무너지는 고통을 소년은 원했다.

사실, 영화 속에서 소년은 그 어떤 초능력도 쓰지 않았다. 그저 저주의 말을 했을 뿐이고, 남자는 처음에는 현대 의학을 동원해서 그 저주를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하고 남자와 남자의 아내는 점점 그 저주를 믿게 되고 결국 가족 중 한 사람을 희생하기도 결정한다. 소년의 바람대로. 남자는 결국 자신의 죗값을 치렀고, 완벽한 가족에 구멍이 났으며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게 어떤 고통인지 알게 되었다. 영화 내내 카메라는 남자를 지켜보는 것같은 각도로 남자를 따라다닌다. 그래서 마치 어떤 전능한 힘이 스크린 밖에서 소년과 공모해서 남자의 숨을 옥죄는 것 같은 효과를 주고, 지켜보면서 침을 꿀꺽 삼키게 된다. 으스스한 분위기를 이렇게도 전달할 수 있는 것에 놀라면서 정돈되고 깔끔한 병원 병실, 집안이 아주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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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V무료영화 따위 거들떠도 안 보다가 극장에서 보기는 싫고 다운받기는 더 싫고 했는데 무료영화에 들어있어서 봤는데, 쇼파에 누웠다가 앉았다가 하면서 보기에 아주 좋은 영화이다. 무료영화 자주 이용해주겠어.

2. 영화는 무척 곱다. 일단 영상이 곱고, 사람의 심리를 다루는 것도 곱고, 음식을 하는 장면도 곱다. 시골집도 가끔 가서 누워있다 오고 싶게 곱다.

3. 물론 8할 이상이 판타지이고 의외로 청춘물이다. 시골삶의 고단함을 좀 상상했는데 고단함보다는 시골에서 사는 것도 괜찮지 않겠니, 하고 슬며시 설득하는 영화같다. 혜원이 도시의 삶을 추구했지만 임용고시도 떨어지고 편의점에서 알바하면서 유통기한 지난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 게 도시에 사는 청년의 삶으로 보여진다. 대기업에 입사한 재하 역시 월급을 축낸다는 상사의 말을 듣고, 조직에서 개인은 월급만큼의 일을 하는 사람인가 아닌가로 평가받는 것에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며 귀농을 한다. 한 번도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 은주. 학교 졸업 후 농협은행에 다니는데 농촌에서 농사일이 아니라 조직생활을 하는 건 도시 삶이나 똑같다는 걸 에둘러 보여준다. 학교 다닐 때는 지금과 삶이 다르게 펼쳐질 것이라고 꿈을 꾸지만 학교를 졸업한 지금, 거창한 꿈 따위보다는 실천할 수 있고,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일이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한다.

철마다 자연이 제공하는 제철 재료로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혼자, 또는 나눠 먹으며 대화하며 웃는 일이 세상살이 아닌가. 아카시아꽃이 피면 따서 얇게 튀김옷을 입혀 화전을, 밤이 열리면 주워서 밤조림을 만들고, 감을 따서 겨울나기 준비로 곶감을 만들기 위해 정성스럽게 깎아서 바람에 말리며 이따금씩 손으로 주물러준다. 또 막걸리를 만들어서 친구들을 불러 지짐이 안주로 꽐라가 되게 마시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일인데 왜 실천하기 힘들까. 삶의 기준 탓인데 그 기준은 버리면 간단한데...간단한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

4. 세 청년의 삶을 부러워하다가도 농가 홍보책자를 만들기 위해 농가 취재를 했던 때를 떠올렸다. 실상은 혜원이처럼 밤 한 톨 한 톨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을만큼 농사일이 한가하지 않다. 농한기에는 병원에 입원해서 아픈 허리 치료를 받고 봄이 되면 다시 일을 한다는 한 농부의 아내도 있고, 뉴질랜드에서 화초공부를 하고 와서 나무를 키우고 싶지만 현실은 하루하루 닥친 일을 해내느라 귀농하면서 처음에 품었던 꿈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농부 등등. 농사일은 끝이 없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몸을 움직이지 않는자는 귀농에 부적격자니.

5. 곱디고운 영화를 보고 굳이 이런 농가 현실을 떠올릴 필요가 없거늘. 쓸데없이 이런 현실을 떠올리면서 판타지로 영화를 정의나 하고.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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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보글을 보고는 별로 안 보고 싶었는데 상영시간이 맞아서 본 영화. 홍보글은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는 43살의 중년 여자가 미국인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서 미국으로 사랑을 찾아 떠나는 로맨틱 코디디처럼 묘사했다.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단순한 사랑을 찾아서 떠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고독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본 사회, 나아가 현대 사회의 외로움과 인간적 윤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상당히 주제가 무겁다.

2. 첫장면이 퇴근길, 사람으로 가득찬 지하철역. 인파 속에서 세츠코의 귀에 잘 있었어요,라는 속삭임을 남기고 한 남자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에 몸을 날린다. 마치 이런 일이 빈번한 것처럼 영화 중간에도 묘사된다. 누군가가 지하철에 뛰어들어 열차 운행이 중지되고 있다고. 이런 말을 주고 받고,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 구성원들의 이야기이다. 세츠코의 회사에서  아마도 강제 퇴직할 수 밖에 없는 중년 여인의 송별회에서 세츠코는 사람들이 그녀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려준다. 나중에 세츠코가 사직을 권고 당할 때, 세츠코가 사무실 문을 닫고 나가자 모두 즐거운 소리로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슬픔이나 아픔에 공감을 보여주지 않는 사회에 익숙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아무하고도 마음을 터놓지 않고 늙어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그러다가 조카의 소개로 독특한 수업방식을 지닌 영어 수업에 등록하는 세츠코. 입술을 움직이이 않고 말하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은데 익숙한 세츠코는 루시란 영어 이름을 갖게 되고 입을 크게 벌려 상대에게 어떻게 지내는지 묻는 연습을 하게 된다. 수업 시간 전에는 허그를 워밍업으로 하고. 허그는 상징적이면서도 그 힘이 엄청나다. 세츠코/루시가 자신을 루시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 존을 따라 미국에 간거는 맞지만 존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 즉 '허그'를 찾아나선 것이다. 허그에서 오는 사람의 온기를 루시는 갈망하고 있었다. 사람의 체온을 몰랐을 때는 자신이 결핍된 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존을 통해 사람의 온기가 결여되고 비로소 갈망하기 시작한다.

세츠코/루시는 왜 히키코모리가 되었나. 과거의 연인을 친언니가 가로채서 결혼했다. 언니의 딸 조카딸 미카 덕에 존을 알게 되었고, 미카는 존과 연인이고 그런 존을 좋아한다고 믿게 되고, 미카는 그 사실을 알고 자살을 하고. 한국일일드라마로 일년은 족히 풀어갈 이야기가 두 시간도 채 안되는 상영시간에 다 들어가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덕보다는 개인의 욕망이 우선하는 가족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나.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건 최소한의 도리이고, 예의인데...라고 쓰면서 급반성을.

3. 낯선 이와의 허그 속에서 세츠코/루시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찾기 힘든 인간적 예의를 발견했기 때문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었던 건 아닐까.

4. 영화를 다시 생각하니 우울하네. 고집 내지는 아집이 늘어가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는 요즘인데...공감 능력은 나이들수록 떨어지고.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심드렁하게 받아들이고. 단 하나 긍정적인 점은, 갑자기 변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인지는 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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