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 마당 Vol.10 어른 찾아 삼만리 - 2018
언니네 마당 편집부 엮음 / 언니네마당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른 찾아 삼만리'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어른은 어디있을까, 무엇일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한다. 어른의 다양한 정의부터 책은 시작한다. 여러 사람이 생각하는 어른, 아이들이 생각하는 어른, 여러 문화권이 정의하는 사전적 정의 등등.

 

그리고 어른에 대한 단상이 이어진다. 평범한 사람들이 주관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 들여다본다. 자유를 찾는 스무살, 마흔살 비혼으로 살아가기, 마흔살 워킹맘으로 살아가기, 딸이 나이든 아버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들 속에서 슬며시 겹치는 감정들이 있다.

 

어른이라면 당위성, 책임만 무게를 둔다면 '어른 찾아 삼만리'는 책임과 당위성보다는 개념있게 사는 게 어른이 아닐까를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소비사회에서 관계지향적이고 개념 소비를 하는 이의 경험, 적게 벌고 덜 쓰는 삶을 사는 청년, 은퇴 후에도 자신의 정신적 자산을 주변과 나누려는 건강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이사이에 지하철 빈자리를 연마하는 촉 등 찌질하지만 생존(?)과 관련된 어른의 기술, 방학이 없는 어른을 위해 잠시 쉬는 시간에 동심으로 돌아가 '어른이표 탐구생활'을 해보고 '비공인꼰대감별모의고사'로 꼰대인지 어른인지 생각해보면서 피식 웃음을 선사하는 시간을 부록으로 싣는다.

 

넘쳐나는 자기계발서 속에서 서둘러 자기계발을 하라고 부추기거나 질책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자리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가 잠시 멈춰서 내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불안한 고민이 아니라 생산적 고민을 하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군가의 삶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미 어떤 시선으로 그 사람의 삶을 판단하고 편견을 갖게 된다. 꼭 계몽주의자가 아니어도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권하고 조언을 하려고 안달한다. 누군가의 삶을 그대로 바라보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일상에서도 이런데 영화는 더군다나 더 힘들다. 카메라 자체는 이미 하나의 시선이고 권력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 나오는 이들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도 이 보다 더 시선이 개입할 거 같은데. 이 영화는 극장편영화인데도 시선의 개입이 없는 것처럼 보는 이에게 다가와 더 놀랍다.

일정한 거주지가 모텔인 이들의 삶. 모텔은 잠시 머무는 공간으로 약속된 공간인데 임시 거주지가 집이 되는 이들의 생활 속으로 영화는 들어간다. 장기투숙자에 아이들이 있다. 이 아이들은 서로 친구가 되고, 방학 내내 시간을 같이 보낸다. 모텔 주변을 뛰어다니면서 소리지르고 웃는다. 재미있는 놀이가 있으면 서로 알려주고, 폐허에 들어가 불장난도 하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지나가는 손님에게 구걸을 하기도 한다. 득텍한 아이스크림을 한 입씩 돌려가며 그 달달함을 공유하고 애정하는 게 사라지는 허망함도 경험하고, 때론 그 허망함을 견디는 법도 터특해간다. 장기투숙자 아이들의 엄마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으로 아이들을 세심하게 배려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 아이들을 안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최선의 방식으로 사랑한다.

극 중에서 무니 모녀가 있다. 무니의 엄마가 왜 아이와 모텔 생활을 하게 되었고, 왜 파트타임이라도 한 곳에서 일하지 않는지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는다. 영화는 개연성을 설명하기 보다는 무니 모녀의 일상을 그저 보여준다. 주 단위로 방세를 내야하는데 돈이 없어서 고민하고 모텔 관리인과 언성을 높이며 화를 못 참아 극단적으로 행동한다. 근처 고급 리조트 관광객들에게 접근해서 향수를 파는 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지만 무니와 함께 할 때면 당당하고 아이의 시선과 노력하지 않아도 같아보여서 무니와 노는 것은 곧 무니 엄마의 놀이처럼 보인다. 몹시 불안정해 보이는 삶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관객은 무니의 앞날에 대해 슬그머니 고민한다. 무니 모녀는 행복한데 이 행복은 경제적 무능력, 사회적 편견으로 보면 아이에게 옳지 않은 행복일 수도 있겠다, 하는 지점에서 아동국 직원들이 등장한다.

무니 엄마는 SNS를 통해 성매매를 해서 방세를 내는 일이 기관에 알려지고 이웃 장기투숙자들에게도 알려진다. 무니는 어른들의 개입으로 갑자기 친구들을 잃게 되고, 유일한 친구 엄마만 남는다. 다른 사람의 이해와 공감이 없는 상태에서 모녀의 관계는 변함없다. 아이에게 사회가 지향하는 윤리적 태도를 알져주지 못 하는 엄와와 아이를 분리시키려는 시선에 모녀는 흥분상태가 되고 무니는 결국 아동국 직원의 손에서 달아나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무니가 엄마와 헤어지는 것을 저항하는 표정에서 과연 기관이 엄마와 아이를 떼어놓는 게 맞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무척 충격을 받았다. 무니의 탈출은 진정한 탈출일까, 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하지만 무니의 탈출을 지지하고 있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이 엠 러브>를 감독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영화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지독한 사랑에 대해 말한다. 사랑은 지독하게 주관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제도를 거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은 사랑이 없어도 잘 산다. 하지만 사랑이 있다면 사랑 없는 삶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사랑 없는 삶으로 돌아가는 게 옳지도 않으니 사랑하는 이를 만나면 몸과 마음을 던져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감독이다. 사랑에 몸과 마음을 던지는 게 어떤지 감이 안 오고 사랑의 세계는 내가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이고 중독성이 있어보여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에 절대적 지지를 보낸다. 무언가를, 심지어 사랑도 머리로 이해하고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는 나란 사람은 사랑의 세계가 무엇인지 죽을 때까지 모를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절망이 찾아오기도 한다. 요즘은 더욱 방황(?) 중이기도 하고.

이 영화는 금기된 사랑과 성장, 성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지만 사랑에 금기란 게 사회적 인식이고 그 사회적 시선을 따르겠다는 전제가 있어야 금기가 성립된다. 여름 휴가에서 만난 미국인 연구원을 보고 알 수 없는 마음의 동요에 괴로워하는 한 소년이 있다. 아버지의 손님에게 몸과 마음이 저절로 반응하는데 낯설어하고, 자신의 감정인데도 정체를 모르고, 느끼는 바를 말하는 게 옳은 지 확신도 없으며, 상대가 자신을 받아줄 지는 더더욱 불확실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어느 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금지된 선을 넘는다. 그 후에는 겉잡을 수 없는 감정 속으로 빠지고 이별은 예정되어 있다. 미국인과 이탈리아인은 휴가가 끝나면 물리적으로 헤어진다. 소년은 자신의 성정체성에 혼동스럽고 사랑이란 감정에 열병을 앓는다. 소년의 감정은 이탈리아 시골을 배경으로 바흐를 재즈풍으로 편곡해서 연주하는 피아노 곡, 뜨거운 볕 아래서 페달을 밟는 움직임, 식탁에서 자신의 감정이 사람들한테 들킬까봐 불안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다 먼저 일어나는 일, 미국인 연구원과 2층에서 같은 화장실을 쓰는데 그가 화장실 출입을 할 때마다 곤두서는 감각들. 소년의 불안과 동요를 일상적 행위에 아주 세심하게 배치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소년의 감정이 전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의 감각과 세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온전히 가 있고, 그 경험을 함께 할 것을 영화는 권한다.

열병 같은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헤어질 수 밖에 없고, 고통은 영원할 거 같지만 일상은 잘도 돌아간다. 사랑의 고통은 고통이고 일상은 일상이니.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애도 의식은 결국 소년의 서러운 울음으로 나온다. 사랑 때문에 울어본 적이 있다면 그 울음의 끝은 그 사랑을 가슴 한편에 묻고 또 다른 사랑을 기다리는 희망의 방을 만든다는 걸 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영화는 언어의 무용함에 관한 영화다.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짓는 기준은 언어이다. 말, 특히 문자의 발명은 획기적 수단이었다. 문자로 생각을 기록할 수 있고,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도 있어서 인류는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고 시간을 절약하고 문명을 발달 시킬 수 있었다. 또 언어는 인간을 다른 종들에서 분리되어 언어를 공유하는 이들과 결속시킨다. 언어는 하나의 권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세 시대에는 글을 읽는 것을 철저히 통제하기도 했다. 글을 읽고 사고하는 힘은 인간을 분열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언어의 유익성과 유용함에만 몰두해 있다. 기능적 면에서 언어는 확실히 발명품이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으로 넘어오면 언어는 위력을 잃어버린다. 언어는 인간의 감정을 백만분의 일도 전달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감정을 언어화하는 작업은 아주 작은 부분만을 옮기는 게 가능하고, 그것 마저도 때로는 오해를 일으킨다. 발신자와 수신자의 감정 체계가 다르다면 언어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이끄는 수단이 된다.

<쉐이프 오브 워터>의 여주인공 엘라이자가 듣기는 하는데 말을 하지 못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언어 체계로 사고 하는 인간이 아니라 감정 체계로 사고하는 인간의 상징이다. 그녀는 비언어권에 속해 있고, 인간의 언어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체의 비언어적 체계에 익숙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괴생물체가 그녀에게는 그냥 자신과 같은 생명체일 뿐이다. 언어 쳬계에 속한 인간에게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인 생물체라 해부를 해야한다고 결정한다. 수수께끼를 푸는 인간의 방식은 상대가 언어적 정보를 보내야하는데 비언어적 단서들은 인간에게는 때로는 위협적인 것으로 보이고, 때로는 하등한 것으로도 보이고, 때로는 성가신 것으로도 보인다. 이런 인간의 결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스트릭랜드이다. 언어계, 즉 선명한 기호체계에 종속되어 있는 인물이다. 스트릭랜드는 희귀한 초록색 캐딜락을 타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 혹은 멋진 사람이라는 기호를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그에게 괴생물체는 그야말로 '괴'기스러운 것일 뿐이고 성공을 위한 임무이다.

반면에 그와 대척점에 있는 엘라이자는 인간계와 생물계의 경계에 있다. 그래서 괴생물체를 보자마자 친근함을 느끼고 인간의 학대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을 한다. 그저 보살펴주고 사랑을 주는 것이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단번에 교감을 느끼는 게 가능하지, 하면서 흥미가 급감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아늑한 카페에 앉아서 소통의 어려움에 대해 영화를 같이 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는 이 영화를  스트릭랜드처럼 보려고 했다. 스트릭랜드같은 사고 쳬계에 속한다면 이 영화는 재미없는 그저 잘 만든 영화로 보인다.

엘라이자는 괴생물체를 학대와 죽음에서 구출하기로 하고, 영화는 판타지라 엘라이자의 결정을 도와주는 이들이 곁에 있다. 인간의 언어계에 속해 있지만 마음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다. 현실에서도 마음의 움직임에 귀를 움직이는 이들이 드물게 있다. 다행스럽게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언가를 적고 싶은 영화를 오랜만에 봤다. 용산참사 후 그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사람마다 사건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용산참사에는 두 연대 주체가 있었다. 용산철거민연대와 다른 지역철거연대. 두 주체는 공동의 목적이 있었고, 연대했다. 하지만 공권력 앞에서 무기력했다. 4층 건물에 망루를 세우고 저항을 하고 공권력은 점점 그들을 압박했다. 화염과 폭발, 그리고 사이렌의 혼돈 속에서 현장에 있던 이들의 공포 진원은 각기 달랐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같았다. 건물에서 뛰어내리지 않으면 죽을 거라는 공포심. 생사를 오가는 공포 속에서 살려는 의지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본능이다.

용산철거민연대를 이끈 당시 위원장은 망루로 진격을 외치고 가장 먼저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그로 인해 그는 몇몇 동지와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기지 못했지만 이성이 지배하는 시간에는 감정을 억누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다른 철거민 집회에 나가 용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먼저 뛰어내려 산 것에 대한 죄책감을 치유하는 자신만의 방식이다. 하지만 다른 지역철거민연대는 생각이 다르다. 그들은 공동정범으로 형기를 마치고 출소 후 무기력하고, 트라우마 속에 살다가 감정적 연대를 필요로 한다. 소주 한 잔 기울이며 분노를 나누고 서로 다독이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다. 현장에 있던 이들만이 잊을 수 없는 공포와 분노를 마주하는 방식이다.

트라우마를 바라보는 이 두 방식이 충돌한다. 공동목표를 위해 출범했고, 정권의 그릇된 시선으로 목표는 좌절되고 공동정범이란 죄목을 달고 어찌보면 평생 보이지 않지만 같은 배를 타고 나아가야하는 운명에 처했다.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지만 내부 갈등은 곪아있다. 감정적 연대가 부재한데 감정적 연대는 대의명분을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게 아닐까. 이미 한 배를 탔고 거친 폭풍우를 만나 좌초되었고 남은 건 잔해다. 잔해를 주워담으려면 이성도 필요하지만 그 전에 잔해를 왜 맞춰야하는지에 대한 논리가 필요하다. 용산은 이미 참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상황을 원상복구하는 게 아니라 억울함을 알리기 위한 규명이고,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정권의 잘못이고, 공동정범으로 몬 검찰의 잘못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저항할 수 밖에 없었던 절박한 당시의 상황을 당사자가 아닌 타자에게 이해시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미디어가 더 이상 보도를 하지 않으면 그 어떤 타인의 고통도 잊혀지기 마련이니까. 특히 약자의 고통은 더 잊혀지기 쉽다. 

용산철거민연대위원장과 타지역연대참여자들이 6년 만에 만나서 감정을 골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위원장에게 말한다. 죽음이라는 공포 속에서 뛰어내린 것을 탓하는 게 아니다. 위원장에게 너무나 필요했던 한 마디였다. 고통을 마주하고 대처하는 방식이 다른 연대가 감정적 연대를 이루는 지점이기도 하다. 진상이 규명되고 그 억울함이 밝혀지기를. 우리가 할 일은 잊지 않는 일이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많이 보고 잊지 말고 다시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었으면 좋겠다. 잊지 않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그들과 감정적 연대를 이루는 게 아닐까.

<코코>에 이런 말이 나온다. 가장 슬픈 일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일이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